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회 국민강좌]'巫俗에 살아있는 우리 上古史'
- 舞天문화연구소장 조성제님 -
삼신종교
삼신할머니는 창조의 신
태백진교의 모체가 된 종교가 있었다면 그 종교는 <삼신종교>가 아닐까 한다. 삼신종교는 바로 우리 민족이 지금도 믿고 있는 <삼신신앙三神信仰>이 있다. 우리 민족은 삼신이 생명을 점지해야만 아기가 탄생된다고 굳게 믿어온 것은 삼신은 바로 창조의 신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이렇게 삼신을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바로‘삼신신앙’이며, 민족의 종교인 것이다. 삼신은 부도지에서는 마고와 두 딸인 궁희와 소희라고 하였다. 또 한인·한웅· 단군을 삼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천지인을,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원방각(圓方角)을 삼신이라고 한다.
또한 하늘의 직녀성을 삼신이라고도 하는데 직녀성 세별을 마고본성, 실한성, 허튼성이라고 하였다. 이들 세 성을 소리로 본다면 마고본성은 본소리(本音), 실한성은 실한소리(實音), 허튼성은 허튼소리(虛性)가 된다. 삼신산을 다른 말로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라고 한다. 삼신할머니를 다른 말로 삼신상제(三神上帝)·삼신제왕(三神帝王)·삼신제석(三神帝釋)으로 부르며 삼신신앙(三神信仰)이 탄생되었다. 다만 삼신신앙이 종교라는 기록은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면 종교가 되는 것이다.
삼신신앙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삼신할머니’ ‘마고삼신’ ‘삼신산’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등이 있다. 하늘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직녀성이다. 이 직녀성은 ‘마고麻姑’ ‘궁희穹姬’ ‘소희巢姬’를 나타내며 이것을 삼신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북두칠성, 해, 달을 삼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삼신은 마고, 봉래, 영주라 부르기도 한다.
삼신종교는 오랜 세월 거치면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해 나갔다. 이론적인 근거가 되는 <일석삼극>의 원리가 보편적인 진리로 자리 매김하였고, 여기에 <음양조화론>이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삼태극 사상이 완성되었다. 삼신은 천부경의 일섬삼극(一析三極)으로 표현되었으며, 천일·지일·인일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있어 삼신은 삼진(三眞)과 삼망(三妄)으로 구분한다.
삼신종교를 근거로 도 · 불 · 유 삼교일체의 신선도가 한웅천황에 의하여 <태백진교>로 확립되어 가르쳤다. 삼신사상에 있어 삼진인 선청후(善淸厚)를 망치는 삼망인 악탁박(惡濁薄)이 들오는 길은 삼도(三途)인 감(感)·식(息)·촉(觸)이다.
삼진이 머무는 집인 삼가(三家)는 심(心)·기(氣)·신(身)이며,
삼진을 지키는 세 개의 관문은 성(性)·명(命)·정(精)이 된다.
이렇게 삼진을 지키기 위하여 생긴 것이 바로 유·불·선이며, 삼교일체 사상이 성립된다.
|
感 (止感)
心 (明心)
性 (覺性)
|
觸 (禁觸)
身 (修身)
精 (精誠)
|
息 (調息)
氣 (養氣)
命 (長命)
|
|
불 교
|
유 교
|
도 교
|
즉 모든 느낌을 끊어 버리고(止感) 마음을 맑게 하여(明心) 본래의 성품을 깨달아(覺性) 성불을 추구하는 사상은 불교라는 옷을 입었다. 또 모든 육체적 감각(관능적인 욕구)을 극복하여(禁觸) 행실을 닦고(修身) 정기(정력)를 성실하게 함으로써(精誠) 성인군자를 추구하는 사상이 유교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게 쉬고(調息), 원기를 길러(養氣), 불로장수(長命)하는 신선을 추구하는 사상이 도교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교에서도 3이라는 개념이 중심사상이 되어 회삼귀일(會三歸一) 또는 개삼현일(開三顯一)을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원효스님은 난마처럼 얽힌 불교 속의 삼(三)이라는 개념을 삼회일귀(三會一歸)라 풀이하였다.
