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환웅은 황제와 싸워 이겼고 중원을
석권하였다
그러면 치우환웅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의 활동 상은 어떠하였는가. 『신시본기』는 고기의 하나인 『대변경』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변경』大辯經에 말한다.
우리 치우천왕은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어 백성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셨다. 유망楡罔의 정권이 쇠약해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刀鎧, 모극矛戟, 대궁, 호시弧矢같은
무기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탁록琢鹿(지금의 북경 일대)을 함락하고 구혼九渾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萬軍을 겁에 질려
굴복케 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었다. 한 해 동안에 아홉 제후의 땅을 점령하고 양수洋水를 건너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 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웠다. 이에 서토西土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치우환웅의 진격은 중원을 석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회수와 대산 사이의 땅까지
차지하였다.
이때 유망은 소호少昊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치우)은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케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도망쳐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 『관자』(管子)에 말하는 바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사마천 『사기』의 「오제본기」에 나오는 말들이다. 치우환웅의 활약으로 유망이 망하고 삼황三皇 시대가 마감된다. 그리고 나타나는 인물이
헌원(軒轅, 후의 황제黃帝)인데 치우와 싸운 헌원은 뒷날 황제가 되어 한족(중국인)이 그를 자기네 시조라고 숭모한다. 그에 반해 치우환웅은 우리
민족의 시조인데 우리는 치우가 우리 시조인줄 모르고 있다. 그뿐 아니라 치우마저도 현재 중국인의 시조로 이적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시조를 도둑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치우는 우리의 환웅이었으므로 치우의 헌원과의 싸움은 저들 한족漢族과 우리 한족韓族의
일대 천하쟁탈전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과연 우리의 시조인 치우가 중국인의 시조인 헌원에게 졌는가. 아니면 이겼는가.
사마천
『사기』에는 치우가 지고 죽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측 기록인 『신시본기』에는 우리가 이긴 것으로 되어 있다. 왜 두 나라 기록이
다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만일 헌원이 사실대로 졌다고 기록하면 영원히 중국이 동이족에게 패했다는 오명을 남기게 되기 때문에 저들이 역사를
위작한 것이다. 『신시본기』에는 싸움의 승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때에 공손헌원公孫軒轅이란 자가 있었으니
토착 주민의 괴수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空桑에 입성하여 크게 신정新政을 포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엄하게도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자기가 즉위하여 천자를 대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치우천왕은 앞서 항복해 온 소호少昊를 시켜 탁록에서 적을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감히 백 번이나 도전해 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九軍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길을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기병
3,000명을 이끌고 탁록의 유웅有熊에서 헌원과 싸워 적을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치우천왕은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만들어 싸움을 독려하니 헌원의 군대는 두려워 달아나 숨었다. 그때 상황이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百里兵馬不相見)고 할 정도였다. 이에 치우천왕은 회대淮垈 지방을 모두 점령하고 탁록에 성을 쌓으니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신하되기를 원하여 조공을 바쳤다.
이와 같이 헌원과 치우의 싸움 즉 중국민족과 한국민족의 전쟁은 압도적으로 우리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다. “백 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면 완전한 패배였다. 왜 그렇게 치우의 군대가 강했는가
하면 무기가 월등히 우수하였기 때문이다. 치우는 안개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갑옷을 만들어 적의 화살을 무력화시켰다. 그래서 중국인은 치우를
사람이 아니라 “머리가 구리요 이마가 쇠로 된 도깨비”라고 생각했다.
대저 서방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를 알지 못하였는데 치우천왕의 법력이 높고 세어 싸울 때마다 패했다. 『운급헌원기』에 보면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치우를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라고 썼으니 그 낭패한 모습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치우환웅은 백전백승하였는데, 그가 만든 무기 가운데에는 지남차와 비석박격기가
있었다.
치우천왕은 더욱 더 군용軍容을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 바 10년 동안에 헌원과 73회나 싸웠으나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고 군은 물러설 줄 몰랐다.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자 원한이 쌓여만 갔다. 헌원은 군을 일으켜 우리 신시를 본 따서
무기와 갑옷 그리고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도전하였다. 치우천왕은 크게 성을 내어 형제종당兄弟宗黨으로 하여금 전쟁 준비를 갖추어 위엄을 세웠으며
헌원의 군대가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시종 치우가 우세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사마천 『사기』에는 치우가
헌원에게 죽었다고 기록하였는가. 그것은 사마천이 중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했을
것이다.
치우환웅은 영원한 군신으로
추앙되었다.
그러면 사실은 어떠했는가. 사실은 치우환웅 자신이 싸움터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치우비라는 한 장수가
전사한 것이다. 사마천 『사기』에는 치우비의 죽음을 치우의 죽음으로 바꿔 썼다. 그러나 『신시본기』에는 사실대로 쓰고 있다.
그런데 한 바탕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우리측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급히 공을 세우려 서둘다가 불행히도 전사하였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를 잡아 죽였다”(擒殺蚩尤) 한 것은 치우비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지 치우천왕의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에 치우천왕은
격노하여 새로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어 진을 치고 서로 연합하여 진격하니 적진은 감히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치우천왕은 정예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서쪽의 땅을 지키도록 하고 다른 한 부대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회대淮垈의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게 하였으며 헌원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므로 치우환웅은 헌원에게 잡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서 훌륭하게 신시를 지켰다. 그러기에
치우환웅의 능이 중국 산동성에 남아 있으며 치우의 이름이 치우기蚩尤旗라는 별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양
3국의 군신軍神으로 추앙 받고 있는 것이다.
치우천왕이 돌아가신 지 수천 년이 되었으나 지금까지 만장의 광열이 있어 능히
후대인으로 하여금 흥분케 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 하다. 『한서』漢書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중국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안에
있다고 하며 높이가 7척으로 진한시대의 주민들은 매년 10월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 때는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한줄기 붉은 띠 모양의
연기가 뻗었는데 이를 치우기蚩尤旗라 하였다고 한다.
치우천왕의 영명한 혼과 웅장한 육체는 보통 사람과 아주 달라 수천
년이 되도록 오히려 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반해 헌원은 쓸쓸히 잊혀져 갔고 유망 또한 영구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치우천왕의 공덕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위엄이 살아 있다. 그러나 헌원의 경우는 다르다. 헌원
이후의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고 헌원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히 베개를 베고 눕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사기』에 이르기를
“산을 뚫고 길을 내어도 한번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등 마치 전장터와 같은 곳에서 살아야만 하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헌원이 생존시에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것이다.
글쓴이 박성수 씨는 서울대 사대 역사학과를 거쳐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등 각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며 후학들을 길렀으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을 역임한 후 한국정신문화원 편집부장으로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을 주도하였다. 아울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서 중국 속의 독립운동사적지 및 백두산, 발해사적지 등을 탐방하였다.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이며
민족사바로찾기연구원 원장으로 왕성한 연구 및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