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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 신화의 기능과 한민족의 시작에 대한 인식

송화강 2019-06-12 (수) 23:54 6년전 5921  
  Myth-h_1.hwp 42.0K 150 6년전

신화의 기능과 한민족의 시작에 대한 인식


<되돌아가 만나야 할 겨레의 미래, 신화의 세계>


  임 재 해


1. 신화는 왜 만들어졌는가? 


신화는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가? 이 질문은 신화의 정체를 밝히는 데 가장 직접적인 구실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다. 신화는 원인론적 이야기라든가, 신성시되는 이야기 등으로 쉽게 뜻매김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견해를 아울러 ‘신화는 신성한 시작의 이야기’라고도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신화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신화 여부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들 가운데도 신화가 왜 무엇 때문에 지어져서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가 하고 물으면 한참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화는 문학작품으로서 또는 역사학이나 종교학의 자료로서 우리 앞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긴 하되, 실제로 살아 생동하며 발휘하는 신화의 본디 구실을 직접 수행하고 있는 모습은 발견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신화라고 하면 고대문헌 속에 기록되어 있는 문헌자료가 고작이거나 세간에서 옛날이야기의 한 갈래로 전승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신화는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정말 알기 어렵다. 그러한 문헌 자료들이나 구전 자료들은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 자료 자체만 고스란히 전할 뿐, 신화가 왜 만들어졌으며 신화는 어디에 어떻게 쓰여졌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화라고 하면 “옛날 옛적에 갓날 갓적에 밥나무에 밥이 열리고 옷나무에 옷이 열릴 적에, 호랑이 담배 피우고 여우가 말을 할 적에”라고 하며 시작되는 아주 태고적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단군신화나 주몽신화 등 건국신화를 떠올리게 된다. 이야기를 직접 전승하는 민중들은 앞의 이야기이가 신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뒤의 이야기들을 신화라고 여긴다. 


앞의 이야기는 신화적 성격을 다소 지닌 민담에 지나지 않으며, 뒤의 이야기는 문헌신화로서 특정 신화 갈래에 한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신화는 아주 오랜 옛날의 사정을 초월적으로 신이하게 설명하는 동시에, 건국영웅의 출생이나 나라의 시작과 같은 거대 규모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원을 말하는 이야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신화는 시간적으로 태초의 사실이나 기원의 문제처럼 원초적 사유를 담고 있으며, 공간적으로 우주나 인류, 국가나 민족과 같은 거대한 문제들의 생성에 대한 세계관적 인식을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화를 통해서 우주의 기원은 물론, 국가나 민족의 시작에 관한 선조들의 인식을 포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태초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들을 거듭해서 말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신화의 실상을 통해서 무엇의 시작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지 먼저 점검할 필요가 있다.


2. 신화는 무엇의 시작을 말하는가? 


