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 동이전》서문의 '동이' 관련글
▶ 자료 출처 :《중국정사조선열국전》□□□編譯. 서울 東文選. 1996.
03〔言-05/01〕《王制》云: 「東方曰夷.」 夷者, 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1]故天性柔順, 易以道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2]夷有九種,[3]曰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4]故孔子欲居九夷也.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을 ‘이夷’라 한다」 하였다. ‘이夷’라는 것은 ‘근본이 되는 뿌리’라는 의미이니, 어질고 자애심이 많아 살생을 꺼려 마치 만물이 뿌리 되는 땅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천성이 유순하여 법도로서 다스리기 쉬워 군자의 나라(君子國), 또는 죽지 않는 나라(不死國)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夷’에는 아홉 종류이 있으니 견이 · 우이 · 방이 · 황이 · 백이 · 적이 · 현이 · 풍이 · 양이 등이다. 때문에 공자는 구이九夷에 머무르고자 하였다.
【1】事見《風俗通》.
【2】《山海經》曰: 「君子國衣冠帶劒, 食獸, 使二文虎在旁.」《外國圖》曰: 「去琅邪三萬里.」《山海經》又曰: 「不死人在交脛東, 其爲人黑色, 壽不死.」 並在東方也.
【3】《竹書紀年》曰: 「后芬發卽位三年, 九夷來御」也.
【4】《竹書紀年》曰: 「后泄二十一年, 命畎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后相卽位二年, 征黃夷. 七年, 于夷來賓, 後少康卽位, 方夷來賓」也.
【1】《풍속통風俗通》에 이 내용이 보인다.
【2】《산해경山海經》에 이르기를 「군자국君子國에서는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고 두 마리의 무늬 있는 범을 곁에 두고 부린다」라고 하였다.《외국도外國圖》에 이르기를 「낭야琅邪와는 3만 리 떨어져 있다」라고 하였다.《산해경》에 또 이르기를 「죽지않는 사람(不死人)은 교경국交脛國의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몸빛이 검으며 장수를 누리고 죽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 모두가 동방에 있다.
【3】《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이르기를 「후분발后芬發의 즉위 3년에 구이九夷가 와서 시중을 들었다」라고 하였다.
【4】《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설后泄 21년에 견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 등에게 명을 내렸다. 후상后相 즉위 2년에 황이黃夷를 정벌하였다. 7년에 우이于夷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하였으며, 뒤에 소강少康이 즉위하자 방이方夷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하였다」라고 하였다.
03〔言-05/02〕昔堯命羲仲宅嵎夷, 曰暘谷, 蓋日之所出也.[1]夏后氏.太康失德, 夷人始畔.[2]自少康已後, 世服王化, 遂賓於王門, 獻其樂舞.[3]桀爲暴虐, 諸夷內侵, 殷湯革命, 伐而定之. 至于仲丁, 藍夷作寇.[4]自是或服或畔, 三百餘年. 武乙衰敝, 東夷寖盛, 遂分遷淮‧岱, 漸居中土.[5]
옛날 요堯가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嵎夷의 땅에 자리잡아 그들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바로 양곡暘谷이라 일컬어지는 곳으로 대저 해가 솟아나는 곳이다. 하후씨 태강太康이 덕을 잃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배반하였다. 소강少康 이후부터 대대로 왕의 교화敎化를 입더니, 마침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며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쳤다.
걸桀이 난폭하고 잔악해지자 여러 이夷들이 침범하여 들어왔으며, 은殷의 탕湯이 혁명하여 그들을 정벌하고 안정시켰다. 중정仲丁 때 이르러 남이藍夷가 노략질을 하였다. 이때부터 3백여 년 동안을 혹은 복종하고 혹은 배반하였다. 무을武乙 때 (은殷은) 쇠퇴하여 피폐해지고 동이東夷는 점차 번성하여지니, 마침내 회淮와 대岱의 지방으로 나누어 옮겨와 점차 중국의 영토를 점거하게 되었다.
【1】孔安國《尙書》注曰: 「東方之地曰嵎夷. 暘谷, 日之所出也」.
【2】太康, 啓之子也. 槃于游田, 十旬不反, 不恤人事, 爲羿所逐也.
【3】少康, 帝仲康之孫, 帝相子也.《竹書紀年》曰: 「后發卽位元年, 諸夷賓于王門, 諸夷入舞.」
【4】仲丁, 殷.大戊之子也.《竹書紀年》曰: 「仲丁卽位, 征于藍夷」也.
【5】武乙, 帝庚丁之子, 無道, 爲革囊盛血, 仰而射之, 命曰: 「射天」也.
