8장. 철학의 모험(BC400년 - BC300년경)
혜자의 역설, 장자의 무위. 맹자의 자애
혜자(惠子, BC370 – BC309?)의 逆說
장자(莊子, BC370 – BC311?)의 無爲
맹자(孟子, BC372? -BC 89)의 慈愛
장자는 墨家, 儒家에 짜증이 났다. 그들은 자존심을 갖고 오만하게도 자신들에게 세상을 구할 사명이 있다고 확신을
했기 때문이다.
정치는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없다. 왕, 정치가가 백성의 생활에 간섭을 하면 어김없이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장자는 다스리지 않음(無爲之治)을 믿었다.
사람들에게 인간이 만든 법칙에 복종토록 강요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잘못된 일이었다.
그것은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서 짧게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BC4세기에 중국의 정치, 경제는 급속도로 변화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원정비용과 전비는 계속 늘었다.
그래서 새로운 상업경제를 장려했다.
BC5세기 중국인은 철의 주조법을 발견했다. 철 도구로 방대한 삼림을 개간할 수 있었다. 수확량이 늘고 파괴적인
전쟁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급증했다.
진취적 상인들은 교역제국을 만들어 물자를 한반도 북부, 초원지대, 인도까지 가져갔다.
읍성은 단순히 정치, 종교의 수도가 아니라 교역과 산업의 중심이 되어 수천 명이 모여 살았다.
BC4세기에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는 중국에서 가장 큰 읍성으로 주민 30만 명. 왕궁에 소속되지 않은 장인, 공예가가
신도시 계급으로 등장.
제나라 제후들은 중국의 지도적인 학자들을 후원했다.
BC357년에는 임치의 서문인 직문(稷門)근처에 학궁이 생겨 사(士)에 속하는 학자들이 푸짐한 장학금을 받으며 살았
기에 직하지학(稷下之學)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변화를 즐겼으나, 다른 사람들은 이런 삶이 조상들의 제의화된 삶과 다르다고 해서 불편해했다.
그러나 크고 성공적인 나라의 제후들은 이제 의식의 속박에 얽매이지 않았다.
BC4세기 초 위(魏)나라 왕은 세습귀족과 고관들을 보수를 받는 관리로 대체하는 신관료제를 도입했다.
말을 안 들으면 파직했다. 다른 나라들도 위나라의 본을 떴다.
정치는 매우 위험한 game이 되었다. 제후들은 가끔 선비들의 자문을 구했지만 상인들의 말에 훨씬 더 귀를 기울였다.
경제호황은 불평등을 심화하고 사회적 분열을 가져왔다. 농민들은 군대에 끌려가 가정, 경작지로부터 멀어졌다.
통치자들은 농민이 수렵, 사냥, 땔감 모으던 늪과 숲을 가로챘다.
마을 공동체들은 치명상을 입었다. 많은 농민들이 어쩔 수 없이 공장, 주물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일부 귀족 가문은 망하고 구식 제후국은 위기에 봉착했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커다란 공허가 생겼다.
합법적인 것은 무엇이고 불법적인 것은 무엇인가?
초나라 왕족이자 시인인 굴원(屈原. BC343?- BC278? 65세?)은 이렇게 물었다. “이 나라는 실망의 진창이다.
순수한 것은 이제 없다. 밀고자들이 찬사를 받는다. 귀한 집안의 현자들은 명성을 잃었다.”
굴원은 그의 군주에게 성인의 자문을 구해 도(道)로 돌아오라고 간청했지만 퇴짜를 맞고 추방을 당해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神農(신농. 농사를 발명한 전설적인 성군)은 많은 통치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제국을 중앙집권화하려 않고 각 봉건국에
자율권을 주었다. 고관들을 공포에 떨게 하지 않았고 농작물을 정기적으로 검사하는 대신 무위(無爲)로 통치했다.
BC4세기 중반 들어 신농 같은 철학자가 나왔다. 양자(楊子, BC440? - BC360?, 본명 楊朱)였다.
그는 儒家와 墨家에 도전을 했다. 가족의 예(禮)는 한 개인의 목숨이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 했다.
궁정에서는 목숨이 위험하므로 정치적 지위를 구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 여겨 공적생활에서 물러났다.
그들은 요순임금이(유가 주장과는 달리) 겸손 때문에 물러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나 타인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
려고 물러났다고 주장했다.
침략군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왕위를 거부한 周나라 왕들의 조상 고공단부(古公亶父)의 사례를 인용했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아들이나 동생을 사지로 모는 것은 내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고공단보는 양위연설에서 말한 바 있다.
양가(楊家)는 인(仁), 즉 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의 철학은 모든 사람은 각자 라는 것이었다.
유자가 보기엔 양가철학이 터무니없이 이기적인 것이었다.
유학자들은 양자가 “털 한 올을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양가는 타인의 일이나 제도에 개입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주장했다.
최고의 의무는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일만 하라는 것이었다.
양가는 인간의 본성에 관여하지 말고, 하늘이 세워 놓은 道만 따라야 했다.
쾌락을 거부하거나 궁정생활의 인위적 제의를 따르는 것은 인간관계를 왜곡하기 때문에 잘못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禮를 따르면 사람들과 진정으로 접촉할 수가 없었다. 삶은 자발적이고 진지해야 했다.
양자가 옳다면 백성을 위해 쾌락을 거부한 덕이 높은 왕들은 어리석고 비뚤어진 것이며, 단순히 향락을 추구한 부도
덕한 압제자들이 하늘에 더 가깝다는 말이 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것일까? 그렇다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도덕성의 기초는 무엇일까? 自己陶冶라는 유가 이상은 잘못된 것인가? 양가가 높이 치는 인간본성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이 인(仁)이라 생각, 인은 인간 본성의 왜곡이 아니라 완성이라고 주장.
인은 인간성(humanity)과 동의어다. 깨달음을 얻은 군주는 열정을 제어하고 욕망을 진정시켜 산만한 생각 대신 참된
자아를 발견할 것이다. 이 같은 자기성찰의 명상법을 중국인들은 BC4세기경에 개발했다.
집중과 호흡제어 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을 심술(心術)이라 불렀던 것 같다.
기(氣)의 관리가 심술의 요체였다. 실재의 역동적이고 활동적 토대인 기는 Demokritos의 원자와 다르지 않으나, 다
만 더 신비할 뿐이다. 기는 뭉치면 피조물이 되지만 결국은 흩어진다. 사람, 식물은 죽고 바위는 해체된다.
그러나 기는 여전히 살아 있다. 우주만물은 강도는 달라도 똑같은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이유다.
기의 가장 순수하고 집중된 형태는 존재자체, 실재의 정수, 즉 정(精)이다.
중국이 무시무시한 전쟁으로 갈가리 찢길 때 중국의 신비주의자들은 자기 내부에서 모든 것을 한데 끌어 모으는
평정을 발견했다. 이런 통일을 향한 욕망이 변증과 토론을 불렀다.
초기의 辨證家(BC4세기경) 중 가장 유명인은 혜자(惠子. BC370-BC309?. 본명 혜시惠施)였다.
그는 전국시대의 가장 앞선 나라 魏나라 재상이었다. 그는 묵자사상에 친밀감을 느꼈다. (그는) 말은 사물이 영속적
이고 견고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해가 중천에 있으면 지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죽는 것이다. 모든 것은 흐르며, 따라서 어떤 생명이든 존재 순간부터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사물을 단단하고 확고한 범주에 집어넣는 것은 잘못이다. 합쳐진 것은 나뉜 것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 삶과 죽음, 우월한 것과 비천한 것 등 만물은 하나다.
혜자는 정치가이자 활동가, 묵가로서 모든 인간은 동등한 가치가 있으며, 사회적인 운 또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언어는 우리 생각의 구조에 내재한 초월을 드러낸다.
혜자의 역설들은 제논의 역설들과는 달리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명제 10가지(歷物十事)는 초월과 자비의 관념이라는 틀 안에 있다.
혜자의 영적인 전망은 중국의 축의 시대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장자(莊子, BC370-BC311? 59세?)와 공통점이
있다.
장자는 평생을 outsider로 살았다. 혜자와 논쟁을 즐겼다. 혜자가 죽자 이제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음을 한탄했다.
장자가 썼다고 하는 책 『장자』는 사실 BC4세기부터 BC3세기 말까지 나온 글들의 묶음이다.
장자는 묵가와 유가에 짜증이 났다. 그들이 자존심을 갖고 오만하게 마치 세상을 구할 사명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처럼
확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는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왕이나 정치가가 백성의 생활을 간섭하면 어김없이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장자는 다스리지 않음(無爲之治)을 믿었다. 장자는 먹고 먹히는 삶을 체험했다. 어느 날 숲속을 지나다 나무 위 까치를
보고 활로 겨냥. 까치는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세상모르고 편히 있는 버마재비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도 매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장자는 산지기로부터 남의 땅에 들어왔다고 쫓겨났다.
장자는 이 일을 겪고 나서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보았다.
세상은 모든 것이 유동적이며 늘 뭔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동결시켜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천도(天道)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아니다. 생명의 무한한 변화로부터 차단되어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것이
되려는 시도는 우주의 자연스런 리듬에 어긋나는 것이다. 장자는 이를 안 뒤 환희와 자유를 느꼈다.
그는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보존 노력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생사, 희비는 밤낮처럼 서로 이어지는 것임을 알았다.
(장자는) 현자는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이지 않다고 믿었다. 완벽한 인간에게는 자기가 없다고 했다.
장자는 아마도 동시대의 맹가(孟軻), BC372-BC289, 83세, 흔희 맹자 孟子라 부름)를 자기본위의 말참견 잘하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맹자는 공적 생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유가인 맹자는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학자가 되었지만, 진짜 야망은 조정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맹자도 공자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맹자는 장자처럼 세상에 등을 돌리지 못했으며, 자신이 하늘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일을 위임 받았다고 믿었다. 맹자는 역사에서 하나의 유형을 보았다.
대략 500년마다 성군이 나타났으며 그러기 전에는 평범한 명망가들이 통치를 했다.
