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자료] 이병도 사상 연구
yibyungdo.hwp
102.8K 148 6년전
이병도 사상 연구 Ⅰ. 머리말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사학의 기반을 수립"한 학자로 알려진 斗溪 李丙燾博士(1896-1989)는 한국사연구에 있어서 그 긴 생애만큼이나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동시에 후진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두계사학의 시대적인 한계인 동시에 방법론적인 내용도 적지 않은 때문이었다.
본고에서는 斗溪史學이 가지는 사학사적 위치에 주목하여 두계사학이 성립해 온 추이와 한국사 연구의 특징, 그리고 그 한계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시대적 배경과 사조가 중요한 작용을 했을 것이나, 두계가 사학계를 주도했던 사실에 비추어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 두계의 개인적 특징과 그 한계에 촛점을 두도록 하겠다.
따라서 Ⅱ장 斗溪 李丙燾의 生涯와 活動에서는 斗溪가 韓國史硏究를 결심하는 과정과 두계가 공부했던 당시 일본의 학적 풍토, 斗溪의 학문연구 활동이 이루어졌던 震檀學會가 설립된 배경과 성격, 그리고 해방 후 두계의 활동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Ⅲ장에서는 흔히 '實證主義史學'이라고 일컬어지는 斗溪史學을 斗溪의 歷史觀과 現實認識을 통해 알아보고, 著書를 통해 나타난 두계의 韓國史硏究 내용을 알아보겠다. 그리고 Ⅳ장에서는 斗溪史學을 대표하는 韓國古代史의 硏究에 있어서 그 方法論的 特徵과 辰國·三韓에 대한 연구를 검토하려 한다. 斗溪 李丙燾의 한국사연구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사의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한 개인의 업적으로서의 문제가 아니라 사학사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斗溪史學에 대한 고찰은 한국사 및 그 연구사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Ⅱ. 斗溪 李丙燾의 生涯와 活動
1. 斗溪의 韓國史硏究 入門
조선시대 西人과 老論의 대표적 가문의 하나인 牛峰 李氏의 후예인 斗溪의 학문 편력은 집에서 訓長을 초빙하여 수학한 漢學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런데 영어를 잘하는 부인 趙南淑과 신식 공부를 하던 처남을 보고 자극을 받아 1911년에는 普成專門學校 法律科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법학에는 흥미를 갖지 못하고 國際公法에서 찾아볼 수 있는 史的 事例에 관심을 두면서 역사를 전공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두계는 1914년 일본 早稻田大學에 유학하여 동양사·서양사·일본사·사회학 등이 합쳐진 성격의 '史學及社會學科'에 입학하였고, 煙山專太郞 교수 밑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려 하였다. 그런데 吉田東伍 교수가 쓴 {日韓古史斷}을 읽고 그의 수업을 1년 동안 들으면서 "일본사람이 우리 역사를 이렇게 많이 아는데 한국인이 자기 역사를 몰라서야 되겠는가"하는 생각에 한국사를 전공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특히 강사 津田左右吉 밑에서 한국사연구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는 "經濟的, 政治的 모든 면으로 日人과 대항이 안 될 때였지만 진리 앞에는 萬人이 고개를 숙이게 마련인즉 日人인들 별 수 있으랴 싶어 學問的 抗爭"을 시도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日本 史學界는 한국사 연구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연구를 위한 三韓 및 三國의 연구에 치중하였고 그 연구방법으로 문헌고증과 언어연구를 도입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 사학계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白鳥庫吉은 언어를 민족의 성격·특색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 언어의 연구를 통해서 민족의 기원·형성이나 민족의 교류의 역사를 검토하려 하였다. 또한 白鳥는 기성의 전통적인 역사상에 대해 철저한 비판자였다. 그러나 그는 전통에 대한 부정과 파괴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러한 파괴 뒤에 남은 것은 실망·경멸의 念 뿐이었고 이러한 경향은 다른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한편 白鳥庫吉은 1908년 설립된 南滿洲鐵道株式會社의 滿鮮歷史地理調査室과 제휴하여 箭內昁, 松井等, 稻葉岩吉, 池內宏, 津田左右吉 등의 인재를 양성하고, 지명고증·연대기에 의한 전쟁사·정치사 연구를 성격으로 하는 역사연구를 주도하였다. 문헌비판이나 사실고증에 엄밀했던 이들은 사회적·경제적 측면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사를 한국민족의 주체적 발전으로 보지를 않고 대륙사의 한 局部로, 특히 滿洲와의 밀접·불가분의 관련을 중시해서 한국사를 생각한다는 의식의 '滿鮮史'가 성립되었다. 滿鐵 調査室은 한국사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대륙사 속에 해소시키는 경향의 만선사로 가는 교량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하여 일제는 韓國古代史에 역점을 두게 한다는 의미에서, 한국사를 그 후의 한민족 발전의 역사나 일제하의 민족운동과의 관련을 무시하도록 유도, 지리 연구에 치중하게 함으로써 인간사회, 민족의 존재를 망각하게 하였다.
斗溪는 유학 시절 早稻田大學의 스승인 津田左右吉과 그의 소개로 알게 된 東京大學의 池內宏에게 직접, 간접으로 지도를 받았다.
특히 두계의 스승인 津田左右吉은 白鳥庫吉의 제자로서, 확실한 原典을 근거로 해서 그것을 철저하게 비판, 합리적 사유에 기초하여 재구성한다는 방식의 사료비판·고전비판을 주로 하였다. 또한 그의 韓國古代史 硏究는 日本古代史와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역사, 일본인의 사상의 특수성을 알기 위해서였고, 외국의 역사연구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법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또한 池內宏은 旗田巍의 회고에 의하면, 專門的인 個別硏究를 위주로 하였으며 주된 연구대상은 韓國·滿洲에 있어서의 여러 민족의 盛衰·興亡이나 戰爭의 역사였다. 그 방법으로는 정확한 연대와 장소의 추구, 사료비판에 기초를 둔 역사의 재구성이었고, 풍부한 史料가 있는 것보다도 사료가 적은 것에 論理的 類推에 장기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민족에 대한 인식 부족하였고, 제도사에 치우쳐 인간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斗溪는 歷史學의 文獻考證學的 方法論 뿐 아니라 言語學과 地理學 및 文獻考證學의 기초를 수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계는 1919년 귀국하여 早稻田大學의 1년 선배인 崔斗善이 교장으로 있던 中央學校에서 7년간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이때 詩人인 金億의 요청으로 新進文人 南宮璧, 廉想涉, 吳相淳, 黃錫禹 등과 함께 同人誌 {廢墟} 창간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1925년에는 池內宏의 권유와 추천으로 朝鮮史編修會의 囑託職을 맡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사연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당시 日帝의 植民政策은 단순한 禁壓에서 머물지 않고 그들의 착상에 따라 한국사를 再構成하려는 데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 한창 주창되던 '日鮮同祖論'이나 강압만으로는 韓民族의 복종을 기대하기 어려움을 알게 되었고, 한국인들이 민족주의 역사가인 朴殷植의 {韓國痛史}(1915) 등의 역사서를 통해서 민족 의식 및 독립운동,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있는 상황에 비추어 새로운 한국사 정책이 절실히 요청되어졌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1922년 12월 4일 訓令 제 64호로써, 조선총독부 政務總監을 위원장으로 하는 '朝鮮史編修會規程'을 공포하였다. 이와함께 총독부는 이 위원회에 관련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朝鮮史學會'를 조직하고, 이들 주도하에 朝鮮史 講習會를 개최하고, {朝鮮史講座}(1923-24)를 간행하였다. 1925년에는 稻葉岩吉이 주도하던 '조선사편찬위원회' 대신 '朝鮮史編修會'를 설치하고, 1932년부터 {朝鮮史}(37권)을 비롯한 {朝鮮史料集眞}(3책), {朝鮮史料叢刊}(21종)을 간행하였다.
그런데 이 朝鮮史編修會에서 발간한 {朝鮮史}는 단순한 通史가 아니고 하나의 史料集이었다. 이는 외관상으로 모든 사료를 망라하여 서술한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취사선택이 행하여져 日帝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은 많이 채록하고 한국사의 본질적인 문제나 민족문제 그리고 그들에게 불리한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한국사를 서술한다면 그것은 한국사의 주체성을 살리는 역사가 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두계는 이 朝鮮史編修會에서 韓國歷史調査硏究에 종사하던 今西龍, 稻葉岩吉, 編修會 顧問으로 있던 黑板勝美 등과 활발히 접촉하여 자극되고 계몽된 바가 적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稻葉岩吉은 한국사 연구자 가운데 가장 강하게 명백하게 停滯論을 주장한 학자였다. 그는 {朝鮮文化史硏究}(1925)에서 한국에 封建制度가 없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한국사회의 進度는 일본보다 약 600년 낙후되어 있다고 했다. 또 [滿鮮不可分의 史的 考察], {支那社會史硏究}(1922)에서는 한국사의 독자성·자주성을 부인하고, 민족·영토·경제의 세 방면에서 보아 한국은 태고적부터 大陸 특히 滿洲와의 불가분의 관련 속에서 존재할 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에서 일어난 큰 역사적 사건은 모두 大陸 政局의 반영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저서마다 한국사는 중국의 コロに(콜로니)에서 시작되었다고 강조하는 등 植民主義史觀에 철저한 학자였다. 이와같은 성향의 학자와의 교류는 한국사연구에 있어 두계에게 그리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겠다.
그리고 두계는 이 시기에 학문적으로 津田左右吉, 池內宏 뿐 아니라 李能和, 崔南善, 安廓, 李重華, 文一平, 黃義敦 등의 국내 역사학자들과도 交遊하였다.
두계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기 전까지 韓國近世史 연구를 목적으로 하였고 이를 위하여 黨爭史를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으나, 곧 韓國儒學史가 우선적으로 연구해야할 과제임을 깨닫고, 退溪와 栗谷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儒學史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두계의 역사학술논문으로는 처음으로 1926년 {朝鮮史學}에 [李栗谷의 入山動機에 대하여]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20년 동안 奎章閣 도서를 참고할 수 있었던 기회에서 얻은 성과로 유학자들의 개별적인 연구를 계속해서 진행시켰고, 1959년에는 한문으로 된 한국유학사 개설서인 {資料韓國儒學史草稿}와 이를 한글로 풀고 설명한 {韓國儒學史}(1987)를 발간하였다.