학자들은 신화유산을 문헌에서 찾기 일쑤여서 옛문헌에 남아 있는 건국시조신화들을 곧잘 우리 신화의 전모로 이해한다. 그 결과, 구전신화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가 하면, 우리나라에는 우주의 기원이나 인류의 시조를 말하는 신화는 없다고 단정하며 크게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화의 실상도 제대로 포착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신화가 무엇 때문에 만들어졌는지 온전하게 알 수 없다. 문헌에 갇혀 있는 신화가 제 구실을 본디대로 감당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따라서 신화가 왜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신화가 현장에서 살아 생동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다행히 아직도 그러한 구실을 하는 신화가 남아 있다. 무당들이 굿을 하면서 부르는 서사무가가 바로 그 보기이다. 서사무가와 같은 무속서사시를 신화의 범주에 넣어서 일컬을 때에는 무속신화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신화는 크게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 건국신화와 굿판에서 연행되는 무속신화의 두 갈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신화는 신성한 시작의 이야기라고 했듯이 신화로서 최소한의 자질을 갖추려면 초월적 경이를 현실로 인정하는 신성성과 함께, 어떤 사실에 대한 원인이나 기원을 설명하는 구실을 발휘해야 한다. 유래담의 성격을 지닌 전설도 시작의 역사를 말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시작의 대상이 원초적 기원이 아니어서 신성시되지 않은 까닭에 신화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신화는 함부로 시비를 따질 수 없는 신성한 권위가 부여되어 있다. 이와 달리 신성시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기원이나 원인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한갓 종교이야기일 따름이다. 예수나 부처의 초월적 행적을 말하는 이야기들은 신성하되 모두 신화라 일컫지 않는 것은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는 으레 신화를 내포하고 있다. 섬기는 신격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없이 종교가 성립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종교의 이론적 구조물이며, 이를 토대로 제의가 수행될 뿐 아니라 모든 역사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한다. 기독교의 천지창조신화가 성서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건국신화가 국가사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속신화라고 해서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건국신화가 해당 국가의 역사를 기술할 때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처럼, 우주의 기원을 말하는 무속신화 또한 굿의 현장에서 여러 거리 가운데 가장 앞거리에 구연된다. 이처럼 신화로서 같은 범주에 속하고 있으면서도 건국신화와 무속신화로 다른 갈래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의 처음을 말하는가 하는 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화 유산이 크게 두 갈래를 이루고 있다면 시작에 대한 인식도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우리 신화들은 무엇의 시작을 말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을까? 먼저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건국신화부터 주목하기로 한다.


3. 단군신화는 민족의 시작을 말하는가? 


현재로서 가장 오래된 건국신화, 이를테면 신화 중의 신화를 단군신화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단군은 곧 우리 민족의 시조로 인식되는가 하면, 고조선은 우리 겨레가 세운 고대국가의 가장 첫국가로 인정되어 국사책의 앞자리를 차지한다. 고조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단군신화는 과연 민족의 시조를 말하는 배달겨레의 시조신화인가? 그렇다면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이면서 우리 민족의 신성한 시작을 말하는 민족시조신화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서 단군신화를 자세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시조인 단군의 신화이면서 고조선 건국의 신화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건국시조신화 또는 건국신화라 일컫는다. 단군신화 이후에 성립된 주몽신화나 박혁거세신화 등의 문헌신화들 또한 건국시조의 출현과 건국의 과정을 설명하는 원인론적 이야기라는 점에서 한결같다. 고조선에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고대국가들은 건국신화를 통해 국가의 지배이념을 확립하고 공동체의식을 강화하기 위하여 저마다 건국신화를 지어서 전승하였던 것이다. 고조선의 단군,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백제의 온조, 후백제의 견훤, 고려의 왕건 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모두 같은 지평에 있는 건국시조신화들이다. 백제의 건국시조 온조가 백제족의 시조가 아니고 주몽이 고구려족의 시조가 아니듯이, 박혁거세가 신라족의 시조일 수 없으며 단군 또한 고조선족의 시조일 수 없다. 건국시조와 민족의 시조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건국신화는 구조상 건국시조신화를 겸할 뿐 결코 민족시조신화를 겸하는 것은 아니다. 


한 국가의 시작을 말하자면 그 국가를 일으킨 민족 지도자의 출현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 필수적이므로 건국신화는 건국시조신화를 반드시 겸할 수밖에 없다. 나라가 있으려면 나라를 세울 만한 지도자가 있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있기 전에 단군이 먼저 있었듯이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있기 전에 주몽과 박혁거세, 온조와 같은 지도자가 먼저 있었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을 말하기 전에 단군의 출현과정을 자세하게 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단군은 천제인 환인의 서자 환웅천왕과, 곰에서 사람으로 변한 곰녀 사이에서 출생하여 고조선을 세운다. 고조선을 세우고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다는 기록은 이 신화 말미에 조금뿐이고 대부분의 내용은 단군이 출생하게 된 과정을 신이하게 설명하는 데 봉사하고 있다. 환웅이 하늘에서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지상으로 하강하여 신단수 아래 신시를 세워서 천왕이 되는 과정과, 곰이 범과 함께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지내다가 삼칠일만에 사람이 되는 과정, 그리고 사람이 된 곰녀가 신단수 밑에서 환웅을 통해 단군을 잉태하는 과정이 길고도 자세하게 서술된다. 