또 삼신(三身)이라 하여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은 33가지의 모습으로 몸에 나타내어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그리고 오래된 사찰을 가서 대웅전 팔작지붕 양 옆 밑을 보면 큰 원 속에 작은 원이 3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은 바로 삼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필자는 큰 원은 우주로 보고 적은 원은 즉, 천일의 마고, 태일의 궁희, 지일의 소희로 보아 삼신의 신성성을 의미한다고 보며, 우주에서 최초로 삼신이 창조를 시작하였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해석하고 싶다.
유교의 성리학에서도 삼극지의(三極之義)라고 하여 삼의 사상을 풀이하였다.
그리고 불로장생으로 신선을 추구하는 도교에서도 『태청(太淸)의 세계에 구선(九仙)이 있고, 상청(上淸)의 세계에 구진(九眞)이 있으며, 옥청(玉淸)의 세계에 구성(九聖)이 있어, 모두 27위(位)라 하였으며, 선(仙)을 상선(上仙)· 고선(高仙)· 대선(大仙)· 현선(玄仙)· 천선(天仙)· 진선(眞仙)· 신선(神仙)· 영선(靈仙)· 지화(至化)의 9계급으로 나누었다.』라는 기록을 《운급칠첨(雲?七籤)》의 권3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에서도 성부와 성자과 성신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삼신사상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기본이념과 사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백진교
한웅천왕시대에 와서 비로소 종교의 이름이 나왔다. 그 이름이 <태백진교>였다.
태백진교는 천부에 근원을 두고 지전地轉(자전)을 합쳐 인사人事(사람이 하는 일)가 우주의 섭리에 맞도록 하는 것이다. 라는 기록이 <한단고기/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247쪽>에 나온다.
소도경전본훈은 태백진교가 우주의 섭리에 근거를 둔 종교임을 밝히고 있다. 한인천제는 천부삼인을 한웅천왕에게 주어 백성을 가르치게 하되, 가르침의 근원을 천부에 두도록 하였다. 이는 인간의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도록 가르쳤다는 말이다. 이 가르침이 太白眞訓태백진훈(필자 주,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이라고 한다.
태백진훈은 우리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치는 교훈으로 우리의 정체성은 바로 천부에 있다고 하였다. 곧 북두칠성과 해와 달에 있다는 것이다. 일석삼극一析三極이라는 우주의 원리에서 태백진교가 나온다. 우주에 3이라는 우주만물이 생성하고 운행하는 이치가 있다. 이 이치에서 처음으로 세상에 종교가 나온다. <태백>은 한웅천왕이 나라를 세운 때 주산으로 삼은 산 이름이다. 또한 그 아래 神市를 만들어 그 곳에서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침을 주어 깨달게 했던 것이 바로 <진교>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웅천왕의 <태백진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시원종교라고 할 수 있는 대배달민족의 시원종교는 <태백진교>보다 더 오래된 어떤 종교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웅천왕의 태백진교의 진훈은 단군왕검시대로 넘어가서 덕교德敎라는 이름으로 백성을 교화 화였다.
단군의 가르침 덕교
일석삼극의 원리를 신화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 태백진교는 일석삼극의 원리가 운삼사성환運三四成環의 원리로 발전하면서 덕교를 잉태한다. 3 이라는 수가 우주라는 구체球體를 운행하면서 4 라는 수로 발전하는데, 덕교는 우주의 균형을 잡아주는 4 라는 수를 신학적인 체계로 가지고 있다. 우주를 3 이라는 수와 4 라는 수가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우친 분이 단군왕검이었다.
그는 우주에 충만한 4 라는 수에서 덕교를 완성하였다. 덕교는 우주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가자는 격조 높은 사상을 담고 있다. 3 이라는 수가 운행하면서 도달하는 4 라는 수는 우주에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원리를 생산한다. 이 원형이정의 원리에서 사계절이 나온다. 사계절의 자연스러운 병화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에 순응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우주의 모든 것은 네 과정의 순환을 거친다. 잉태와 탄생과 성장과 멈춤이 있다. 유년과 청년과 장년과 노년이 있듯이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다. 동서남북이 있으며, 상하좌우가 있다. 이 모두가 자연의 순리를 말하고 있다.