孔子는 禮만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공자는 仁을 정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孟子는 거기에 분명하고
좁은 의미를 부여했다. 慈愛였다. 이는 군주가 세상에 등을 돌릴 수 없게 만드는 핵심이었다.
孟子는 墨子의 모든 사람을 향한 관심을 불신했다. 이런 호의는 사회의 핵심을 이루는 가족의 유대를 훼손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맹자는 인간 본성이 善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묵자는 사람들이 오직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며, 선은 외부
에서 그들에게 주입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맹자는 모든 사람이 4가지 충동이 있어 이를 제대로 계발하면 4가지 기본적인 덕이 된다고 했다.
仁義禮智였다. 맹자는 유위(有爲)였고 장자는 무위(無爲)였다.
두려움에 떠는 전사들의 서시 『마하바라타』
인도의 위대한 敍事詩 마하바라타. 국가체계가 형성되기 전인 브라마나(brāhmana.
인도의 바르나 제도에서 최고위의 사제계급. 바라문婆羅門이라고 음사되며 영어로는 Brahman이라고 한다.) 시기의
쿠루-판찰라 지역이 배경이다. 구전(口傳)은 BC5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글로 기록된 것은 서력기원이 시작되고
나서 몇 백 년 사이의 일이었다.
♥바르나(varna)
인도 사회의 사대신분(계급)의 호칭으로 종성(種姓)이라고 번역된다.
바르나라는 것은 본래 <색(色)>을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아리아인의 인도진입 당시 피부색이 지배자, 피지배자의
구별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 <계급>의 의미가 가해졌고, 그후 〈종성〉의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마누법전』을 비롯한 인도법전에 의하면, 각 바르나의 의무가 다음과 같이 정해져 있다.
①브라만(브라마나) : 타인을 위한 제식집행, 베다성전의 교수, 포시의 수납.
②크샤트리아 : 정치나 전투에 의한 인민보호.
③바이샤 : 농업, 목축, 상업, 대출.
④수드라 : 예속적 노동이나 수공예에 의한 상위 3바르나에 대한 봉사.
이상 4바르나의 중 상위 3바르나는 再生族이라고 하며, 자신을 위한 제식거행, 베다성전의 학습, 포시의 세 가지를
공통의 의무로 하고 있다.
재생족에 속하는 남자는 10세 전후에 우파나야나(upanayana, 입문식, 제2의 탄생)를 올리고, 아리아사회의 일원으
로서 베다의 제식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졌다.
이에 대해서 수드라는 입문식을 올릴 수 없는 一生族이라고 하였으며, 재생족으로부터 여러 가지 차별을 받았다.
또한 수드라 밑에는 4 바르나의 틀 밖에 놓여진〈바르나를 가지지 않는〉 또는 〈제5의 바르나〉인 不可觸民이 존재
했다.
후세, 하위의 두 바르나와 직업 관계에 변화가 생겨, 바이샤는 상인을, 수드라는 농업, 목축, 수공업에 종사하는 일반
인을 가리키게 되었으며 이런 변화에 따라서 수드라 차별은 완화되었다.
각 바르나에 속하는 자에게는 동일한 바르나 중에서 배우자를 얻는 것이 의무시 되었으나 바르나간의 혼혈은 피해야
한다고 하는데, 상위 바르나의 남자가 하위 바르나의 여자와 결혼하는 아눌로마(anuloma, 순모(順毛)혼은 많이
보였다. 단, 그 반대인 프라틸로마(pratiloma, 역모(逆毛)혼은 기피되었다.
힌두교도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믿어진 인류 기원 신화에 의하면, 신들이 원인(原人)의 몸을 갈랐을 때, 그 입에서
브라만, 양팔에서 크샤트리아, 양 넓적다리에서 바이샤, 양발에서 수드라가 나왔다고 한다.
즉 인류는 출현 당초부터 4바르나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설은 바르나의 구분을 절대시하는 브라만의 창작이며, 사실은 아니다. 바르나 제도가 성립한 것은 아리아인이
간가(갠지스)강의 상류역에 진출해서 농경사회를 완성시킨 후기 베다시대(기원전 1000년경-기원전 700부터 기원전
600년경)이다.
바르나 제도의 이론은 이어지는 시대에 다르마 수트라 중에서 더욱 정비되고,『마누법전』(기원전 200년경-기원후
200년경 성립)으로 대표되는 힌두법전 중에서 완성되었다.
이 사이, 바르나 제도는 아리아 문화의 전파와 함께 인도아대륙의 거의 전 지역에 퍼지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강약
의 차이는 인정되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 기능하고 있으며 후세의 카스트제도는 바르나라는 큰 틀 속에서
성립한 것이다.
마하바라타는 복잡한 다층의 text로서 전통의 다양한 가닥들이 모여 있다.
이야기의 전체적 윤곽은 BC4세기 말에 확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축의 시대의 결정적인 text들이 사제와 출가자들의
저작인 반면, 이 서사시는 크샤트리아 전사계급의 ethos를 반영하고 있다.
축의 시대 종교혁명은 그들에게 곤혹스런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왕이나 전사는 공동체를 방어키 위해 싸우거나 죽어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이행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Ahimsa(불살생)라는 理想을 존중할 수 있었을까?
각 계급의 의무는 신성했다. 각 계급에는 침해 불가능한 다르마, 즉 신이 정한 생활 방식이 있었다.
브라만의 의무는 veda 전승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고, 크샤트리아는 법, 질서, 방어를 책임졌다.
바이샤는 부의 생산에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왕, 전사, 상인은 자신의 의무를 성공적으로 이행하려면, (붓다 표현을 빌리자면) ‘해로운(아쿠살라)’ 방식으로,
또는 아예 죄가 되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샤는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야망을 갖고 경쟁자들을 이겨내야 했다. 욕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음과 재생의
순환에 묶일 수밖에 없었다. 크샤트리아는 군사작전을 벌이다보면 진실을 감추기도 하고 거짓말도 해야 했다.
옛 친구와의 동맹도 배신해야 했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비폭력과 진실 고수를 요구하는 요가의
에토스와 양립할 수 없었다. 마하바라타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고민을 했지만, 만족스런 해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서사시의 전체적인 움직임은 축의 시대가 끝나갈 무렵, 크샤트리아가 관심을 집중했던 일들에 관해 어떤 통찰을 보여
준다. 마하바라타는 친척간인 카우라바 집안과 판다바 집안이 쿠루-판찰라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인 격렬한
전쟁 이야기를 전한다.
집안만 분열된 것이 아니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인류 전체가 소멸될 뻔 했다.
서사시를 읽다보면 오직 엘리뜨 집단만 위대한 변화에 관여했음을 알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전의 종교적 관행을 유지했고 파생적으로는 새로운 상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하바라타는 제의 전문가들에 의해 개혁이 이루어지기 전에 거행되었던 제의 시합에 대한 공포를 반영하기도
한다.
제의 경쟁이 파국적 결과를 낳았다고 하는 이 이야기의 관점을 보면, 브라마니의 제의 개혁을 불러왔던 불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서사시는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낳으며, 불명예스런 배신은 또 다른 배신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굴에서 나온 Idea의 탐구자 Platon
BC399년 Socrates가 아테네 민주주의에 의해 죽었을 때 그 제자 Platon은 30살 스승의 비극은 제자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그의 철학에도 깊은 영향 남겼다.
Platon은 그의 영웅 Socrates와 달리 부유한 귀족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테네의 마지막 왕의 후손이었다.
막내 3촌은 페리클레스의 친구였다. 3촌 두 사람은 아테네가 펠레포네소스 전쟁에 패한 뒤 30인 참주정부에서 활동
했다. 그들은 Platon에게 함께 일을 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Platon은 Socrates의 재판과 죽음이 그의 희망을 좌절시켜 공적활동을 접었다.
어느 polis를 보아도 정부체제는 나빴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올바르게 또 진정으로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정치적 권한을 얻을 때까지, 또는 정치적 통제력을 지닌 계급이 어떤 섭리에 이끌려 진정한 철학자가 되기
전까지 인류는 더 나은 날을 볼 수 없을 것이다”(Gottlieb, Dream of Reason)
Platon은 공자의 추종자들처럼, 현자가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공적인 정책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믿었다.
Platon은 스승이 죽은 뒤 영감을 얻고자 지중해 동부를 여행했다.
Socrates 제자이자 Elea학파 철학자인 Eucleides와 함께 메가라에 머물렀다.
그들은 Parmenides에게 매혹되었다. Platon은 또 피타고라스의 공동체에도 마음이 끌려 그들과 평생 우정을 나누었다.
수학은 정신을 훈련시켜 특수한 것들의 혼란스러운 늪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수와 기하학적 형태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게 해주었다. Platon은 이집트와 리비아도 여행했다. 그는 10여 년만인 BC387년 고향 아테네로 돌아왔다.
BC370년에 아르고스의 민주주의자들이 귀족 1,200명을 곤봉으로 때려 죽였다.
테게아에서는 과두정치 지도자들이 폭력적인 군중에게 학살당했다. 이런 폭력에 대한 Platon의 대응은 수학과 철학의
학파를 세우는 것이었다. 학파 이름은 Akademia였다.
영웅 아카데모스에게 바쳐진 아테네 외곽의 신성한 숲에서 학자들이 만났기 때문에 Akademia라고 한 것이다.
가르침은 강의보다 Socrates 방식의 토론이었다. Platon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개인적 사상을 강요치 않았고 독립적
사고를 권장했다. 동시에 글을 써서 자신의 개인적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결국 전 저작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는 최초의 철학자가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통찰을 교조적으로 기록하지 않고 대화의 형식을 취했다. Platon의 대화는 결정적 주장이 아니라, 더 많은 생각을 해보라는 권유였다. 그는 현대의 학자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엄숙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장난스럽게 간접적으로 넌지시 제시하곤 했다. 우화를 사용키도 했고 에둘러서 모호하게 근본적인 진리를 언급키도 했다.
그는 진리에 이르는 과정이 어려우며, 길고 엄격한 변증법 훈련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진실이 단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전달될 수 없으며, 경험적 관찰과 규율 잡힌 논리만이 아니라 직관, 미학적 통찰, 상상력도 요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Platon 철학에서는 보통 形相 idea(eidos)학설이라고 부르는 것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이 학설이 일관된 이론이 된 적은 없다. Paton 대화마다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어려운 개념(形相학설 같은)에 다가갔다. 겉보기에 난해한 이 같은 개념은 BC4세기의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세계와 어떤 현실적 관련을 맺었는지 파악하려고 (Platon은) 노력했다.
