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왕 오구라
2013년 10월 한 달 동안 일본국립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의 미술’이란 특별기획전이 열렸다.
전시된 물품이 이른바 ‘오구라 컬렉션’으로 오구라란 일본인이 우리나라 왕릉과 고분을 무자비하게 파헤치고
도굴해 간 우리 문화재와 보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는 조선을 돌며 곳곳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속에서 꺼낸 귀중한 우리문화재
1천여 점을 불법으로 반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명실 공히 도굴왕으로 불리어졌다.
그는 대구에서 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었으며 마침내 조선 제일의 전기회사로 성장했다.
여기서 벌어들인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온갖 수단 방법을 다해 고분을 도굴하고 보물을 수집한 장본인이다.
오구라 컬렉션에 포함된 우리나라 문화재 중 30여점은 일본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무덤을 파헤치고 훔쳐간 남의 나라 보물을 버젓이 자기 나라의 문화재로 둔갑시킬 만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오구라는 죽기 직전인 1964년에 수집품의 도굴장소와 유통경로를 정리한 책을 썼다.
따라서 천여 점의 고고자료와 미술공예품들의 정확한 유물출토지, 유통경로 등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문화재를 훔친 사람은 오구라 뿐이 아니다.
조선침략의 앞잡이였던 이토히로부미도 최고의 문화재로 손꼽히는 고려청자의 대량수집가로 알려져 있다.
수집한 고려청자로 일본왕실과 귀족, 대신들에게 선물하며 정치적 야욕을 달성했다.
얼마나 많은 고려청자를 반출했는지는 그 역시 고려무덤 파괴의 주범이란 닉네임으로도 알 수 있다.
경술국치 이전에도 이미 일본에서는 천여 점의 고려자기가 한자리에 전시될 만큼 많이 반출되었다고 한다.
거의가 도굴로 취득한 유물들이 많아지자, 골동품 전문 상점이 늘어나고 ‘경성미술구락부’까지 생겼다.
우리문화재가 미국, 프랑스 등으로 반출되는 창구역할을 했다.
또한 1920년대는 도쿄대학이 중심이 되어 낙랑고분을 발굴했고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부 대학으로
가져갔다.
처음 허가받을 당시에는 총독부 박물관에 보관하기로 약속했지만 조사가 끝나는 대로 돌려주겠다는 핑계도
저버린 채 아직도 도쿄대학에 불법 소장되고 있다.
일본이 강점기에 도굴한 유물들은 우리가 몇 백 년을 두고 발굴, 연구해도 못다 할 만큼 엄청난 양이라 한다.
극히 일부는 보고서로 남겼지만 대부분은 사멸시키고 말았다.
특히 그들의 고적조사 목적이 지배체제를 뒷받침할 자료수집에 있었으므로 한국인의 근접을 철저히 막았다.
따라서 한국인의 연구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더구나 해방되면서 재한일본인들이 점유했던 모든 재산을 원칙적으로 압류해야 했지만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 그런 행정적인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재한일본인이 소장한 문화재들도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그나마 곧바로 총독부 박물관을 접수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선고적조사사업’이란 미명하에 문화재 발굴을 실시했고, 그 과정에서 한몫 잡겠다는
일본인까지 닥치는 대로 우리 문화재를 불법 반출했으며 오구라와 이토히로부미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 때 문화재 반환청구 품목을 작성하였고 그 중에 오구라 컬렉션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오구라 컬렉션은 개인소장이란 이유로 반환을 거절했다.
반환이냐, 기증이냐의 명칭을 두고도 신경전을 벌였다.
양측은 반환도 기증도 아닌 ‘인도(引渡)’라는 밋밋한 용어로 절충하여 1.432점을 인도했지만 그 물품들이
빈 쭉정이들이다.
석굴암, 왕릉도굴 등 특급보물을 약탈한 그들이 짚신 3켤레와 막도장 20개, 우편집배원 모자, 영등포우체국
간판 등을 돌려주며 불법 반출한 문화재 반환이 종결되었다고 하니 웃기는 일이 아니라 피눈물 나는 비극이다.
