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자료] 동사강목- 지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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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하건대 역사를 읽는 자는 반드시 먼저 강역(疆域)을 정해놓고 읽어야 한다. 그래야 점거(占據)한 상황을 알 수 있고, 전벌(戰伐)에서의 득실을 살필 수 있고, 분합(分合)의 연혁을 상고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를 보는 데 어둡게 된다. [주C-001]지리고(地理考) : 본 지리고는 순암(順庵)이 여러 문헌을 들어 변증(辨證)하는 한편, 종래 주장의 잘못들을 지적하고 자기 의견을 내세운 것인바, 일언 반구(一言半句)도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므로 아무리 틀린 글자라고 생각되는 것도 매우 분명한 상식적인 것 외에는 원문대로 번역하고 주를 달았다. 단 ‘盖馬’(본문에서는 ‘盖’자와 ‘蓋’자를 혼용하였다)의 ‘盖’자 경우, 본 ‘盖馬大山考’에서 ‘蓋通典音合’이라 하였으니, 순암은 ‘盖’의 음을 합으로 하였는지도 모르나, 본 번역에서는 통상음인 개로 하였다.
단군의 강역은 상고할 수 없지만, 기자(箕子)가 단씨(檀氏)를 대신하여 왕 노릇하였는데 그 제봉(提封 제후(諸侯)의 봉지(封地))의 반이 곧 요지(遼地)였으니, 단군의 시대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다. 《고기(古記)》에, “북부여(北夫餘)는 단군의 후손이다.”
하였다.상고하건대 부여는 요동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니, 아마 단씨 세대가 쇠하자 자손이 북으로 옮기고 옛 강역이 이내 기자의 봉지에 흡수된 것이리라. 《고려사》 지리지(地理志)에, “마니산(摩尼山)의 참성단(塹城壇)은 세속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이다.’ 하고, 전등산(傳燈山)은 일명 삼랑성(三郞城)인데, 세속에서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것이다.’ 고 전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그 남쪽은 또한 한수(漢水)로 한계를 해야 할 것이다.
[주D-001]《고기(古記)》 : 《단군고기(檀君古記)》를 약한 것이다. 단군의 사적을 기록한 문헌인 듯하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에는 《단군본기(檀君本紀)》로 되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태백산(太伯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지금의 영변부(寧邊府)에 있다. 이다.”
하였는데, 《고려사》 지리지와 《여지승람(輿地勝覽)》은 모두 그 설을 따랐다. 태백산이 묘향으로 변한 것은 그 어느 시대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 모든 산 이름은 대부분 중들이 지었으니 묘향이란 이름 또한 불가의 문자이리라.이목은(李牧隱 목은은 이색(李穡)의 호)의 묘향산기(妙香山記)에, “산은 압록강(鴨緣江) 남쪽에 있는데, 요지(遼地)와 경계가 되고 장백산(長白山)의 분맥(分脉)이다. 그 산에는 향나무가 많다.”
하였다. 그렇다면 묘향산이란 이름은 향나무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리라.단군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에 하강하였고 단(檀)은 바로 향나무인 까닭에 후인이 그 임금을 단군이라 칭하고, 그 산을 묘향이라 부른 것이 아닐까? 《삼국사기》 최치원전(崔致遠傳)에 있는 태사(太師)에게 올린 장(狀)에, “고구려의 잔민(殘民)이 북쪽 태백산 아래에 의거하고 국호를 발해(渤海)라 했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킨 것이요, 위에 말한 장백산이 바로 그것인데 단군이 하강하였던 지역이다.【안】《여지승람》에는, 강동현(江東縣)에 대박산(大朴山)이 있고 그 아래에 큰 고총(古塚)이 있는데 세속에는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고 기록되고, 지금 그 지방 사람들이 대박산을 태백산이라고 하나, 또한 믿을 수 없다.
《삼국유사》에,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했고, 또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다.”
하고, 또,“아사달은 또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 지금의 배천(白川)이다. 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 백악궁(白岳宮) 지금은 미상 이 바로 그것이다.”