Socrates는 선(goodness)의 진실한 본성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이를 정리하지 못했다. 플라톤은 대화에서 스승을 등장시켜 용기, 덕 같은 주제들에 대해 어떤 공통분모를 찾아내려 했다.
서로 경쟁하는 정체(政體) - 예컨대 민주제, 과두제, 참주제, 귀족제, 군주제- 의 지지자들이 시끄럽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그 시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Platon의 해법을 찾을 유일한 희망은 좋은 통치의 바탕에 깔린 원리를 찾는 것이라고 믿었다.
Platon은 Socrates와 마찬가지로 sophist의 상대주의에 혼란을 느꼈다. 그는 지속적으로 합리적 사고를 발휘하면 파악할 수 있는, 항상적이고 변함없는 실재의 영역을 찾아내고자 했다. 선, 정의,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은 감각으로는 경험할 수 없고, 그것은 듣거나 보거나 만질 수도 없으며, 다만 모든 인간의 영혼(psyche)에 존재하는 추론의 힘으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물질세계의 모든 것에는 영원하고 변함없는 形相(이데아)이 있다. 용기, 정의, 크다는 느낌, 심지어 탁자도 마찬가지다. 강둑에 서 있을 때, 우리 앞의 물을 웅덩이나 바다가 아니라 강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에 강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보편적 개념은 우리 자신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예컨대 이 세상에는 어떤 두 사물도 완전히 똑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절대적 동일성이라는 관념을 지니고 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는데도 그런 관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물은 그 나름의 고정된 존재 또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 Platon은 Socrates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우리와 관계가 없고,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하며, 자신의 존재나 본질하고만 관계가 있다. 이런 존재나 본질은 본래 그들 자신의 것이다."
그리스의 Idea라는 말은 현대 영어 Idea와는 의미가 같지 않다. 그리스의 Idea 또는 eidos는 사적, 주관적인 정신적 구축물이 아니라 형상, 패턴, 본질이었다. 形相 또는 이데아는 原型, 각각의 특수한 실체에 독특한 형태나 조건을 부여하는 최초의 패턴이었다.
Platon의 철학적 개념은 고대 영속철학이 합리화되고 내면화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철학에서는 지상의 모든 대상이나 경험이 천상의 영역에 대응물을 가진다. 이런 인식은 축의 시대 이전 종교에서는 핵심적이었다. 따라서 절대적인 것들의 세계가 세속적인 영역에 불완전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Platon의 사상을 당시 사람들은 현대인만큼 낯설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형상은 시간의 세계에 자신을 표현하지만, 그보다 우월하고 초자연적이며 영원하다. 이 형상들은 우리 삶에 형태를 부여하지만 그것을 초월한다. 이곳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변하고 쇠퇴한다. 그러나 Platon은 아름다운 사람이 그 외모를 잃고 죽는다 해도 아름다움 자체는 계속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 미인은 절대적 아름다움을 소유하지는 못한다. 지상의 어떤 실체도 그럴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아름다움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이 영원한 특질에 참여한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녀의 자매의 아름다움이나 시, 산, 건물의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영원한 형상에 관한 타고난 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람과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녀에서 드러난 아름다움에 굴복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을 훈련하여 지상에서의 아름다움의 불완전한 표현물을 통해 그 밑에 놓인 영원한 형상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형상의 영역이 1차적이고, 우리의 물질적 세계는 2차적, 파생적이다.
영속철학에서 천상의 영역이 속세보다 더 우월하고 더 지속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형상에는 덧없는 현상이 소유하지 못한 강렬한 현실성이 있다. 어떤 사람, 행동, 대상에 불완전하게 드러난 현상이 잠깐 보일 때, 우리는 그 감추어진 본질을 본 것이며, 지상에 표현된 것보다 더 진정한 수준의 존재와 만난 것이다.
장자나 붓다와 마찬가지로 Platon은 우리가 여기 아래(지상)에서 보는 모든 것은 늘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형상은 생성의 흐름과는 무관하다. 형상은 정적이며 변화가 없고 불멸이다.
Platon은 감각자료보다는 순수한 이성의 성과에 기초한 앎을 계발하여 더 깊은 수준의 의미와 만나고자 했다. 감각자료는 본디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붓다라면 아마도 불만족스러운 감각자료를 두카(고통)라 했을 것이다.
Platon은 과거의 신화적 인식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지만, 동시에 당대의 수학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 Akademia의 문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고 새겨져 있었다. 피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Platon도 우주가 숫자와 기하라는 근본관념을 바탕으로 질서를 잡고 있다고 믿었다.
자연의 대상에서는 완전한 원이나 3각형을 결코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형상들은 모두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대상의 바탕이 된다. 이런 형상들은 그것을 인식하는 지성과 독립적으로 그것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그 형상은 일반적인 사고양식이 아니라, 훈련받은 지성이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다.
수학은 Platon이 구했으나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는 파생되지 않았던 절대적으로 확실한 앎의 예였다. 오늘 날에도 수학자들은 자신들의 학문에 대해 Platon과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Roger Penrose는 “어떤 사람이 수학적 진실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의식이 이 Idea들의 세계까지 뚫고 들어가 그 세계와 접촉한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이런 앎은 고통스럽게, 힘겹게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전적으로 인간의 자연스런 능력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Platon의 신념이었다. 인간은 그런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다. 깨우치기만 하면 된다. 진실은 외부에서 정신에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형상에 대한 직접적인 앎을 지니고 있던 태어나기 전의 존재로부터 다시 모아야(re-collect)하는 것이었다.
Platon이 Socrates의 입을 빌려 말하자고 했던 것은 각각의 영혼(프시케)은 여러 번 태어났으며, 이곳(지상)과 지하세계의 모든 것을 보았다. 영혼이 배우지 않는 것은 없으며, 따라서 덕에 관해서건 다른 것에 관해서건 전에 알았던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탐구하고 배우는 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회상(recollection)이기 때문이다.
Platon은 인간의 정상적인 경험을 초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근이 가능하고 우리 인간성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실재의 영역이 있다는 축의 시대의 많은 철학자들의 신념을 공유했다.
그러나 다른 철학자들은 이런 통찰을 추론으로는 얻을 수 없다고 믿은 반면, Platon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앎이 본질적으로 회상이라는 그의 주장은 이런 엄격한 변증법이 차가운 분석이 아니라 직관임을 보여준다.
철학 입문자들은 처음에 사랑하는 사람의 신체적 완벽성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이 아름다움의 한 표현에 불과할 뿐이며, 이런 미(美)는 다른 존재에게도 있음을 보기 시작한다.
인문의 2단계는 신체의 미는 추한 사람에게도 존재할 수 있는 영혼의 아름다움, 즉 파악하기 더 어려운 미보다 급이 낮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놀라운 비전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것은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으려고 노력했던 아름다움의 영혼이다. 이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이것은 특수한 대상에 한정할 수 없으며 절대적이고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하며 유일무이하고 영원하다.
다른 모든 것도 거기에 참여하지만, 그것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안에도 그 아름다움은 증가하지만, 감소하지도 않고 어떤 변화를 겪지도 않는다. 프시케는 사랑의 신비에 입문하여 물질적 세계를 떠나며 절대적 아름다움 자체에 관한 황홀한 앎을 얻는다.
현대인은 생각을 무언가 우리가 하는 일로서 경험한다. 그러나 Platon은 생각을 정신에 일어나는 일로 보았다. 사고의 대상은 그것을 보게 된 사람의 프시케(영혼)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실재였다. 이런 실재를 일단 경험하면 아주 깊은 정신적 변화를 겪어 초라하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는 더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앎을 얻은 사람은 “단지 선의 반영된 이미지가 아니라 진정한 선을 낳는다. 반영된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접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Platon의 아름다움(앎, 진리, 진실) 묘사는 다른 사람들이 신(神)이나 도(道)라고 불렀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
신, 브라만, 니르바냐와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움은 완전히 초월적이다. 절대적이고, 그 자체로 홀로 존재하며, 유일무이하고, 영원하다. 아름다움의 목적은 탐구가 아니었다. 그 목적지는 인간이 바라는 모든 것의 본질인 善이었다. 선은 묘사가 불가능하며, Platon은 그것을 우화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우화는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다.
Socrates는 평생을 죄수처럼 동굴 안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상상한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동굴 안쪽 벽만 바라볼 수 있도록 묶여 있어 바깥 세계의 반영인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만 볼 수 있다. 이것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인간 조건의 이미지다. 이런 상태에서 형상을 직접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불행한 환경에서만 살아 왔기에 이런 덧없는 그림자를 진정한 현실이라 생각한다. 만약 동굴에서 해방된다면,동굴 밖 찬란한 햇빛(善)과 존재에 눈이 부시고 당황할 것이다. 어쩌면 불감당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예전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 할지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Socrates는 빛으로 가는 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햇빛은 善을 상징한다. 물리적인 빛 때문에 명료하게 볼 수 있듯이, 선은 진정한 앎의 원천이다. 선을 보게 되면 해방된 죄수처럼 우리는 진실한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 해 덕분에 사물은 자라고 번창할 수 있다.
동굴의 우화는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Platon의 정치적 묘사 가운데 일부다. 그는 늘 이상의 실제적 적용이라는 문제로 돌아온다. 벽의 그림자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빈약한 비전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강제와 자족적인 환상에 의존했던 당대 정치의 덧없는 착각을 표현한다.
Platon은 『국가』에서 정의가 합리적인 것이며, 통치자가 이성의 지배를 받는 훌륭한 사회에서 성장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살아 마땅한 방식으로 살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따라서 도시는 요즘의 대다수 도시들과 달리, 그림자들을 두고 싸우고 통치하기 위해 서로 투쟁하는, 그것이 무슨 대단한 선이나 된다는 듯이, 사람들이 아니라, 꿈을 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사람들이 다스리게 될 것이다. 통치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적은 통치자가 다스리는 도시가 내전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도시가 될 수밖에 없다.”
