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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역사왜곡사례 - 한사군 문제

송화강 2019-05-27 (월) 16:59 6년전 5863  

역사왜곡사례 - 한사군 문제

(김종욱 선생님의 글입니다)


「한민족의 저력」을 쓰신 <김종욱> 선생님의 글을 본문에다가 재 소개합니다. 전문은 다음 파일로 첨부 합니다(출처:한 민족의 저력 http://www.hanhim.org)

 

 

[이 글을 올린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머리말]


지금도 첨예한 대립 각을 세우며 또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한사군]의 [존재유무]와 [위치비정]이 왜 중요한 관건인가를 말씀드리기 위한 서두(序頭)입니다. 바로 이 쟁점들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외세지배론]의 핵심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사편수>를 빌미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는 3대 요건이 필요하다는 <일제의 내부원칙-중추원 령에 근거한 총독부 지침>에 


그 첫째가 상고사와 국조의 부정이고, 

둘째가 동양사의 주체였던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압축해 버리는 것 

마지막 셋째가 한국 민족은 오늘날까지 제대로 완전한 독립을 해 본적이 없고 주인도 없고 뿌리도 없는 유랑민으로서 무능하고 부패하고 민족분열을 일삼는 망국 근성의 민족인 것처럼 자타가 공인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왜 그렇게 한사군의 반도 비정과 한사군의 존재고착에 매달리는 이유가 자명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충실히 따라가며 완성된 [조선역사]는 위의 요건을 금과옥조로 삼았고 또 단군조선의 말살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왔던 당시 일본의 가장 어용 사학자 이마니시류(금서룡)같은 이를 전면에 중추인물로 세움으로써 그 의도가 명백해졌다. 



아울러 조선사 편수의 시대 구분에서도 위와 같은 의도가 엿보이는데 


1916년 1월의 회의 때 결의한 시대구분인 상고, 삼국, 통일신라 등이 

1923년 1월 8일 제 1차 위원회 회의에서 삼국 이전, 삼국시대, 신라시대로, 

1925년 10월 8일 제 1차 위원회 때는 신라통일 이전, 신라통일 시대로 압축되었던 


미묘한 흐름이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위와 같은 의도는 확연히 드러나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살펴보면 


조선의 반도적 지리 요건으로 인해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점(반도 북부는 중국의 신민지, 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 

조선역사는 위만 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추론의 근거 부각. 

조선인은 자립, 자치 능력이 없는 민족이다 라는 결론의 유도 등이다. 


위와 같은 일제의 의도가 너무도 뻔한 조선사의 편찬이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커진다. 일례로 광복 후 출판된 권위 있는 역사 사전마저 '<조선사>가 비록 일본의 식민통치아래 유화정책으로 된 것이기는 하나 색인이 없는 사료의 이용을 위해서는 많은 편리를 준다.'라고 손을 들어줌으로서 그 망령의 해독을 아직까지 끼치고 있다는 슬픈 현실 때문이다. 


[본문]


단제 신채호(丹齋 申采浩) 선생이 말씀하신대로 “역사(歷史)는 애국심(愛國心)의 원천(源泉)이다”라고 생각하면 일제(日帝)가 왜 우리의 역사를 말살 왜곡하려했는지 그 답이 확연하게 나온다.


<조선사 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조선사 35권]의 역사 체계와 그 내용들이 조선사 편찬에 가담했던 <두계 이병도 박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해방 후 국립 서울대학교를 온상으로 하여 학술회원으로서, 국사편찬위원장으로서 양성했던 후진(後進)들에 의해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이 말은 우리나라 사학계 전반에 걸쳐 아직도 식민 사학의 잔재가 온전히 남아 지속적으로 전해오고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식민사학]의 논리 중 <우리 역사가 위만 조선과 한사군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사왜곡의 핵심은 단연 “한사군 문제”이다.


때문에 <임승국 교수>는 <한국 상고사韓國 上古史>에 중첩되는 모순 부실 허구 가운데 한사군의 음모만큼 심각한 문제 거리는 없다>라고 한 바 있고, 또한 <한암당 이유립李裕 선생>은 <어떻든 국사 찾기는 한사군漢四郡의 허구성을 올바르게 고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임을 다시 강조한다>라고 일찍이 말한 바 있다.


이리하여, [한사군 문제]를 재조명하면서 그 왜곡된 바를 시정하여 올바른 민족사 교육으로 역사가 애국심의 원천이 되게 하고자 그간의 연구업적을 제도권(制度圈)과 재야(在野)를 망라하여 다각도로 검토해보았다.



1. [한사군] 전후의 동아시아 국제관계


<진시황>의 뒤를 이어 한 고조(漢 高祖) 유방(劉邦)이 한(漢)나라를 건국한 B.C 200년대 무렵 동아(東亞)의 정세는 동호(東胡 -고조선 고구려 초)와 흉노(匈奴)와 지나족(支那族)이 병립하던 시대였다.