하였으나, 모두가 확정되지 않은 말이다.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서는 신지선인(神誌仙人)의 비사(秘詞)에 있는 백아강(白牙岡)에 대한 설을 인용하여 서경(西京)평양(平壤) 을 거기에 해당시켰다. 신지(神誌)는 단군 때 사람이라고 세속에서 전한다. 권남(權擥)의 응제시(應製詩) 주(註)에 보인다.이른바 백아강이란 곧 백악(白岳)이다. 단군이 도읍을 옮긴 것이 마치 고구려가 평양(平壤)에서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기고, 신라가 금성(金城)에서 월성(月城)으로 옮긴 것 같은 것이 아닐까? 《고려사》 지리지에, “문화현(文化縣)의 구월산(九月山)을 세속에서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 전하고 장장평(庄庄坪)은 세속에서 단군이 도읍한 곳이라고 전하는데, 곧 당장경(唐藏京)의 잘못이다.”
하였는데, 《여지승람》에는 “장장평이 문화현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기지(基址)가 지금도 있다.” 하였으니, 백악은 바로 이 땅이다. 방언으로 아사(阿斯)는 구(九)에 가깝고 달(達)은 월(月)에 가깝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나라 지명은 모두 방언으로 불렀으니, 이것 또한 그랬으리라. 혹자는 “그 산에 궁궐의 옛터가 있기 때문에 세속에서 궐산(闕山)이라 칭하는데, 와전되어 구월산이라 한 것이다.” 한다.
《한서(漢書)》에는, “현도(玄菟)와 낙랑(樂浪)은 본디 기자가 봉해진 곳이다.”
하고, 《당서(唐書)》에는,“배구(裴矩)가 ‘요동은 본시 기자의 나라다.’ 하였다.”
하고, 《요사(遼史)》 지리지에는,“요동은 본디 조선(朝鮮)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놓자 조선으로 갔는데, 그대로 기자를 거기에 봉하였다.”
하고, 《요동지(遼東志)》에는,“요동은 본디 기자가 봉해진 땅이다.”
하고, 《일통지(一統志)》 요동명환(遼東名宦)에도 기자가 실려 있고, 《성경지(盛京志)》에서는 심양(瀋陽)ㆍ봉천부(奉天府)ㆍ의주(義州)ㆍ광녕(廣寧) 지경이 모두 조선과 경계했다고 하였으니, 요동의 태반이 기자의 제봉(提封)이 되었었고,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광녕성(廣寧城) 북쪽 3리에 기자정(箕子井)이 있고, 그 곁에 기자묘(箕子廟)가 있으며, 후관(冔冠)을 씌운 소상(塑像)이 있었는데, 가정(嘉靖 :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의 병화(兵火)에 탔다.” 하였다. 기자는 또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무릇 도읍이란 국중(國中)에 정하는 것이고 보면, 오운(吳澐)이 ‘요하(遼河) 이동, 한수(漢水) 이북이 다 기자의 땅이었다.’ 고 한 것이 옳다.후손에 이르러 연(燕) 말기에 서쪽 지경 1천여 리를 잃고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삼았는데, 곧 《한서》 지리지에 보인 요동군(遼東郡) 동부(東部) 속현(屬縣) 반한(潘汗)이다. 이때에 요지가 중국에 홉수되었던 것이다. 《괄지지(括地志)》에는, “조선(朝鮮)ㆍ고구려(高句麗)ㆍ예(濊)ㆍ맥(貊)ㆍ동옥저(東沃沮) 등 5국(國)의 땅은 동서가 1천 3백 리, 남북이 2천 리이며, 동쪽으로 바다까지는 4백 리, 서쪽으로 영주(營州) 지경까지는 9백 20리, 남쪽으로 신라국(新羅國)까지는 9백 20리, 북쪽으로 말갈국(靺鞨國)까지는 1천 4백 리이다.” 하였으니, 그것 또한 방증(傍證)이 될 만하다. [주D-001]반한(潘汗) : 《한서》 지리지에는 반(潘)이 ‘潘’자로 되어 있고, 응소(應劭)는 “음이 반(盤)이다.” 하였다.