단군왕검은 이를 덕교에 수용하였다. 덕교로 세상을 교화하였다. 덕교는 공격성을 가지지 않았고, 사술성도 가지지 않았다. 덕교의 경전으로 태백진교로부터 이어 받은 천부경과 삼일신고. 그리고 고려 때 만들어진 참전계경에는 경전이 갖추어야 할 순수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덕교의 문화가 우리 민족의 떡문화로 발전하였다.
혈구에 꽂은 모기?旗
한인천제 시대에 소도라는 것이 있었다. 소도는 특정지역을 성역화 한 것이다. 소도의 정상에는 반드시 모 라는 깃발을 세웠다. 이 깃발은 하나님이 계신 신성한 곳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며 신성시 한다.
丘非人爲之曰丘 丘前高後下? (구비인위지왈구 구전고후하모) <康熙字典>
사람을 위하여 만들지 않는 언덕이 구이다. 구는 앞이 높고 뒤를 낮은 곳으로 모를 꽂는다.
소도에 모를 꽂는 것은 소도가 나라의 중심이 되는 땅이라는 뜻이다.
한웅천왕의 청구라는 곳은 바로 소도가 있는 나라의 중심이라는 말이다.
청구에 세웠던 깃발이 모였고 모는 다른 말로 당幢이라고 하는 기다란 깃발을 말한다. 이것이 사찰의 당간지주가 되었다.
土地高者曰丘 因高以事天 故於地上 (토지고자왈구 인고이사천 고어지상) <강희자전>
땅이 높은 곳을 구라고 한다. 높으므로 하늘을 섬기는 일을 한다. 고로 땅위에 세운다.
이 말은 청구의 높은 언덕에서 하늘의 제를 지낸다는 말이다. 이를 줄여서 말하면 구사천이 된다. 하늘에 제사 지낸다는 말이다. 이는 곧 굿의 어원이 된다. 그러면 청구의 높은 언덕 에서 굿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丘因以下事地 故於澤中 (구인이하사지 고어택중)<강희자전>
구가 낮은 곳에서는 땅을 섬기는 일을 한다. 고로 못의 가운데에서 한다.
언덕의 높은 곳에서는 하늘의 제사를 지내고, 구가 낮은 곳에서는 땅에 제사를 지내며 못 가운데에서 하는 것이다. 강화도 마니산이 바로 땅에 제사 지내는 구의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丘事天과 九事地란 말이 나오고 이 말이 바로 굿의 어원이 아닌가 한다. 구에서 모라는 깃발을 꽂고 굿을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 언제 굿을 하였을까? 강희자전에 기록을 보면
前高後下曰 ?丘 星名昴七星僞?頭 (전고후하왈 모구 성명묘칠성위모두)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곳이 바로 모기를 꽂는 언덕이라 한다. 별이름이 묘수인 칠성이 모기의 머리가 된다.
모기의 생김새와 모기를 꽂는 곳에 대한 기록이다. 모구에 모기를 꽂은 이유는 지금으로 부터 BC4400년에서 BC 2000년 사이에 묘수와 태양이 일치할 때가 춘분이었다. 이때가 바로 한웅천왕이 세운 신시의 배달나라를 거쳐서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이 중원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이때 모구에 춘분을 상징하는 모기를 꽂고 춘분마지 굿을 하였다.
<모>는 천제를 지낼 때 <쇠꼬리>를 바쳐서 천제를 지냈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굿을 할 때는 반드시 춤을 추어야 한다. <예>의 舞天에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무교의 정신 生生之生과 相生
굿의 기원
무교는 우리 할머니들의 생활의 지혜요, 삶 그 자체였으며 오랜 세월 우리들과 함께 하면서 우리 민족 심성의 원형이라 생각한다. 굿이란 말은 얼마나 좋은 말인지 영어에 좋다는 뜻인 굿(Good)이 있고 신을 말하는 갓(God)도 굿에서 나왔다.
화해동참(和解同參)과 해원상생(解寃相生)
굿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 굿의 기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문헌으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종교적 제의로는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전하는 예맥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마한의 소도(蘇塗)라는 제사의식이다. 이러한 제천의식들이 굿의 원형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들을 종합하면 소도라는 신성한 곳에서 동쪽을 향하여 재물을 바치고 북을 치며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뜨는 해와 달을 맞이하는 굿이라고 해석할 수가 있다. 이것이 오늘날 굿의 기원이며 지금도 무당들이 행하고 있는 일월맞이 굿이다.