또한 한 고조 유방(劉邦)과 흉노 선우(單于), 그리고 <선우>에게 「천리마千里馬」와 「애첩愛妾」과 「공한지空閑地」를 내어놓으라고 강압적으로 군림할만한 세력이었던 [사기 흉노전]이 전하는 성명미상의 동호왕(東胡王)이 자웅을 겨루었던 시대이다.


이 중 漢나라의 <고조>만은 농경족의 수장(首長)으로 진(秦)나라를 물려받았을 뿐 유목민족인 동호와 흉노에게 굴욕과 찬탈을 다반사로 당하던 제왕이며 만리장성의 문을 걸어 잠그고 수세(守勢)만을 지켜온 옹졸하고 비겁한 인물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흉노>와 <漢>과의 굴욕적인 관계가 7대 무제 유철(武帝 劉徹)은 물론이요 그 3대 뒤인 10대 원제(元帝)때 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양계초>가 지적한 바대로 <중국역사에서 외족(外族) 침입 중 가장 많이 괴롭힌 자는 동호(東胡)였다. <동호>는 춘추시대 초기부터 동북아시아에 있었던 강대족(强大族)으로서 연(燕)을 침략하였으며...... 진 한(秦 漢) 시대에는 흉노(匈奴)가 강성하여 모든 이민족(異民族)이 흉노의 지배 하에 통일되었으나 오직 동호(東胡)만이 강대(强大)하여 흉노에 대립하였다> 는 형세였다.


이러한 국제 관계의 와중에서 소위 [한사군 전쟁]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전쟁의 결과는 <위만조선>의 조선족 원거주민출신 장상(將相)들의 내부 반역에 힘입어 종결되었고, 이어 조선을 평정한 다음 [4郡]을 두었으되


<삼>을 홰청후,

<음>을 적저후,

<겹>을 평주후,

<최>를 날양후로 봉하였다는 것으로서


※ 여기에서 어떤 분들은 원래 5명의 후(侯)인데 어찌 4郡으로 끼어 맞추느냐? 하면서 반론의 근거로 삼는데 나머지 한 사람인 <장 혹은 장각>은 무제가 자기 나라의 땅을 떼어주어 기후(畿侯)로 봉한 것임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도 초점을 흐리려고 물고 늘어진 것인지?



따라서 이는 [조선 4군]이지 나중에 말하는 [漢四郡]이랄 수 없다는 사실이고 이들 4인의 <후>는 [사기 年表]에 정확하게 기록되었지만 소위 [漢四郡]은 사기 연표에 기록이 없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위산, 공손수, 순체, 양복, 섭하(전사), 卒正 多(인명)>는 참수로 모두 죽음을 당한, 그래서 사마천 자신도 냉정히 인정한 바대로 漢나라 측에서 볼 때에도 명백히 패배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사군 문제]에 대하여 <제도권 사학자>들과 <재야 사학자>들 간에 팽팽히 맞선 주장을 하나하나 살펴보겠다.



2. 한사군(漢四郡)의 유무(有無) 문제


<이병도> 계열의 [제도권 학자]들은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1차 사료史料>인 『사기 조선전 史記 朝鮮傳」 대신에 그보다 200여 년 후에『사기史記』 원전에 <낙랑樂浪, 현도玄 , 임둔臨屯, 진번眞番>의 여덟 자를 추가하여 기록한 반고(班固)의『후한서後漢書』를 근거로 한사군(漢四郡)이 존재하였음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제도권인 <윤내현> 교수와 재야사학자들은 <1차적으로 기본으로 삼아야 할 사료史料>인 『사기史記』원전에 [漢四郡]이 없었으므로 [漢四郡]을 부정하였고, 그 대신 위만(衛滿)을 멸한 지역에 조선(朝鮮) 의 將相들에게 諸侯로 임명한 지역의 <홰청, 날양, 적저, 평주군>이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윤내현> 교수는 [한사군]이야 말로 아무리 양보한다 하더라도 겨우 서한(西漢)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사마천(司馬遷) 자신이 직접 목격(直接 目擊)하고 기록한 <1차 史料>에 없는 것을 후세 기록자가 그 기록에 추가하여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가필한 내용>을 인 정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덧글]


이들은 이른바 눈속임을 한 것이다. 해방 후 아무도 이병도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고 또 현재만큼 다양하고 박식한 많은 고전연구가들과 사학가들이 없었으며 또 있었다손 치더라도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정황을 최대한 그리고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렇게 후학(後學)들을 현혹시키고 말았다. 이는 명백한 사기이며 학문적 범죄행위이다.



3. 조선(朝鮮)에 설치된 [漢四郡]이 아니라도 한(漢)의 행정구역(行政區域)으로써의 사군(四郡)이 어디에 있었느냐 위치의 문제


제도권에서는


흉노전(匈奴傳)과 [한사군 전쟁] 십 년 전에 이미 죽은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무릉서(茂陵書) 그리고 <대동강 유역 평양지역>에 발굴된 유적 유물을 근거로, 또 漢나라 계통의 중국계 유물분포가 <청천강>을 경계로 구분된다는 점을 들어 [청천강이 패수浿水요 고로 낙랑군樂浪郡이 평양平壤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윤내현> 교수와 재야사학자들은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이 상호계승관계로서 같은 위치에 존재해야하고 기자조선(箕子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있던 지역에 수성현(遂城縣)과 갈석산(碣石山)이 있는 것이 증명된 사실들을 들어 낙랑군(樂浪郡) 등 소위 [漢四郡]은 지금의 난하유역( 河流域)이라고 주장하였다.