Platon도 자신의 상상의 국가(Republic)를 진짜 국가의 청사진으로 여기지는 않고, 아마 토론을 자극하는 용도로 활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utopia에 내재한 잔인성(우월하지 못한 것들, 깨우치지 못한 열등한 것들의 제외, 포기)은 축의 시대의 동정적인 ethos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국가』는 권위적이다. 자신의 전망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붓다라면 ‘해롭다’고 생각했을만하다. Platon은 인문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 음악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그리스 교육을 의심의 눈길로 보았다. 예술이 비합리적인 감정을 자극한다고 보았다. Platon의 국가는 개인적 관계를 장려하지 않는다. sex는 유전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시민을 양육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Platon은 자신의 이상적인 polis에서 비극을 금지하고 싶어 했다.
시민 대다수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위대한 시절에 향수를 느꼈으며, 여전히 그들의 비극적 통찰을 갈망했다. 그러나 Platon은 비극에 등을 돌렸다. Platon은 비극에 깃든 비관주의,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불신했으며, 신들에 대한 회의적 관점으로 인해 치명적인 허무주의가 나타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비극은 고결한 시민의 영혼조차 마비시켜 그것을 본 사람들의 삶을 더 나쁘고 더 비참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무엇보다도 비극은 슬픔을 향한 자연스러운 경향을 자극, 감정적 굴복(emotional surrender)을 불러올 수 있었다.
Platon은 맹자와 달리 자비의 싹을 기르는 대신, 제거하기를 원했다. Platon의 형상(形相.eidos)이라는 비전 덕분에 그리스 종교는 새로운 역동성을 얻었다. Homeros이래 그리스인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으며, 자신의 조건을 초월하거나 급격하게 바꾸고자 하는 야망이 없었다.
시인, 과학자, 비극 작가들은 존재란 덧없고 죽어가는 것이며 종종 잔인하게 파괴적이기도 하다고 주장해왔다. 인간 삶은 두카(dukkha. 고통)였다. 그러나 Platon은 고난과 죽음을 견딜 필요가 없으며 길고 가혹한 철학적 입문에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으면 그들의 영혼도 신들의 도움 없이 신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고, 한때 올림포스 존재들의 특권이었던 불멸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Platon 이후에는 신들 너머에 존재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에 대한 갈망이 나타났다. 그러나 말년에 Platon의 신학도 바뀐다. 『티마이오스』에서 그는 장인(匠人.데미우르고스. demiourgos)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이 장인은 영원하고 한 없이 선하지만 전능하지는 않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우주를 만들지 못하고 설계도(paradigm, pattern)에 따라 창조를 해야 한다. 이 장인은 종교적 탐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최고신이 아니다. 더 높은 신이 존재하지만, 그 신 또한 인간의 곤경과 관련이 없다.
Platon은 "우주의 창조자이자 아버지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설사 찾아낸다 해도 모든 사람에게 그를 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Platon의 최종 목표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냥 합리적인 우주론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그의 합리적인 정신(nous, 누스)과 영혼(psyche, 프시케)은 그 철학의 키워드였다. Platon은 전통적인 종교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종교가 철학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종교는 진정한 깨달음을 줄 수 없었다.
形相은 신화의 통찰이나 祭儀의 신성한 드라마가 아니라, 오직 정신의 이성적인 힘만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종교는 격하되었다. 미토스(신화, 이야기.mythos)는 Platon의 신비한 logos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다.
Platon은 철학적 탐구 초기에 그릇된 종교적 관념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스승(소크라테스)의 처형에 경악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자신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사형선고를 옹호했다. Platon의 전망은 힘을 잃었다. 그것은 강제적이고 편협하고 징벌적인 것이 되었다. 외부로부터의 덕을 강요하려 했고 자비로운 욕구를 불신했으며 자신의 철학적 종교를 전적으로 지성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스의 축의 시대는 수학, 변증법, 의학, 과학에는 놀라운 기여를 했을지 몰라도 영성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로고스의 건축가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BC384-BC322?,62세?)는 이런 분열을 더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18세 때(그리스 식민지에서) 아테네로 갔고, Akademia에 들어가 20년 동안 플라톤 밑에서 공부했다. 이 기간엔 Aristoteles는 Platon의 충성스런 제자로 Platon의 形相理論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형상은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Aristoteles는 관념세계가 물질세계보다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어떤 것은 진실로 영원하고 신성했으며 소멸하는 대상들보다 우월했다. 그러나 그것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기는 매우 어려웠다. 우리의 감각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식물이나 동물의 구조처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았다. BC347년에 Platon이 죽자Aristoteles는 아테네를 떠났다. BC342년 친구 필리포스(마케도니아 정치가, 군인, 나중엔 그리스 최고의 군주가 됨)의 아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재위 BC336-BC323)의 스승이 되었다.
BC336년 필리포스는 Persia를 침략할 계획이었으나 BC336년 암살당하고 아들 Alexandros가 뒤를 이었다. 이듬해Aristoteles는 아테네로 돌아가 자신의 학교인 Lykeion(리케이오스의 신전 옆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을 세웠다.
이 무렵 Aristoteles는 생물학자였다. 그는 철학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Platon을 비롯한 축의 시대 현자들이 흐름과 변화 가능성에 혼란을 느꼈던 반면, Aristoteles는 생성과정 전체에 흥미를 느꼈다. 변화는 두카(고통)가 아니었다. 모든 생물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Aristoteles는 비물질적 세계에서 의미를 찾지 않고, 변화의 물리적 형상에서 의미를 찾았다. Aristoteles에게 形相(eidos)은 감각 너머에 있는 영원한 실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각 물질 내부에 내재하는 구조였으며, 그 물질이 성숙해질 때까지 진화를 통제했다. 각 사람이나 사물은 그것이 그 형상으로 성장하도록 추동하는 디나미스(dynamis)를 가지고 있었다. 변화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 축하할 일이었다. 그것은 완성을 향한 보편적 노력을 상징했다.
Aristoteles는 logos의 인간이었다. 진리 자체를 위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테오리아(관조, 명상)는 인간(이때 인간은 남자. Aristoteles는 여성을 결함 있는 형태로 간주, 낮게 평가했음)의 마지막 형상 또는 목표였다. 따라서 인간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복지)는 지성에 있었다. 그에게 선(善)은 분명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계획, 계산, 연구하고 일을 줄여 나아가는 것이었다.
Aristoteles는 “이성에 따르는 삶이 최선이고 가장 쾌적하다”고 보았다. 인간의 지성(nous,누스)은 신성하고 불멸이었다. Aristoteles에게 노에톤(noeton.생각)이 존재의 최고 형태였던 것은 분명하다. 노에시스 노에세오스(noesis noeseos.생각하기에 관하여 생각하기)야 말로 존재 그 자체였다. 그것은 만물의 기원이었으며 神의 감추어진 삶의 특징이었다.
Aristoteles는 Platon과 마찬가지로 테올로기아(theologia.신학.신에 대한 연구)를 제1의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존재의 가장 높은 근거와 관련되기 때문이었다. Aristoteles는 Platon의 우주 종교를 수용, 우주를 신성시 했으며, 별을 살아 있는 神으로 보았고, 신성한 匠人과 그의 창조물 너머에 존재하는 至高의 존재를 상상했다.
Aristoteles의 신은 제1원인이 아니었다. 우주는 신성하고 영원하기 때문이다. 대신 Aristoteles는 신을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게 하는 자(unmoved mover. 至高의 形相)로 보았다. Aristoteles는 움직이는 모든 것이 다른 어떤 것의 작용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성은 인과(因果)의 사슬이 하나의 출발점을 가지고 있을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Aristoteles의 신은 신비한 직관을 통해 파악한 실재라기보다는 그의 우주론이 낳은 논리적 결과였다. Aristoteles는 동물의 왕국에서는 욕망이 운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별은 그 자체로 워낙 완벽하기 때문에 오직 더 큰 완벽을 갈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갈망은 지고한 활동에 종사하는 존재에 대한 지적인 사랑에서 생겨난다. Aristoteles의 신은 자신에 대한 명상에 잠긴noesis noeseos였다.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게 하는 자는 인류에게 관심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Aristoteles는 그 밑에 있는 올림포스 신들이 인간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생각에도 의심을 품었다. Platon에게 올림포스의 신들이 인간사에 관여한다는 것은 신조였지만, Aristoteles에게 그것은 단지 가설일 뿐이었다.
Aristoteles의 형이상학에는 신성한 면이 전혀 없었다. Aristoteles는 갑자기 세상을 창조하기로 결정하고 인간 역사에 직접 개입하는 至高의 神이라는 개념을 아주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일신론자들은 나중에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게 하는 자’에 대한 Aristoteles의 미덥지 않은 ‘증거들’을 이용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만, 철학자들의 신은 결국 더 분별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데우스 오티오수스(deus otiosus.게으른 신, 물러난 신이라는 뜻)로 여겨졌으며 영적인 탐구에는 쓸모가 없었다.
Aristoteles도 그런 생각에 동의했을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엔 신성한 면이 없었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란 용어 자체가 Aristoteles의 단편적인 글과 강연 노트를 묶은 편집자와 사서들이 만들어낸 말이었다. 그들은 서로 관계없는 주제에 관한 14편의 에세이를 1권으로 묶으면서 거기에 메타 타 피지카(meta ta physika), 즉 ‘자연학 다음’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Aristoteles는 祭儀전문가들이 늘 직관적으로 파악하던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했다. 그의 문학비평은 인간 중심적이었으며, 그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현세의 세계를 향해 있었다. Aristoteles 합리적 지성은 심오한 종교적 경험도 은근히 뭔가 더 실용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Aristoteles는 위대한 천재성을 지닌 선구자였다. 그는 거의 혼자 서구과학, 논리학, 철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서구 기독교에게도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겼다. 12세기에 유럽인이 그의 글을 발견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게 하는 자’(unmoved mover. 至高의 形相)에 대한 그의 합리적 증명-실제로는 그의 성취 가운데 그렇게 빛나는 대목은 아니었다-에 매혹되었다.
