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imes 시사논단] 강단사학과 랑케의 망령
(최재완 편집인 2007/10/01 11:34:04)
사관(史觀)에는 대체로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E.H. 카(Carr)가 주창한 [주관적 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L. 랑케(Ranke)의 [객관적 사관]이다. 둘 다 학문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사관이다. <카>는 “역사는 과거 사실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과거 사건의 중요성을 인지·해석·평가해서 재구성할 때 확립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이에 비해 <랑케>는 “역사는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 오직 객관적·역사적 사실만을 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사관]이 도입되고 형성된 시기는 <일제 식민시절>이다. 당연히 일본인들의 사관이 우리 역사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적용된 사관이 당시 일본 사학계를 지배한 [랑케사관]이다. 역사를 배우려고 스스로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갔다고 고백한 <두계 이병도>가 그 사관에 그렇게 매달린 이유가 여기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랑케>는 19세기 독일의 역사관을 주도한 역사가였다. 이러한 19세기말 독일을 개발모델로 삼았던 일본은 [랑케사관]에 입각해 그의 <실증주의 사관>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랑케 사관을 도구로 삼아 우리 한국사를 왜곡*폄하해 이른바 [식민사관]을 정립하는데 특히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랑케>의 [실증주의 사관]은 이론 그 자체로는 그리 큰 모순이나 결함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이론이나 학문이 완벽하지 않듯이 이 사관은 한 가지 큰 결함을 갖고 있었다. 오직 객관적 사실(事實)만을 추구하다 보니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史實)이라도 그것이 문헌 등에서 고증되지 않으면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 모순이 바로 그것이다. 일제가 [랑케사학]을 응용한 이론이 이른바 ‘문헌고증주의’라는 역사이론이다. [문헌고증주의]란 문헌에 나와 있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나 주장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역사이론이다.
일제는 랑케사학의 바로 이런 모순점을 악용하여 우리 역사를 본격적으로 왜곡하고 폄하했다. 그렇게 해서 만든 우리나라 역사가 바로 식민사관에 의한 한국사(이병도의 국사대관을 근본으로 따르는)다. 일제가 저지른 한국사 왜곡은 우리의 역사적 실증 사실을 증명해줄 사서(史書)가 거의 없었다는 걸 알고 출발한다. 그것도 삼국시대 초기 이전의 고대사 영역이 특히 그러했다. 남아있는 史書라야 기껏 불교적 입장에서 서술한 <삼국유사>와 모화주의(慕華主義) 입장에서 서술한 <삼국사기> 정도가 고작이다. 그 이전의 수많은 史書가 병란으로 유실되거나 왜정시대 때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기처분됐다.
여기에서 <삼국사기>가 후세에 남긴 역사적 폐해를 잠깐 집고 넘어가야겠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당시 고려는 북쪽의 거란과 대치하고 있었다. 거란은 발해(大震)를 정복하고 과거 고구려의 강역을 대부분 차지한 몽골리안 국가였다. 통일신라시대도 사실 우리나라는 발해와 신라라는 남북조 2국(國) 체제였다. 그러나 신라가 국가 정통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발해와 친하게 지내지 않고 중국과 오히려 더 친했다.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중기 이후 거란이 들어서자 혹시나 거란이 우리 민족의 정통국가라고 자처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서 <김부식>은 거란을 오랑캐로 몰아 버리고 고려가 한민족의 유일한 정통 왕조임을 주장했다. 그렇게 강변하다 보니 자연 거란의 영토인 만주일대를 포기하게 됐다. 이렇게 <김부식>은 우리의 강역을 한반도 안으로 축소시켰다. 거란을 인정하기 않기 위해서다. 우리가 동아시아 대륙국가에서 반도 국가로 전락한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제가 얼마나 좋아했겠는가? 이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입각해 즉 문헌에 입각해, 우리나라 고대사를 말살시켰다. 특히 황하 이북의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서 2천여 년 간 실존했던 고조선 역사를 신화의 역사로 만들어 그 실존을 부정해 버렸다. 더욱이 민족의 강역도 동아시아에서 한반도 이내로 축소시키고 우리 역사가 시작된 시기를 AD 6-7세기로 조작해 실제 역사보다 몇 천 년이나 후퇴시켰다. 그들의 역사가 6-7세기 때부터이므로 우리나라 역사가 일본역사보다 몇 천 년이나 앞선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서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조수(助手)로 일하던 <이병도>를 비롯한 일단의 사학자들이 해방 후 다른 명망 있는 민족사학자들이 납북되거나 생을 다하는 가운데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우리나라 역사학계를 주도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 역사에 적용한 역사이론이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랑케>의 이론을 교묘하게 악용하여 반대 논리를 제압하는데 즐겨 사용한 [실증주의]와 그에 따른 [문헌고증주의]였다. 일본인 조수로 일하면서 배운 게 그것 밖에 없으니 그럴 만도 하긴 하다. 그들은 문헌에 나와 있지 않은 사실(史實)은 역사로 인정할 수 없다 하여 이를 부정했다. 이러한 [문헌고증주의]에 의해 우리 역사가 더욱 초라해졌다.
