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화 기행 1 > 전문역사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문역사자료실

[한국문화] 한국신화 기행 1

송화강 2019-05-12 (일) 22:47 6년전 4458  

<한국신화 기행>

 

 

1.고대史 ‘살아있는 목소리’ 일연스님을 찾아서

 

 

 

이윤기기자 /문화일보
참회하는 심정으로 내 이야기를 쓴다. 이것은 나 개인의 자괴(自愧)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가 살아온 서글픈 내력

이기도 하다.

나는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에서 태어나 열한 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고향에는 우리 형제들의 생가가

있고, 생가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는 조부모와 부모를 모신 선산(先山)이 있다.

선산에는 우리 형제들 묻힐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나의 경우는 아직 작정이 되어 있지 않지만 형님들은 아마

거기에 묻힐 것이다. 한분이 벌써 거기 묻혀 계시다. 

오랜 세월 지나지 않아, 조부모와 부모가 그랬듯이 우리 형제들도 무덤과 이야기로만 남았다가 세월 더 지나면

그나마 훼멸될 것이다.

앞질러 말하기 쓸쓸하지만 언필칭, 적멸(寂滅)이 문밖에 와 있다. 마을에 택호를 ‘화북댁’으로 쓰는 집안이 있었다.

그 집 형제들이 우보국민학교를 나와 함께 다녔는데 상급생도 있고 하급생도 있었다.

그들은, 외가 ‘고로면 화북동’ 이야기를 자주 했다.

외가가 큰일을 치를 때는 며칠씩 다녀올 때마다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큰 절’ 이야기를 했다.

지금 내 기억에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동’에서 시집 온 ‘화북댁’ 및 그 아들들과, 거기에 있다는 ‘어마어마하게

큰 절’ 이야기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마을에 택호를 ‘화북댁’으로 쓰는 집안이 있었다. 그 집 형제들이 우보국민학교를 나와 함께 다녔는데 상급생도

있고 하급생도 있었다. 그들은, 외가 ‘고로면 화북동’ 이야기를 자주 했다.

외가가 큰일을 치를 때는 며칠씩 다녀올 때마다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큰 절’ 이야기를 했다. 지금 내 기억에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동’에서 시집 온 ‘화북댁’ 및 그 아들들과, 거기에 있다는 ‘어마어마하게 큰 절’ 이야기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학교를 차례로 다니면서, ‘삼국사기’는 김부식, ‘삼국유사’는 일연, 하는 식으로 달달 외기만 했다.

서른살이 더 된 다음에야 두 사서의 엉성한 번역본을 처음 읽었다.

비록 서양 것들이기는 하지만 신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참이라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유사’가 좋았다.

그래서 ‘삼국유사’를 여러 차례 읽었다. 준비되지 않으면 읽어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모양인가.

나는 여러 차례 듣거나 읽었을 텐데도 근 쉰살이 다 되어서야, ‘삼국유사’가 쓰인 곳이 내 고향 군위군의

인각사(麟角寺)라는 것, 인각사가 ‘화북댁’ 형제들의 외가가 있는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 있다는 것,

그집 형제들이 ‘어마어마하게 큰 절’이라고 부르던 절이 바로 인각사라는 것을 알았다.

부끄럽고 억울한 일이다.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고향인 터키의 이즈미르까지 찾아다닌 나에게 그것은 참으로 부끄럽고도 억울한

일이다.

인각사는 내가 다니던 우보국민학교에서 겨우 16.4㎞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국민학교 다닐 당시(4학년까지), 40리밖에 안 떨어진 화북에 있다는 절이 인각사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 절이 바로 일연스님이 주석(駐錫)하던 절, ‘삼국유사’의 산실이라는 소리는 더더욱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내 고향 인각사의 내력을 안 뒤에도, 서양 신화에 발목이 잡힌 나머지 나는 오래 그 절을 찾아가지 못했다.

카메라를 매고 가야 할지 향촉(香燭)을 짊어지고 가야 할지 몰라 오래 망설이다 21세기를 맞고서야 인각사를

찾았다.

대구의 시인 이하석이 ‘민족 사학이 태동한 성지(聖地)’라고 부른 바로 그 인각사를 찾았다.

대찰을 본 적이 없는 화북댁의 아들들이 ‘어마어마하게 큰 절’이라고 하던 그 인각사를 처음 보았다.

큰 절은 아니었다. 일주문도 없고, 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 극락전은 작고 초라했다.

극락전 앞에는 일연 스님의 유골을 모신 부도(浮屠)가 서 있었다. 극락전, 강설루, 명부전도 짜임새없이 흩어져

있었다. 

인각사를 찾았던 답사자들이 입을 모아 ‘언제 가봐도 황량하고 찬바람이 돈다’든지, ‘소중한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준 일연 스님에 대한 이 시대의 대접이 지나치게 소홀하다’고 쓴다.

이하석은 심지어 ‘버려진 성지’라는 말을 쓰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절의 뜻이 어찌 그 크기에 있을까. 내가, 지척에

두고도, 오래 알아보지 못한 인각사는 큰 절이다.