한편, '政治的인 要求와 學問的인 好奇心으로 韓國과 滿洲에 걸친 歷史地理에 관한 調査事業에 奔忙하던' 일본인 학자들과, 池內宏이 {滿洲地理歷史硏究報告}를 꾸준히 보내주었던 것이 자극이 되어 두계는 韓國古代史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는 한국고대사 연구에 대해 虛無感과 동시에 義務感과 責任感, 그리고 일종의 自負心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古代史硏究에는 歷史地理가 基礎的이고, 先決條件인 것을 느끼게 되었고 또 그러기 위하여서는 在來 여러 學者들 사이에 聚訟이 紛紛한 三韓四郡의 問題를 먼저 解決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주제에 집중하였다. 한국고대사에 대한 연구성과는 후에 {韓國古代史硏究}(1976)로 정리, 발간되었다.
그런데 1927년 {東洋學報}에 [高麗三蘇考]를 발표한 두계는 이내 池內宏으로부터 地理圖讖思想을 연구해 볼 것을 종용받고 高麗時代를 중심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두계의 회고에 의하면 이는 자기 연구영역을 침범하기를 원하지 않던 일인들의 권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중국 지리도참사상의 기원과 그것의 한국전래 연유와 영향, 이러한 문제를 핵심으로 삼아 지리도참과 시대와의 상호관련성을 구명하려 하였다. 思想史 내지 그 이면사라 할 수 있는 이 연구의 성과로 {高麗時代의 硏究}(1948)를 간행하였다.
2. 斗溪와 震檀學會
일제시대 韓國의 歷史學界에는 세 흐름이 있었다. 정통적인 역사학의 입장을 계승한 역사가는 역사서술의 기술적인 면에서 소박하였으나, 역사의 밑바닥에 강렬한 民族精神의 흐름을 의식하고, 그러한 정신 위에서 전역사를 체계화하려는 학풍이었고, 식민정책 하에서 역사학을 수업한 일부 역사가는 랑케流의 史風을 밑바닥에 깔았으나 개별적인 역사사실에 대한 文獻考證을 위주로 하는 實證主義의 학풍을 이룩하였다. 또한 社會思想의 격동 속에서 등장하게 되는 역사학은 주로 사회과학을 전공한 학도에 의해서 제기되었는데, 여기서는 일정한 역사관에 의해서 전 역사를 체계적으로 계통지으려는 학풍을 취하고 있었다. 이는 각각 民族史學, 實證主義歷史學, 社會經濟史學이라고 일컬어진다.
특히 1930년대 들어 어떤 선입견 없이 각자의 專攻 분야에서 한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一群의 학자가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34년에 조직된 震檀學會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지만, 이 같은 경향을 띤 학자들은 그 이전부터도 나타나고 있었다. 우선 李能和(尙玄)과 安廓(自山)이 주목된다. 李能和는 그가 관심을 가지는 주제에 대한 사료를 발견하면 이를 곧 수집하여 {朝鮮佛敎通史}를 위시한 방대한 편찬물을 남기었다. 이에 대해서 安廓은 民族史·美術史·學藝史·政治史·經濟史·外交史·陸海軍史를 내용으로 하는 {朝鮮文明史}(1923)의 체계적 저술을 꾀할 정도로 학문적인 체계화를 위하여 노력한 학자였다. 또한 崔南善은 한국의 원시문화를 이해하는 데 文化圈의 理論을 적용하였다.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에 촛점을 둔 不咸文化論에 대한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原始文化에 대해서뿐만이 아니라 韓國文化의 發展相 전반에 대해서 世界文化上의 위치를 규정하려고 하였다.
이 시기 靑丘學會 등 일본인 학자의 학회가 성립되고 민족주의 사학과 유물론 사학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유물사관의 白南雲이 {朝鮮社會經濟史}(1933)와 {朝鮮封建社會經濟史}(1937) 출간하고, 李淸源·李北滿 등이 비슷한 경향의 학문활동 전개하면서 우파계열 학인들의 학회 조직 필요성이 생겼으며, 민족주의 계열 학인들에게도 日語로 논문을 쓰는 것은 명분상 불리하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일인학자가 중심이 된 靑丘學會의 발족·발전에 자극을 받아 "학술적인 저항심을 금할 수가 없어" "일인에 대한 학술적 또는 민족적 항쟁"을 위하여 학회 결성을 구상해 나갔다.
여기에 참여한 학자들은 早稻田大學 출신으로 史學을 전공한 李丙燾(斗溪)를 위시하여 金庠基(東濱)·李相佰(想白)·孫晋泰(南滄)·宋錫夏(石南)·高裕燮(又玄) 등과 1924년 창립된 京城帝大에서 배출된 柳洪烈·申奭鎬 등 사학자, 李崇寧·趙潤濟 등의 국어국문학자들로서 1934년에는 震檀學會를 창립하였다. 진단학회의 명칭은 우리 고유의 국명인 震과 단군의 檀을 합하여 두계가 직접 이름을 지은 것이었고, 두계는 이를 바탕으로 實證史學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갔다.
두계의 회상에 의하면, "이렇다할 아카데믹한 학회라든지 잡지가 없어서 자기의 연구를 발표하자면 일본 학회나 학술잡지에 발표해야 했다. 이에 우리의 학회와 기관지를 경영해야겠다는 동기와, 종래의 우리의 학문연구의 태도와 방법이 대개 過渡期적인 또는 啓蒙期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거기서 탈피해서 좀더 學術的으로, 좀더 實證的으로, 좀더 냉철하게 우리 한국학을 연구하고자, 한국연구를 일인이 독점한 상태에서 그들의 연구태도가 왜곡된 견해를 많이 가졌기 때문에 일종의 學術的인 抗爭意識에서" 진단학회를 결성하였다는 것이다.
학회 설립 초기에는 한글학회를 주관하던 李允宰가 漢城圖書株式會社를 통해 재정지원을 약속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李丙燾·金性洙·金娔洙·尹譜善·尹致暎·尹致昊·崔奎東·李能和·宋鎭禹·曺晩植·安廓·文一平·黃義敦·權悳奎·崔斗善·李光洙 등이 찬조하여 운영되었다. 진단학회에 참여한 이 일군의 연구자들은 史論보다는 史實의 엄밀한 실증을 중시하는 史風이 특징을 이루어 아카데미즘 사학의 면모를 농후하게 드러낸 이 학풍은 한국사학을 역사과학으로 이끌어가는 데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역사해석에 앞서 史實의 고증작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분위기 아래 '朝鮮及 隣近文化의 硏究'를 표방하면서 그러한 연구를 통해 '조선문화를 개척·발전·향상시킬 것'을 목적으로 한 진단학회는 1930년대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벌인 문화운동과 같은 궤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와 비슷한 계열의 언론사인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으로부터 환영받았는데, {동아일보} [震檀學會의 創立] 題下의 사설에서는 "學問의 純粹性을 잃어버려 그로 말미암아 朝鮮民族史의 誤謬된 論筆과 거기에 追隨盲從하는 착각적 인식이 많은" 당시의 학적 풍토를 지적하며 "現代科學的 方法에 依한 嚴肅하고 眞實한 硏究를 試하여 自別한 歷史性을 正觀하고 蕪雜한 文化相을 審察하는 때에 震檀의 悠久하고 絢麗한 文化는 비로소 躍如한 面目을 얻을 것이니, 우리는 此際에 企冀하는 배 큰 것이다" 라고 호의적인 긍정적 입장을 보여주었다.
한편 李淸源의 평에 의하면, "'社會的 運行을 초월한 純粹思惟'이니, '순수한 個人의 自己思想'이니 하는 따위의 '늘 漸進的으로'라는 기분 좋은 旋律(멜로틱)에 나아가는 觀念的史觀으로 이 나라의 젊은 學究者들에게 소화 불량의 결과를 주었다는 것이 즉 그것이다. 우리는 늘 이상과 같은 관점과 준비 아래서만 이 會에 대한 정당한 評價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진단학회를 굳이 말을 만들어 붙인다면 純粹史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성질의 학문활동을 하는 學會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너무 순수하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요컨대 史觀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정한 기성사관에 집착하고 있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기피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들은 일정한 기성사관보다는 구체적인 역사 연구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려고 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개별적 史實을 통한 일반화작업이 한국사 내지는 역사 전체를 일관하는 어떤 구체적인 체계로까지 발전되지 못한 데에서 사관이 없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진단학회의 기관지인 {진단학보}는 "純學術雜誌"로서 유심론, 유물사관의 논문을 실지 않아 사상과 관련이 없었으므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별 탄압 없이 1942년 자진 폐간 때까지 14집의 학보를 발간하였다. 자진 폐간의 직접원인은 1942년 朝鮮語學會 사건으로 李允宰·李熙昇 등 국어학 전공의 회원들이 투옥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진단학회 회원까지 잡혀가면 안된다는 생각에 해산한 것이라 한다.
이 {震檀學報}에 두계는 거의 매호 투고하는 연구의욕을 보여, 조선시대의 유학과 풍수지리사상, 고대사의 강역 연구에 이르기까지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7회 연작의 [三韓問題의 新考察]은 두계사학의 대표로 불릴만한 勞作이라 하겠다.
3. 해방 후 斗溪의 활동
1945년의 민족해방을 맞으면서 한국사학 역시 환희와 혼란을 함께 안게 되었다. 이 격변기에 韓國史學을 담당하게 된 것은 震檀學會였다. 해방 후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유물사관 사학자들은 정치로 빠지고 학문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했던 실증사학풍의 학자들만 그대로 학계에 남아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것이다. 먼저, 國史를 되찾은 각급 교육을 위하여 中等敎員養成所를 설립하여 급속히 敎員을 양성하고(1945-53), 응급의 교재로 {國史敎本}(1945, 李丙燾·金庠基·申奭鎬 집필)을 편찬하였으며, 해방의 시점에서 국내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대학의 교수진이 진단학회의 회원들로 많이 충당되어 해방후의 한국사학이 이 학풍을 잇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東濱 金庠基와 함께 일제시대의 연구방식인 實證史學 방면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야겠다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와 그렇지 않은 인사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진단학회에서의 親日派 除名運動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제말기부터 손진태와 더불어 소위 '新民族主義史觀'을 모색해 오던 趙潤濟가 해방 후 친일파 제명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따라 宋錫夏와 조윤제가 진단학회 위원장과 총무를 맡게 되었고, 송석하의 타계로 李相佰이 1948년 8월부터 위원장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50년 전란 중 민족주의자와 좌익들이 대거 월북·납북되고, 극심한 반공주의 정책 하에서 친일파문제가 조용해지면서 두계는 학계 최고의 원로로서 위상이 높아져 1954년 진단학회 이사장에 취임, 1989 타계 때까지 35년간 실질적으로 진단학회를 이끌어갔다. 특히 1950년의 戰亂 중에 新民族主義 歷史學을 제창하고 있던 孫晋泰, 李仁榮 등이 납북되고, 唯物史觀에 의거하고 있던 全錫淡 등이 월북한 가운데 文獻考證史學者들만이 남은 학계에서 두계의 독주는 당연한 것이었다.