패수(浿水)가 여러 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인 바 위만(衛滿)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 한반도의 평양(平壤)까지 도달하는데 수 십 개의 강을 건너야하는데 하필이면 <청천강> 하나만을 건너 왔을까? 실로 무슨 생각으로 그런 엉뚱한 이야길 하는지 어이가 없다.



4. 상황적 분석과 지리적 측면 문제


조금만 생각을 깊게 해도 역대 중국의 왕조 가운데 300년 넘은 왕조가 하나도 없고 200년 넘은 왕조가 겨우 <후한後漢 당唐 명明 청淸의 사국四國>뿐이다. 그런데 어찌 421년(BC 108~AD 313)간이나 존속된 [漢四郡]이 있을 수 있겠는가? [四郡]의 종주국이라고 주장하는 전한(前漢)은 AD 108년에 망했다. 종주국도 없이 해외의 식민지가 300년씩 존속하다니? 또한 조금 더 양보하더라도 [四郡]이 「전한前漢→후한後漢→삼국위三國魏→서진西晉」의 5개 왕조를 거치면서 식민지로 있었다는 논리는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다.


그리고 漢의 북쪽과 북동쪽 즉 漢이 한반도의 <평양>까지 침공할 통로 위쪽에 막강한 흉노(匈奴)와 동호(東胡)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만리장성(萬里長城) 넘어 가까운 곳은 모르되 6000 여리가 넘는 한반도 평양까지 침공할 상황이 아니었다.


지리적으로도 판단하여볼진대「사기史記 지리지地理志」「수경水經」 및 「서경書經의 우공禹貢」등은 중국의 지리서인데 이들의 기술 범위가 「장강이북長江以北~장성이남長城以南」의 중국본토(中國本土)쪽 지리에 국한하고 있다고 그 서문(序文)이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그 책들에 기록된 글 속에 있는 「낙랑 현토 진번 임둔」「요동遼東, 요수遼水, 왕검성王險城」그리고 「조선朝鮮」「고구려」「창해滄海.....」등의 지명은 모두 중국 본토 안에 있는 지명이지 한반도(韓半島)의 지명들은 아니다.



5. 유물 유적 등의 문제


물론 대동강(大同江) 유역에서 중국의 유물이 발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유물이 [漢四郡] 중 낙랑군(樂浪郡)의 유물이라고 무턱대고 주장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그들이 틈만 있으면 반론의 근거로 제시된 봉니(封泥), 동종(銅鐘), 각석(刻石), 와당(瓦當) 묘전 등 다섯 가지 유물 모두가 석연치 않은 의문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여 이 유물들은 대부분 <대동강지역>이야 말로 낙랑군(樂浪郡)이 대동강(大同江)에 위치해있었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억지로 짜 맞추려했던 의구심이 많은 유물들이다.



[옮긴이의 덧글]


보다 자세한 증명은 저의 글 가운데 [바른역사에 대하여]란의 [한사군은 있었는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6. 기타 문제



서기 246년 위(魏)나라의 관구검( 丘儉)의 침략을 받은 환도성(丸都城)을 복구하기 어려워 서기 247년에 동천왕(東川王)이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그런데 정말로 고구려의 평양성이 그들이 누누이 주장한 대로라고 보았을 때 낙랑군(樂浪郡)이 서기 313년까지 평양에 있었다면 동천왕(東川王)의 환도(遷都)가 가능했었겠나?


이점에 대하여 제도권사학자들은 이 사실을 애써 외면 내지는 무시하려들고 427년 장수왕(長壽王)의 평양천도(平壤遷都)만을 교과서에 실어 가르치고 있다.


이상으로 [漢四郡]에 관련된 연구를 한 제도권 학자와 재야 사학자들의 문헌들을 종합검토 한 결론은


한(漢)의 식민지(植民地)로써의 한사군(漢四郡)은 없었고, 漢의 행정구역(行政區域)으로써의 [四郡]은 있었으되 그 위치가 대동강(大同江) 주변을 포함한 한반도권(韓半島圈)이 아닌 기자조선(箕子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위치해있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시작되고 기록에 충실하여 수성현(遂城縣)과 갈석산(碣石山)이 지금도 살아있는 현 난하 유역( 河 流域)이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일은 비단 [漢四郡 문제]만이 아니다.

중국인(中國人)에 의한 일제 식민사학(日帝 植民史學)에 의한 어떠한 역사 왜곡(歪曲)도 하루 속히 시정하여 참된 역사(歷史)로 바로잡아 우리 민족이 긍지(矜持)를 회복(回復)하여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는 진정한 역사교육(歷史敎育)의 산실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거듭거듭 다짐하는 계기가 된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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