무당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제2대 남해왕 조를 보면 남해왕은 차차웅으로 불렸는데, 이 말은 무당을 나타내는 말이라 한다. 남해왕은 시조의 묘를 세워 친누이동생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들은 굿의 기원을 밝히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강희자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牛尾 舞者所持以指麾 모모우미 무자소지이지휘
모는 희고 털이 긴 소의 꼬리이다. 춤을 추는 자가 쥐고서 흔든다.
이 기록은 제천의식에서 흰 쇠꼬리를 쥐고서 흔들면서 춤을 추었다고 볼 수가 있다. 우리 속담에 「쇠꼬리 쥔 놈이 임자」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그 당시 쇠꼬리를 쥔 사람이 임금이라는 말일 것이다. 지금도 무당들이 굿을 할 때 부채 끝에 긴 천을 달아 그것을 쥐고서 춤을 춘다. 이러한 행위도 흰 쇠꼬리를 쥐고서 춤추던 그 때의 풍속이 아닌가 한다.
무당내력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가람문고본에 조선시대 무당에 대한 기록을 한 <무당내력巫黨來歷>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을 보면, 『상원 갑자 10월 3일 신인이 태백산을 내려오시어 신의 가르침을 설하고 백성을 가르쳤다. 큰아들 부루가 어질고 다복하여 집집마다 땅을 택하여 단을 쌓고 질그릇에 벼와 곡식을 채워 짚으로 영을 짜서 덮는다. 이를 부루단지 혹은 업주가리라고 하였다. 매년 시월 햇곡식으로 채우며 떡과 과일과 술을 바쳐 기도를 한다. 기도할 때는 반드시 나이든 여인이 한다. 이를 무당이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검토하여 보면 무당이라는 공식적인 말이 부루단군이 죽고 태자 가륵이 즉위하면서 백성들 사이에 일어났던 부루단군을 추모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부루단군을 추모하는 과정에서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 영적인 힘이 생기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무당이 현재까지 이어온 무당이다.
<삼한관경> 본기 제4편을 보면 “한웅천왕이 제사를 지내려 갈 때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며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풍백이 천부의 거울을 들고 앞서갔다는 것은 지금 무당들이 지니고 있는 명두明斗나 동경으로 해석이 되며, 우사가 북을 치며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는 것은 하늘의 신을 맞이하러 가는 사람, 즉 무당의 보조자라고 할 수 있다. 북을 치면서 주위를 돈다는 것은 지금 국악이나 풍물에서 여러 명이 북을 치며 원을 그리며 도는 소고춤 등으로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무巫란 낱말을 풀이해 보면 무는 공工자에서 비롯되었다. 단군시대에 공공共工이라는 벼슬이 있었다. 공工은 일을 업으로 삼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 즉 ‘숙달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공공共工은 하늘에 제를 지내고 하늘의 뜻을 전하는 일을 맡아 하는, 즉 단군의 일을 맡아서 잘 처리할 사람이란 뜻이다. 이 말을 증명하는 기록이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있다. 巫는 ‘신명을 다해 춤추는 사람으로, 춤으로 신을 접하므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공工자의 양쪽에 두 사람이 춤을 추는 형상을 취한 글자다.’라고 하였다.
초어楚語에는 「신명강지재 남왈격여왈무 神明降之在 男曰覡女曰巫」 란 기록이 있다.