이러한 내용을 두고 어떤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곰의 자손이란 말인가?”하고 흥분하며 단군신화와 단군의 존재를 부정하려든다. 이는, 하느님께서 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는 창세기를 근거로 “우리는 흙으로 만든 토우의 후손인가?” 하고 엉뚱하게 따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러한 비판은 합리적 사고로 따질 수 없는 초월적 상상력에 의해 형성된 신화의 신성성을 알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신화의 서사적 맥락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에서 비롯된 것이다. 환웅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하강 하기 전에 이미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데 뜻을 두고 홍익인간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을 뿐 아니라, 지상에 내려와서도 신시를 베풀고 천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단군 이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상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단군이 민족의 시조라고 여기며 우리가 곰의 자손이란 말이냐며 따지는 것은 한갓 말트집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단군이 민족의 시조라면 고조선이라고 하는 민족국가를 결코 수립할 수 없다. 민족의 혈연적 시조는 국가를 일으킬 만한 민족공동체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군이 고조선이라고 하는 고대국가를 세웠다고 하는 것은 이미 국가 규모에 걸맞는 수많은 인구와 넓은 영토가 넉넉하게 확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단군은 고조선의 건국시조일뿐 결코 민족시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시조는 누구인가? 우리 민족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가?


4.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가 아닌가? 


민족의 시조는 누구인지 쉽게 답할 수 없다. 민족시조신화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 민족이 단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 신화는 한민족의 기원에 대해서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고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적어도 직접적으로 발언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발언 내용들은 단군신화를 비롯한 건국신화에서 두루 찾을 수 있으며 인류시조를 말하는 무속신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단군신화든 무속신화든 인류의 시조로서 인간 또는 인간 일반에 관해서 이야기할 뿐 결코 민족에 한정해서 시조를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보기를 들면, 단군신화에서도 ‘인간세상’을 말하거나 ‘홍익인간’을 표방할 따름이지 특정 민족이나 홍익민족을 결코 거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속신화에서도 인류의 시조를 말할 뿐 배달겨레를 지목하거나 한민족의 시조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신화에는 혈연적 기원으로서 민족의 시조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신화가 없다고 해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화는 건국시조에 관한한 적극적으로 말한다. 민족의 시조는 말하지 않고 건국시조를 말하는 것은 신화의 형성사 및 전승매체와 연관되어 있다. 적어도 단군신화 이후의 여러 건국신화들은 민족공동체국가를 형성한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 건국신화들은 한결같이 국가사를 주로 서술하는 사서류에 수록되어 전승되고 있다. 자연히 민족의 시조보다 건국의 시조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여 건국시조가 민족시조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혈연적인 개념이면서 문화적인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민족은 동일한 혈연과 문화를 지닌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적어도 고조선과 같은 국가를 이룩할 만한 규모의 민족 성원은 혈연적 시조보다 오히려 문화적 시조로서 민족적 지도자상이 한층 긴요하게 설정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단군은 우리 민족의 혈연적 정체성보다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한 시조로서 한민족 공동체의 문화적 시작을 설정하고 세계관적 기원을 수립한 최초의 인물이다.