【1】공안국이《상서尙書》의 주석에서 말하였다. 「동방의 땅을 우이嵎夷라 한다. 양곡暘谷은 해가 솟아오르는 곳이다.」
【2】태강太康은 계啓의 아들이다. 사냥터에 머무르면 1백 일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았으며, 백성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 예羿에 의해 쫓겨났다.
【3】소강少康은 천자 중강仲康의 손자이며 천자 상相의 아들이다.《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발后發 즉위 원년에 여러 이夷들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였으며, 또한 여러 이夷들이 들어와 춤을 추었다」라고 하였다.
【4】중정仲丁은 은殷 나라 대무大戊의 아들이다.《죽서기년》에 이르기를 「중정仲丁이 즉위하여 남이藍夷를 정벌하였다」라고 하였다.
【5】무을武乙은 천자 경정庚丁의 아들인데, 무도하여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피를 가득 담아 높은 곳에 걸어두고, 활로 쏘며 이르기를 「하늘을 쏜다」라 하였다.
03〔言-05/03〕及武王滅紂, 肅愼來獻石砮‧楛矢. 管‧蔡畔周, 乃招誘夷狄, 周公征之, 遂定東夷.[1]康王之時, 肅愼復至. 後徐夷僭號, 乃率九夷以伐宗周, 西至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2]偃王處潢池東, 地方五百里,[3]行仁義, 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 穆王後得驥騄之乘,[4]乃使造父御以告楚, 令伐徐, 一日而至.[5]於是楚.文王大擧兵而滅之. 偃王仁而無權, 不忍鬪其人, 故致於敗. 乃北走彭城.武原縣.東山下, 百姓隨之者以萬數, 因名其山爲徐山.[6]厲王無道, 淮夷入寇, 王命虢仲征之, 不克, 宣王復命召公伐而平之.[7]及幽王淫亂, 四夷交侵, 至齊桓修覇, 攘而卻焉. 及楚靈會申, 亦來豫盟.[8]後越遷琅邪, 與共征戰, 遂陵暴諸夏, 侵滅小邦.
무왕武王이 주紂를 멸하자 숙신肅愼이 들어와 돌화살촉(石砮)과 호목화살(楛矢)을 바쳤다. 관숙과 채숙이 주周를 배반하고 이적夷狄을 꾀어들이자 주공周公이 이를 정벌하여 마침내 동이를 평정했다. 강왕康王 때 숙신이 다시 들어왔다.
후에 서이徐夷가 신분에 넘치는 칭호로 스스로 일컬으며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宗周를 정벌하고자 서쪽으로 나와 하수河水의 상류에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 세력이 한창 강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서언왕徐偃王에게 명하여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언왕偃王은 황지潢池의 동쪽에 거처하고 있었으니, 땅은 사방 5백 리에 행위가 어질고 의로워 뭍길로 배알하러 오는 것이 서른여섯 나라였다. 목왕이 후에 기록驥騄 등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얻어 조보造父로 하여금 이를 몰아 초楚에 가서 알리고, 서국의 정벌을 명하게 하니 하루 만에 초에 이르렀다. 그러자 초 문왕文王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망시켰다. 언왕은 어질고도 권도權道의 술수가 없었으며, 그 사람됨이 차마 전투를 감당해 내지 못한 까닭에 패하고 말았다. 이에 북쪽으로 팽성彭城의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자 백성된 자로 그를 따르는 자가 1만여 명이었으니, 그런 연유로 그 산을 서산徐山이라 이름하였다.
여왕厲王이 무도하자 회이淮夷가 들어와 노략질하기에, 왕이 괵중虢仲에게 명하여 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며, 선왕宣王이 다시 소공召公에게 명을 내려 그를 정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유왕幽王에 이르러 음란하고 어지러워 사방의 만이가 번갈아 침략하여 왔으나, 제齊 환공桓公이 패권을 거머쥐게 되자 물리쳐 쫓아 버렸다. 초楚 영왕靈王에 이르러 신申에 제후들을 모이게 하자 역시 와서 참여하여 맹서를 하였다. 후에 월越이 낭야琅邪로 옮겨가 더불어 정벌의 전쟁을 벌이니, 마침내 화하華夏를 능멸하며 포악한 짓을 하고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멸망시켰다.
【1】《尙書》武王崩, 三監及淮夷畔, 周公征之, 作大誥. 又曰, 成王旣伐管叔‧蔡叔, 滅淮夷.
【2】《博物志》曰: 「徐君宮人娠而生卵, 以爲不祥, 棄於水濱. 孤獨母有犬名鵠倉, (持)[得]所棄卵, 銜以歸母, 母覆煖之, 遂成小兒, 生而偃, 故以爲名. 宮人聞之, 乃更錄取. 長襲爲徐君.」 尸子曰: 「偃王有筋而無骨, 故曰偃」也.