위만(衛滿)이 기씨(箕氏)의 나라를 빼앗았으니, 그 영토는 서북으로는 만반한에 경계하고, 또 곁에 있는 작은 읍(邑)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을 침략하여 항복시켰으니, 지금 동북 새외(塞外)와 북도 영동(嶺東)의 땅이 바로 그것이다.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청제(靑齊 청주(靑州)와 제주(齊州) 지역)와 통하고, 남쪽으로는 한수(漢水)에 이르러 삼한(三韓)과 접하였었는데, 뒤에 망하여 한(漢)에 흡수되니 한에서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사기(史記)》에, “장량(張良)이 한(韓)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동쪽으로 와서 창해군(滄海君)을 보고 역사(力士)를 얻었다.”
하고, 그 주(註)에,“창해군은 동이(東夷)의 군장(君長)이다.”
하였으니, 창해라는 이름이 생긴 지 이미 오래다. 한 무제(漢武帝) 원삭(元朔) 원년(B.C. 128)에 예(濊)의 임금 남려(南閭)가 항복하자,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으니, 아마 옛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리라. 예고(濊考)와 관련시켜 보기 바란다. 잡설(雜說) 삼한 조에 또 보인다.
삼한 땅은 지금의 한수(漢水) 이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한(馬韓)은 한수 이남 경기ㆍ충청ㆍ전라도 땅이며, 서쪽은 바다를 건너 청제양월(靑齊揚越 청주ㆍ제주ㆍ양주(揚州)ㆍ월주(越州) 지역)과 통하고, 동남은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과 통하고, 북쪽은 한수를 한계로 조선과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ㆍ변한(弁韓)과 연하였는데, 뒤에 백제가 그 땅을 차지하였다. ○ 진한은 지금의 경상도 낙동강(洛東江) 이동의 지역으로, 북쪽은 예(濊)ㆍ맥(貊)과 연하고, 서북쪽은 마한과 접하고, 서쪽 지경은 대부분 변한과 섞여 살아 경계가 불분명하고, 동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과 통하였는데, 마한에 복속(服屬)되었다가 뒤에 신라가 되었다. ○ 변한은 지금의 경상도 낙동강 이서의 지역으로, 서남쪽은 지리산(智異山)을 걸쳐 지금 전라도 동남 지역에 이르고, 동쪽은 진한과 섞여 살아 경계가 불분명하고, 서북쪽은 마한과 접하고, 동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과 통하였는데, 마한에 복속되었다가 뒤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변한 땅은 또 나뉘어 5가야(伽倻)의 땅이 되고,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가야금(伽倻琴)을 변한금(弁韓琴)이라 하였으니, 그것 또한 증거가 된다. 지리산 서쪽에 있는 땅은 백제에 흡수되었다. 상고하건대 삼한(三韓)은 소소한 지방의 연혁에 비할 것이 아닌데, 우리 나라 문헌에 증빙할 만한 것이 없어, 수천 년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그 위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이제 여러 설을 아래에 인용하여 그 옳고 그름을 나타낸다. ○ 《후한서(後漢書)》에서 비로소 삼한전(三韓傳)을 두어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한(韓)에는 3종이 있는데,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國 국(國)은 군(郡)과 같다)으로 되었고, 북쪽은 낙랑(樂浪)과 연하고, 남쪽은 왜국과 접하였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으로 되었고, 북쪽은 예(濊)ㆍ맥(貊)과 접하였다. 변진은 진한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으로 남쪽은 역시 왜국과 접하였다. 모두 78국인데, 동서는 바다로 한계하였다. 삼한 땅을 합하면 사방 4천 리가 된다.
【안】 4천 리라는 설은, 먼데서 들었기 때문에 사실과 틀린다.
○ 《북사(北史)》의 백제전(百濟傳)에는 ‘마한의 무리이다.’ 하였고, 신라전(新羅傳)에는 ‘진한 종족이다.’ 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다.’ 하였는데, 이 설이 근사하다. 《신당서(新唐書)》ㆍ《구당서(舊唐書)》 같은 데에는 모두 ‘변한의 묘예(苗裔 후손)가 낙랑(樂浪) 땅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떠도는 이야기이다. 낙랑은 옛날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으니, 계림(鷄林 신라)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졌다.