1950년대 들어 두계는 한국 정치구조의 역사적 고찰 특히 合坐會議制의 연구에 주력하였는데 그 일단이 {서울大論文集 人文社會科學}에 발표한 [古代南堂考-原始集會所와 南堂-]이다. 특히 共同體 제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관심이 '두레'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는데, 이 공동체 이념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을 요약해서 저술한 것이 {국사와 지도이념}(일조각, 1955)이었다. 1956년에 출판한 {두계잡필}(일조각) 뒤로 대략 10년마다 전문역사서가 아닌 隨想集을 한권씩 출판하여서 1966년에 {내가 본 어제와 오늘}(신광문화사), 1975년에 {斗室餘滴}(박영사), 그리고 1983년에 {成己集}(정화출판문화사)이 나왔다.
서울대학교 재직 중에는 한국사의 기본문제인 制度史에 치중하여 서울대학교 사학과의 특징으로 살리려고 하여, 후진들에게 이를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60년대에는 그 제자인 韓永愚, 金哲埈 등에 의해 사실에 대한 고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의미부여에 노력하고 이를 체계화시키려는 작업이 행해졌으며, 70년대 들어서는 연구인원의 증대에 따른 학문적 분화와 전문사가의 배출, 주체적인 민족사관이 성립될 수 있었다. 이러한 두계사학은 서울대학교의 국사학 전공자 뿐 아니라 전반적인 한국사의 이해에도 뿌리깊이 자리하고 있다. 두계는 해방 후 경성대학 교수를 거쳐 1946년 9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였고, 1947년 중앙도서관장, 1953년 박물관장, 1954년 대학원장 등의 보직을 거쳤다. 1952년 4월에는 1948년에 출간된 {고려시대의 연구}로 서울대학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밖으로는 1950-54 國防部 政訓國 戰史編纂委員會 委員長, 學術院 會員(1954-1989), 서울특별市史編纂委員會 委員(1954), 國史編纂委員會 委員(1955-82)을 겸임하였다. 1960년에는 학술원 회장(1960-1981)이 되어 이후 20년간 학술원 이끌었다. 그는 학술원 회원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명분이 서지 않는다 하여 연구의 계속을 강조하고 연구발표와 토론을 계속하게 하였으며,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 학술잡지를 만들었다.
1960년 4월 許政 과도정권 때 보성전문 동창인 許政 내각수반의 간청으로 4개월간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1961년 서울대 교수 정년을 맞았고, 국민대학 학장에 취임하였으며, 1965년부터는 성균관대 교수로 있었다. 1965년 부터는 民族文化推進會에 간여하였고, 1970년에는 國土統一院 顧問, 1980년부터 88년까지는 國政諮問委員으로서 정권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중국의 胡適박사에 이어 아시아인에게 단 한자리만 주어지는 미국역사학회 명예회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사실 두계는 90여 평생을 학자로만 일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이력은 직접적으로 학문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음을 보여준다. 두계사학은 그 연구성과 자체로서 뿐 아니라 이러한 학문 외적 활동에서 비롯되는 권위의 후광을 더하여 그 자리를 굳건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Ⅲ. 斗溪史學의 成立
1. 斗溪의 歷史觀과 現實認識
랑케 사학은 明治유신 이후 일본에 들어가 白鳥庫吉, 津田左右吉 등에 의해 文獻批判史學으로 발전하였고 이병도가 다시 그 영향을 받아 한국의 문헌비판사학의 단서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斗溪史學은 그러나 그 방법론의 세련성에 비하면 문제의식이 뒤떨어져 있다. 두계의 문제의식은 독립정신·계급의식의 고취, 역사발전에 대한 신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과의 학문적 경쟁의식에서 동기유발된 것이었다. 즉 그는 植民主義史學과의 정면대결이 아니라 日人 史學의 테두리 속에서 한국인의 능력을 보여주고자 하는 同參的 競爭意識을 가졌던 것이다. 이는 강렬한 실천적 문제의식을 지닌 민족주의 역사가나 사회주의 역사가 어느 쪽과도 거의 교류 없이 日人 고증학자의 지도와 영향 하에서 학문과 활동을 해온 경력과 연관된 것이다.
그는 일본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東京大 중심의 역사전문학술지인 {史學雜誌}와 {東洋學報}, 朝鮮史編修會 기관지인 {靑丘學叢} 등에 잇따라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를 통해 통해 발표된 논문들은 그 주제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史實考證의 측면에서는 수준 높은 것이었다.
두계는 94세의 생애 중 60여년 간을 역사학자로 일관해오면서 뚜렷한 史觀을 표방하지는 않았다. 단지, "사관이라는 것은 편벽되어서는 안된다. 唯物史觀이다 唯心史觀이다 하는 것이 도대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物心兩面, 主觀·客觀 이것이 합치되어야지 어느 사관으로 치우치면 안된다."고 밝혔을 뿐이다. 또한 "역사는 社會史的으로, 政治史라든지 經濟史라든지 한편으로 기울어지느니보다도 社會史的으로 해야 되겠다"고 강조하고, "歷史는 다방면으로 관찰해야지 기울어서는 안된다. 歷史는 記憶만은 아니고 思索이다. 哲學만이 사색이 아니라 사학도 思索의 학문, 批判의 학문으로서도 다각적으로 고찰해야한다."고 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역사는 단지 사실의 기록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료와 사실을 검토하고 비판하고 사색하여 사회생활의 서로 相異한 시대간에 존재한 인과적인 관련과 계기성을 밝히는 동시에 그 이면 또는 그 이상에 드러나있지 않은 어떤 의의와 법칙과 가치를 발견하면서 항상 새롭게 관찰하여야 한다. 재료와 사실을 뼈에 비유하여 말한다면 거기에 대한 비판적인 사색적인 새 견해는 살과 생명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역사가 새롭게 고찰될 수 있도록 역사는 더욱 살쩌가고 이해가 깊어가는 것이다...그러나 역사를 새롭게 고찰한다고 객관을 沒却한 주관이거나 어는 한 편벽된 사관에 치우치거나 또는 사실을 고립적 標本으로 고찰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항상 객관을 토대로 삼아 시야를 넓히어 다각적으로, 縱的(시간)·橫的(공간)·心的·物的인 관련 아래 공정하게 고찰하여야 한다. (李丙燾, {韓國史大觀} 제1편 [總說], 보문각, 1950, p.2.)
또 역사는 현재에서 떨어진 과거의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지만, 현재의 현실을 전혀 망각한 죽은 학문으로 관념하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과거는 현재의 뿌리요, 현재는 과거의 성과며 과거의 생활 중에는 현재에 대한 양분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될수록 현재 현실에 입각하여, 현재와의 관련·비교에서, 과거를 회고하고 고찰하여야 할 것이다. 더 말하면 역사는 현재를 잘 이해·파악하기 위하여, 또 자아반성, 자아비판에서 자아창조를 위하여 과거에 관한 생동한 지식을 얻고자 함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역사는 진보되고 또 여기서 인간 이성의 광명, 인간 심리의 작용, 인간 행위의 어떤 질서·목적 또는 진리와 현실성을 파악하여 미래를 전망하게 된다. 역사의 究竟 목적은 즉 여기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李丙燾, {韓國史大觀} 제1편 [總說], 보문각, 1950, p.3.)
라고 하여 편벽되지 않은 사관으로 역사를 이해할 것과, 현재적인 역사의 효용성을 역사의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旣成史觀에 집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피하는 것으로까지 보이는 두계의 이러한 태도는 史觀이 없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또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련짓는 도구인 사관 없이 歷史의 秩序와 法則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이는 논리적이지 못한 두계의 역사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두계 자신도 實證史學의 범주로 분류되는 연구의 성향을 인정하였다. 그는 직접적으로 실증사학의 연구방법이나 목적을 논하지는 않았지만, 사료비판, 문헌비판으로써 사실을 고증하는 일본 사학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고, "실증사학 방면"으로 제자를 양성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실증사학이라는 것은 실증을 중시하는 역사학으로, 실증적인 연구방법에 입각한 역사의 연구를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증사학에서 중시하는 연구방법은 文獻考證을 위주로 하고 史料批判에 철저한 것으로, 이는 個別的인 史實을 확정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역사의 체계적인 이해나 역사에서 법칙을 찾아보는 일에는 소홀하였다. 즉 사료를 검토하고 그것들을 동원해서 실증사학자들이 얻고자 한 것은 구체적인 개별적 사실들이었다. 실증사학의 연구에는 특히 정치분야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대체로 국왕이나 왕족을 포함한 귀족 내지 지배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에만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데 역사 연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 전체와의 연관 속에서 개별적 사실이 지니는 의미가 밝혀졌는가 하는 것이다. 전체와 개별적 사실의 관계 파악은 곧 시대인식과 연결되는 것이고, 여기에서 얻어지는 이러한 역사 발전에 대한 이해는 시대구분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시대구분은 사회발전의 체계적인 인식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만 시대를 구분하는 이상 거기에 사회의 변동·변혁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연히 거기에는 새로운 인간 혹은 계층이 출현했을 것이며, 새로운 의식과 행동을 갖는 자가 등장했을 것이다. 그것을 파악할 수 없는 시대구분은 공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계의 한국사 시대구분을 {한국사대관}(보문각, 1964.)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上代史(古朝鮮에서 新羅末까지의 時代) 제1기 西北行列의 東方社會 제2기 漢四郡設置以後의 東方社會 제3기 三國의 發展과 外國勢力과의 抗爭 제4기 新羅統一時代 中世史(高麗時代) 제1기 再統一·再組織期 제2기 興隆期의 高麗 제3기 動亂期의 高麗 제4기 衰退期의 高麗 近世史(朝鮮 및 大韓時代) 朝鮮의 前期(1392-1567) 朝鮮의 中期(1568-1724) 朝鮮의 後期(1725-1910) 最近(1910-1948)
즉 두계는 시대를 시기의 멀고 가까움과 나라의 차이를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는 그가 한국사의 전개를, 사회의 盛衰나 나라의 興亡이 연속적·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결국 國家興亡史觀의 입장에서 한국사의 전개를 이해하고자 한 경향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실증사학자들이 대체로 시간의 선후관계에 비추어 역사적 사실들을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데 철저를 기하였다는 지적을 두계의 역사관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특정한 사건·제도·사상 등 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검토하는 데 있어서, 먼저 그 발생·유래·연원 따위를 찾아보고, 다음에 그 과정·경위·전개를 알아보고, 끝으로 나타난 결과 내지 영향을 지적하는 실증사학자들의 방식은 사실의 변화를 중시하는 입장의 반영으로 사실의 始末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나타난 것이다. 특히 끝보다는 처음, 결과보다는 원인에 집중하였다. 시말의 과정으로서 사실이나 사건의 변화를 보고자 하는 그들의 태도는 흥망의 과정으로서 사회나 국가의 발전을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을 보여준다. 또 결과보다는 원인을, 종말보다는 시작을 더 중시하는 경향은 그들의 더 큰 관심이 현대사보다는 고대사에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두계는 한국사의 전개를 민족의 관점에서 조망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上代·中世·近世·最近"과 동시에 "民族의 未統一·統一·再分裂·再統一" 등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는 경제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의 절충일 뿐 뚜렷한 시대구분 의식은 없는 것이다.