【3】《水經注》曰, 黃水一名汪水, 與泡水合, 至沛入泗. 自山陽以東, 海陵以北, 其地當之也.
【4】《史記》曰: 「造父以善御幸於周.繆王, 得赤驥‧盜驪‧驊騮‧騄耳之駟, 西巡狩, 樂而忘歸.」
【5】造父, 解見《蔡邕傳》.
【6】武原, 縣, 故城在今泗州.下邳縣北. 徐山在其東.《博物志》曰: 「徐王妖異不常. 武原縣東十里, 見有徐山石室祠處. 偃王溝通陳.蔡之閒, 得朱弓朱矢, 以己得天瑞, 自稱偃王. 穆王聞之, 遣使乘駟, 一日至楚, 伐之. 偃王仁, 不忍鬪, 爲楚所敗, 北走此山」也.
【7】《毛詩序》曰: 「江漢, 尹吉甫美宣王也. 能興衰撥亂, 命召公平淮夷.」 其詩曰: 「江漢浮浮, 武夫滔滔. 匪安匪游, 淮夷來求. 王命召虎, 式辟四方, 徹我土疆.」
【8】《左傳》楚靈王‧蔡侯‧陳侯‧鄭伯‧許男‧淮夷會于申.
【1】《상서》에 무왕이 죽자 세 재상과 회이淮夷가 반란을 일으키니,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는 대고大誥를 지었다. 또 말하기를 성왕이 관숙과 채숙을 정벌하고 회이를 멸망시켰다.
【2】《박물지》에 이르기를 「서군徐君의 궁녀가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이를 불길하다고 여겨 물가에 버렸다. 고독모孤獨母에게 곡창鵠倉이라 불리는 개가 있었는데, 그 버려진 알을 발견하여 입으로 물고 고독모에게 돌아오자, 고독모가 따뜻하게 덮어 주었더니 마침내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나면서부터 한쪽으로 기우는 까닭에 ‘언偃’이라 이름하였다. 궁녀가 이를 듣고 이내 상을 주고 데려왔다. 장성하여 자리를 물려받아 서국徐國의 임금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시자가 말하였다. 「언왕은 근육은 있으나 뼈가 없는 까닭에 ‘언偃’이라 이름하였다.」
【3】《수경주》에 이르기를 「황수黃水는 일명 왕수汪水라고도 하며 포수泡水와 합해진 후 패수沛水에 이르러 사수泗水로 흘러 들어간다. 산양山陽의 동쪽으로부터 해릉海陵 북쪽의 땅에 흐른다 하였으니 그 땅이 마땅히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4】《사기》에 이르기를 「조보造父는 말을 잘 부리는 것으로 주周 무왕繆王에게 총애를 입었는데, (무왕은) 적기赤驥․도려盜驪․화류驊騮․녹이騄耳 등 네 필의 말이 끄는 사마駟馬 수레를 얻어 서쪽으로 순행하여 수렵을 즐기며 돌아갈 일을 잊었다」라고 하였다.
【5】조보에 관해서는《채옹전蔡邕傳》에 상세히 보인다.
【6】무원武原은 현縣인데 그 옛 성이 지금의 사주泗州 하비현下邳縣의 북쪽에 있다. 서산徐山은 그 동쪽에 있다.《박물지》에 「서왕의 괴이함은 범상치 않다. 무원현 동쪽 10여 리에 있는 서산의 석실에는 제사를 올리던 터를 볼 수 있다. 언왕이 진陳과 채蔡 사이에 물길을 통하게 하고, 붉은 활과 붉은 화살을 얻어 이로 자신이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여기고 스스로 ‘언왕偃王’이라 일컬었다. 목왕穆王이 이를 듣고 사신을 파견하며 사마의 수레를 내주어 하루 만에 초楚에 이르게 하여 초로 하여금 그를 정벌하게끔 하였다. 언왕은 어질어 차마 싸움을 하지 못하니 초에게 패하여 북쪽의 이 산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7】《모시서》에 이르기를 「《시경詩經》의 ‘강한江漢’이라는 시는 주周의 공경대부 윤길보尹吉甫가 선왕宣王을 칭송한 것이다. 선왕은 능히 쇠퇴해진 나라를 일으켜 혼란을 다스리고 소공召公에게 명하여 회이淮夷를 평정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모시毛詩》에 이르기를 「강수江水와 한수漢水가 넘실거리니 병사들의 발걸음 씩씩하네. 즐기는 것도 아니요 노니는 것도 아니라 회이淮夷를 찾아서 간다네. 왕께서 소호召虎에게 명하시어 온 세상을 평정하여 우리의 강토를 바르게 다스림이라」라고 하였다.