○ 고려 중 무극(無亟)의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최치원이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요, 변한은 백제다.’ 하였으니, 동명왕(東明王)이 일어날 때 벌써 마한을 병합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칭한 것이다. 지금 사람이 혹 금마산(金馬山)이 있다고 해서 마한을 백제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고구려 땅에 원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이름한 것이다. 《당서(唐書)》에 ‘변한의 묘예가 낙랑에 있다.’ 고 한 것은, 온조왕(溫祚王)의 계통이 동명왕(東明王)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혹 어떤 사람이 낙랑 땅의 출신으로 변한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 등과 서로 대치했다고 하는 것은, 온조왕 이전에 있었을 터이니, 도읍한 곳이 낙랑의 북쪽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룡산(九龍山)을 잘못 알아 또한 변나산(卞那山)이라 불렀던 까닭으로 고구려를 변한이라고도 하나, 마땅히 옛날 현인(賢人 최치원을 가리킨다)의 말을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원래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 것이다.
○ 고려 말기 김경숙(金敬叔)의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삼한(三韓)을 서술할 적에는,“고구려는 낙랑과 변한을 병합하고, 백제는 마한과 대방(帶方)을 병합하였다.”
하고, 삼국(三國)을 서술할 적에는,
“고구려는 곧 마한이고, 백제는 곧 변한이다.”
하고, 또 고려 세조(世祖 고려 태조(太祖) 왕건의 아버지)가 ‘대왕(大王)께서 만일 조선(朝鮮)ㆍ숙신(肅愼)ㆍ변한(弁韓)의 땅에 왕 노릇을 하려 하신다면, 송악(松岳)을 먼저 점령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궁예(弓裔)를 설득한 말을 기록하고, 주(註)에,
“지금 서경(西京)이 옛날 변나경(弁那京)이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다.”
하였다.
○ 권근(權近)은 이렇게 적었다.삼한에 대한 설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워 국호를 마한이라 하였는데, 백제 온조가 서게 되자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 익산(益山))에 옛 성(城)이 있는데 지금 사람들도 그것을 기준성(箕準城)이라고 일컬으니,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진한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난 땅이다. 《신당서(新唐書)》에 ‘변한이 낙랑 땅에 있었다.’ 하고 또 ‘평양(平壤)은 옛 한(漢)의 낙랑군이다.’ 하였으니, 진한이 신라가 되고 변한이 고구려가 되었다는 것 또한 의심할 여지가 없다. 《후한서》에 ‘변한은 남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다.' 하였는데 ‘변한이 남쪽에 있다.’ 한 것은, 대개 한(漢)의 지경인 요동 지방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지 변한이 진한과 마한의 남쪽에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리라. 최치원이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이다.’ 한 것은 잘못이다.
○ 본조(本朝) 서거정(徐居正) 등이 《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이렇게 적었다.삼한에 대한 설은 최치원에게서 이미 정론이 내려졌다. 고려 중엽에 와서, 금마산(金馬山)이 백제의 지경에 있고 평나산(平那山)이 고구려의 지경에 있으니, 평(平)자와 변(卞)자가 음이 저로 가깝다 하여, 마한은 백제가 되고 변한은 고구려가 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분명하게 지적해서 말한 사람은 없었다. 김경숙(金敬叔)의 말은 스스로 모순되니 따질 가치가 있겠는가? 그런데 권근(權近)이 곧 마한은 백제가 되고 변한은 고구려가 되었다고 단정하여 오래전부터 이미 정해진 설을 착란시켰으니, 웬말인지 알 수가 없다.
다시 상고하건대, 삼한 때에는 마한이 가장 커서 54국을 거느렸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국을 거느렸으니 지금 익산(益山) 이남에 54국을 수용할 땅이 없다.
생각건대, 마한의 왕도(王都)가 남쪽은 변한에 아주 가깝고, 동북쪽은 낙랑(樂浪)ㆍ옥저(沃沮) 등과 서로 인접하였으며, 뒤에 고구려 동명왕이 낙랑에서 일어나 마한 동북쪽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후인이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칭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이리라.
《후한서》에 ‘변진(卞辰)은 진한의 남쪽에 있다.’ 하고, 또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산다.’ 하였으니, 변한과 진한이 서로 인접하였었다는 것 또한 알 수가 있다.
신라 혁거세 19년에 변한이 와서 항복하였고, 백제가 이미 마한을 멸한 다음, 신라를 잠식하여 변한의 옛땅인 지리산(智異山)의 서쪽을 모두 병합하였으니, 후인이 백제를 변한이라고 칭한 것은 아마 이 때문이리라. 그런데 어째서 권근은 금마(金馬)ㆍ평나(平那)의 설에 미혹되어, 마한이 백제 영역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결국 백제라고 했는가?