오늘날의 ‘삼국유사’가 있게 한 절이라서 큰 절, 크게 기억해야 할 절인 것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대표 유홍준)가 펴낸 ‘답사여행의 길잡이’는 인각사를 답사하면서 ‘삼국유사’를 이렇게 쓰고

있다.

“‘삼국유사’는…… 우리 고대사 연구뿐만 아니라 지리·문학·종교·미술·민속 등 문화 전반에 관한 정보를 캐내는데

없어서는 안 될 금광과도 같은 책이다.

만일 ‘삼국유사’가 없다면 우리의 고대사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우리는 민족사의 첫머리에서 단군신화를 지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건국신화를 갖지 못한 허전함을 감내

해야만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향가 14수를 잃어야 하리라. 그리하여 노래가 없고 서정이 사라진 건조한 고대사를 아쉬워해야 하리라.

그밖에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신화·전설·설화가 스러져 우리 선조들의 생활과 사유는 물론 우리 꿈까지도 길어

올리던 샘이 말라버릴 것이다. 실로 ‘삼국유사’ 없는 우리의 고대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리라.”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다.

신라 백제 고구려, 이 3국의 역사를 개국부터 멸망까지 기전체(紀傳體)로 기록한 역사서라서, 설화나 풍습쪽으로는

전혀 고개가 돌아가 있지 않다.

‘삼국유사’는 그보다 140년 뒤인 1285년에 일연스님이 지은 유사(遺事), 즉 전해지는 이야기 책이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고대국가와 3국의 사적(史蹟)을 간략하게 적되, 대부분을 신화·전설·설화·시가에 할애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살아온 삶의 결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책이 바로 ‘삼국유사’다.

인각사에는 남아 있는 일연 스님 부도비의 정식 명칭은 보각국존비(普覺國尊碑)다.

스님 세상 떠난 지 6년 뒤 부도비가 세워질 때는 충렬왕 당대의 학자 민지(閔漬)가 글을 짓고, 진나라의 명필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해서 비문을 새겼다고 한다.

지금은 벙어리장갑 모양의 파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다행히도 옛 탁본의 사본이 비각 안에 걸려 있다.

한 탁본의, 1701년에 쓰인 서문에 따르면, 임진년 전란 때 섬 오랑캐들이 이 비를 보고 ‘왕희지의 참 자취를 여기

에서 다시 보는구나’하고 감탄하면서 다투어 탁본을 뜬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서문은, 때가 마침 겨울이라 불을 놓고 찍어내다가 왜인들이 비를 쓰러뜨려 깨트렸다면서 ‘섬나라 오랑캐들

횡포가 어찌 이리 심한가’하고 한탄하고 있다.

이 비문에는 일연스님이 쓴 100여권의 저서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당대 유생이었던 민지가 ‘삼국사기’를 의식했거나, 스님의 기록을, 심심소일로 희작(戱作)한, 확인될 수 없는

일사유문(逸事遺文)으로 여겨 고의로 넣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다음과 같이 쓴 데는 까닭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일연 스님은 만년에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마침내 뿌리치고 귀향해서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다, 그 어머니가 가신 뒤에는 인각사를 지키다 입적했다.

그가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281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그가 ‘게송잡저(偈頌雜著)’등 100여권의

불서(佛書)를 편찬, 저술한 뒤의 일이다.

일연 스님에게 고려의 신화 설화 시가 등의 유사(遺事)는 사기(史記)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마침내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품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인각사에 머물다, 거기에서 불과 40리 떨어진 내 고향의 어머니 무덤 앞으로 달려가, 허연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군위군 인각사에서 내 어머니 품안 같은 우리 신화의 세계를 열고자 한다.

 

 

 

 

 

 

 

 

2. 本풀이와 분풀이

 

2월 초 환경운동연합과 문화연대 관련자들과 함께 묻어 그리스, 터키 및 이집트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문화 운동에 대한 종사자들 눈높이 돋우기’가 목적이라고 했다. 한가한 여행이 아니고 답사 일정이 매우 가팔라

그 자체가 격렬한 육체 노동 또는 몸풀기 운동이기도 했다.

문화에 대한 눈높이 돋우는 역할을 주로 맡은 이는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한국 미술사가(美術史家)

유홍준 영남대 교수였다.

서양 미술사에 대한 그의 안목도 한국 미술사에 못지 않게 넓고도 깊어 보였다.

유홍준교수는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통해 독자들 눈을 열어줌으로써 ‘아는 것만큼 더 보이게’ 만들고, 본 만큼

더 알게 만든 주인공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

그는 관심과 사랑으로써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문화 유산 답사기라는 것을 처음으로 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처럼 친절하고 자상한 문화 유산 답사기 저자를 우리가 보유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

우리가 그를 통하여 말 없는 문화 유산 앞에서 매우 수다스러워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서 나는 그의 출현을 문화

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출현으로 우리는 말없는 문화 유산을 느끼는데 그치지 않고 설명까지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그와, 서양 미술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그리스 미술의 원적(原籍)이라고 할 수 있는 이집트

답사를 동행하면서 나는 그의 방대한 ‘인류 문화 유산 답사기’를 한편으로는 희망하고 한편으로는 예감했다.