Aristoteles는 신에 종교적인 가치를 담을 생각이 없었으며, 이런 신은 축의 시대의 주요한 흐름에는 낯선 것이었다. 이 흐름의 궁극적 실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묘사할 수도 없으며, 파악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성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A는 서구를 과학의 길 위에 올려놓았다. 그 길은 첫 번째 축의 시대 이후 거의 2,000년 만에 제2의 위대한 변화를 부르게 된다. (이성시대, 과학시대)
9장. 제국의 시대 (BC300-BC220년경)
축의 시대 현자들은 (모두) 삶이란 본질적으로 불만족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고통을 초월하고자 했다. 그러나 단순히 괴로움을 피하거나 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구원은 고통과 맞서는 데 있지 물러나 부인하는데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韓非子, 荀子, 老子의 도덕군주론
BC3세기가 시작되면서 타 지역에서는 종말을 향해 가던 축의 시대가 중국서는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원래의 理想 중 몇 가지는 硬化되고 있었다. 이 시절 위(魏)와 진(晉)은 대국이었고, 여타국들은 끝없는 전쟁에 몰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요순시절 같은 통일된 나라를 만들어낼 만한 강한 통치자를 갈망했다. 중국에서는 그리스인을 매혹시켰던 과학적, 형이상학적, 논리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중국인들이 원한 것은 법과 질서회복이었다.
계속 팽창하는 대국의 군주들은 이제 그들이 가진 직책의 마법적 능력(도덕)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주의자들이었으며, 경제가 성공의 열쇠임을 알았다. BC4세기 말에 이르러 통치자들은 유가와 묵가의 조언을 버렸다. 대신 상인계급에 의존했다. 그들은 계산과 財政법칙에 의지했다. 그들은 道 대신 돈을 바라다보았다.
나라마다 통치자들은 정치과학자들, 즉 방법을 가진 자들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중국 역사가들은 이들을 법가(法家)라 불렀다. 방법론자들은 물론 법에 관심을 두었지만, 법학에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법이란 기준, model을 뜻한다.
법가는 사람들을 그들의 이상에 적응시키고 싶어서 법이라는 말이 사회적 행동을 통제하는 규범적인 방법들을 포함하도록 그 의미를 확대했다. 따라서 법은 종종 벌을 뜻하는 형(刑)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儒家, 墨家는 자애와 도덕성을 갖춘 聖君만이 사회개혁을 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法家는 군주의 도덕성엔 관심이 없었다. 가혹한 법과 엄격한 형벌이 있으면 된다고 보았다. 봉건시대 이후 끊임없는 영토 확장 전쟁으로 거대 군주국이 되자 왕국은 인(仁)과 예(禮)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법가는 실제로 기능을 하는 정부를 만들고 싶어 했다.
법가는 법의 구조를 저울에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제대로 된 저울을 사용하면 무게를 속일 수 없다. 현명한 통치자가 법으로 일을 처리하면 배신자, 사기꾼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법가는 봉건시대 개인 대 개인 통치에서 객관적인 법률체계로 중요한 지적 이행을 이루었다. 그러나 통치자의 지적, 도덕적 상태와는 무관한 법이 문제였다. 다시 말해 爲를 위한 통치수단으로서의 법이 문제였다. 묘하게도 법가는 無爲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하늘의 도가 인간의 의도와 관계없이 작동한다고 주장한 장자 같은 도가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초기 법가도 도가의 그런 생각에 동의했다.
법가는 BC5세기에 진(晉)나라에서 떨어져 나온 위(魏), 한(韓) 조(趙)에서 처음 발전했다. BC370년경 商鞅(상앙.BC390-BC338?)이라는 야심찬 젊은이가 위나라에 자리 잡고 그 나라의 정치과학자들의 토론에 끼어들었다. 이들은 거대한 영적 프로그램은 없이 단지 군대개혁, 곡물증산, 지역귀족을 약화시켜 통치자의 권력 강화, 분명하고 효과적인 법률 개발을 꾀했다.
상앙은 魏나라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지만, BC361년 진(秦)나라 군주의 중요한 자문이 되었다. 상앙의 노력 결과, 진나라는 BC3세기 말에 다른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BC221년에 천하를 통일, 始皇帝시대에 진입했다.
상앙은 오직 부국강병을 제1 목표로 했다. 그 목표를 달성키 위해 조정은 주민의 공포와 탐욕을 이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상앙은 탈영병을 엄히 다스려 병사들이 차라리 전장에서 죽기를 바라게 만들었다. 또한 농민이든 귀족이든 뛰어난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경작지를 상으로 내렸다.
진나라는 상앙의 지도를 받아 무시무시하게 능률적인 전투기계가 되었다. 병역과 부역은 강제였다. 상앙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 농업생산을 군대와 결합한 것이었다. 공을 세운 농민 겸 병사는 지주가 되고 관직, 연금을 받았다. 반면 옛 귀족은 특권을 박탈당했다. 전장에서 제대로 싸우지 못한 귀족은 강등되어 평민이 되었다. 태자도 법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의 후사를 끊을 수 없어 태자 대신 스승이 벌을 받았다.
상앙은 군주의 도덕성에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덕이 많은 현자는 왕으로서는 실패한다고 믿었다. 평화를 설교했던 유가는 위험했다. 모두가 예를 실행한다면 누가 전장으로 가겠는가? 상앙은 유가의 황금률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상앙은 “전쟁에서는 적이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하면 강해진다. 어떤 일을 계획할 때 적이 창피해서 하지 못할 일을 한다면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고 했다.
그의 가혹한 개혁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BC340년 위나라를 공격, 큰 피해를 주고 천하통일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상앙은 자신이 만든 무자비한 제도의 희생자가 되었다. BC338년 그를 후원했던 孝公이 죽은 뒤 경쟁자들이 새 군주를 부추겨 상앙 자신이 조달한 전차에 갈가리 찢겨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법가사상은 이미 전례(典禮)가 되었다. 秦의 始皇帝 밑에서 일했던 韓非(BC280-BC233)는 법가 중 가장 뛰어난 학자였는데, 그는 스스로에게 인류를 돕는 고귀한 사명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孤憤(고분)’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쓸모없고 비실용적인 생각을 팔러 다니는 다른 사(仕)들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역사는 靑出於藍인가, 아니면 과거의 부정인가? (순자의 성악설이 한비의 법가사상으로 진일보 한 것인가? 아니면 개악된 것인가?)
그는 왕이 도덕의 모범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지만, 효율적인 체계를 세워 보통 사람이 유능한 통치자가 되도록 돕고 싶었다. 그가 썼다는 다음 글은 통치자의 무위(無爲)에 거의 신비스러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군주는 지식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명민함을 얻고, 슬기를 버림으로써 결과를 얻고, 용기를 버림으로써 힘을 얻는다.”(韓非)
법은 벌과 억압의 수단이 아니었다. 법은 왕과 신민이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데 익숙하게 해주는 교육이었다. 이런 개혁이 완성되면 법은 필요 없어진다. 모든 사람이 나라에 최선의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비도 처참한 종말을 맞이했다. BC233년 모함을 당해 감옥에 갇혔다가 처형 대신 자살을 택했다. 한비는 법가가 되기 전에 당대의 가장 유명한 유가 철학자 荀子(BC300?-BC230? 이름은 황況) 밑에서 공부했다. 순자는 정열적,시적이면서도 매우 합리적인 사상가로서 다른 철학자들의 통찰을 자신의 유가적 전망 속에 통합, 보다 강력한 종합사상을 이루어 내려고 했다.
순자는 墨家, 楊家, 法家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 복잡한 주장의 한 측면만 강조했을 뿐, 그들 모두로부터 뭔가 배울 점이 있다고 보았다. 순자는 또 도교사상에서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순자는 새로운 실용주의에 놀랐다.그것이 도덕적 기준의 쇠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순자는 법가의 현실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전히 자비심 있는 왕만이 평화와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순자는 진(秦)나라 백성이 높은 수준의 문명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과감한 개혁(상앙의 개혁)이 가능했다고 보았다. 그는 진나라 사람들이 늘 천하가 힘을 합쳐 진을 정복할 것이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그는 가혹한 통치방식이 다른 나라 백성의 원성을 살 것이기 때문에 진이 중국 전체를 다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순자는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진은 실제로 타국을 물리치고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무자비한 통치방식은 왕조의 붕괴로 이어져 천하통일 14년 만에 망했다. 이사(李斯.BC?-BC208)도 순자의 제자였다. 그러나 스승의 유가적 가르침은 제자들에게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순자는 군자의 자비(仁)와 도덕성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보았으나 실제는 그러하질 못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실용주의적인 길로 나아간 것. 이사는 스승에게 물었다. “진은 스승님 말씀처럼 仁이나 義가 아니라, 기회를 이용했을 뿐인데 그렇게 된 것(부강) 아닙니까?” 이사는 순자를 버리고 법가가 되어 진의 승상이 된다. 그는 번개 같은 원정을 지휘, BC221년 진이 최종 승리자가 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순자가 진(秦)을 방문한 뒤 BC260년 진나라 군대가 순자의 나라 趙를 정복했다. 왕이 항복을 했는데도 趙나라 병사 40만을 학살했다. 순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양보정신과 인(자비)의 윤리가 중국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열심히 헌신적으로 노력하면 거리의 누구라고 堯임금처럼 되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하늘은 세상사에 간섭하는 神이 아니었다. 하늘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신탁을 구해 하늘의 뜻을 왜곡하려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런 낡고 조직적인 미신을 싫어했다. 하늘은 자연 그 자체였다. 천도는 인간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었다. 인간을 인도하지 않고 인간에게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이 자신의 길을 찾는 데 필요한 자원을 이용하게 해줄 뿐이었다. 이런 길을 찾는 것이 군자의 임무였다. 장자처럼 천도를 명상한답시고 인간의 일을 무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회에서 물러나는 것은 잘못이었다. 문명은 엄청난 업적이었다. 문명은 인간에게 신의 지위를 주었고, 하늘이나 땅과 동등한 짝이 되게 해주었다.
하늘에 복종하고 하늘을 기리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천명을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나은가? 도가처럼 하늘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하늘이 제공한 자원을 이용,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이 나은가? 만일 하늘에 집중,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태만히 한다면, 우리는 만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고 순자는 주장했다.