단군의 부계는 하늘에서 하강한 환웅 곧 천신에 두고 있으며, 모계는 동굴에서 나온 곰녀 곧  동물에 두고 있다. 따라서 단군은, 존재의 격으로서 보면 ‘신격’과 ‘동물격’을 합일한 ‘인격’이며, 존재의 위상으로 보면 ‘하늘’과 ‘땅’과 ‘인간’ 곧 ‘천지인’의 삼재론을 이루는 세계의 한 구성요소이다.  거기다가 천신인 환웅과 동물인 곰은 한결같이 인간세상을 동경하며 마침내 인간적인 삶을 성취한다. 그리고 환웅은 신단수 밑에서 신시를 베풀고, 단군은 죽어서 산신이 된다. 모두 인간을 동경하되 인간 중심주의에 머물지 않고 천지자연과 동식물을 함께 껴안고 있으며 신격과 인격이 서로 오고 가고 한다. 따라서 홍익인간의 이상 아래 수립된 고조선의 세계관적 기원은 하늘과 땅, 천신과 동물, 산과 나무 등 모든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친화적 삶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단군신화에서 말하는 인본주의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배타적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하는 공생적 세계관을 실현함으로써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주의를 뜻한다. 홍익인간주의는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학적 공생의 세계를 이룰 때 가능한 것으로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공생의 세계야 말로 진정한 인본주의와 만날 수 있다.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추구하는 세계관적 토대로서 홍익인간의 이상을 말하는가 하면, 단군이라는 인격을 통해 우리 민족의 이상적 지도자상의 모습도 말한다. 단군이 민족의 시조는 아니라 하더라도 민족지도자의 시조임에는 틀림없다. 민족지도자로서 단군은 인간세상을 다스리며 홍익인간의 이상을 펼치겠다는 천신다운 꿈을 지닌 동시에, 곰에서 인간으로 변신하기 위하여 동굴 속에서 고난을 겪고 마침내 인간으로 비약하는 자기 혁신의 실천성을 겸비한 존재이다. 초월적 신격으로서 인간세상을 동경하여 지상으로 내려오되, 동물처럼 천박하지 않음은 물론 과감하게 자기 껍질을 벗어던지고 비약할 수 있는 인격이 바로 민족지도자로서 단군이자, 우리 민족이 가장 바람직한 존재로 여기는 인간상이다. 그러므로 단군신화에서 이야기된 단군상은 민족지도자의 으뜸을 그리는 동시에 문화적 개념에서 민족의 시조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군은 혈연적으로 민족의 시조라 할 수 없지만, 민족공동체가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설정한 최초의 인물이므로 문화적인 민족 시조라 할 수 있다. 


신화학의 용어를 빌린다면 문화적인 민족시조를 문화영웅이라 일컫지만 단군은 건국시조로서 무게 중심이 더 높기 때문에 건국영웅이라 일컫는다. 단군은 역사적으로 최초의 건국시조일 뿐 아니라 건국영웅으로서 전형성을 확보하고 다른 건국영웅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한민족 건국영웅의 기원이자 시작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주몽이나 신라의 박혁거세, 가락국의 수로 등 고대국가를 일으킨 건국영웅들의 인간상은 저마다 개성을 지니면서도 크게 보면 단군의 인간상을 뛰어넘지 않는 전형성이 있다. 이를테면 한결같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뿐 아니라 지상의 토착 세력과 상호교감 아래 나라를 세운다는 점에서, 천상적 존재의 초월성과 지상적 존재의 현실성을 조화롭게 합일시킬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건국영웅이다. 주몽은 태양신을 자처하는 아버지 해모수와 강물 신의 딸인 어머니 유화부인 사이에서 출생한다는 점에서 단군의 출생과 아주 흡사하다. 다만 땅의 신격을 산에서 취하지 않고 강물에서 취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박혁거세나 수로 또한 모두 하늘에서 신이하게 하강하고 땅에서 이를 맞아 왕으로 추대한다는 점에서 천지합일의 동일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때 하늘이나 땅은 신화적 상징성을 지닌 공간이다. 환웅이나 해모수처럼 하늘에서 하강한 존재는 천신으로서 신성성을 지니는 동시에 지상의 토착 세력과 다른 도래인 또는 이주민의 성격을 지닌다. 반대로 곰녀나 유화부인처럼 땅에서 출현한 존재는 동굴이나 강물, 바위 밑 등 그 서식처에 따라 구체적인 성격은 다르되 그 지역에 붙박이로 살아온 토착 세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역사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 민족의 건국영웅들은 탁월한 역량과 문화적 선진성을 지닌 도래인들과 일정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토착세력들이 우호적인 결합을 통해 건국시조로 추대한 존재로서 일정한 전형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박혁거세 이전의 신라 육부촌장들이 한결같이 하늘에서 산으로 하강하여 촌장이 되었다는 사실도 단군신화와 같은 싱징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보기라면, 백제의 온조가 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이주해서 하남의 땅에 도읍지를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은 단군신화의 역사적 해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실증적 보기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혈연공동체로서 배타성과 지연공동체로서 폐쇄성을 지니지 않은 채 다른 민족의 문화적 역량을 수용하고 외세와 끊임없이 교섭하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가운데 민족의 힘을 강화하고 건국의 토대를 마련해왔음을 알 수 있다. 단군신화가 홍익민족을 표방하지 않고 홍익인간을 내세운 사실도 이러한 사실에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5. 한민족의 시조를 말하는 신화는 없는가?