또 《당서》에 이른바 ‘변한의 묘예가 낙랑 땅에 있다.’ 한 것은, 아마 변한의 계통이 낙랑으로부터 나왔음을 말한 것이리라. 그런데 권근은 그것을 이끌어 증거하면서 곧 묘예라는 두 글자를 빼버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그의 말에 ‘《후한서》에 「변한이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은 대개 한(漢)의 경계인 요동 지방을 기준해서 말한 것이지, 변한이 진한과 마한의 남쪽에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였는데, 참으로 그의 말과 같다면, 그가 말한 마한이 서쪽에 있다는 것 또한 요동의 서쪽에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주관육익》에는 ‘서경이 옛날 변나경이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더욱 거짓되고 허망한 말이다. 변한을 서경으로 삼는다면, 조선(朝鮮)은 다시 어느 땅을 가리킨 것인가? 후일에 궁예가 나주(羅州)에서 용병(用兵)하기 시작하였으니, 세조가 말한 변한은 백제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에 ‘고구려 땅에 원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하고, 백제 땅에 원래 변산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했다.’ 하였는데, 지금 평양부(平壤府)에 마읍산이 있고, 부안현(扶安縣)에 변산(邊山)이 있으니, 《삼국유사》의 말이 혹 증거가 있는 듯하다. 그런 때문에 최치원의 구설(舊說)에 따라 경기도ㆍ충청도ㆍ황해도 등을 마한의 옛 영역에 해당시키고, 전라도를 변한의 옛 영역에 해당시켰다.
○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은 이렇게 적었다.우리 동방은 옛날에 저절로 남북이 나뉘어졌다. 북쪽은 본디 삼조선(三朝鮮)의 땅이요, 남쪽은 곧 삼한(三韓)의 땅이었다. 《후한서》에 삼한 지역을 가리킨 것이 또한 명백하다.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진한 육부(六部)의 추대를 받자 신라가 비로소 생겼고, 온조(溫祚)가 마한을 멸하자 백제가 일어났다. 변한은 전사(前史)에서 비록 어디로 전했는가를 말하지 않았으나, 수로왕(首露王)이 가락(駕洛)에 나라를 세우고 진한 남쪽 지역을 차지했으매, 가야산(伽倻山) 남쪽과 지리산(智異山) 동쪽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가 뒤에 신라에 흡수되었으니, 아마 이 지대가 곧 변한의 땅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남쪽은 어디까지나 남쪽이고 북쪽은 어디까지나 북쪽이니 본디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이다. 그 한계는 분명히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한수(漢水)가 남북을 한계하는 천참(天塹)이 되었던 것 같다.
최치원이 비로소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다.’ 하였으니, 이것이 첫째 착오요, 권근은 마한이 백제라는 것은 알았지만, 고구려가 변한이 아니라는 것은 역시 알지 못하고 혼동해서 말하였으니, 이것이 둘째 착오다.
삼한 때 본국에는 비록 문자가 없었으나, 《전한서》와 《후한서》에 모두 열전(列傳)이 있으니, 연대(年代)의 상하와 지계(地界)의 원근을 가지고 구한다면 백대토록 멀더라도 눈 앞에 있는 듯 역력하다.
한 무제(漢武帝)가 조선 땅을 사군(四郡)으로 만들고, 한 소제(漢昭帝)가 그것을 합쳐서 이부(二府)로 만들었는데, 주몽(朱蒙)이 일어나서 이내 그 땅을 차지하여 고구려를 세웠으니, 어느 시기에 변한이나 또는 마한이 될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으로써 사군과 이부는 어디까지나 사군ㆍ이부였고 삼한과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후한서》에 ‘변한은 진한 남쪽에 있고 또한 왜국과 접했다.’ 하였고, 또 ‘진한과 변한은 섞여 살았으므로 의복ㆍ거처ㆍ풍속이 동일하다.’ 하였고, 또 ‘마한은 54국을 거느리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국을 거느렸다.’ 하였으니, 진한과 변한은 합해도 겨우 24국으로 마한의 절반도 되지 못했다.