순자는 법가로부터 사람들에게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순자는 맹자와 달리 인간 본성은 善이 아니라 惡이라고 믿었다. 모든 사람은 “질투와 증오의 감정을 품고 태어나며, 그런 감정에 빠져들면 폭력과 범죄로 나아가고 충성과 믿음은 모두 사라진다.”고 보았다.
그는 “굽은 나무는 도지개(굽은 활을 바로 잡는 도구)에 대놓고 쪄서 억지로 펴야만 곧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현자가 될 수 있다. 단 이것을 혼자 이룰 수는 없다. 스승을 찾아서 禮에 복종해야 한다. 그런 다음 예를 지키고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명령을 따르고 사회규칙을 준수하면 질서를 이룰 수 있다는 것, 선은 의식적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것.
현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행동을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삶의 고통과 기쁨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여 사회관계의 질서를 잡는 방법을 발견했다. 따라서 예는 자신에게 견주는 恕(서)의 원리에 기초했다.
통치자는 자신을 정복해야만 사회전체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올 수 있었다. 예는 감정을 인간화하고, 예술가가 하찮은 재료에서 형식과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듯이 감정을 다듬었다. 禮는 “너무 긴 것을 자르고 너무 짧은 것을 늘이며, 남는 것을 덜어내고, 모자란 것을 채우며, 사랑과 존경의 형식을 확대하고, 올바른 행동의 아름다움을 한 단계씩 완성시킨다.”(순자)
예는 일종의 자연법이었다. “하늘과 땅은 예에 의해 조화를 이루고, 해와 달은 예의 빛을 받는다. 4계절은 예에서 질서를 끌어내고, 별과 행성은 예에 의해 움직인다”(순자). 그렇지 않으면 혼돈이 생길 것이다. 만물이 우주의 질서 속에서 적당한 자리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예는 또 인간의 감정을 정화한다. 따라서 예는 비자연적이기는커녕 사람들을 실재의 핵심으로 이끈다. “예의 원리는 실로 깊다” “체계를 만드는 자들의 거칠고 공허한 이론을 가지고 거기에 들어가려 하는 자는 망할 것이다”(순자)
모든 중국인과 같이 순자도 자연을 신처럼 숭배했다. 그의 종교적 합리주의는 신비한 침묵에 기초를 두었다. 그는 한 가지 교조적 입장을 자기중심적으로 고집하는 것을 强迫(강벅)이라 부르며 개탄사회를 개혁하려면 도를 이해해야 한다.그러나 자신만 옳고 타인들은 틀렸다고 고집을 해서는 도를 이해할 수 없다.
道는 텅 비고, 통일되고, 고요한 정신만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순자는 장자와 완전히 일치한다. “마음이 텅 비고, 한결같고, 고요한 것을 일러 크게 맑고 밝다(淸明)고 한다”(순자). 그것이 바로 올바로 도를 터득한 이의 특징이다(순자).자기중심적인 강박에서 벗어나면 평범한 사람도 현자처럼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현자의 지성은 神과 같아진다.
순자가 보기에 법가는 야망이 크지 않았다. 도를 깨달은 사람은 경제 또는 군사기계의 톱니가 아니라 신성한 존재였다.“넓고 크다. 누가 그런 사람의 한계를 알겠는가? 밝고 이해력이 뛰어나다. 누가 그의 덕을 알겠는가? 끓어오르고 뒤섞여 늘 변한다. 누가 그의 형태를 알겠는가? 그의 밝음은 해와 달에 비길만하다. 그는 커서 사방을 채운다. 이것이 대인(大人)이다.” (순자)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인간성의 잠재력을 실현한 사람은 세상을 구할 수 있다. BC3세기 중반이 되자 순자, 노자 같은 사람들의 text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도덕경은 원래 개인이 아니라 작은 나라의 제후들을 위해 썼는데도 서구에서는 개인의 수양서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정작 노자에 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떠도는 얘기뿐이다.
도덕경은 81장에 수수께끼 같은 韻文으로 되었다. 노자는 법가보다 훨씬 영적이지만 둘 사이에는 친화성이 있으며, 법가는 그 점을 즉시 간파했다. 둘 다 유가를 경멸했다. 둘 다 반대되는 것을 추구할 때에만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역설적인 세계관을 지녔다. 둘 다 통치는 무위를 유지, 나라의 삶에 가능한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老子는 法家와 달리 왕에게 덕이 있기를 바랐지만 끝도 없이 백성을 위해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儒家의 聖君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無爲의 삼가는 태도와 완전한 공평성을 실행에 옮기는 군주여야 戰國時代의 폭력을 끝낼 수 있다고 보았다. 고대의 왕들은 일련의 외적인 의식을 거행하며 지상에 하늘의 도를 확립하는 마법적인 능력으로 통치를 했다고 전해진다. 노자는 이런 오래된 의식을 내재화했으며, 군주들에게 도와 내적으로 영적인 일치를 이루자고 충고했다.
老子는 마음을 고요와 공허(텅 빔)에 뿌리를 두었다. 그래서 도덕경 중 30장을 군주의 내적 삶을 변화시켜 그에게 고대 성군들처럼 세상을 다시 채우고 복원할 힘을 부여해 줄 신비한 훈련에 할애했다. 우리는 첫 장에서 노자의 방법을 만나게 된다. 현명한 통치자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일반적인 합리적 사고는 소용이 없다. 敎義, 이론, 체계는 그의 진전에 방해만 될 뿐이다. 언어와 개념을 넘어선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이름 없는 것이 하늘과 땅의 시초였다(無名天地之始)." 세상의 보이지 않는 것과 표현된 것은 둘 다 훨씬 더 깊은 존재 수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만물의 은밀한 핵심은 ‘신비 위의 신비’(玄之又玄)이다. 다시 말해 어둠(玄)이라 불렀다.온갖 오묘한 것의 관문이다. 그 무엇을 알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더 깊은 신비를 깨달아야 한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그래서 kenosis(자기 버리기)를 강조했다. ‘나는 원한다’고 쉴 새 없이 외치는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노자는 도를 그의 전망의 중심에 놓으면서 영적 삶의 유동성을 강조했다. 목표는 감추어져 있고 접근할 수 없다. 길은 새로 비틀리거나 방향을 튼다. 계속 멀리 물러나면서 우리더러 더 다가오라고 계속 다그친다.
“섞여서 형성된 어떤 것이 하늘과 땅보다 먼저 태어났다. 소리도 없이 텅 비어 있으며, 홀로 서서 변하지 않으며, 두루 행하여 움직여도 위태롭지 않아 세상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래서 그냥 道라고 부른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임시로 크다(大)라는 이름을 준다. 크기 때문에 물러난다고 말할 수 있다” (도덕경).
老子의 모호한 시는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숭고한 것에는 이름이 없다고 말하고 나서 몇 줄 뒤에는 ‘이름이 있는 것’과 ‘이름 없는 것’이 같은 출처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노자의 글은 추론이 아니라 명상을 위한 참조(점)들이다. 그는 결론만 기록할 뿐 이런 통찰에 이르게 된 단계들을 짚어주지 않는다. 현명한 통치자들은 표현된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론 어둠 가운데 가장 어두운 곳까지 혼자서 도를 따라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인에게는 그들 나름의 요가(坐忘)가 있었다. 이것은 바깥 세계를 차단하고 일반적인 인식방식을 폐쇄하라고 가르쳤다. 장자는 이것을 잊음(忘), 즉 삶의 버림이라고 불렀다. 노자도 이따금씩 이 요가 훈련을 언급한다. 그러나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것은 그가 요약한 신비한 과정의 핵심이었다. 독자가 그의 결론을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여행을 해보는 것뿐이었다.
노자는 보이지 않는 실재를 종종 허(虛)라고 불렀다. 규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성은 진공을 싫어한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관념, 말, 생각으로 가득 채운다. 그렇게 하면 생각으론 가득 찬 듯 보이지만, 사실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도덕경에서는 혀를 만물의 ‘자궁’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생명을 낳기 때문이다. 노자의 허, 골짜기, 우묵한 곳의 이미지들은 모두 거기에 없는 것에 관해 말한다. 묘사 불가능한 존재의 신비를 가리킬 뿐 아니라, 에고가 사라진 무위의 마음, 즉 kenosis를 가리키기도 한다.
虛란, 노자에 따르면, 사람들이 문명(문명은 인간 삶에 그릇된 책략을 들여다 놓았다.)에 감염되기 전에 누리던 진정한 인간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개입하는 바람에 도를 잃은 것이다. 다른 생물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도를 잘 지킨 반면, 인간은 항상 바쁜 有爲의 사고에 의해 도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구분을 만들어 냈으며, 실제로는 자기중심적 투사에 불과한 엄숙한 행동원리들을 고안했다.
노자는 이 점에 관해 장자와 의견이 같았다. 현자가 이런 정신적 습관을 버리는 훈련을 하면 원래의 본성으로 돌아가 올바른 길로 복귀할 수 있다.(“만물이 어지럽게 변화할지라도 모두 그들 각자의 뿌리로 돌아간다.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라 한다.” (道德經)
보이지 않는 것과 조화를 이루면 완벽한 지혜와 공정성을 얻는다. 자신과 도를 동일시 할 수 있다. 무(無)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실패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바퀴통에 30개의 살이 꽂혀 있지만, 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곳(축을 꽂는 빈 곳)이다.” 현명한 통치자는 ‘하늘처럼 행동해야 한다. 하늘은 다른 생물의 도에 간섭하지 않고 자신의 불가사의한 경로를 따른다.
이것이 사물이 따라야 할 마땅한 도다. 어디서든 통치자, 정치가, 관리는 음모와 계략을 짰다. 많은 철학자들이 도움보다는 해를 주었다. 墨家는 문학, 전략,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儒家는 문화를 찬양했지만, 노자가 보기에 문화는 도의 흐름을 방해했다. 유가의 영웅인 요, 순, 우는 강의 흐름을 돌리고, 경작지를 만들려고 숲과 산에 불을 놓는 등 자연에 간섭했다.