건국신화들만 주목하면 우리 신화는 한결같이 건국시조 또는 국가의 시작만을 말할 뿐 우리 민족의 시작이나 한민족의 시조를 말하는 신화가 없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신화의 자료를 바꾸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른바 무속신화를 보면 시간적으로 원초적이고 공간적으로 우주적인 시작의 이야기를 최근까지 생생하게 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문헌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천지개벽신화나 인류시조신화가 굿판에서는 무당들에 의하여 노래되어왔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천지개벽신화는 천지창조신화 못지 않게 태초에 우주가 형성되고 천체의 운행이 질서잡히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류시조신화 또한 천지가 개벽된 이후에 최초의 인간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물론, 오늘날의 인간세계가 왜 이처럼 부조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까지 실감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 무속신화는 우주의 시작과 인류의 시조에 관한 우리 민족의 인식을 고스란히 갈무리하고 있어 주목된다. 


먼저 천지개벽신화를 보면, 하늘과 땅이 하나로 맞붙어서 혼돈 상태를 이루던 우주가 음양이 서로 교감하면서 하늘과 땅이 서서히 떨어져 천지개벽이 이루어지며, 처음에는 해와 달이 각각 둘이어서 사람이 살기 어려웠으나 천지왕의 도움으로 그 아들이 이를 조절하여 지금처럼 천체가 순조롭게 운행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천지창조신화와 달리 조물주의 의지에 의해 천지가 완벽하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음양의 이치에 따라 천지가 저절로 개벽되었다는 점에서 자연법이 존중되며 부조화를 이루던 천체운행이 점차 조화를 이루어 지금과 같이 안정되었다는 점에서 진화론적 사고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피조물도 아닐뿐더러 창조주인 신격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천지자연의 형성과 신격의 참여에 의한 우주의 질서는 모두 인간의 순조로운 삶을 위해 존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음양의 교감에 의해 생성되고 인간은 그 사이에서 출생하여 천지인의 ‘삼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단군신화의 세계관과 일치한다. 거듭 말하면 단군신화와 마찬가지로 천지개벽신화에서 보이는 우주 생성의 논리와 세계 구성의 논리가 제각기 음양론과 삼재론의 이치에 입각해 있다는 점에서 한결같다.


건국신화에는 건국시조가 출현한 다음에 건국이 이루어지므로 사람이 먼저 이야기되지만, 인류시조신화에는 천지개벽이 먼저 이루어진 다음에 최초의 인간이 출현하므로 천지의 형성이 먼저 이야기된다. 천지개벽신화에서는 하늘과 땅이 개벽된 다음에 저절로 인간이 나타난 것처럼 소극적으로 이야기되고 만다. 천지의 생성과 질서를 설명하는 데 무게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신조신화에서는 인간의 출현 양상이 한층 본격적으로 자세하게 이야기된다. 인류시조신화라 할 수 있는 창세가를 보면, 미륵님이 두 손에 각기 금쟁반과 은쟁반을 들고 기도를 하자, 하늘에서 금벌레 은벌레가 다섯 마리씩 두 쟁반에 떨어져서 금벌레는 남자가 되고 은벌레는 여자가 되어 부부의 인연을 맺었으며, 세상사람들은 모두 이들 부부로부터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인간의 출현이 미륵님의 기도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 결코 조물주의 창조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물론 그 출현도 급격하지 않다. 금은벌레가 먼저 나타나고 그 벌레들이 제각기 변하여 남녀 인간이 된다. 피조물로서 인간이 아니라 벌레에서 자력적으로 진화하여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를 취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인간들은 모두 금은벌레가 변해서 된 남녀 사이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건국시조의 출현이나 우주의 생성처럼 인류의 시조 역시 음양론에 의해 생성되는 일관성을 보인다. 신화의 갈래가 서로 다름에 따라 무엇의 시작을 말하는가 하는 내용은 다르되, 이를 설명하는 체계나 세계관은 한결같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신화로서 동질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러므로 단군신화에서 보이는 인본주의는 인류시조신화에서도 그대로 관철된다.