1. 西北行列의 東方社會 -+ 古朝鮮 및 그 周圍의 諸種族·部族社會 民族未統一及一部被侵略時代 2. 漢四郡設置以後의 東方社會 主로 漢民族과의 鬪爭時代 漢郡縣-後方系列의 諸社會-三韓-三國-三國의 初期 -+ 3. 三國의 發展及 完全鼎立時代 民族小統一時代 4. 新羅統一時代 民族大統一時代 5. 後三國時代 民族再分裂期 6. 高麗時代 民族再統一時代 主로 北方塞外民族과의 鬪爭時代 7. 近朝鮮時代 主로 南北兩民族(胡·倭)과의 鬪爭時代 8. 日帝侵略時代 民族受難時代 日本帝國主義에 대한 鬪爭時代 9. 大韓民國建設 및 育成期 民族更生時代 主로 共産主義에 대한 鬪爭期
위에서 알 수 있는 민족 중심의 시대구분({한국사대관}, 보문각, 1964, p.16.)은, "민족은 자기 발전 자기 완성을 위해서의, 자기 자체 내의 相剋과 협조도 있지만, 다른 민족과의 사이에 여러모로 교섭을 갖는다. 그 교섭에는 평화적인 것도 있고 투쟁적인 것도 있다."({한국사대관}, 보문각, 1964, p.3.)는 민족 관점에서 생긴 것이다. 두계는 민족의 발전은 내부적으로는 민족 구성원 사이의 갈등과 타협, 외부적으로는 다른 민족과의 선린과 투쟁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파악하였고, 민족 내부의 갈등과 타협을 실제 시대구분에 있어서 민족의 통일과 분열로 이해했던 것이다. 즉 민족이 통일되었는가, 분열되었는가로 시대구분을 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통일과 분열보다는 나라의 흥망에 더 유의하면서 민족이나 나라의 모든 사회적 현상들에 작용하는 어떤 원리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支配的理念', '指導理念', 그리고 '最高原理' 따위의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지도이념은 '과거 우리의 실제 생활 즉 사회생활, 국가생활, 및 문화생활을 리드하고 지배하여 온, 모든 사상과 정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遠古 이래 공동체적 생활을 통하여 나타난 協同精神과 妥協主義로 추출된다'고 하였다. 특히 사회의 지도층 내부의 단결과 하층민의 그에 대한 협력을 중시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내용의 협동정신·타협정신이 최고원리로서 과거의 사회·국가, 나아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여 그 흥망성쇠를 결정하였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祖國光復을 위해서 피흘려 싸워온 鬪爭의 보람도 없이 解放以來로 이러한 "過誤"와 "混亂"이 他律的인데 原因한 바도 있는 것이나, 그 보다도 自律的인 原因이 더 많고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他律的인 過誤와 矛盾은 自律的인 "正氣"와 "正義", "團結"로서 넉넉히 깨뜨리고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民族獨自의 正氣"를 蘇生시키고 擴充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하여 全國民이 一致團結하고 協同하여 祖國의 直面한 諸難關을 克服하여야 하겠는바,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간절히 要請되는 것은 우리 民族이 밟아 나아가야 할 指導理念이라고 하겠다.....나는 年來 史學的 또는 社會學的 立場에서 이를 考察하여 본 結果, 다음과 같은 結論을 얻게 되었다. 즉 遠古以來 共同體的 生活을 通하여 나타난 協同精神과 妥協主義를 抽出할 수가 있었다. ....지금 우리의 現段階에 있어서의 緊急한 要請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傳統的인 指導理念인 이 協同妥協精神을 잘 把握하고 向上시키는 同時에 저 外來의 새로운 形式의 民主主義를 折衝融合하여, 먼저 指導層을 構成하는 中心體의 大同團結을 굳게 하여 大衆을 正道로 引導하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李丙燾, [나와 나의 祖國], {내가 본 어제와 오늘}, 신광문화사, 1966, pp.200-201.)
어느 民族 어느 나라의 歷史에도 그렇지만 우리 民族 社會發展에는 두 가지 精神의 作用이 움직여왔고 또 現在와 將來에도 그러할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그러면 그 二大精神이란 무엇인가? 즉 하나는 '大我精神'이요, 또 하나는 '小我精神'이다. 大我精神은 "民族" 혹은 "國家"의 統一과 發展을 指導原理로 삼는 것이요, 小我精神은 말할 것도 없이 "個人", "家族" 혹은 "黨派"의 利益을 위하는 精神이다. 이 二大精神을 說明하자면 大我精神과 小我精神과의 關係는 마치 圓의 中心과 圓周와의 關係와 같은 것이다. 大我精神은 圓의 中心을 이루어 一切의 것을 一點에 "集中" "統一"하는 精神이고 小我精神은 이 一點을 中心으로하여 그 圓周를 無限히 擴大하려는 遠心的精神으로 때와 환경을 따라서 流轉變化하는 것이다. 이 두 精神의 相互作用, 相互調和로서 韓國民族正氣의 本質인 "統一"과 發展이 基礎되어 온 것이다.....그런데 이 두 精神은 그 本質에 있어서 서로 反對·矛盾, 對立의 狀態를 나타내고 있으므로 往往히 悲劇을 演出할 때가 많다. 이러한 悲劇과 矛盾을 克服하자면 '새로운 調和'를 향하여 뻗어나가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그러자면은 우리의 小局的인 또는 小我的인 精神을 억누르고 大局的이고 大我的인 正氣에 集中시켜야 될 것이다. (李丙燾, [나와 나의 祖國], {내가 본 어제와 오늘}, 신광문화사, 1966, pp.202-203.)
民族的 國家的 危機에 處하여 이것을 打開하고 克服할 唯一한 武器는 오직 公明正大한 民族 正氣의 猛烈한 發動에 있는 것이다. 民族全體 國民全體가 民族과 國家를 爲하여 자기의 小小한 利害關係를 超越하고 小我를 犧牲하여 民族我를 救出하고 살리는데 集中하여야 할 것이다. 즉 이때야 一切를 國難 克服에 集中하여 完全한 獨立과 自由와 平和를 戰取하는 우리의 最高 原理(民族 正氣)을 實踐하고 發揮할 때가 아니고 무엇이냐. (李丙燾, [民族의 抗爭], {斗溪雜筆}, 평화당, 1956, p.116.)
즉 민족이나 국가의 통일과 발전을 위한 것이 大我精神이고, 개인이나 가족 또는 당파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小我精神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전자가, 그것이 태평할 때는 후자가 指導原理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보이는 協同精神·妥協精神이나 大我精神·小我精神 등은 모두 精神史觀의 산물로 보인다.
또한 이 일련의 글들은 두계가 해방 직후 남북의 분열, 사상의 혼란, 경제의 불안, 정치의 모순과 같은 암담한 역사적 현실에 대한 원인을 국내적인 요인에서 찾고 이의 해결방안으로 共同體的 協同妥協精神이라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1930년대에 유행하던 민족개량주의적 시각이나 민족주의사학 특히 唯心論史學을 연상하게 한다. 그는 '指導理念'이라는 것을 내세워 역사적 원동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하향적으로 작용한다는 계몽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大我'와 '小我'의 개념을 내세워 극단적으로는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해야한다는 전체주의적인 색채를 풍기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두계의 역사인식은 時流的인 적응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우리 민족의 지도이념으로서 협동과 타협의 전통을 찾으려 한 것은 6 25 이후 국민적 단결을 호소하려는 데 현실적 목표를 둔 것으로서, 이를 그의 학문태도가 다소 이념지향적으로 변해간 것을 말해주는 대목으로 볼 수도 있다. 학자적인 면모와 관계없이 당시 정권의 이념적인 국민 통제에 동참하여 "祖國"과 "正道"등을 유난히 강조했던 것이다.
2. 李丙燾의 韓國史硏究와 主要 著書
1) 古代史 硏究와 {韓國古代史硏究}(1976)
斗溪의 韓國古代史 硏究는 漢四郡과 三韓 문제가 핵심이다. 특히 한군현과 삼한의 위치비정에 쏟은 정열과 업적은 그의 학문적 성과와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漢四郡의 위치에 대하여 두계는 樂浪은 지금의 平壤, 玄砺는 尔佳江방면의 고구려 지방, 臨屯은 함경남도 지방, 眞番은 자비령 이남 한강 이북에 각각 비정하였다. 낙랑, 현도, 임둔의 위치는 安鼎福, 韓鎭書 등 조선후기 南人 학자들과 비슷한 것이나 진번의 위치비정이 특이하여 학계가 주목하였다. 그런데 당시 申采浩, 鄭寅普 등 민족주의역사가들은 漢四郡의 허구성을 주장하면서 그 위치를 만주지방에 비정하고 있었다. 두계의 한사군 위치비정은 이와는 대조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한사군의 중심지가 한반도에 있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日本學界의 주장처럼 한사군이 한반도 전영토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지배하였다고 하였다.
三韓의 위치와 그 변천과정에 대한 연구에 있어 조선후기의 학자들의 연구성과는 三韓의 위치가 한강 이남이라는 것과, 삼한의 주민은 周代부터 파상적으로 이주하야 왔고 準王이 남천하기 전에 이미 馬韓 존재하였다는 것, 馬韓은 지금의 경기·충청·전라도를 포괄하는 지역으로 그 중심지는 益山(目支國)이며, 辰韓은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지방, 弁韓은 경상남도의 해안지방에 있었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두계의 연구성과는 準王이 南遷하기 전에 이미 한강 이남에는 辰國이 있었고 그 중심지는 稷山이며 그 지역은 月支國으로, 衛滿에게 나라를 뺏긴 준왕이 지금의 廣州지방에 내려와 韓王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준왕의 성이 箕씨가 아니라 韓씨인 까닭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곧 '韓氏朝鮮說'과 연결되는 것으로 기존의 '箕子朝鮮說'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즉 箕子는 우리나라에 온 일이 없으며 소위 기자조선은 土着人인 韓氏가 세운 국가로, 준왕이 내려와 韓王을 자칭한 이후 모든 한강 이남의 유이민이 韓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는데 경기·충청·전라 지방의 韓을 馬韓, 마한의 동북지방 경기도(한강유역)을 辰韓, 경상도 지방의 한을 弁韓이라 부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辰國의 존재 확인은 한국고대사에 있어서 큰 수확이나, 辰國과 三韓의 위치비정은 학계에서 호응받지 못하였다. 또 箕子東來說을 부인하고 韓氏朝鮮說 을 주창하였으며, 衛滿이 상투를 틀고 왔다는 점을 들어 위만을 조선족으로 해석하고, 任那日本府說 부인하는 등 당시 日人의 연구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日帝下에서 日人들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漢四郡의 位置比定이나 문화의 영향을 斗溪가 정정당당하게 정력을 쏟으면서 代案을 제시했으나, 그것이 韓國古代史에서 그토록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日本學者들이 韓國古代史에서 漢四郡과 樂浪文化를 외쳤다고 여기에 맞서 대결하였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휘말려 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古代史의 內的 發展의 추구 같은 動的인 연구가 아니라 단편적인 연구에 빠져버린 잘못을 범한 것이다.