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했는데 그것은, 그리스와 이집트를 답사하고 다니던 그 때가 바로 내가

우리 신화로의 귀향을 위해 바로 이 원고를 준비하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신화에 대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는 그의 명제를 원용

하자는 착상을 떠올렸다.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를 가능케 한 그의 방법을 빌려, 나는 ‘말 그 자체’인 우리 신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환기시키고자 했다. 무관심은 증오보다도 유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신화는 극심한 애정 결핍증을 앓아온 것은 혹시 아니었던가 하고 물어본다.

무속(巫俗)의 현장은 ‘본(本) 풀이’로부터 시작된다.

본 풀이는 제물을 흠향할 대상신(對象神)의 내력과 일대기를 말로 풀어내는 일이다.

우리 삶의 현장도 우리의 근본을 푸는 ‘본 풀이’로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우리의 본은 우리의 바탕자리다.

‘본 풀이’ 할 때의 ‘본’은 관향(貫鄕)을 뜻하는 ‘본관(本貫)’의 ‘본’보다 까마득히 높은 데 존재한다.

우리의 근본을 푸는 ‘본 풀이’, 이것이 곧 우리 신화다.

나는 우리 신화, 우리 본이 의례로 풀리는 ‘본 풀이’의 은밀한 현장을 알고 있다.

신화는 원래 의례와 동행한다. 지난 해 10월에는 충청도 옥천의 한 절이 그 의례의 현장이 되었다.

해마다 10월에 베풀어지는 단군제는 월남에서 사귄 내 친구 지승(智勝) 스님이 근 20년 전에 시작한 제사다.

단군 성조(檀君聖祖)의 자손된 몸이 마땅히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지승 스님이 단군제를 시작한 것이다.

이날이 되면 지승 스님은 손수 지방(紙榜)을 ‘국조단군왕검신위(國祖檀君王儉神位)’로 써붙이고 제사를 모신다. 

‘만남의 의례’라고 이름지어진 대목에 이르면 스님 자신이 환웅(桓雄) ‘할배’가 되어 곰과 호랑이를 상징하는 한

여성에게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개씩 나누어주는 의례를 재현한다.

‘국조단군왕검신위’ 앞에 절할 사람은 해도 좋고, 절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하지 않아도 좋다.

단군제 통문(通文)이 돌면 나는 행복해진다. 시월 상달의, 날 좋고 달 좋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날을 맞으면,

호젓한 산중에 여남은 명 친구들이 모여 본 풀이로 밤을 지샌다.

우리는 이날이 되면 ‘지금 여기’와 ‘아득한 그 때’ 사이에 가로놓인 긴긴 시간이 소거(消去)되는 아뜩한 느낌을 체감

하면서 하루쯤 사회에 대한 모든 권리와 의무에서 해방되어 산대나무처럼 홀가분하게 바람에 한번쫌 솰솰 나부

끼는 호사의 자유를 덤으로 누린다.


이 자유에 절도(節度) 있는 범위 안에서 누려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절도는 흐트러져 본 적이

없는 만큼 교단(敎團)이 이를 시비하는 일은 아주 없었으면 한다.

나는 단군 숭모(崇慕) 단체의 단군제보다 한 스님이 차리는 단군제를, 단군 신화에 바쳐지는 조촐한 관심과

사랑을 더 좋아한다.

나는 절에서도 절을 하지 않고 교회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하지만 단군제에 가면 사배(四拜)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단군이 실존인물로 증명된 분이냐고 묻는다. 그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면 제사는 무엇

이고 절은 또 무엇이냐고 묻기도 한다. 단군은 실존 인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에, ‘제왕운기’에 실재한다.

아테네 여신은 실존하던 여신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신에게 바쳐진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에 실재한다.

나는 이러한 실재를 ‘신화적 실재’라고 부른다.

나는 그 신화적 실재에, 지승 스님이 단군 신화에 기울이는 관심과 사랑에 절하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견주어도 그렇고, 힌두 신화나 유럽의 신화에 견주어도 그렇다.

우리 신화는 그 수가 많지 않고 체계화되어 있지도 않아서 빈약하고 어수선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신화가 우리 문헌에 기록되는 시기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유교가 우리 삶에 깊숙이 침윤하고 있던 시절인데,

불행히도 이 때는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인 신화가 거의 소독(消毒)당하다시피 하던 시절이었다.

유교 경전의 하나인 ‘논어’의 ‘술이(述而)’ 편은 공자님이 ‘괴이한 것과 힘센 것과 변란과 귀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子不語怪力亂神)’고 전하고 있다.

‘옹야(雍也)’ 편도, 앎이 무엇이냐는 제자 번지(樊遲)의 물음에 공자님이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안다고 할

수 있겠다(敬鬼神而遠之)’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 신화가 끼여들 자리가 없다.

경북 군위군 인각사엔 일연 스님 부도 비문이 남아있다.