인간세상에 악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는 것은 기독교 신화에서 말하듯이 사람 탓이 아니라 인간세상을 서로 차지하려는 신격들의 욕심 탓으로 이야기한다. 단군신화에서 환웅과 곰 모두 인간 세상을 동경했듯이, 석가와 미륵 또한 인간세상을 동경하여 서로 차지하고자 다툰다. 그러다가 석가가 미륵을 속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세상을 차지했기 때문에 인간세상이 지금처럼 거짓과 속임수가 판을 치는 부조리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창조는 하느님이 하고 세상을 타락하게 한 허물은 사람 곧 여성 탓으로 돌리는 신 중심적이고 남녀 차별적인 성서의 인류시조신화와 크게 구별된다. 상대적으로 우리 신화는 남녀평등 사상에 입각해 있을 뿐 아니라 신격들마저 인간세상을 동경하는 가운데 신격의 한계를 드러내는 가운데, 자력적 진화의 역량을 지닌 인류시조를 설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신화는 그 갈래가 어떠하든 신격의 신성성을 인정하되 거기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남녀평등의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토대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 왜 한민족의 시작을 말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우리 신화의 여러 갈래를 두루 돌아봐도 배달민족의 기원을 별도로 말하는 신화는 없다. 그러니 한민족의 시조에 관해서 딱 부러지게 말하는 민족의 기원 신화는 없는 셈이다. 단군신화에서도 홍익인간을 말할 뿐 홍익민족을 말하지 않고 천지개벽신화나 인류시조신화에서도 인류의 시조 자체를 일반적으로 말할 뿐 배달민족의 시조를 구체적으로 한정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 단위보다 작은 성씨시조신화는 전승되고 있다. 물론 이들 신화는 박혁거세나 석탈해, 김알지, 김수로, 왕건과 같은 왕조신화와 겸하기 일쑤이다. 


인류시조나 홍익인간을 표방하고 성씨시조 신화는 있으면서 왜 민족시조 신화는 없을까. 성씨시조 신화는 후대의 사람들이 성씨별 혈연의식이 조성되면서 뒤늦게 왕조신화와 결부시킨 것으로서 견강부회의 성격이 짙다. 자신의 가문이나 혈통의 뿌리를 확립하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씨시조가 분명하지 않으면 자기 정체성을 찾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족보의 작성과 함께 성립된 것이 대부분이다. 역사시대의 신화적 사유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성씨시조신화라고 한다면, 존재 근원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고자 역사시대 이전부터 구전하는 가장 원초적인 이야기가 천지개벽신화와 인류시조신화이다. 이들 신화에서 인류의 시조는 말하면서 민족의 시조를 말하지 않은 까닭은 어디 있을까? 