2) 高麗時代 風水地理 思想 硏究와 {高麗時代의 硏究}(1948)
두계는 1920년대 중반 역사연구 출발 초기부터 高麗時代 風水地理思想에 관한 논고를 발표하였다. 그는 역사에 있어 외적 생활사보다도 내적 생활사 면에 더 관심을 가졌다 한다. 그래서 思想史를 취미로 가졌는데 圖讖도 일종의 사상사이고 또 실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기에 연구를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1930년대에 역사지리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실증사학의 전반적인 학문적 기풍의 영향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池內宏과 津田左右吉의 영향을 꼽고 있다.
두계의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사상에 대한 논고를 모아 발간한 {고려시대의 연구}(1948)는 우리나라 최초의 박사학위논문(1952)으로, 고려와 조선 초기의 지리도참 사상을 주로 國都문제와 관련시켜 연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의식이 풍수지리사상이 지닌 민족지리학으로서의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미신적, 신비적 측면과 그 害毒에 치중한 면이 있다.
3) 조선시대 유학사 연구와 {한국유학사}(1987)
두계는 [李栗谷의 입산동기에 대하여](1926)부터 시작하여 權近(1929), 徐敬德(1936), 李球(1936), 李彦迪(1936), 成海應(1938), 鄭道傳(1959), 朴世堂(1966), 李珥(1957), 李德懋(1966) 등에 대해 개별연구를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유학사의 개설서인 {資料韓國儒學史草稿}(1959)를 한문으로, 이를 한글로 풀고 설명한 {한국유학사}(1987)를 펴냈는데 유학사 연구는 일제시대에 20년간 朝鮮史編修會에 참여하면서 奎章閣 圖書를 참고할 수 있었던 기회에서 얻은 성과라 볼 수 있다.
張志淵의 {朝鮮儒敎淵源} 이후 실증적 방법론으로 유학사 연구를 시작한 것은 그의 연구가 최초이다. 그는 {韓國儒學史} 序說에서 '儒敎의 現代的 學問體系의 수립'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 하면서 유교 자체에 대한 비판과 과거 유교사상에 대한 취사선택 및 東西思想의 절충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이 그가 유학사를 다루는 시각이었다. 두계는 대표적 儒學者의 形而上學을 주로 소개하고 정치·경제·사회사상을 다루지 않아 사상사의 차원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性理學과 道脈에 치중했던 조선조 학인들의 유학사 인식수준을 한단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즉 그의 연구방식은 특정한 儒學者의 家系·學派·黨派 등을 언급하고, 그것들을 그 유학자의 사상 내지 그 사상의 특성과 연결시키는 일에는 소홀한 것이었다. 그 결과 어느 인물의 생애에 관한 설명과 그의 사상에 대한 설명은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소속된, 지위를 함께하는 계층·계급·단체·모임 따위의 크고 작은 집단을 대신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인간은 그가 소속된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역사학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인간은 단순히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움직이는 사회적 세력으로서의 인간집단을 말하는 것으로, 실증사학에서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지적이 여기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두계는 조선왕조시대를 고려왕조시대보다 더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儒敎(특히 朱子學)과 양반, 그리고 그들의 정치형태인 黨爭을 조선왕조의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발달을 저해한 중대원인으로 이해하였다.
儒敎思想에는 물론 취할 점도 있지만...비난할 점도 적지 않다. 너무도 名分的인, 封建的인. 事大的인, 尙古的인, 虛禮形式的인, 重農的인 主義와, 崇文賤武·男尊女卑·官尊民卑의 思想, 기타 差別·偏頗·排他的인 점이 많다. 유교의 이러한 점이 원래 停滯的이요, 因襲的이요, 또 偏頗的인 半島國民에게 일층의 박차를 가한 것이라고 본다. (이병도, {국사와 지도이념}, 일조각, 1955, pp.40-41.)
이러한 조선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특히 조선시대의 성격을 停滯的이라 본 것은 그가 朝鮮史編修會에 속해 있던 시절, 植民主義史觀의 停滯論을 강하게 주장했던 稻葉岩吉과의 交遊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Ⅳ. 斗溪史學의 特徵 - 韓國古代史 硏究를 중심으로
1. 斗溪의 韓國古代史 硏究 方法論的 特徵
실증사학은 개별적인 사실의 추구에 집착하였다. 그리고 개별적인 사실을 추구하기 위하여 旣成의 理論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때로는 법칙적인 체계화 자체로부터 벗어난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어떤 理論的 先入觀을 가지고 歷史를 연구하는 것은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같은 실증사학의 등장으로 인하여, 민족주의사학이나 사회경제사학이 자칫 소홀히 하기 쉬었던 역사의 구체적 연구에 대한 방법의 문제가 새로이 크게 제기되었다.
斗溪의 한국고대사 연구성과는 개별적 사실의 고증 가운데 歷史地理의 중요성에 입각하여 漢郡縣·三韓의 위치비정, 古朝鮮(阿斯達)문제, 古代國家의 기원과 성립문제, 그리고 南堂으로 상징되는 古代會議制度 해명 등으로 대표된다. 이러한 역사 연구에 있어 두계는 다음에서 밝히듯이 역사학 연구 방법으로 문헌학적 방법과 언어학적 방법을 적용하였다.
우리의 原始民族, 다시 말해서 우리 民族의 根幹要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解明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文獻을 주로 하는 史學的 입장에서 뿐 아니라 人類·考古學·言語學 등의 여러 補助科學의 힘을 빌려야 되는 까닭이다. 그런데 오늘의 이 방면에 관한 人類·考古學이 아직도 썩 進步되지 못한 형편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선 아쉬운 대로 言語學的·文獻學的인 面에서 이를 考察해볼 수 밖에 없다.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序說, 박영사, 1976, p.23.)
이는 앞에서 살펴본 그의 학문 편력과 관계가 있다. 즉 두계가 처음 역사공부를 시작한 일본 早稻田大學의 성격이 文獻考證學 위주였고 당시 두계에게 영향을 미친 津田左右吉, 池內宏 등 은사들의 성향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특히 지명의 고증에 있어서 언어학으로부터의 도움을 집요하게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도 그가 大本으로 삼은 것은 역시 사료 내지 문헌이었다.
두계는 이 역사방법론을 한국고대사 연구에 적용하였다. 예를 들어 현존하는 風納里 土城을 {三國史記}에 나오는 蛇城에 비정하고 이를 언어학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증명하고 있다.
言語上으로 風納里란 地名과 蛇城의 名稱을 考察하여 兩者의 關係를 論하려 한다. 風納里는 俗名 '바람드리'의 漢譯名으로, 村民은 지금도 '바람드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俗名을 들을 때, 나는 直覺的으로 蛇城의 名稱을 聯想하여 '바람드리'가 '배암드리'의 訛傳이 아닌가하는 推測을 일으켰다. 蛇는 즉 國語로 배암이니, '배암'과 '바람'과는 音이 자못 近似하여 속히 發音하면 거의 混同할 程度이다. 그 다음 '드리'는 納의 뜻으로, 平野의 義인 '들'과도 共通되는 말이니, 坪古城이란 名稱도 여기서 생긴 듯하다. '들'은 '벌'과 같이 古代에는 平野의 義도 되도 또한 人民聚落의 城邑을 意味한 말로도 되어, 그 發音은 '들' 以外에 '돌' '드라' '드래' '다라' '달래' '드르' 등 種種의 發音이 있다. 그리하여 이를 漢字로 寫音할 때에도 種種의 글자를 쓰게 된다.....그러면 蛇城은 方言으로 '배암다라' '바암드르'인 것이 의심없다. 요컨대 '바람드리(風納)'는 '배암드르' 혹은 '배암드리'의 와전인 동시에 蛇城은 바로 後者의 譯名이며, 百濟當時에는 漢字로는 蛇城이라 썼지만, 俗稱으로는 흔히 方言을 사용하였던 모양이다. (李丙燾, [風納里土城과 百濟時代의 蛇城],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pp.505-506.)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추측일 뿐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역사지리학적 고증의 문제뿐 아니라 역사사실에 대한 해석에도 이러한 방법을 동원한다는 데에 있다. 百濟의 건국문제에 대한 諸說 가운데 두계는 始祖 仇台說을 주장하였다. 이는 {三國史記}의 始祖溫祚說 및 始祖 沸流說을 부인하고 중국측 사서에 전하는 始祖 仇台說을 받아들인 것이다. 또한 백제의 시조 仇台는 곧 {三國史記}의 古溠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서 두계가 설명하는 것은 古溠와 仇台는 字音上으로도 서로 一致한다고 볼 수 있으니, 仇(Ku)와 古(Ko, Ku)는 물론이요, 溠와 台도 전혀 同音인 까닭이다. 溠는 곧 婾로 爾字와 通用이므로,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ni, i. ji의 音을 발하는 글자이며, 台는 後世에 흔히 臺로 發音하지만, 原音은 역시 以(i)로서 '與之'·'盈之' 또는 '延知' 등으로 反切된다.....그러면 仇台는 '구이(ku-i)'로 發音할 수 있는 동시에, 仇台·古溠는 실상 同一人名의 異寫로 볼 수 밖에 없다. (李丙燾, [百濟의 建國問題와 馬韓中心勢力의 變動],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p.476.)