오구라 컬렉션의 문화재들은 그의 아들에 의해 일본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개인소장품이란 이유로 반환을 거부했던 명분도 사라진 것이다.
신화는 문화의 뿌리
우리 신화에는 하늘의 마음과 땅의 현실을 결합시킬 수 있는 자만이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강열한 메시지
신화학자 프레이즈 박사의 저서 “황금가지(金枝)”에서 신화는 문화의 뿌리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서구문화의 뿌리를 이태리의 숲속 거울같이 맑은 ‘네미’호수로 정의하고 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처절한 투쟁은 철저히 ‘정글’법칙이 통용되는 힘의 세계이다.
칼을 뽑아들고 시대를 정복한 자가 왕이다.
왕의 후보자는 왕을 죽임으로서 왕이 될 수 있다.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적용될 뿐이다.
결국 왕이란 살인자며 또한 살해되어야 할 대상이다.
이처럼 유럽신화의 원형은 권력을 향한 갈등과 피의 투쟁사를 여과 없이 투영시키고 있다.
이 숲이야 말로 서구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희랍 신화에도 아버지를 살해하는 근친살해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왕을 죽이고 임금이 된 크로노스는 자신도 아들에게 권좌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자식을
낳는 데로 삼켜 버린다.
그러나 우리 신화는 전혀 다른 화소를 갖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은 상상도 할 수 없고 갈등이나 권력투쟁도 전혀 없다.
인간은 하늘과 땅의 조화에서 생겨난 신비로운 존재로 본다.
단군신화와 주몽신화는 모두 천강(天降)신화로 이루어진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나 해모수가 천강신화의 주인공이고 웅녀와 유화가 땅의 신의 대리인이었다.
이런 신화요소는 우리민족의 원형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이런 신화소는 박혁거세와 알지신화로 삼국시대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우리 민족신화의 원형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융합하고 조화되는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인
“한”사상으로 골격을 이룬다.
하늘을 숭상하고 이 땅의 모든 자연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아낄 수 있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철학도 이런
신화적 발상에서 비롯했다.
혁거세와 알지신화에서는 간접화법을 쓰고 있다.
알로서 태어나거나 황금 궤 속에서 태어나며 서광이 비치고 뭇 짐승과 새들이 축가를 불렀다는 것으로 보아
천제의 아들임을 충분히 은유하고 있다.
신화는 인간존재의 기본적인 양태를 말하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한 상상적 창조물일수 있고 또한 창조의 원천일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화를 통해서 당대를 살아갔던 옛 사람들의 사고의 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고대 탄생신화의 리얼리티(reality)는 우리들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이고 그 메시지는 바로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인 ‘한’사상으로 표출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정신적 고향은 대자연이다.
하늘이고 땅이다.
그대로 축복이고 화합이요 통합인 아름다운 왕의 군림이었다.
이런 신화소는 ‘인간은 부러운 대상“이며 신도 인간을 선망의 대상으로 보았다.
살벌한 ‘네미’숲 신화나 기독교 창세기에서 보여주는 죄를 짓고 쫓겨난 인간, 신에게서 버림받은 존재로
부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따라서 우리 신화에는 하늘의 마음과 땅의 현실을 결합시킬 수 있는 자만이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강열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인간이란 하늘과 땅의 이미지가 결합될 때 비로소 인간다워진다.
피비린내 나는 칼과 모반과 살부(殺夫)의 정글법칙이 통용되는 “네미"숲속과 같은 서구적인 신화원형과는
하늘과 땅만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 문화의 뿌리는 천지인합일의 신화로 하늘과 땅과 모든 사람이 하나로 통합하는 ‘한’문화로 형성된
것이다.
천부경에서 석삼극(析三極) 무진본(無盡本)이란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갈태일 한문화연구회장,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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