그 비문에는 일연스님이 쓴 100여권의 저서 이름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삼국유사’가 빠져

있다. 비문을 지은 민지(閔漬)가 당대 유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삼국사기’를 의식했거나 스님의 기록을 공자님 뜻을 거스른 희작(戱作)으로 여겨 고의로 넣지 않았을 가능

성이 있다.

민지보다 세 세대 이전 학자에 속하는 이규보는 ‘동명왕편’ 서문에다 당시의 분위기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기도

하다.

“세상에 동명왕에 대한 황당한 이야기가 떠돈다… 내 일찍이 이를 듣고 웃으며, 공자님도 괴력난신을 말씀하시지

않았는데다, 동명왕 얘기는 하도 황당하여 나같은 유생은 감히 입에 올릴 바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 신화는 그러나 소독당하지 않았다. 우리 신화는 문헌에 남아 있고, 구비전설에 살아 남아 있고 무가(巫歌)에

살아 남아 있다. 살아 남은 것에는 살아 남은 이유가 있다.

이제부터 우리 ‘본 풀이’의 내역과, 신화가 살아 남은 까닭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본 풀이다. 분풀이가 아니다.

 

 

 

 

3. 신기하고 이상한 이야기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괴력난신’, 이 네 마디는 스님의 뇌리에서조차 떠나지 못한다.

‘머릿말로서 쓴다. 무릇 성인은 예절과 음악으로서 나라를 일으키고, 어짊과 의로움으로써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래서 괴력난신, 즉 괴이한 것과, 용력(勇力)한 것과, 패란(悖亂)한 것과 귀신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帝王)이 마침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부명(符命), 곧 하늘의 명을 얻게 되고, 도록(圖錄),

곧 미래의 길흉화복이 기록된 예언서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여느 사람과 다른 데가 반드시 있는 법이다. 

그런 조건이 갖추어진 다음, 변화의 고비를 능히 타고 큰 자리를 잡음으로써 우두머리가 되는 법이다.

그래서 하수(河水)에서는 하도(河圖), 즉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진 그림이 나왔고, 낙수(洛水)에서는 낙서(洛書),

즉 신이한 거북의 등에 씌어진 글이 나옴으로써 성인이 일어났던 것이다. 

(보라) 무지개가 신모(神母)의 몸을 두르니, 성덕이 일월(日月) 같이 크게 빛나는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가 나고,

용(龍)이 여등(女登)과 교접하니,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가 나며, 황아(皇娥)가 궁상(窮桑)이라는 벌판에서

백제(白帝)의 아들을 자칭하는 신동(神童)과 사귄 연후에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가 난다. 
(어디 그 뿐인가?) 간적(簡狄)은 알 하나를 삼켜 상(商)나라 시조 설(契)을 낳고 강원(姜嫄)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주(周)나라 시조 후직(后稷)을 낳으며, 성천자(聖天子) 요(堯)는 그 어머니에게 잉태된 지 열 넉달 만에야

태어나고,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그 어머니가 큰 못에서 용과 교접한 뒤에 태어난다. 

이렇듯이 신기하고 이상한 일은 얼마든지 있지만 여기에다 모두 쓸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고구려, 신라, 백제 시조들의 탄생이 신기하고 이상하다고 한들 괴이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책 첫머리를 ‘기이(紀異)’, 즉 ‘신기하고 이상한 이야기’로 삼은 뜻은 실로 여기에 있다.”

이렇듯이 ‘신기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소외시키고 배척했던 시대의 일연 스님은 신기하고 이상한

분이 아니었던가? ‘삼국유사’번역본 해제에서 번역자인 국문학자 김영석 교수(배재대)가 쓰고 있는, 일연 스님이

잉태되는 과정을 보라. 어쩌겠는가? 스님 역시 ‘신기하고 이상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햇빛이 방 안에 들어와 어머니 이씨의 배를 비추기 시작한 지 거의 사흘 만에 일연

스님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고조선 단군 왕검’ 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중국 북제(北齊)의 역사책 ‘위서(魏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檀君王儉)이 있었다. 그 분은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했는데 아사달은, 경(經)에

따르면, 무엽산(無葉山), 혹은 백악(白岳)이라고도 한다.

백주(白州)에 있었다고도 하고 개성 동쪽에 있었다고도 하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

단군 왕검은 여기에 도읍을 정해 나라를 세우고는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했다. 중국의 요(堯)와 같은

시기다.”

단군의 사적을 기록한 ‘단군고기(檀君古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옛날 하늘님(桓因) 아들 중에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있어 하늘 아래를 차지할 뜻이 있어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아버지가 아들 뜻을 알아차리고 몸소 삼위태백산(三危太伯山)을 굽어다 보니 아닌게 아니라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해줄(弘益人間) 만도 했다. 

하늘님은 아들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내려가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伯山), 곧 지금의 묘향산 마루의 신단수(神檀樹)아래로 내렸다.

이곳이 신시(神市)이고, 이 분을 환웅 천왕이라고 한다.

이 이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형벌, 선악을 비롯, 360여 가지 인간사를

주관하면서 백성들을 가르쳤다.”