이것으로 보면,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이 합쳐서 마한이 되고, 영남(嶺南) 1도(道)가 나뉘어 진한과 변한이 되었다는 것을 또 어찌 의심하겠는가?
상고하건대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삼한의 강역은 천고의 미결안이다. 다행히 전적(典籍)이 남아 있고 선유(先儒)의 논변(論辨)이 있어서 참험(參驗)할 수는 있지만, 여러 설의 이동(異同)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알 수가 없는데, 자네 또한 말할 것이 있는가?”
하기에, 답하기를,“동방에는 이미 증빙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중국의 역사 책을 가지고 논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후한서》에 ‘마한은, 북쪽은 낙랑과 접하고, 남쪽은 왜국과 접했다.’ 하였으니, 한강(漢江) 이남에서 남해(南海)까지가 그 땅이 아니겠는가? 또 ‘삼한은, 동서는 바다에 닿았는데, 진한은 동북에 있어 예ㆍ맥과 접했다.’ 하였으니, 예ㆍ맥은 지금 강원도이므로, 진한은 지금의 영남(嶺南)이란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또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또한 왜국과 접했다.’ 하였으니, 지금 낙동강 이서 지리산 서남쪽의 제군(諸郡)과 양남(兩南 호남(湖南)ㆍ영남(嶺南))의 연해(沿海) 등지가 바로 그 땅이다.
또 《위지(魏志)》에 의하면, 진(辰)ㆍ변(弁) 제국(諸國)은 국명이 서로 같은 것이 많기 때문에 진변(辰卞)이란 두 글자를 더해서 구별하였으니, 진한과 변한의 지역이 섞여 있던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다. 《북사(北史)》에 ‘백제는 마한의 무리요 신라는 진한의 종족이다.’ 하였으니, 그 설이 옳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온조(溫祚)가 강역을 정할 때 남쪽은 웅천(熊川)까지 한계를 삼으니, 마한왕이 나무라기를 「왕이 처음 하수를 건널 때 내가 동북 1백 리의 땅을 떼어 주었다.」 했다.’ 하였으니, 웅천은 지금 공주(公州)이다. 마한은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였는데, 금마군은 지금의 익산(益川)이니, 이것은 양호(兩湖 호서(湖西)ㆍ호남(湖南))가 마한이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이것으로 논한다면 삼한의 강역이 저절로 의거할 만한 것이 있으니, 분분하게 각기 신설(新說)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하였다. 또,“그렇다면 고운(孤雲 최치원의 호)이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이다.’ 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므로 답하기를,“그 설 또한 옳다. 고운은 당시 사람인데, 마한이 고구려가 아니라는 것을 어찌 몰랐겠는가? 그가 말한 마한이 고구려라 한 것은 고구려가 일어난 땅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 뒤에 고구려가 마한 동북쪽 땅을 병합한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스승(성호(星湖) 이익(李瀷)을 가리킨다)의 말에 “최치원이 마한을 고구려라고 한 것은, 기준(箕準)이 비록 도망하여 남쪽으로 갔지만 고구려를 가리켜 마한의 옛땅이라 하므로 아마 그랬을 것 같다.” 하였다. 그가 말한, 변한이 백제라고 한 것은 마한이 백제의 땅이 아님을 말한 것이 아니라, 변한의 반면(半面)이 또한 백제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의 생각에는, 삼한을 삼국에 분배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 설이 이와 같은 것이니, 착오라고 할 수 없다. 후인이 그의의를 궁구하지 않고 망령되이 비방을 가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고운의 문장은 박아(博雅)하여 가장 고고함에 가까우니, 무사(誣辭)가 아닐 것이다. 대개 이같은 유는 마땅히 시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근거를 삼아야 하니, 나는 고운의 설로 정설을 삼는다.”
하였다. 또,“여러 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므로,“《삼국유사》가 고운의 설을 따른 것은 옳으나, 고구려의 마읍산(馬邑山)을 들어 마한산이라 하면서 금마산(金馬山)을 들어 마한이라 한 것을 배척한 것은 잘못이다.
《주관육익》의 실착을 《여지승람》에서 반박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세조(世祖)가 말한 ‘조선ㆍ숙신ㆍ변한의 땅에 왕 노릇 하려거든……’ 이라고 한 것은, 우리 나라 지역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려 했던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숙신은 북에 있고, 변한은 남에 있고, 조선은 중앙에 있었기 때문이니, 궁예가 나주로부터 비로소 용병한 것으로 변한의 증거를 삼은 것은 불가하다.