라고 하고 있다. 이는 古溠王代 이전의 {삼국사기} 기사는 신빙할 수 없다고 보는 것으로 언어학적인 명칭의 탐구와 문헌학적인 사료의 비교검토를 통해 얻은 결론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성과로 두계가 하남위례성에 비정하는 風納里土城의 연대가 기원후 1-2세기까지 소급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삼국사기} 초기 기사를 신뢰할 수 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이는 곧 문헌학의 한계로 볼 수 있는 문제로, 사료에 대한 맹신이 역사적 사실의 연대를 오판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사실 과거의 韓國古代史를 형성한 기초적 논리나 그것을 뒷받침한 증거가 새로운 연구 결과와 遺跡·遺物의 발견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 韓國古代史가 지나치게 無批判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斗溪史學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리나 古代史를 꿰뚫는 일관성에 限界性이 나타난 것은 이미 그 점에서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그와 같은 上古時代의 해명이 언어풀이나 文獻資料의 대조로 해결되리라 믿었던 것 부터가 方法上의 限界點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두계의 연구가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동시에 모든 時代와 모든 主題를 다룰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만큼 연구실적도 부족하였고, 연구인력 뒷받침되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런 한계를 줄이기 위하여 史實의 實證, 考證에서 역사연구를 출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있어서 두계는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고 언어학적 방법론의 위험성과 문헌학의 맹점을 경시하였다. 즉 그는 수많은 한자의 音과 訓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임의적 가설에 불과한 언어학적인 고증과, 실천력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문헌사료의 字句에만 의존하는 문헌사학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회인식이 결여된 연구실 안의 학자로서, 또 다른 사관을 가진 학자들에 대해 독존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의 학자로서의 태도는 두계사학에서 비판되어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實證은 역사학의 기초 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歷史學 자체일 수는 없다. 이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작업과정으로서의 실증이 시도되어야 한다. 그런데 실증사가들은 개개의 사실 위에서 일반적인 의미를 생각해보는 작업에 거의 의욕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역사학은 학문이 되기를 그만두고 취미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역사학은 물론 법칙의 발견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들을 시간적인 사회적인 연관 속에서 이해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법칙도 구체적인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 없이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이 체계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불가결의 것이기도 하다. 古代史가 토막토막의 歷史가 된 것은 理論不在를 입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별적 연구나 연구분야의 세분화는 전체상의 형성과의 관련에서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 正統的인 것이라 일러오는 文獻考證學風이 주로 政治史와 관련된 文獻整理에 置重하였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역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사회경제사적 연구의 기초 없이 성립한, 정치사를 주로 하는 역사이해는 전근대적인 역사인식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또 충분한 문화사적 이해 없이 역사적 성격을 규정하려는 태도는 그들의 한국사연구가 근대사학으로서의 성격을 확립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편협한 주제의 역사연구 결과, 연구성과들의 정리에 있어 체계적인 역사를 보는 안목을 확립하는 방향이 아니라 새롭게 증가된 지식의 수집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文獻考證學的 學風은 古代學의 學問的 土臺 마련한 업적을 남겼으나, 일인학자들에 의해서 이룩되었기에 일본인의 정치성과 그들의 문화관에 좌우되어 한국 민족의 내적 경험의 성장과정을 주체적인 것으로서 파악하고 이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적극적인 방향은 취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한국고대사 자체의 주체적인 성격보다는 歷史地理와 編年整理를 위주하면서 韓·中·日 삼국간의 국제관계면에서의 한국의 위치에 대한 이해가 한국사의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쳤다. 이는 오늘날에 와서 당연히 비판적인 재정리를 거쳐야 할 성질의 것이다. 어떠한 문헌정리도 그것이 技術的인 정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史觀의 방향이 가지는 한계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사의 각 시대의 시대성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던 당시에 있어서는 고대적인 것과 중세적인 요소를 구분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중세적인 것에 대한 비판기준이 일단 서 있는 당시의 사관으로서는 중세적인 윤색을 입은 고대사료는 중세의 僞作이라 하여 제거해 버리고 고대관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료에 대해서는 역사 아닌 신화의 범주에 넣기도 하였다. 즉 중세적인 요소의 한계를 그 자체의 생리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비판적으로 그것을 부인하는 방향에 빠졌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주의 사관의 잔재는 일인학자들의 그릇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연구성과 뿐 아니라 실증사학자들의 연구태도에도 은연중에 남아 있는 것으로 비판되는 것이다.
2. 斗溪의 辰國·三韓 硏究
韓國古代史의 연구는 한국사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에 일제시대에 한국 학자들이나 일본 학자들은 한국고대사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양자는 모두 實學時代 연구의 주요업적인 韓百謙의 {東國地理誌}나 {東國文獻備考}의 [輿地考]에서 정리된 歷史地理的인 고증과 조선시대의 한국사 인식체계를 세운 安鼎福의 {東史綱目}이나 그 전에 나온 {東國通鑑}에 영향된 바 큰 것이어서 역사인식의 근본적인 성격에 있어서는 실학시대와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 학자는 주로 古朝鮮에 대한 연구에 치중하였고 일본 학자는 漢四郡 이후 三國時代 연구에 치중하였는데, 일본 학자의 이같은 태도는 사료가 한정된 상태에서의 문헌고증학의 한계와 더불어 한국의 역사를 일본의 역사 이전으로 소급하지 않으려는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漢의 식민지인 四郡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 중국 학자로는 楊守敬, 일본에서는 白鳥庫吉, 今西龍, 뒤에 和田淸과 한국 학자로 李丙燾의 연구가 발표되어 고조선 말기의 세력권과 그 위에 성립된 한군현 등의 위치는 이 시기에 거의 해명되었다. 그러나 中國郡縣이 당시 토착사회와의 관계 면에서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두계는 漢郡縣의 문제에서 나아가, 기원전 108년에 古朝鮮이 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됨에 따라 북방에서 남으로 이동한 流移民 파동과 남방 지역에 있어서의 部族國家의 대두와를 직결하여 설명하는 정치사의 체계로서 [三韓問題의 新考察]을 발표하였다. 즉 그는 衛滿朝鮮 이전의 고조선 세력과 한강 이남의 辰國의 세력이 당시 정치변동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주목하고, 당대에 일어난 유이민의 이동을 중심으로 유이민과 토착민, 또는 이들과 낙랑군과의 접촉에서 삼한문제를 생각하여, 삼한의 위치비정 보다는 유이민의 파동에 크게 비중을 두면서 유이민과 직결된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설명할 수 있는 체계를 찾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사실 日帝下에서 日人들의 촉발에 의해 시작된 漢四郡이나 三韓의 位置比定의 문제가 韓國古代史에서 그토록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辰國 및 三韓에 대한 연구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실증사학자들이 역사적 사실들을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경향과 관련하여 원인과 시작을 중시하게 되는 고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또한 辰國과 三韓에 대한 논의의 전개는 문헌고증의 문제에 더하여 고고학적 자료를 적극 활용하게 되는 場을 열었다는 점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발전적 계기를 이룬 것도 사실이다.
두계가 보는 辰國 및 三韓의 역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史記} 朝鮮傳의 "眞番旁辰國 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의 구절에서 처음 나오는 '辰國'은 辰王의 나라란 뜻이고 진왕은 諸部族社會의 맹주국인 目支國의 君長으로 특히 마한지역 제부족장들의 선거에 의하여 추대되었다고 한다. 이 辰國時代에는 三韓時代와 마찬가지로 諸小國(部族國家)들이 목지국의 진왕을 중심으로 한 일대연맹체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즉 辰國은 부족사회를 포함한 일대연맹체로서 그 최고 맹주가 이른바(목지국의) '辰王'이고 그 밑의 다른 소국들은 이에 附庸관계를 가졌던 것이며, '辰王'은 目支國(馬韓)의 군장으로서 중국과의 교섭(朝貢貿易)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다른 君長들은 自衛를 위하여 목지국의 '辰王'을 맹주로 삼아 부용관계를 맺고 그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이 목지국은 진국 이래 마한의 정치적 중심지로 稷山, 成歡 등지가 바로 그곳에 해당되며, 소위 馬韓-百濟 사이의 경계라는 熊川은 公州가 아니고 安城川이고, 초기 맹주적 입장에 있던 稷山의 目支國이 백제국에 귀속되자 후기 마한의 맹주적 구심체가 益山 지역이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두계가 稷山 目支國說을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한강이남, 서해안지대에 있어 역사상 古都로 일컬어 오는 곳은 益山, 廣州, 稷山, 公州, 扶餘 등인데 廣州는 河南慰禮城에 해당하고 公州, 扶餘는 백제와 관련된 것이므로 논의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益山은 馬韓 후기의 중심지라면 몰라도 마한 전기 혹은 '辰國'시대의 목지국이라 할 수 없는데, 익산이 마한제소국의 하나인 乾馬國에 해당하는 까닭이라 하였다. 따라서 稷山 일대는 백제의 古都는 아니더라도 백제 이전 久遠한 역사를 가지고 있던 河南(한강이남) 제일의 古國都로 著名하였던 것으로 辰國 내지 馬韓의 정치적 중심지인 目支國을 내놓고는 상상할 수 없으므로 직산 및 그 부근일대를 옛날 목지국의 소재지로 비정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이 牙山灣에 면한 해안지대인 만큼, 북조선(낙랑) 방면과의 교통에 있어서도 해로를 취하는 편리가 컸을 것이며, 聖居山上의 '慰禮城'址와 稷山舊邑에 있는 삼국시대의 蛇山城 유적과 직산 부근의 都下里, 安宮里, 坪宮里, 新宮里 등의 지명 등으로 보아 직산 지역이 도읍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辰韓과 馬韓과의 界線 내지 건국기 백제와 馬韓과의 계선인 熊川은 安城川에 해당하는 이유로는
安城川流域인 孔道面(安城郡)에는 熊橋里란 곳이 있다. 이를 俗稱 '고무 다리'라고 일컬어온다. 孔道란 面名 自體도 이 '고무'(곰)에서 緣由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또 安城川下流에는 平澤의 軍勿津(或云 昆池津)이 있는데, 이를 또한 軍門里津(군문이 나루)이라고 일러온다. '고무' '공' '군물' '군문' 등 이 모두 熊의 邦語인 '고마' '개마' '곰'의 異寫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들 名稱을 통해보더라도 安城川의 古名이 熊川-즉 '고마나루' '고마내'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李丙燾, [目支國의 位置와 그 地理],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p.248.) 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두계의 논리 가운데 여러 군데서 헛점이 드러나고 있다. 목지국의 도읍 비정은 구전되는 古都說만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로도 설명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두계가 말한 '慰禮城址'와 '蛇山城'의 유적은 그의 지적대로 분명 平時常居의 都城이 아니고, 三國時代 혹은 羅末麗初 飁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두계는 이 두 城址가 삼국시대 이전의 遺址에 의해서 개축된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또한 도하리, 안궁리 등의 지명이 어느 시기부터 쓰였는지에 대한 고찰 없이 단순히 '都'자와 '宮'자가 들었다 하여 도읍과 연관짓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한다.
여기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辰王과 辰國과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두계는 진국은 진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규정하고 논의를 전개, 시키고 있다. 이에 가장 주목되는 사료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古之辰國也... 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 走入海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三國志} 東夷傳 韓條.)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凡七十八國...地合方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初 朝鮮王準 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 走入海 攻馬韓破之 自立爲韓王 準後絶滅 馬韓人復自立爲辰王... ({後漢書} 東夷傳 韓條.)