이 때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의 범이 굴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은 늘 신웅(神雄)에게 빌어 사람으로 화(化)하기를

원했다. 이 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개를 내리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날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곰과 범이 이것을 먹으면서 삼칠일, 곧 스무 하루를 삼갔는데,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범은 능히 삼가지 못해서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해서 함께 살 사람이 없어 날마다 신단수 아래서 아기 밸 수 있기를

빌었다.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웅녀와 짝을 이루니 곧 아기를 배었다가 아들을 낳았다. 이분이 바로 단군 왕검이다.

단군 왕검은 당요(唐堯)가 즉위한지 50년 만인 경인년(庚寅年) 지금의 서경(西京)인 평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비로소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불렀다… 단군 왕검은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호왕(虎王)이 을묘년(乙卯年)에 즉위하면서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구월산(九月山)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돌아와 아사달로 은거, 산신(山神)이 되어, 1908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환인이 누구인가? 인도의 베다 경(經)과 법화경(法華經)에 등장하는 군신(軍神) 인드라, 즉 사크라데바남 인드라

(釋迦堤桓因陀羅)의 한자 이름이다.

불교에서는 제석천(帝釋天)으로 불린다. 동방의 수호신인 인드라는 빛의 신이기도 하다.

이 신이 은거하는 ‘메루 산’은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세계의 중심’이다. 
몽고인, 부리야트 인, 타타르 인이 인지하는 세계의 중심은 각각 ‘숨부르 산’, ‘수무르 산’, 그리고 ‘수메르 산’이다.

중국인들은 ‘수미산(須彌山)’이라고 부른다. 모두 ‘메루 산’에서 온 말이다.

‘유사’의 이 첫머리를 두고 ‘중이 지어낸 황당무계한 불교 신화’라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냥,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우리 민족에게 이 산은 백두산이다. 

뒷날 ‘환웅 천왕’이 되는 환웅은 그 환인의 서자(庶子)라고 한다. ‘첩에게서 난 아들’이라고들 하는데 아무래도

북한에서 나온 번역본의 ‘지차 아들’이라는 해석이 좋을 듯하다.

맏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 한다. 하계(下界)로 떠나보내었으니 맏이가 아니었다는 뜻일 듯하다.

맏이는 신화에 잘 가담하지 않는다. 

맏이는 아버지의 세계를 이어받을 뿐 새로운 세계를 짓지는 않는다. 신화는, 중심에서 이탈한 자가 자신의 주변성

(周邊性)을 소통의 중심을 변화시키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이제 이 ‘지차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고는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伯山)의 신단수

(神檀樹) 아래로 내려, 바람 맡은 어른(風伯), 비 맡은 어른(雨師), 구름 맡은 어른(雲師), 이 세 분과 함께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이 다섯 가지 일을 비롯, 360여 가지 인간사를 주관하면서 백성들을 가르쳤다.

원형적 신화와 사회적 신화.

신화에는 원형적 신화와 사회적 신화가 있다. 원형적 신화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우리의 근본을 떠오르게 하는

신화다. 이런 신화를 읽으면 우리 안에서 신화가 잠을 깬다.

이런 신화를 읽으면 ‘언제 어디에서 들은 듯한 이야기’, ‘어쩌면 나도 써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이야기’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회적 신화는 사람이 필요에 따라 지어내는 신화다. 국가나 국가의 우두머리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혹은

모듬살이의 물줄기를 특정한 곳으로 틀기 위해 지어진 신화다. 사회적 신화에는, 원형적 신화의 틀을 갖추지 못할

경우 세월이 지나면 훼멸되는 경향이 있다.

환웅이 내린 ‘신단수’가 뜻하는 것, 곰과 범이 동굴 속에서 견디다 마침내 곰이 승리하는 이야기를 풀자면 아무래도

우리의 원형적 심상을 찾아나서야 할 것 같다.


주) 중국의 창세 신화에 등장하는 우주적(최초의)인간 반고는 나뭇잎에 싸여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그가 곧 자연, 혹은 자연 속에 자재하는 인간임을 나타낸다.
근대에 그려진 단군(삼성출판 박물관)도 목과 허리에 나뭇잎이 돋아나 있다. 우주적 인간의 표상이다.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모셔져 있는 단군상도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4. 거룩한 나무, 거룩한 짐승

말레이시아 아기의 돌잔치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의 한 인류학 교수 연구실에서 흥미로운 슬라이드 몇 장을 차례로 본 적이 있다.

그 미국인 인류학 교수가 말레이시아 현장 조사 중에 만난 현지인과 결혼하고 아들을 낳은 것은 그 전 해의 일인데,

문제의 슬라이드는 처가에서 있었던 아들의 돌잔치 사진이었다.

방 바닥에 ‘∧’꼴 겹사다리 하나가 놓여 있다. 높이는 그날 잔치의 주인공인 돌바기의 키와 비슷하다.

겹사다리 양쪽에는 각각 일곱 개 씩의 가로장이 있다.