【8】《좌전》에 초영왕楚靈王․채후蔡侯․진후陳侯․정백鄭伯․허남許男․회이淮夷 등이 신申에서 회동會同했다고 하였다.
03〔言-05/04〕秦幷六國, 其淮‧泗夷皆散爲民戶. 陳涉起兵, 天下崩潰, 燕人衛滿避地朝鮮,[1]因王其國. 百有餘歲, 武帝滅之, 於是東夷始通上京. 王莽簒位, 貊人寇邊.[2]建武之初, 復來朝貢. 時遼東太守祭肜威讋北方, 聲行海表, 於是濊‧貊‧倭‧韓萬里朝獻, 占攵章‧和已後, 使聘流通. 逮永初多難, 始入寇鈔; 桓‧靈失政, 漸滋曼焉.
진秦이 여섯 나라를 병합하자 그 곳의 회이淮夷와 사이泗夷들이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진섭陳涉이 군사를 일으키니 천하는 혼란 속에 무너지고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피신하여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1백여 년 후에 한 무제武帝가 그 나라를 멸망시키니, 이에 동이가 비로소 상경上京과 통하게 되었다.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자 맥인貊人들이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건무建武(25~56)초에 다시 들어와 조공하였다. 이 때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위세로서 북방을 복종시키니 그 명성이 바다 건너까지 이르러, 예濊․맥貊․왜倭․한韓 등이 1만 리 밖으로부터 와서 조공을 바쳤다. 그리하여 장제章帝와 화제和帝 이후에는 사자를 보내 안부를 묻는 등 서로 소통하게 되었다. 영초永初(107~113)연간에 이르러 어려움이 많자 비로소 쳐들어와 노략질하였으며, 환제桓帝와 영제靈帝가 실정을 하자 점차 더욱 가벼이 여겼다.
【1】《前書》曰: 「朝鮮王滿, 燕人.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築障. 漢興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滿亡命東走, 度浿水, 居秦故空地, 稍役屬朝鮮.蠻夷及故燕‧齊亡(任)[在]者, 王之, 都王險」也.
【2】《前書》莽發高句麗兵當伐胡, 不欲行, 郡縣彊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州郡歸咎於高句麗侯.騶, 嚴尤奏言貉人犯法, 不從騶起, 宜慰安之.
【1】《한서》에 이르기를 「조선의 왕 만滿은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가 번성하였을 때, 일찍이 진번과 조선을 공략하여 예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요새를 건축하였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연에] 속하였으며, 연나라 왕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위만이 망명하며 동쪽으로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빈 땅에 거처하였는데, 점차 조선과 만이蠻夷 및 옛 연燕과 제齊의 도망자들을 점차 복속시키더니,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면서 왕험에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하였다.
【2】《한서》에서 말하기를, 왕망이 고구려의 병사들을 내어 호胡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고구려가 그렇게 하려 들지 않자, 군현郡縣의 위세로 고구려를 강제로 핍박하니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서서 법을 어기고 노략질을 하게 되었다. 주州와 군郡에서 모든 허물을 고구려후 추騶에게 돌리자 엄우가 천자에게 아뢰기를, 맥인들이 법을 어기며 추騶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마땅히 그를 위안하여 주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03〔言-05/05〕自中興之後, 四夷來賓, 雖時有乖畔, 而使驛不絶, 故國俗風土, 可得略記. 東夷率皆土著, 憙飮酒歌舞, 或冠弁衣錦, 器用俎豆. 所謂中國失禮, 求之四夷者也.[1]凡蠻‧夷‧戎‧狄總名四夷者, 猶公‧侯‧伯‧子‧男皆號諸侯云.
(한나라가) 다시 일어나고부터 사방의 만이蠻夷들이 들어와 복종하여 조공을 바쳤으며, 비록 때로 틀어져 배반하기도 하였으나, 사신과 역마驛馬가 끊이지 않았던 까닭에 그 나라들의 습속과 풍토를 간략하게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동이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 음주와 가무를 좋아하였으며, 혹은 예복에 관을 쓰고 비단옷을 입으며 생활의 기구로 제기祭器를 사용하였다. ‘중국에서 예禮를 잃어버리면 사방의 만이에게서 이를 구한다’고 말하는 바가 그것이다. 무릇 만蠻․이夷․융戎․적狄을 함께 일러 사이四夷라고 하는 것은, 마치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을 제후諸侯라 부르는 것과 같다.
【1】《左傳》曰: 「仲尼學鳥名[官]於郯子, 旣而告人曰: ????吾聞之, 天子失官, 學在四夷, 其信也.????」
【2】《좌전》에 이르기를 「중니仲尼가 담자郯子에게 새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칭하는 것을 배우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 천자가 관직을 일컫는 예법을 잃어버리면 사이四夷에게 배운다 하였는데 그것은 믿을 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