{史記}와 {漢書}에서는 '辰國'名이 보이지만 辰王의 기록은 없다. {三國志}와 {後漢書}에 와서 辰國은 '古之辰國'으로 과거의 존재로 나타나고 비로소 辰王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서에도 진국과 진왕이 결부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서 辰國을 南方의 始原的인 國家로 등장시키는 것은 기록상 辰國 다음에 三韓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삼한보다 먼저 등장했던 진국을 확대하고 여기서 역사의 근원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準王의 문제를 살펴보면 더욱 복잡해진다. 古朝鮮의 마지막 왕인 준왕의 南下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역사가들은 준왕의 남하를 그 뒤에 오는 역사와 관련지으려 한다는 특징이 있다. 준왕이 남쪽으로 와서 韓王이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이것을 {三國志}에 나오는 "辰王治月支國"의 진왕과 동일한 실체로 보려는 혼란이 야기되기 쉽다. 그러나 분명 韓王과 辰王은 별개의 존재이며 準王 즉 韓王과 辰王은 시간적으로 선후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辰國은 辰王이 존재하던 三韓時代에는 古之辰國이다. 準王은 南來하여 益山지방(金馬, 乾馬)을 중심으로 하는 辰國을 다스리다가 馬韓의 辰王에 의해 절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辰國과 三韓의 직접적인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문헌사료나 고고학적 자료는 찾아지지 않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準王의 南來 지역을 稷山으로 일단 비정하고 廣州 일대의 辰國이 점차 남하하면서 辰韓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辰國 내지 馬韓·辰韓·弁韓이라는 칭호가 地域的 칭호이든 族的 칭호이든 또는 양자를 혼동한 것이든 간에 유이민의 이동과 문화적 전환이 행하여졌던 당시의 사회상황하에서 그 칭호가 표시하는 의미의 범위라든가 그 역사적 실내용의 성격이 어떠한지의 문제이다. 그러한 것이 어떠한 요인에 의하여 어떻게 변동한 것인지, 또는 그 원래의 성격이 삼국시대 초기까지 장기간 같은 것으로서 계속될 수 있었던가의 여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종교·사상 방면이나 사회경제관계, 법제관계, 그밖의 분야에 대한 연구가 적고 초기적인 정리의 단계에 그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 연구성과가 문헌사가들에겐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Ⅴ. 맺는말 - 斗溪史學의 史學史的 意義와 限界
두계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좌와 우, 항일과 타협으로 양분되던 1920년대부터 우파 계열의 學人으로서 타협주의 노선을 따르면서 역사학의 전문성을 제고해 온 인물이다. 역사학이 근대적 학문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文獻批判의 방법론과 역사학의 전문화를 이룬 공로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지식인의 양심과 학자로서의 전문성이 동시에 요구되었던 시기에 학자로서의 전문성에만 치중한 인생관과 시국관은 그의 학문이 국민 속에 살아 숨쉬는 생기있는 역사의식을 고취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민족주의, 사회주의 사학자들이 사라진 1950년-60년 사이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막강한 영향력 행사하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학계의 전반적인 학풍을 문헌고증사학이 지배하는 가운데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론이나 타율성론 등이 여전히 위력 발휘하였다. 역사의식과 역사방법론(특히 실증적 방법론)을 '體'와 '用'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면 이병도사학은 '體'의 역사학이 아니라 '用'의 역사학을 발전시킨 공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의 발달과 더불어 새롭게 얻어진 업적을 통해 본 두계사학은 부정되어야 할 부분이 상당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두계사학은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발돋움의 바탕이라는 데 그 존재를 인정해야 할 것이며, 현재의 입장과 성과를 가지고 비판을 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시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斗溪史學에 대하여 긍정이나 부정의 이분법적인 평가는 옳지 않다고 본다. 그보다는 시대적 상황 아래에서 두계사학의 특징을 밝히고 방법론상의 한계를 밝혀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 결론과는 상관없이 학문적으로 타당성, 객관성, 정확성이 인정되면 평가할만한 것이다. 이익의 여부는 연구결과가 정확하고 공평한가, 체계적인 지식을 제시하였는가에 있는 것이지 도덕적인 선악에 있는 것은 아니다. 두계사학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사연구는 그것을 극복할 필요가 있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에서 역사학의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參 考 文 獻 - [斗溪 李丙燾博士 九旬紀念 招待 座談會 速記錄], {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7. [斗溪 李丙燾博士 年譜], {震檀學報} 제71 72합집, 1991. [사학자 李丙燾의 우봉李씨 집안 -주간연재 新名家(2)-], 조선일보 1995.1.11.(27) 旗田巍 著, 李基東 譯, [日本에 있어서의 韓國史硏究의 傳統], {日本人의 韓國觀}, 일조각, 1983. ; {韓國史市民講座} 제1집, 일조각, 1987. 旗田巍 著, 李基東 譯, [津田左右吉의 韓國史硏究], {日本人의 韓國觀}, 일조각, 1983. 旗田巍 著, 李基東 譯, [韓國史硏究를 돌이켜보며], {日本人의 韓國觀}, 일조각, 1983. 金榮漢, [實證主義史觀 -콩트와 버클을 중심으로-], {史觀이란 무엇인가}, 청람, 1980. 金泳鎬, [歷史認識의 두 潮流], {문학과 지성} 1977년 여름호(제8권 2호, 통권28호). 金容燮, [日本·韓國에 있어서의 韓國史敍述], {역사학보} 31, 1966. 金容燮, [우리나라 近代 歷史學의 發達], {문학과 지성} 1971년 여름호(제2권 2호, 통권4호). ; 李佑成·姜萬吉 編, {韓國의 歷史認識 下}, 창작과 비평사, 1976. 金容燮, [우리나라 近代 歷史學의 發達 2 -1930 40년대의 實證主義歷史學], {문학과 지성} 1972년 가을호(제2권 3호, 통권5호). 金元龍, [三國時代의 開始에 관한 一考察 -三國史記와 樂浪郡에 대한 再檢討-], {東亞文化},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1967. 金貞培, ['辰國'과 '韓'에 關한 考察], {史叢} 12 13합집, 고려대학교 사학회, 1968. 金貞培, [韓國古代史의 過去와 現在], {문학과 지성} 1973년 여름호(제4권 2호). 金貞培,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의 諸問題 -益山의 靑銅器文化와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13, 1976. 金貞培, [三韓社會의 "國"의 解釋問題], {韓國史硏究} 26, 1979. 金哲埈, [韓國古代史學의 方向 -回顧와 展望-],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1975. 金哲埈, [韓國의 歷史學], {韓國史學史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邊太燮, [韓國古代史硏究 30年], {韓國史의 省察}, 삼영사, 1978. 邊太燮, [韓國史硏究의 方法論問題 -새로운 問題意識과 硏究方法의 要求], {韓國史의 省察}, 삼영사, 1978. 邊太燮, [한국사학의 학풍 한 세대 -서울대학교의 한국사연구-], {韓國史의 省察}, 삼영사, 1978. 申瀅植, [韓國古代史硏究의 成果와 推移],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1984. 李基白, [社會經濟史學과 實證史學의 問題], {民族과 歷史}, 일조각, 1971. 李基白, [일제시대 韓國史觀 批判 - 日帝時代의 社會經濟史學과 實證史學], {문학과 지성} 1971년 봄호(제2권 1호, 통권3호). 李基白, [近代 韓國史學의 發展], {韓國史學의 方向}, 일조각, 1978. 李基白, [近代 韓國史學에 대한 硏究와 反省], {韓國史學의 方向}, 일조각, 1978. 李基白, [現代 韓國史學의 方向], {韓國史學의 方向}, 일조각, 1978. 李基白, [半島的 性格論 批判], {韓國史市民講座} 제1집, 일조각, 1987. 李基白, [著述을 통해 본 斗溪史學], {출판저널} 47, 1989. ; {韓國史像의 再構成}, 일조각, 1991. 李萬烈, [日帝官學者들의 植民主義史觀], {韓國近代歷史學의 理解}, 문학과 지성사, 1981. 李萬烈, [한국 近代史學의 계보 - 人脈으로 살펴본 한국의 學界], {韓國近代歷史學의 理解}, 문학과 지성사, 1981. 李丙燾, [過去의 指導理念], {국사와 지도이념}, 일조각, 1955. 李丙燾, [民族의 抗爭], {斗溪雜筆}, 평화당, 1956. 李丙燾, [나의 硏究生活의 回顧], {斗溪雜筆}, 평화당, 1956. 李丙燾, {韓國史大觀}, 보문각, 1950. (개정판, 1964.) 李丙燾, [나와 나의 祖國], {내가 본 어제와 오늘}, 신광문화사, 1966. 李丙燾, [自號(斗溪)풀이], {내가 본 어제와 오늘}, 신광문화사, 1966. 李丙燾, [自序],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序說, 박영사, 1976. 李丙燾, [百濟의 建國問題와 馬韓中心勢力의 變動],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李丙燾, [風納里土城과 百濟時代의 蛇城],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李丙燾, [第3回 開會辭], 震檀學會 편, {韓國古典 심포지움 제1집}, 일조각, 1980. 李淸源, [震檀學報 第3卷을 읽고], {震檀學報} 4, 1936. 任昌淳, [辰韓位置攷], {史學硏究} 6, 1959. 千寬宇, [韓國史硏究 百年], 李佑成·姜萬吉 編, {韓國의 歷史認識 上}, 창작과 비평사, 1976.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韓國學報} 3, 1976. 韓永愚, [이병도],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하}, 창작과 비평사, 1994. 洪承基, [實證史學論], {現代 韓國史學과 史觀}, 일조각, 1991. Ⅰ. 저서