유가는 禮를 강요, 사람들이 순수하게 외적인 영성에만 집중토록 장려했다. 목표지향적인 有爲의 활동이 너무 많았다.이것은 생물을 그대로 놓아두는 도의 부드럽고, 독단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과는 양립할 수가 없었다.
도는 행동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 군주나 제후가 도를 지킬 수만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변할 것이다. 도가를 따르는 통치자의 결론은 “내가 바라기를 그만두고 고요하게 있으면 스스로 평화로워질 것이다.”는 것이었다.
생존의 비결은 직관과는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생활에서 늘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미친 듯이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고, 무지보다는 앎을 좋아하고, 약함보다는 강함을 좋아한다. 그러나 노자는 정반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생각에 관심을 가졌던 그 시대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지만, 단단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물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 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는 않는다.
하늘, 땅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연장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인은 자신을 마지막에 놓지만 오히려 앞서게 되며, 그가 자신의 개인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힘과 강제는 본래 자멸적이다. 노자는 말했다. “끝을 맺되 자만 말라, 끝을 맺되 자랑 말라. 오만하지 말라. 끝을 맺되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에만 하라. 끝을 맺되 위협하지 말라.” 따라서 무위는 행동의 부재가 아니라 증오의 상승을 막는,비호전적이며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다.
인간이 하는 일의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다. 사람들은 늘 말과 행동 뒤에 놓인 감정과 동기를 느낄 수 있다. 군자는 적대감을 흡수해야 한다. 보복은 틀림없이 새로운 공격을 낳는다. 군자는 다투지 않기에 세상 누구도 그와 다툴 수가 없다. 무위는 겸손과 결합해야 한다. 君子는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 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노자는 인간 본성이 원래 친절하며 선하다고 보았다. 오직 정교한 법과 도덕에 강제로 따라야 한다고 느낄 때만 격해진다는 것이다. 노자가 공개적으로 입증한 적은 없지만, 남들 자리에 자신을 놓아보려고 노력하라는 말에는 자비가 암시되어 있다. 노자는 우리가 축의 시대 중국에서 만나는 마지막 현자다. 그의 이상은 본질적으로 utopia적이었다.
전국시대의 폭력을 끝장내고 제국을 통일한 것은 道家의 현자가 아니라, 秦이라는 法家의 나라였다. 군사력에 의하지 않으면 왕권을 얻을 수 없음을 증명. 이로써 평화는 찾아오긴 했으나 도덕성, 자비, 폭력을 행한 축의 시대의 희망에는 조종이 울렸다. 제국의 시기에 축의 시대 영성들은 종합되면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된다.
Hellenism - 문명을 만든 최초의 문명 충돌
중국인은 축의 시대의 타민족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기에 Alexandros 大帝의 페르시아 정복(BC333)을 몰랐다. 이어 그는 군대를 이끌고 아시아를 짓밟으며 알려진 세계 대부분을 망라하는 제국을 창조했다. 그의 제국은 공포에 기초했다. (무자비한 파괴, 살생)
그러나 그의 제국은 BC323년 그가 바빌로니아에서 요절하자 살아남지 못했다. 장군들 간에 싸움이 벌어져 알렉산더 사후 20년간 6명의 diadochoi(디아도코이, 후계자들)의 전투로 제국은 흔들흔들. 엉망진창이었다.
2명이 4명을 없애고 알렉산드로스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 가장 주도면밀했던 Ptolemaeos(프톨레마이오스, BC367-BC283, 84세)는 이집트, 아프리카 해안, 팔레스타인, 시리아 남부를 차지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 총독으로 임명했던 셀레우코스(Seleycos, BC358-BC281, 77세?)는 이란을 포함, 옛 Persia 제국의 큰 부분을 지배했다. 그는 유지가 불가능했던 인도 영토를 포기하고 동쪽 경계를 확정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인도인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의 업적은 인도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인도에 실제로 도착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인도에서 보낸 2년도 군사원정이라기보다는 지리적 탐험에 가까웠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ethos의 구현자로 보였다. 그는 Homeros의 신화를 배우며 자랐고 아테네의 이상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리스는 타 지역과는 달리, 축의 시대의 종교적 비전에 완전히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스가 이룩한 축의 시대의 가장 놀라운 업적 몇 가지는 군사적인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모험 2년도 그런 순간으로 보인다. 그리스인들은 요가 수행자들이 인간 심리의 한계를 돌파하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용감하게 궁극적인 것에 맞섰다. 신비주의자들은 내적인 공간을 정복하려 한 반면, 알렉산드로스는 물리적 세계의 가장 먼 곳을 탐험했다.
축의 시대 많은 현자들처럼 알렉산드로스도 늘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Persia 왕들보다 더 깊이 인도로 들어가고 싶어 했고, 지구를 둘러싸고 있다고 여기는 바다에 이르고 싶었다. 이는 서양 탐험가들이 매력을 느끼던 깨달음이었지만, 인도의 신비주의자들이 구했던 니르바냐, 해탈-이것은 자기를 지우는 것, 아힘사, 자비를 특징으로 삼음-과는 매우 달랐다.
그리스 병사들은 인도의 웅장함에 매혹과 공포를 느꼈다. 우연히 마주친 벌거벗은 철학자들에게 흥미를 느꼈는데, 그들은 아마도 차이나 교도였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우리가 이 책에서 언급했던 다른 민족 중 일부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란의 조로아스터 교도는 알렉산드로스를 역사상 최악의 죄인으로 기억한다. 그가 사제와 학자들을 수도 없이 죽이고,신성한 불을 수도 없이 짓밟았기 때문이다. 그는 저주받은 자였다. 사제 학살은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안겨주었다. 조로아스터의 text는 그때까지도 구전되고 있었다.
따라서 사제들 머릿속의 text는 결국 복원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유대인은 알렉산드로스보다는 디아도코이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 이후로 예루살렘은 늘 벽지였다. 모든 교역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디아도코이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예루살렘은 BC320-BC301년 사이에 무려 6번이나 지배자가 바뀌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은 그리스인을 파괴적이고, 폭력적이고, 군사주의적인 존재로 경험했다. BC301년 이집트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알렉산드로스 대제 사후 6디아도코이 중 하나. BC323년 이집트 왕이 됨. 소테르는 이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별칭으로서 구원자라는 뜻이다.)가 유다, 사메리나, 페니키아를 비롯, 해안 지역 전체를 장악했고 그 이후100년 동안 예루살렘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이 왕조는 지역의 일에는 별로 개입치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은 변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근동에 새 도시를 여럿 건설했으며, 이 도시들은 헬레니즘 학문과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크,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이 그런 도시였다.
이런 도시는 그리스의 polis였으며, 보통 원주민을 배제했고, Hellenism 세계에서 전에 본 적이 없는 규모로 건설되었다. 이것이 cosmopolis, 즉 세계도시였다. 이때는 위대한 이주시대였다. 그리스인은 이제 자신이 태어난 작은 도시국가와 결합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영웅적 원정이 그들의 지평을 확대했으며,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cosmopolitan, 즉 세계시민이라고 느꼈다.(21세기의 세계화?). 많은 사람들이 polis가 비종교 지향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인을 사메리나에 정착시켰으며, 나중에 그리스 이주민은 시리아에 도착했다.
가자, 셰켐, 마리사, 암만 등의 고대 도시들을 hellenism적 model을 따르는 polis로 바꾸었다. 그리스 군인, 상인, 기업가는 이런 그리스 문화권에 정착, 새로운 기회를 활용했다. 그리스어를 말하고 쓰는 법을 배운 지역민 또한 군대와 행정부의 하위직 진입이 가능했다.
이렇게 해서 문명의 충돌이 생겨났다. 지역민 중 일부는 그리스 문화에 마력을 느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polis 생활의 세속적 경향, 그리스 신들의 부도덕한 활동, 젊은이들의 연무장에서의 벌거벗고 운동하기 등에 경악을 했다.
그리스인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은 일치하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인이 연무장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았지만, 외국인들의 출입은 허락했다. 그래서 이 지역 유대인은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며 그리스와 유대문화의 독특한 융합을 이루기도 했다.
이 보다 보수적이었던 예루살렘에서는 두 분파가 생겨났다. 한 분파는 느헤미야를 몹시 괴롭혔던 토비아의 후손인 토비아드 씨족이었다. 그들은 그리스 세계에서 편안함을 느꼈으며,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사상의 현자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반대였다. 그들은 전통에 매달리고 오래된 율법, 관습을 유지하려 했던 사제 집안인 오니아드 씨족 주위에 모여 들었다. BC3세기는 예루살렘 역사에서 분명치 않는 시기였지만, 두 진영 사이에 긴장이 통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축의 시대가 끝난 뒤에는 일부 유대인이 예루살렘을 위대한 안티오크라고 부르는 polis로 바꾸려고 하면서 심각한 갈등이 생겼다.
이 혼란의 시기는 또 다른 방식으로 예루살렘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 Persia 제국에 대항한 반역은 거의 없었다. Persia왕들은 그들이 영원히 지속된 제국을 상속 받았다는 신화를 퍼뜨렸다. 이 신화는 아시리아인이 시작한 것이었으며, 바빌로니아인에게 넘어갔다가 마지막으로 키루스에게 간 것이다.
따라서 모든 반역은 피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근동 사람들은 디아도코이가 이 지역을 장악하려고 싸우면서 후계자가 바뀌는 것을 보았으며, 이 때문에 분위기도 변했다. 세상은 뒤집혔다. 어떤 유대인은 그들 자신의 메시아 밑에서 독립할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BC201년 Seleucos 왕조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몰아내자 그런 희망에 다시 불이 붙었다.
기원전 2세기에 Seleucos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Antiochos IV Epiphanes, 재위 BC175-BC163)가 한 행동은 유대인의 묵시록적 열정의 분출을 자극했다. 이 열정은 다윗 왕 시대의 옛 신앙체계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런 메시아 신앙은 축의 시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아니었으며, 유대교를 다른 방향, 축의 시대 이후의 방향으로 이끌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의 지적 성취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제국을 이루었으며, 그의 업적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그가 죽은 뒤 그리스 본토에서 아테네를 비롯한 몇 개 polis가 마케도니아의 통치에 저항했는데 최초의 6디아도코이 중 한 명이며 마케도니아를 통치했던 Antipatros는 반역에 잔인하게 보복했다. 그는 아테네 자치권을 빼앗고 괴뢰정부를 세웠다. 이로써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끝장이 났다.