권근은 ‘변한이 남쪽에 있다는 것은, 한(漢)의 지경인 요동 지방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이지, 변한이 진한과 마한의 남쪽에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하여 변한이 고구려라는 것을 실증하였으나, 대저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고, 변한은 남쪽에 있다.’ 는 것은 곧 《후한서》에 그대로 기재된 글로서 ‘진한은 동쪽, 마한은 서쪽에 있다.’ 한 것은 우리 나라의 지방을 기준으로 해서 말한 것인데 ‘변한은 남쪽에 있다.’는 것만으로 중국의 경계를 말했다는 것은, 문리(文理)가 어긋나 서로 접속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진퇴에 근거가 없게 된다.
《여지승람》은 최치원의 설을 따랐으니 대체로 옳으나, 《삼국유사》에서 말한 마읍산으로 마한을 삼았으니, 그것은 잘못이다. 또 《삼국유사》에서 말한 변산(卞山)을 지금 부안현(扶安縣)에 있는 변산(邊山)이라고 한 것도 옳지 않다. 변한 건국이 과연 변산(邊山)에 있었다면, 이때 마한이 금마(金馬)에 도읍하였는데, 어찌 마한에 속하지 않고 진한에 속하였겠는가? 또한 그 뒤에 하필 마한을 지나서 신라에 투항했겠는가? 이로 보아 그의 설이 잘못이다.
한구암(韓久庵)의 ‘남쪽은 어디까지나 남쪽이고 북쪽은 어디까지나 북쪽이다.’ 하는 설은 정론이라고 할 만하다. 오히려 고운이 ‘마한은 고구려다.’ 라고 말한 뜻을 모르고 결국 양촌(陽村 권근의 호)의 투식으로 돌아갔으니 애석하다. 어떤 사람이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계고편(稽古篇)》에서 ‘옛 사책에 「변한은 변산(卞山) 아래에 나라를 세웠다.」 한다.’ 하고 지금 부안의 변산으로 해당시킨 것은 잘못이다.
지금 호남(湖南) 장흥부(長興府)에 천관산(天冠山)이 있는데 그 봉우리가 마치 관변(冠弁)과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아마 변(弁)은 천관(天冠)의 한 이름일는지도 모른다. 장흥 곁에 있는 보성군(寶城郡)에 군왕(君王)이 파천(播遷)한 유기(遺基)가 있고, 또 모후산(母后山)이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 나라가 망하자 모후(母后)가 이 산으로 피해 들어왔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하니, 이것도 변한의 유적일는지 모른다.”
하였다.【안】 변한이 고구려라는 설은 비록 근거는 없지만, 의심할 만한 것이 한 군데 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의 발해전(渤海傳)에, “그 나라는 부여ㆍ옥저ㆍ변한ㆍ조선 등 여러 나라를 얻었다.”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고구려의 옛 지경이다. 《통감(通鑑)》에도 또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권근이 이것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나 이것도 잘못 전해들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혹 변한의 별부(別部)가 북쪽으로 옮겨가서 그 구호(舊號)를 그대로 사용한 것인가? 이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삼한의 본계(本界)로 말하면, 마한이 서쪽, 진한이 동쪽, 변한이 남쪽임은 무설(誣說)이라고 할 수 없다.
[주D-001]5가야(伽倻) : 아라가야(阿羅伽倻)ㆍ고령 가야(古寧伽倻)ㆍ대가야(大伽倻)ㆍ성산 가야(星山伽倻)ㆍ소가야(小伽倻).
[주D-002]낙랑은 …… 떨어졌다 :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양한지(兩漢志 《전한서(前漢書)》ㆍ《후한서(后漢書)》의 지리지)를 상고하건대 ‘낙랑군은 낙양(洛陽) 동북과의 상거가 5천 리이다.’ 하고, 그 주에 ‘유쥬(幽州)에 속하고, 옛날 조선국이다.’ 하였으니, 계림 땅과는 멀리 떨어진 것 같다.” 하였다. [주D-003]《위지(魏志)》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를 가리킨다. 이하도 같다.
(후략 - 첨부파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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