{譯註 三國史記}(3책), 博文囥, 1941 {朝鮮史大觀}, 同志社, 1948 {高麗時代의 硏究}, 乙酉文化社, 1948 {譯註 하멜漂流記}, 一潮閣, 1954 {韓國史}(古代篇), 乙酉文化社, 1959 {韓國史}(中世篇), 乙酉文化社, 1961 {新修 國史大觀}, 普文閣, 1954 {國史와 指導理念}, 一潮閣, 1955 {對譯詳註 三國史記}(3책), 春潮社, 1956 {譯註 三國遺事}, 東國文化社, 1956 {斗溪雜筆}, 一潮閣, 1956 {資料韓國儒學史草稿}, 서울대 國史硏究室, 1959 {韓國史}(古代篇), 乙酉文化社, 1959 {韓國史}(中世篇), 乙酉文化社, 1961 {韓國史大觀}({國史大觀} 修補篇), 普文閣, 1964 {내가 본 어제와 오늘}, 新光文化社, 1966 {韓國古代社會와 그 文化}, 瑞文堂, 1972 {栗谷의 生涯와 思想}, 瑞文堂, 1973 {斗室餘滴}, 博英社, 1975 {修正版 譯註蘭船濟州島難破記}, 一潮閣, 1975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修正版 譯註拄原文 三國遺事}, 廣曺出版社, 1976 {國譯 三國史記}(原文·國譯 각 1책), 乙酉文化社, 1977 {韓國의 儒學思想}(韓國思想全集 2·共譯), 三省出版社, 1981 {成己集}, 正和出版文化社, 1983 {韓國史의 理解}, 三省出版社, 1984 {나의 人生觀}, 徽文出版社, 1984 {韓國儒學史略}(漢文本), 亞細亞文化社, 1986 {韓國儒學史}(國文本), 民族文化推進會, 1987 Ⅱ. 논문 [高句麗國民의 氣象과 勞力], {開闢} 61호(6권 7호), 1925년 7월호 [李栗谷의 入山動機에 對하여], {朝鮮史學} 1-1, 1926.1 [陰陽地理와 그 傳來에 對하여], {朝鮮史學} 1-2, 1926.2 [世宗大王의 偉業 一般], {新民} 2권 5호, 1926년 5월호 [妙淸의 遷都運動에 對한 考察], {史學雜誌} 38-9, 1927.9 [高麗三蘇考], {東洋學報} 16-4, 1927.12 [李退溪와 李栗谷], {別乾坤} 3권 2·3호, 1928년 5월호 [古朝鮮 四郡 疆域考(1)], {한빛} 4·5합호, 1928년 5월호 [古朝鮮 四郡 疆域考(2)], {한빛} 6호, 1928년 7월호 [權陽村의 入圖學說에 對하여(上)], {東洋學報} 17-4, 1929.4 [權陽村의 入圖學說에 對하여(下)], {東洋學報} 18-1, 1929.8 [眞番郡考], {史學雜誌} 40-5, 1929.5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玄砺郡及臨屯郡考], {史學雜誌} 41-4·5, 1930.4·5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李朝初期の 建郡問題], {朝鮮學報} 1권 1호, 1930.8 [李朝初期の 建郡問題(2)], {朝鮮學報} 1권 2호, 1930.9 [高麗 南京 建置に 就にて], {靑丘學叢} 2호, 1930년 12월 [平壤의 羅城 及 在城考], {靑丘學叢} 3, 1931.2 [高麗西京의 左右宮 及 龍堰宮], {靑丘學叢} 4, 1931.5 [高麗初期의 圖讖及神秘思想], 雜誌{朝鮮} 207-210, 1932.9-1932.12 [浿水考], {靑丘學叢} 13호, 1933년 8월 [所謂箕子八條敎에 對하여], {市村博士古稀紀念 東洋論叢}, 1933.8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洛東江史話], {新東亞} 4권 7호, 1934년 7월호 [震檀辯], {震檀學報} 1, 1934.11 [三韓問題의 新考察(1)], {震壇學報} 1권, 1934년 11월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Slawiks氏에게 答함 -浿水問題에 關하여-], {震檀學報} 2, 1935.4 [三韓問題의 新考察(2)], {震壇學報} 3권, 1935년 9월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新羅의 社會制度], {朝光} 1권 1호, 1935년 11월호 [徐花潭 及 李蓮坊에 對한 小考], {震壇學報} 4권, 1936년 4월 [三韓問題의 新考察(3)], {震壇學報} 4권, 1936년 4월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三韓問題의 新考察(4)], {震壇學報} 5권, 1936년 7월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三韓問題의 新考察(5)], {震壇學報} 6권, 1936년 11월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李晦齋와 그 學問], {震壇學報} 6권, 1936년 11월 [高麗文武王과 長源亭創構], {震壇學報} 6권, 1936년 11월 [儒學上으로 본 栗谷先生], {朝光} 3권 2호, 1937년 2월호 [三韓問題의 新考察(6)], {震壇學報} 7권, 1937년 3월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三韓問題의 新考察(完)], {震壇學報} 8권, 1937년 11월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世宗朝의 國都主山問題], {震壇學報} 8권, 1937년 11월 [成硏經齋興其學術述略], {稻葉博士還曆紀念 滿鮮史論叢}, 1938.6 [李朝初期의 建都問題], {震壇學報} 9권, 1938년 7월 [하멜 漂流記에 對하여], {博文} 1권 1호, 1938년 10월호 [圖讖에 對한 一二의 考察(1)], {震壇學報} 10권, 1939년 4월 [廣州風納里 土城과 百濟時代의 蛇城], {震檀學報} 10권, 1939년 4월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湖岩文一平氏의 生涯와 業績 - 史家로서의 故 湖岩], {朝光} 5권 6호, 1939년 6월호 [廣州夢村土城址 - 百濟時代의 城址], {震檀學報} 11, 1939.12 [水田 起源考], {文章} 2권 8호, 1940년 10월호 [高麗 辛宗朝의 山川 裨補 얘기], {朝光} 6권 12호, 1940년 6권 12호, 1940년 12월호 [三國史記 解說(上)], {博文} 3권 9호, 1940년 12월호 [三國史記 解說(下)], {博文} 4권 1호, 1941년 1월호 [佛敎와 新羅文化], {朝光} 7권 3호, 1941년 3월호 [三國時代 文化의 種類], {朝光} 7권 8호, 1941년 8월호 [朝鮮 古代城郭에 就하여], {朝光} 7권 11호, 1941년 11월호 [新羅文化의 特徵], {史海} 1, 1948.12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薯童說話에 對한 新考察], {歷史學報} 1, 1952.9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古代南堂考 -原始集會所와 南堂-], {서울大論文集 人文社會科學} 제1집, 1954.3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江西古墳壁畵의 硏究 -主로 大墓壁畵에 대한 硏究-], {東方學志} 1, 1954.7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阿斯達과 朝鮮 -특히 그 名稱에 對하여-], {서울大論文集 人文社會科學} 제2집, 1955.6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陽明書之傳來與退溪之辯斥], {庸齋白南濬博士還甲紀念 國學論叢}, 1955.12 [高句麗 國號考], {서울大論文集 人文社會科學} 제3집, 1956.4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衛氏朝鮮 興亡考], {서울大論文集 人文社會科學} 제4집, 1956.9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高句麗 東黃城考], {東國史學} 4, 1956.12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壬申誓記石에 對하여], {서울大論文集 人文社會科學} 제5집, 1957.4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栗谷先生論], {國譯栗谷全書精選}, 1957.5 [東國新續三綱行實에 對하여], {影印東國新續三綱行實 (乾)}, 1958.11 [光海君의 對後金政策], {國史上의 諸問題} 1, 1959.3 [鄭三峰의 儒佛觀], {白性郁博士頌壽紀念 佛敎學論叢}, 1959.7 [從地理歷史上看韓中關係], {大陸雜誌} 20-4, 1959.2 [北漢山州 置廢問題], {鄕土서울} 6호, 1959.12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鄭尙驥와 東國地圖], {書誌} 1-1, 1960.1 [東學敎門과 그 發生의 諸道因], {國史上의 諸問題} 6, 1960.4 [李藕船與其舊藏三四碩], {慶祝董作賓先生 65歲論文集}, 1960.7 [唐法藏寄新羅義湘書에 對하여], {書誌} 2-1, 1960.8 [舊三國의 墓制의 二三에 對하여], {朝鮮學報} 23, 1962.4 [首露王考], {歷史學報} 제17·18합집호, 1962.6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首露王陵考], {大東文化硏究}, 1963.8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新羅人의 肉體美觀], {李相伯博士華甲紀念論叢}, 1964.9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地理歷史上으로 본 湖南], {湖南文化硏究} 제2집, 1964.9 [高句麗의 一部遺民에 對한 唐의 抽戶政策], {震檀學報} 제25·26·27합병호, 1964.12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金正浩와 그 地圖에 對하여], {人物韓國史} 4, 1965.4 ['于山' '竹島' 名稱考], {趙明基博士華甲紀念 佛敎史學論叢}, 1965.5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두레'와 그 名稱에 對한 再考察], {李秉岐博士 75紀念論叢}, 1966.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奎章閣所藏 [靑莊館全書]에 對하여], {서울大學校古典刊行會影印 靑莊館全書} 卷1, 1966.7 [高麗南班考], {서울大論文集 人文社會科學} 제12집, 1966.10 [漢陽城郭考 -특히 前期를 中心으로-], {鄕土서울} 28호, 1966.12 [朴西溪와 反朱子學的思想], {大東文化硏究} 제3집, 1966.12 [洪景來亂과 定州城圖], {白山學報} 제3호, 1967.12 [經世家로서의 李栗谷에 對하여], {朝鮮學報} 제48호, 1968.7 [韓國古代社會의 井泉信仰], {韓國古代史硏究}, 1968.10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金庾信墓考], {金載元博士 回甲紀念論文集}, 1969.12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韓國儒學思想 學說的論爭一段], {香港儒學在世界論文集}, 1969.3 [金正浩의 靑邱圖 解題], {民族文化推進會發行 影印本 靑邱圖}, 1970.7 [百濟近肖古王 拓境考], {百濟硏究} 제1호, 1970.10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日本天理圖書館所藏 [唐法藏致新羅義湘書(墨簡)]], 天理圖書館發行 {ビブリア} 48, 1971.6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 {百濟硏究} 제2집, 1971.10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光海朝의 遷都論과 京內兩闕創建에 對하여], {震檀學報} 제33호, 1972.6 [蘇那曷叱智考], {日本書紀硏究} 제6책, 1972.10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百濟武寧王陵出土 誌石에 對하여], {學術院論文集 人文社會科學} 제11호, 1972.11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慰禮考], {學術院論文集 人文社會科學} 제14호, 1974.9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百濟七支刀考], {震檀學報} 제38호, 1974.9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新羅佛敎의 浸透過程과 異次頓殉敎問題의 新考察], {學術院論文集 人文社會科學} 제15호, 1975.10 ;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高麗時代의 圖讖思想], {韓國思想} 제13호, 1975.12 [慶州瑞鳳塚出土銀合銘文考], Mélanges de Coréanologie offerts à M.Charles Haguenauer, 1979 [靑莊館全書 解題](改稿), {民族文化推進會刊行 靑莊館全書}, 1979. [中原高句麗碑에 對하여], {史學志} 제13집 및 {신동아} 1979년 9월호, 1979.11 [士林의 社會參與], {松汀古稀紀念論文集}, 1982.10 [西原新羅寺事蹟碑에 對하여](일본), {アジア公論}, 1982.12 [西原新羅寺事蹟碑에 對하여], {湖南文化硏究} 3, 1983.6 [北漢山 文殊寺內의 石窟], {震檀學報} 61호, 198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