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학계의 거짓말 잔치(33) 이번호부터는 고구려 초기기록 불신론에 대해 살펴보겠다. 현재의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은 3국 중 가장 빨라 일반적으로 6대 태조왕 때 엄밀한 의미의 고대국가의 건국이 되었다’고 보지만, 『삼국사기』의 건국 기록인 신라 서기전 57년, 고구려 서기전 38년, 백제 서기전 18년과는 큰 차이가 있다.
여러 기록이 일치하는 ‘고구려 건국’ 연도는 사실 먼저 고구려의 건국 관련 기록 중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할 때 추격군을 따돌린 부분에 대한 여러 기록이 일치함은 그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우선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엄호수(淹狐水)에 이르러 건너가려 했으나 다리가 없었다. 뒤쫓는 군사들이 곧 닥칠까 두려워 강물에 고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자다. 지금 도망하는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닥치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하겠느냐?’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몽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져 뒤쫓는 기병은 건널 수 없었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보다 730여년 앞인 장수왕 때 세운 「광개토대왕릉 비문」의 내용도 이와 거의 같다. 두 기록을 비교하면 건넌 강 이름이 약간 다르고, 다리를 만든 것이 ‘물고기와 자라’, ‘갈대와 거북’ 정도로만 다르다. 중요한 것은 광개토대왕 비문이 청나라 말기에 발견되었으므로 『삼국사기』 편찬 당시 그 비문 내용을 몰랐을 텐데도, 이와 같이 두 내용이 거의 같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의 내용이 조작이 아니라는 유력한 증거로 볼 수 있다. 또 『삼국사기』보다 약 백 년 후에 나온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도 위와 거의 같은 내용이 있는데,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규보가 「동명왕편」 서문에 『구삼국사』 「동명왕본기」를 보았다고 했으므로 『삼국사기』 역시 『구삼국사』의 기록을 토대로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 기록의 원전이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 이병도의 동방한사군현도(고구려현 표시)
이병도는 고구려를 ‘한(漢)나라의 제후국’으로 해석 그런데 이병도는 저술에서 전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우선 다음 문장을 보자.
“고씨 왕실의 시조는 주몽(또는 추모, 동명)이라고 하거니와, 그러면 그(계루부 주몽) 이전에 소노부가 왕 노릇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 왕이라는 것은 한문류의 표현으로서 실상은 유력한 거수(맹주격)를 지칭한 것에 불과하니, 처음에는 계루부(홀본)보다도 소노부가 맹주적 지위에 있어 대한(對漢) 관계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모양이다. 따라서 한으로부터의 봉작 등도 여기에 먼저 수여되다가 그 후 소노부의 세력이 쇠하고 계루부가 대신 맹주가 됨으로부터는 거기에 개수(改授)되었던 것이라고 보아야겠다.” (『한국사, 고대편』, 한국학술정보, 2012, 189~190쪽)
계루부의 주몽 이전에 소노부에서 왕 노릇을 했다는 내용은 『삼국지』 동이전의 ‘고구려’ 조에 나오는 내용일 뿐, 『삼국사기』에는 계루부나 소노부 등에 대해 일체 언급 없이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된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지』에 ‘왕’이라고 표현했는데도 자기 임의대로 ‘거수(제후국)’로 격하시켜 놓고, 제후로 봉한 나라가 한(漢)나라인 것처럼 해석하고, 한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동북공정의 주장과 같이 현도군 안에 고구려현을 표시하고 있다(동방한사군현도, 『한국고대사연구』, 98쪽). 이런 발상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추종하여, 고구려가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억지 주장으로서 크게 잘못이다.
삼국사기의 ‘다물(多勿)’ 기록을 상기해야! 일례로 고구려가 한의 봉작을 받지 않았음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조의 다음 기사에서 알 수 있다.
“2년 6월, 송양왕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므로 왕은 그 땅을 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봉하여 다물도주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의 회복’을 ‘다물’이라 하므로 이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동명성왕은 원년에 말갈 부락을 물리쳤고 다음 해에 비류국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다. ‘다물(多勿)’이란 말이 옛 땅의 회복을 뜻한다고 했으므로 고구려를 세운 큰 뜻이 고조선의 잃어버린 옛 땅을 찾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고조선이 한(漢)나라에 잃어버렸던 땅 요동, 현도, 낙랑군 등을 회복하기 위해 그 부근에 고구려를 건국하여 ‘다물도’라고까지 이름 붙인 동명성왕을 한(漢)나라의 봉작을 받는 제후로 깎아내린 것은 우리나라 자존심을 크게 훼손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