그리스 이주자와 식민지 개척자가 새로운 영토에 정착하면서 그리스 문명은 동방의 문화와 융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학자들은 이런 융합을 Hellenism이라고 불렀다. 이런 만남으로 제기되는 어려움은 오히려 문화를 풍요롭게 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리스인의 실험의 강렬함이 희석되었다. 이국의 거대한 지역으로 엷게 퍼지면서 그 실험은 파편화되었으며,진정으로 그리스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와 비슷한 것이 되었다.
그리스인의 정체성에는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자율이 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체계가 극적으로 팽창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거대한 비인격적인 힘에 의해 통제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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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ochos 4세와 유대인의 반란.
BC167년 Antiochos 4세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 종교인 제우스 숭배를 강요하자 나이 든 유대 성직자 마타시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사후에는 아들인 마카베오가 반란군을 리드했다. 그는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발휘,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았다. BC163년 Antiochos 4세가 죽자 Seleucos 왕국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주겠다고 했으나 마카베오는 종교자유뿐 아니라 정치적 자유를 위해 계속 싸우다가 2년 뒤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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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3세기에는 이 시기의 고통에 뿌리를 내린 새로운 철학자 3명이 이런 소외감을 어루만지려고 노력했다.Epicuros(BC341-BC270, 71세)는 마케도니아인에 의해 사모스에서 추방당했다. 이 polis에서 저 polis로 방랑하다가BC306년에 아테네에 도착했다. 아카데미아 근처에 정원이 딸린 집을 한 채 사고,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는 쾌락이 인간 존재의 주된 목표라고 가르쳤다. (비방자들은 쾌락주의적 즐거움을 광적으로 열망한다고 지탄.)
이 공동체는 정원 안에서 운영되는 고요하고 소박한 체제를 채택했다. 쾌락은 호색과 방종이 아니라, Ataraxia(고통으로부터 해방)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모든 정신적 혼란을 피했다. polis 생활은 워낙 긴장되고 예측 불가능했기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공무에서 물러나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평화로운 삶을 누려야 했다. 불멸을 향한 욕망을 없애줌으로써 유일한 삶을 즐기려 했다.
에피큐로스와 그의 친구들이 정원에서 한적한 삶을 즐기는 동안, 키프로스 출신의 그리스화 된 페니키아인Zenon(BC342-BC270, 72세)은 아테네에서 아고라에 있던 공회당인 彩色柱廊(Stoa)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제논과 그의 추종자들을 stoa학파라 했다.
제논은 알렉산드로스가 그의 지배 아래 세계를 통일한 듯 했던 특별한 순간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그는 우주가 통일체라 믿었다. 몸과 영혼은 나뉘지 않는다. 실재 전체가 물리적이고, 살아있으며, 불 같고, 증기 같은 숨에 의해 조직되어 있다.(atman과의 관계성은?)
제논은 이 숨을 logos(이성), Pneuma(프네우마, 영혼), 신 등으로 불렀다. 지능이 있는 이 신성한 힘은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다. 이것은 어디에나 내재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logos에 따라 살 때에만 행복을 얻을 수 있는데, 이 logos는 자연 질서에서 드러난다.
자유는 신의 의지에 굴복하는 데 있다. 신이 모든 것을 미리 결정하기에 운명에 반항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따라서 빠른 태도는 체념하고 묵종하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내적인 평화를 기르고, 불안한 상황은 피하며, 양심적으로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며, 모든 극단적인 것을 피해야 했다.
그 목적은 신성한 logos의 무자비한 과정에 저항하지 않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이었다. 아타락시아(ataraxia.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는 회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엘리스의 피론(Pyrrhon, BC365-BC275, 90세)의 목표이기도 했다. 피론은 어떤 것에 관해서도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 하므로 판단을 중지하는 것(현상학에서의 판단중지. suspension과 다른 점은?)이 평화롭게 사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했던 것 같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의 기초는 관습과 습관이다. 모든 것은 이것이 아니듯이, 저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위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피론은 회의주의를 인식론적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치료법으로 본 것 같다.
BC3세기에 살았던 최초의 회의주의 저자 Sextus Empiricus는 피론과 그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다고 설명했다. “판단을 중지하자 뜻밖에도 몸에 그림자가 따르듯이 고요가 따라왔다.”마음을 열어 두고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 생각했다.
Hellenism 철학자들에게 축의 시대는 실제로 완전히 끝이 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업에서는 현자와 예언자들이 500년 이상 탐험해왔던 위대한 선구적 영성의 잔재들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공자, 붓다, 에스겔, 소크라테스의 영웅적 노력은 더 온건하고 성취 가능한, 말하자면 특가(特價)판으로 바뀌었다.
자연에 조율된 Zenon의 삶의 이상에는 도교의 느낌이 있지만, Stoa학파는 자신을 자연과정에 일치시켜 세상을 바꾸기를 갈망하는 대신, 현상에 대해 체념해버렸다. 이 BC3세기 그리스 철학에는 모두 축의 시대에는 질색을 하던 숙명론이 들어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형이상학적 의견에 집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우파니샤드>의 신비주의자들은 합리적 사고의 오류를 지적, 대화 상대의 입을 다물게 했지만, 그들은 회의주의자들처럼 단순하게 판단을 중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고 습관을 부수는 경험을 활용, 사람들에게 말과 개념 너머에 놓인 신비를 맛보게 해주었다.
인도의 출가자들은 세상을 등졌지만, Epicuros 학파처럼 교외의 ‘정원’에 살려던 것이 아니었다. 붓다는 수도자들에게 아고라로 돌아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향한 자비심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 Hellenism 철학자들은 영웅적인 윤리적 요구를 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 Platon과 Aristoteles의 난해한 형이상학을 밀어내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려고 노력했던 Socrates로 돌아간다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유일한 목적이 혼란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었다. 반면 제논, 에피큐로스, 피론은 모두 조용한 삶을 원했으며, 위대한 축의 시대 철학자들의 극단성과 노력을 피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들은 단순하게 Ataraxia(고통으로부터의 해방)를 원했다. 번민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모두 삶이란 본질적으로 불만족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고통을 초월하자고 했다.
현자들은 구원은 고통과 맞서는 데 있지 물러나 부인하는 데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에피큐로스의 격리된 ‘정원’에서는 붓다의 숲의 느낌이 강하게 묻어난다. 축의 시대 사상가들은 아타락시아를 구하는 대신 사람들에게 고통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에레미야는 물러나 고통을 부인하던 사람들을 ‘거짓 선지자’ 라고 비난했다. 그리스의 비극 작가들은 고통을 무대에 올리고 관객들에게 울 것을 명령했다. 슬픔을 통과해야만 해방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Dukkha(고통)의 경험은 깨달음의 전제조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행자가 다른 사람들의 슬픔에 感情移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Hellenism의 철학자들은 오로지 자기에게만 초점을 맞추었다. 에피큐로스의 코뮨에서 우정, 환대는 핵심이었지만, 이것은 ‘정원’ 밖으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회의주의자들의 치료에도 비록 그 의도는 좋은 것이라 해도 공격성이 강하게 들어 있었다. 사람들의 확신을 무너뜨리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논쟁을 걸며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붓다와 Socrates는 늘 자신의 대화 상대가 실제로 있는 곳에서 시작했지 그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곳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했지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축의 시대 사상가들은 순수한 logos와 이성을 불신했다. 하지만 헬레니즘 철학자들은 직관보다는 과학에 기반을 두었다. 예컨대 에피큐로스는 Demokritos의 원자론을 발전시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귀중한 삶을 낭비하는 일임을 보여주었다. 죽음이란 원자들이 해체하면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신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
Stoa학파는 자연의 신성한 과정이 logos에 의해 계획되어 있어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때에만 그 과정과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BC3세기는 그리스 과학의 위대한 시기였다. 프토레마이오스와 Seleucos의 새로운 Hellenism 왕국은 과거의 polis보다 훨씬 부유했다. Eucleides(BC330-BC275?)와 Archimedes(BC290?-BC211?)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살면서 일을 했다. Miletos와 Elea 철학자들은 오늘날의 대중 과학자들과 비슷하게 자연과학 중 인간과 관련이 있는 측면에만 집중했다.
반면 BC3세기의 신과학자들은 수학, 물리학, 천문학, 공학의 첨단을 달렸다. 과학은 이제 초기의 종교적 방향성을 잃고 전적으로 세속적인 일이 되었다. Hellenism 철학은 오래된 다신교적 종교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희생, 축제, 제의는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신비주의는 더 인기를 끌었으며, 종종 비슷한 동양의 종교와 결합되기도 했다.
BC399년 Socrates는 사람들과 전통적인 신들 사이를 이간한다는 죄로 처형당했다. 그러나 BC4세기가 지나면서 철학자들은 종교적인 견해로 박해를 받지 않았다. 에피큐로스, 제논, 피론은 과거의 종교를 의심했지만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계속 고대의 제의를 거행했으며 훗날 서기 5세기에 기독교가 국가 종교로 강제로 자리를 잡기 전까지 변함없이 유지된다. Hellenism 철학자들은 그들의 선배와 같은 혁명가는 아니었더라도 지속적 영향력은 확보했으며,많은 면에서 막 등장하던 서양정신의 축 역할을 했다.
서양에서는 사람들이 과학과 logos를 향해 모여들었으며, 인도, 중국의 현자들에 비해 영적인 야망이 크지 않았다. Hellenism 철학자들은 정신의 직관적 능력을 훈련하는 대신 과학적 logos에 의지했다. 서양은 신비한 깨달음을 얻는 대신, 세속적인 계몽에 더 흥분했다. 서양의 과학적 소질은 결국 세계를 바꾸며, 16세기의 과학혁명은 새로운 축의 시대를 출범시켰다. 이것은 인류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과거와는 다른 종류의 정신에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제2의 축의 시대 영웅들은 붓다, 소크라테스, 공자가 아니라 뉴턴,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