그 이유는 두 갈래로 생각할 수 있다. 인류의 시작이 곧 민족의 시작이라 생각한다면 굳이 민족의 시조를 별도로 말할 필요가 없다. 민족의 시조가 인류의 시조이고 인류의 시조가 민족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세계를 보게 되면 민족의식이 시간적으로 인류의 시조에 맞닿아 있는 원초성을 지니며 공간적으로는 우주의 열림과 함께 하는 세계성을 지닌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의 시조는 곧 인류의 시조로서 천지개벽과 함께 출현한 최초의 인간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처럼 민족과 인류의 시작을 동일시한다면 민족시조신화는 별도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신화는 우리 민족을 인류와 세계의 시간적 기점과 공간적 중심에 두는 것으로서 자민족중심주의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다시 고려하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 다만 민족의 시조를 별도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배타적 민족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시조이면 그만이지 굳이 민족의 시조를 따로 말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면 민족시조신화를 사실상 별도로 지어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 신화 어디서도 인간 일반을 이야기할 뿐 민족을 변별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류시조신화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최초의 남녀인간들도 인류의 시조를 출산한 시조일 뿐 민족의 시조를 출산하지는 않았다. 단군신화에서도 홍익민족을 말하지 않고 홍익인간만을 말한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지닌다. 인류와 민족의 시작이 같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 곧 민족국가 수립의 이상이라면, 우리 신화는 폐쇄적 민족의식이 아니라 인류의 시작과 번영을 민족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여기는 열린 민족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화적 민족의식은 세계화 시대에 새삼스레 주목할 만하다. 


그럼 이러한 신화적 세계관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건국신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신격이 지상의 존재와 협력하여 나라를 세우고 지도자가 된다는 신화적 서술은 곧 북방민족의 남하 세력과 한반도 토착세력의 결합에 의하여 비로소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 민족신화는 고대국가의 수립과 함께 형성된 두 세력의 결합에 의하여 비로소 창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토착민족과 북방의 이주민족이 서로 협력하고 합의하는 가운데 형성된 한민족의 공동체의식은 자연히 배타적인 민족주의보다 외세와 연대하고 공존하며 협력하는 홍익인간다운 열린 민족주의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신화는 우주와 인류 또는 민족과 국가 등 거시적인 대상에 대한 원초적인 시작에 관해서 말하는 동시에, 인간과 신과 자연의 본질적 관계 또는 민족과 세계의 기본적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그럼 신화는 왜 이러한 사실에 대해 발언하고자 할까. 문헌신화는 문자의 틀 속에 갇혀 있지만, 무속신화는 최근까지 굿판에서 생생하게 구연되며 제 구실을 감당하고 있으므로 이를 통해서 그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굿판은 공연히 벌이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굿을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처음 거기’의 본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문제가 있을 때에는 처음 길을 나설 때 설정한 지표를 다시 점검하기 위해 처음의 상황으로 되돌아가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굿판에서 우주의 생성과 인류의 시조를 말함으로써 현실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하고 미래를 올바르게 개척해 나가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건국신화 또한 건국시조의 출현과 건국과정을 말함으로써 왕권의 신성성을 강화하고 국가기강을 확립하여 나라의 기틀을 강고하게 틀잡아나가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건국신화는 국중대회와 같은 국가제의에서 되풀이 구송되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우리 민족신화가 크게는 우주와 인간의 시작을 말하고 작게는 민족국가의 시작을 말한다. 이처럼 누가 뭐라 그래도 처음과 시작과 기원을 말하는 것이 신화임에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다시 아득한 시절의 신화를 입에 올리는 것은 ‘지금 우리’의 문제는 물론, ‘앞으로 모두’의 문제까지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세계관적 좌표를 제대로 가다듬기 위해서이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하는 공생적 세계관이나 민족을 넘어서 인류의 복지를 말하는 홍익인간의 이념은 세계화시대를 겨냥하며 자연친화적 삶을 실천해야 하는 동시대 사람들의 생활지표로 끌어안을 만하다. 따라서 민족신화는 우리 민족의 현실적 지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인류의 보편적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문화적 자산이자 세계관적 틀거리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처음과 끝이 한결같고 시작과 마무리가 일관성을 확보하는 가운데 민족 정체성을 회복하며 지속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민족신화의 세계로 끊임없이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어디서 온 것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화가 말하는 신성한 시작의 이야기는 가장 원초적인 것이면서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이르러야 할 가장 이상적인 미래 세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신화의 세계는 곧 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겨레의 영원한 미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97. 10. 25. 신세기통신 사외보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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