겹사다리 왼 쪽에는 세숫대야와 비슷한 그릇이 하나 놓여 있다. 그릇에는 물이 가득 담겨 있다. 
아기가 외조부로 보이는 말레이시아 노인의 부축을 받으며 사다리 앞에 서는 순간… 찰칵. 노인이, 걸음마 마악

시작한 아기를 부액(扶腋), 사다리의 맨 아래 가로장에다 발을 대게 한 뒤 하나씩 오르게 하는 순간… 찰칵.

맨 위 가로장에 이르면 같은 순서로 일곱 개의 가로장을 하나씩 내려가게 하는데, 아기가 내려서는 순간… 찰칵.

사다리에서 내려 서면 이번에는 아기의 발을 물그릇에 담그게 하고는 아기로 하여금 그 물을 건너게 한다.

아기가 그 물을 거의 다 건너는 순간… 찰칵. 그 인류학 교수에게 물었다.

“…시베리아의 무당이 자작나무를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의례가 있어요.

자작나무 둥치에는 일곱 개의 ‘노치(칼자국)’가 나 있지요.

그러니까 이 자작나무(白樺)는 칠천(七天), 즉 일곱 겹 하늘을 상징하는 것인데, 무당은 이 나무에 올라갔다가

내려옴으로써 하늘님의 강탄 및 사람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체험한답니다.

사진의 겹사다리는 시베리아 무당의 자작나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사다리의 일곱 가로장 역시

일곱 개의 ‘노치’일 것이고요. 의견을 듣고 싶네요.”

인류학 교수가 활짝 갠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시베리아 무당 자작나무 타기의 말레이시아 ‘버전(版)’입니다.

죽음과 부활의 상징적 의례(儀禮)를 재현한 것이지요. 장인은 의례를 통해 내 아들에게 죽음을 미리 죽어두게

한 것이지요.”

나는 북방계(北方界) 의례의 잔재가 말레이시아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우리의 신화는 세계의 보편적인 신화, 특히 시베리아에 흩어져 사는 여러 민족의 신화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북유럽 신화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에 ‘익드라실’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

이것이 바로 ‘우주수(宇宙樹)’, 혹은 세계수(世界樹)다.

만주족은 천신에게 제사 지낼 때가 되면 ’투루’라고 불리는 기둥을 세우고 개 모양의 상(像)을 얹는데,

개는 만주족의 조상 짐승이다.

‘투루’는 ‘하늘나무’, ‘하늘기둥’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인에게 우주의 중심, 세계의 중심은 ‘히모로기(神籬)’, 즉 신이 머무는 산 혹은 나무 둘레에다 치는 울타리다.

뒤에 이 ‘히모로기’는 ‘신사(神社)’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타타르 족에게 세계의 중심은 철산(鐵山) 한가운데 서 있는, 일곱 가지 하얀 색으로 빛나는 자작나무다.

자작나무를 뜻하는 한자말 ‘백화(白樺)’는 ‘흰벚나무’라는 뜻이다.

빛의 신 인드라(桓因)의 아들 환웅이 우리 땅에 내린다. 어디로 어떻게 내리는가? 빛의 신의 아드님이시니까 아주

환하게 내릴 것 같다.

태백산(太伯山) 위로 내리는데 이 산은 곧 ‘태백산(太白山)’, ‘한량없이 밝은 산’이다.

그가 타고 내린 나무는 신단수(神壇樹), 즉 신령스러운 박달나무다. 빛의 아들 환웅이, 한량없이 밝은 산에 우뚝

서 있는 박달나무를 타고 그 아래로 내린다.

박달나무는,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白樺) 과에 속한다.

‘박달’은 ‘딙다(밝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따르면 신단수 아래로 내리는 순간 환웅은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된다.

이승휴는 단웅천왕을 ‘단수신(檀樹神)’이라고도 부름으로써 박달나무의 신성(神性)을 한층 더 강화하여 환웅천왕과

나무를 거의 동격에 이르게 한다. 이로써 곧게 선 박달나무는 우리의 우주수, 우리의 세계수가 된다.

단수신이 내린 곳이 ‘신시(神市)’가 되고 신령스러운 박달나무가 선 곳은, 이제 한량없이 흰 산, 그 위에 차려진

신시의 한복판이 된다. 

높은 산 위에 높이 솟은 나무의 우듬지는 우주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만나는 접점이다. 

곧게 선 ‘밝은’ 나무는, 빛의 신이자 천신인 환웅이 타고 내려오기에 얼마나 적절한 사다리인가?

그가 이로써 땅의 두 주인 중 하나인 식물과 화해하는 순간 나무는 우리의 조상 나무(祖上樹)가 된다.

퉁구스―만주 족에 속하는 나나이 족에게는 세 그루의 조상 나무가 있다.

누구나 짐작할 테지만 천상에 한 그루, 지상에 한 그루, 지하에 한 그루가 있다. 그들에게 사람의 삶과 죽음이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가기다. 

천상의 나무는 ‘영혼의 나무’, 바로 영혼이 새의 모습으로 은신하고 있는 나무들이다.

그들에게 생명이 잉태되는 일은 이 나무에 깃들여 있는 영혼이 어머니 탯줄로 옮겨오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한 살이를 마치면 인간의 영혼은 지하의 나무로 옮겨간다.