그래도 해방 직후 <이병도>는 고조선이 한반도 내에 실존한 고대국가였음을 인정했다(실제로 고조선은 지금의 요녕성과 요동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고조선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을 신화의 나라로 둔갑시켰다. 타국 역사를 오랑캐 역사라고 폄하하는 중국에서조차 고대 史書에 고조선이 실존국가로 기록돼있는데 우리나라 사가(史家)들이 그 실존을 부정하는 이 기묘한 현실을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될까. 우리 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부정하는데 중국이 고조선과 고구려 역사를 한국 역사라고 인정해줄리 만무하다.
며칠 전 [국사편찬위원회]가 ‘상고사토론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토론회에서 발제자들은 고고학적 발굴 결과 요하 유역의 중국 내몽고 츠펑(赤蜂) 일대와 요녕성 차오양(朝陽) 일대에서 황하 문명을 훨씬 앞지르는 신석기와 청동기 유적이 대거 발굴됐다고 말했다. 발굴 결과 한민족 정체성을 상징하는 빗살무늬(櫛文) 토기 및 돌무덤, 석성, 비파형 청동검이 발굴됐다. 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의 상징인 용과 옥 장식물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제자들은 이를 미루어 보아 이 [요하문명]은 한민족 문화의 시발이 되었다고 밝혔다. 또 이 요하문명의 일부가 남하해 황화문명과 결합해 중국문명을 이뤘다는 ‘문명의 공통 시원(共通 始原)’을 주장했다.
바라건대 우리 사학계도 이제는 더 이상 그 시덥지 않은 [실증주의]와 [문헌고증주의]라는 늪에 빠져 있지 말아야 겠다. <요하 문명> 등 고고학적 발견을 토대로 보다 광범위한 학문적 분석과 조사를 통해 우리의 고대사 영역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성이 절박하다. 이런 측면에서 [국사편찬위의 상고사 토론회]가 우리 역사학계의 오래도록 병폐로 온존하고 있었던 고답적 인식을 뒤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으면 한다.
[새로운 역사인식]이야 말로 지금까지 왜곡돼 있는 우리 역사를 바르게 되찾는 동기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런 역사인식은 요하 문명을 또 자기네 문명이라고 우길지 모르는 중국의 ‘동북아 공정’ 의도를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을 마련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토록 지속되어 오던 [랑케의 망령]이 우리 역사학계를 떠날 때도 되었다.
[덧글] - 월간조선 2002년 10월 인물과 인터뷰
[인물사전(人物辭典) 조남준(趙南俊) 월간조선(月刊朝鮮) 부국장 대우(njcho@chosun.com)의 명문가(名門家) 이야기]를 주제로 두계 이병도(斗溪 李丙燾)와 학자 인맥을 논하는 좌담에서
박성수(朴成壽) 전(前)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두계(斗溪)를 자못 존경하는 뜻으로 미사여구를 총동원하다가 독일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에 비유하며 입에 침을 연신 바른 것은 정말 정확한 표현(?)같다.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