이 공工 자에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이 무巫 자이다. 공工 자에 들어간 두 사람은 즉 단군왕검을 대신하여 하늘과 땅에 제를 올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던 남녀 두 사람을 말한다. 신라 방언에 무당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하는데 차차웅이 제사를 숭상하고 신을 섬김으로써 그를 경외하여 불렀다고 한다. 차차웅을 무당이라고 하는 것은 신시 한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약 155년 뒤 이차돈의 순교 후 23대 법흥왕(514~540) 때 비로소 불교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법흥왕 이전의 왕은 제사장으로서 상징적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지증마립간麻立干등의 호칭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머리에 썼던 모자가 바로 신라 금관이다. 또한 금관을 장식하고 있는 출자모양의 기둥을 비롯하여 곡옥과 해와 달 그리고 별을 의미하는 명두 등 모두가 제사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산해경/해외남경>을 보면 무함국巫咸國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무함국이 여축의 북쪽에 있다. 무당들이 오른손에는 푸름 뱀을 왼손에는 붉은 뱀을 쥐고 등보산에 있는데 이 산은 여러 무당들이 하늘로 오르내리는 곳이다.』
무함이란 무당은 황제黃帝 또는 요堯 시대의 무당이라고 하며, 무함을 중심으로 무당들이 세운 국가가 바로 무함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등보산은 천계天界와 지상地上을 연결하는 곳이므로 영산靈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무함이 또한 최초의 신의神였다고 한다. 또 <대황남경>과 <해내남경>에도 무당들이 제사장의 개념보다 신의神醫로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희남자 설산훈>을 보면 「醫師在女曰巫 의사재여왈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바로 무녀가 바로 의사라는 말이다.
지금도 병원이나 의사라는 뜻의 ‘의’(醫)자를 무당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조선시대 혜민서 근무> 그리고 지금 흔히 말하는 무당巫堂은 개인을 나타내는 말로서, 무당이라는 당堂자 역시 토지신을 지키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보통 글자가 아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나 당호堂號를 부치지 않는다.
무교에서 사용하는 명두의 의미
<삼환관경본기>를 보면 「한웅천왕이 천제를 드리기 위하여 산에 행차할 때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면서 돌아가며 춤을 추며, 운사는 백검으로 호위하였으니 」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풍백이 천부를 새긴 거울을 들고 앞서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천부를 새긴 거울을 앞장세운 것은 바로 하늘의 대리자인 천제天帝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아울러 절대권력을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것을 거울이 말해준다고 하겠다.
그러면 명두는 해와 달과 그리고 북두칠성의 빛을 명두로 받아들여 만신들에게 천지의 정기와 교감을 할 수 있게 하여주는 안테나 역할을 하게 된다. 아울러 신령들의 몸체가 되기도 하며, 사제자의 표시나 왕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 만신들이 신령과의 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통신수단이기도 하다. 명두는 절대권력의 상징으로써 명두에 햇빛이 반사되어 빛을 발할 때의 눈부심은 감히 누구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은 곧바로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절대자로서의 위력을 발휘하는 절대신의 상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밤에 비치는 달의 빛과 북두칠성의 빛을 받은 명두의 빛은 자비로움과 은은함, 그리고 포근함을 함께 느낄 수 있어 절대 신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신의 신비스러움을 더해주게 하는 것이 바로 명두이기도 하다.
즉 명두에 해와 달과 북두칠성이 비추면 그것은 바로 명두 자체가 우주가 되는 것으로 명두를 거는 순간 거대한 우주는 명두로 옮겨지고 무당들이 신당에 앉아 기도를 할 때도 그 명두를 통하여 우주의 파장 즉 기氣와 통신을 하고 더 나아가 우주를 가슴에 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명두明斗는 한자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명두에는 반드시 해와 달, 그리고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어야 하며, 이것들을 천부삼인이라고도 한다.
무당들은 일월명두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무당이 되기 위하여 신을 받는 내림굿을 할 때 일월대日月擡 제일 위에 매달린 일월명두를 통하여 신을 받아 드리고 신과 처음으로 교감했기 때문이다.
일월대는 소나무를 많이 사용하는데 반드시 동쪽으로 뻗은 솔가지를 꺾어다가 사용한다. 솔가지 형체는 몸체와 양팔 그리고 머리 부분을 구분할 수 있는 즉 사람 형상을 닮은 사람의 키보다 조금 큰 것을 선택하여 자른다.
그리고 솔가지에다 홍색치마와 노랑저고리 입히고 겉옷으로 남쾌자를 입힌다. 때에 따라 도포를 입히기도 하는데 신목에 옷을 입히는 사례는 지금도 강릉단오굿에 남아 있다. 이런 풍습은 한웅천왕 때 소도에 웅상을 세워 옷을 입힌대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