나나이 무당은 병든 자를 치료할 때, 죽은 사람의 영혼을 천도할 때 조상 짐승의 보호령(保護靈)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노 하르바의 ‘샤먼의 의상과 그 의상의 의미’에 따르면 나나이 족 무당은 조상 짐승인 곰을 보호령으로 삼아

지하의 나무가 있는 명계를 향해 상징적으로 여행한다.

시베리아에 흩어져 있는 여러 민족 및 몽골족의 경우 조상 나무와 조상 짐승은 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몽골족의 경우 조상 짐승은 개다. 거룩한 기둥 ‘투루’ 위에 개의 상(像)이 놓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로마의 시조(始祖)인 레무스와 로물루스가 늑대 젖을 먹고 자랐듯이 몽골족 시조는 개의 젖을 먹고 자라났기

때문이다.

야쿠트 족, 에벤키 족의 조상 나무와 짝이 되는 짐승은 곰이다.

특히 에벤키 족의 시조는 반웅반인(半熊半人)인 ‘망기(宇宙熊)’다.

나나이 족의 경우, 조상 나무와 짝이 되는 동물은 유제류(有蹄類), 즉 각질(角質) 발톱을 가진, 몸은 크고 송곳니가

없는 초식 동물이다.

‘삼국유사’를 다시 읽어 본다.

‘곰과 범이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삼칠일, 곧 스무 하루를 삼갔는데,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범은 능히 삼가지 못해서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혼인해서 함께 살 사람이 없어 날마다 신단수 아래서 아기 밸 수 있기를 빌었다.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웅녀와 짝을 이루니 곧 아기를 배었다가 아들을 낳았다. 이분이 바로 단군(檀君) 왕검(王儉)이다.’

환웅은 이로써 동물과도 화해한 셈인가?

폭설이 내린 직후 강화도 마리산(摩利山)에 올랐다. ‘마니산(摩尼山)’은 일본인들이 개명한 이름이라서 ‘머리, 으뜸, 최고’를 뜻하는 ‘마리산’으로 이름을 되돌린 산이다. 꼭대기에,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낸 것으로 알려진 참성단(塹城壇)이 있다. 금방이라도 사람을 날려 버릴 듯한 강풍을 맞으면서 깎아지른 듯한 사면의, 흡사 하늘로 통하기라도 할 듯이,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자연석으로 쌓은 수더분한 제단이 있었다. 오르내릴 동안 내 머리를 내내 떠나지 않던 질문 하나.

‘왜 범이 아니고 곰인가?’

 

 

 

 

 

 

5. 범이 아니고 곰이었던 까닭

 

옛날 한 ‘어진’ 선비가 먼 길을 가다가 비도 오고, 해도 앞세우고 하다가 당시에는 ‘원(院)’이라고 불리던 여관에

들었다. 원에서, 빗물 잦아드는 마당을 내려다보던 선비는 오리가 마당에 떨어져 있던, 반짝거리는 물건을 쪼아

데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날 밤에 원주(院主)는 집안의 값비싼 보석이 없어졌다면서 그 선비를 도둑으로 몰아 관가에 넘기려고 했다.

그러자 선비가 원주에게 애원했다.

“아침까지만 기다려 주시오. 내가 도망칠까봐 그러시는 모양인데, 정 염려스러우면 기둥에 묶어 두셔도 좋습니다.

부디 아침까지만 참고 기다려 주시지요. 그러면 내가 보석을 찾아드리리다.”

원주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 싶었던지 선비를 기둥에다 묶어 두었다. 아침이 되자 선비는 원주에게 말했다.
“오리가 변(便)을 보았을 것인즉 변을 잘 헤쳐 보시오. 그러면 변 속에 보석이 있을 것이오.”

원주는 선비가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원주가 도둑맞았다던 보석이 과연 오리의 변 속에 있었다.

원주는 미안해 하면서 선비에게 물었다.
“진작 오리가 쪼아먹더라고 하셨으면 되지 않습니까? 점잖으신 분이 기둥에 묶이는 창피한 경우까지 당하시면서도

어째서 오리가 쪼아먹더라고 진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선비가 대답했다.
“그대가 만일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면 어젯밤에 그대 손으로 오리의 배를 갈랐을 것이 아니오?

오리가 그게 보석인 줄 알고 삼켰을 것이오? 큰 죄 지은 일 없는 오리를 살리자니 그 길밖에 없었소이다.”

내 어릴 적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야기다.

무명의 선비가 벼슬길로 들어서니 이분이 바로 세종대왕때 병조판서를 지낸 명신(名臣) 윤회(尹淮)다.

옛날 일본에 한 떠돌이 무사가 있었다. 떠돌이 무사란 마땅히 섬길 만한 주인을 찾아 온나라를 떠도는 나그네 무사를

말한다. 이 무사에게는 외아들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참이어서 떠돌이 무사는 이 외아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떠돌이 무사가 아들과 함께 어느 마을에 묵었을 때의 일이다.

그 마을의 떡장수 하나가 이 사무라이를 찾아와서 따졌다.
“아들이 떡을 훔쳐먹었으니 마땅히 아비가 떡값을 물어야 한다.”

사무라이는, 자식이 비록 헐벗고 굶주리는 처지이기는 하나 명색이 무사의 자식인 만큼 그런 짓을 했을 리 없다고

맞섰다.

그러나 떡장수는 무사의 주장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자 사무라이는 긴 칼로 외아들의 배를 갈라 보였다. 

밥통에는 떡을 먹은 흔적이 없었다. 아들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것은 물론이다.

아들의 결백을 증명한 무사는 아들을 무고(誣告)한 떡장수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무사는 덤으로 자기 배까지 가르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어째서 범이 아니고 곰이었던가?

‘사(士)’ 자를 우리는 ‘선비’로 읽는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사(士)’는 ‘사무라이(侍)’이기도 하다.

‘순후한 선비’와 ‘강고한 무사’를 각각 한국과 일본 옛 이야기의 인기 있는 주인공을 대표한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식의 단순 비교는 특수한 사례를 보편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우리가 이 사무라이들 때문에 매우 피곤한 역사를 경험했다고 해서 한국인은 다 순후한 선비이고 일본인은 모두

강경한 사무라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윤회가 강고한 사무라이 같았다면 그 이야기가 우리 도덕 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을 것인가.

일본은 도덕 교과서에 윤회같은 순후한 선비 이야기를 실을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인들에게는 전국시대를 주름잡던 세 인물이 인기가 있다.

울지 않는 새를 두고 “죽여버려야 한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울게 만들어야 한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이들인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은 “죽여버려야 한다”는 노부나가, 가장 인기가 떨어지는 인물은 “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이에야스다(이준호 ‘후지산과 대장성’).

빛의 신 인드라(桓因)의 아들 환웅은, 인간 되기를 소원하는 범과 곰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개를

내리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날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熊女) 범은 능히 삼가지 못해서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환웅이 잠시 거짓 변하여 웅녀와 짝을 이루니 곧 아기를 배었다가 아들을 낳으니 이분이 바로 우리의 국조(國祖)

단군 왕검이다.

어째서 범이 아니고 곰이었던가? 어째서 죽임의 명수인 호랑이가 아니고 기다림의 명수인 곰이었는가?

호랑이의 별칭은 암수 가림이 없이 산신령(山神靈) 혹은 산신(山神)이다.

백두산 인근에서는 암수 가림이 없이 ‘노야(老爺)’ ‘대부(大父)’라고 불린다. 모두 남성 명사다. 남성 원리다.

곰은 어떤가? 곰은 빛이 미치지 못하는 동굴에 사는, 말하자면 혈거 동물이다.

곰은 동굴에서 동면한다. 봄이 되면 새로 태어난 새끼를 데리고 동굴을 나서는 곰은 그래서 암수 가림이 없이

‘부활’과 ‘신생’의 표상, 풍요의 바탕이 되는 ‘여성 원리’다.

곰이 시베리아에 흩어져 있는 여러 민족(가령 야쿠트 족, 에벤키 족)의 조상 짐승인 것은 이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냥의 여신,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축제에는 아르테미스의 신녀(神女)를 상징하는

수많은 처녀들이 참가했는데, 이들은 축제 당일에는 서로를 ‘곰’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이들은 곰 차림을 하고 곰의 모습을 시늉하기도 했다.

그리스에서는 아르테미스의 모습이 아름답고 날렵한 처녀로 그려지거나 새겨진다. 

하지만 터키에서는 가슴에 젖(혹은 알)이 무수하게 달린 풍요의 여신으로 그려지거나 새겨진다.

터키 주민의 대부분은 중앙 아시아에서 건너간 투르크 족이다. 그들이 쓰는 말은 우리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알타이

어계(語系)에 속한다. 그들과 우리는 유사한 상징 체계를 광범위하게 공유한다.

남성 원리인 호랑이는 동굴의 어둠 속에서 매운 마늘과 쓴 쑥을 견디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갔다.

호랑이는 ‘바깥’이 그리워 ‘안’과의 싸움을 계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성 원리인 곰은 그 어둠을 ‘기다림’으로써, ‘안’과 싸우면서 삼칠일, 즉 스무하루를 견디고는 사람의 몸을

얻었다. 

그 스무 하루는 환웅이 약속한 ‘백일’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백일 견디기’는 ‘100일 견디기’가 아니라 ‘온날 견디기’일 것이다.

우리는 아기가 태어나면 삼칠일, 즉 스무하루를 기다리면서 견딘 다음에야 친지들에게 얼굴을 보인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인 마음의 원형이다.

사회적 신화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고 필요가 다하면 탈락하지만, 원형적 신화는 사람의 마음 바닥에 오래

머문다.

강력한 남성 이미지, 혹은 강고한 무사를 떠올리게 하는 호랑이 신화가 탈락하고 웅숭깊은 여성 원리, 혹은 순후한

선비를 떠올리게 하는 곰의 신화가 ‘삼국유사’에서, 우리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회원로그인

최신 댓글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280
어제
500
최대
4,666
전체
1,069,631


Copyright © 한퓨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