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세계관 정립은 올바른 역사관에서
인간존재에 대한 인식은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은 물론, 정신문화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성숙된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필수적으로 중요한 요건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정신문화적 측면에서 인간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는냐 하는 역사인식이 매우 중요하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밥을 먹어야 하지만,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값있게 살기 위하여 또한 꿈을 먹고 산다. 꿈이 없고 희망이 없는 잿빛 세상은 생기가 없고 답답하기만 하다. 꿈이 있다는 것은 이상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개인적 차원의 이기적인 야망은 이상이 아니다. 그 꿈은, 그 이상은 높아야 한다. 온 사회공동체를 위하여, 온 나라를 위하여, 아니 온 누리 인류공동체의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높은 이상을 가져야 한다. 그 꿈, 그 이상은 높고 커야 한다.
꿈과 이상을 높고 크게 가지려면, 그 사람의 기우(氣宇)가 커야 한다. 기우를 크게 가지려면, 넓은 시야의 높은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소아(小我)의 욕망부터 버리고, 광활한 천지공간과 유구한 시간 속에서 자유로운 대아(大我)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큰 고이, 큰 슬기,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큰 인물로 스스로를 기르는 동시에 그런 사람이 자랄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존재에 대한 올바른 인간관과 사람이 살아온 흔적을 기록한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이 버젓이 성립되어야 한다.
그런 혜안이 있는 대덕(大德)을 서로 힘써 찾아내고, 그런 싹수가 있는 사람을 발굴하여 서로 도우며 길러내자. 그리하여 앞으로의 세상에 사람다운 참 꿈을 심어 참사람을 많이많이 길러내도록 하다.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간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높은 차원의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한다.
궁예(弓裔)가 세운 후고구려나, 왕건(王建)이 세운 고려는 그 나라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여 대륙을 경영하려는 웅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려 예종 때 윤관(尹瓘)은 두만강을 넘어 깊숙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경박호(鏡珀湖) 근처에 있는 선춘령(先春嶺)에 9성을 쌓고 방위를 굳혔다. 그러나 얼마 뒤에 조정의 사대주의자들은 여진 정벌군 17만을 명분이 없는 군대라고 모함하고 탄핵하여 철군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묘청(妙淸)과 정지상(鄭知常) 등은 어느 나라에도 예속되지 않은 독립국가로서 위엄을 갖추기 위하여 고구려는 물론 신라와 발해에서도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했으니 우리 고려의 임금도 마땅히 칭제건원하고, 서경(西京 :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칭제건원과 서경천도(西京遷都)를 주장했다. 당시 중군장이며 <삼국사기>의 저자로 잘 알려진 김부식(金富軾) 등은 그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토벌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그 사건을 우리나라의 진정한 국풍(國風)을 사라지게 한 ‘1천년 내 일대사건’이라고 그의 글에 기록했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고려와 금(金), 요(遼) 나라의 관계는 서로 평등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은, 우리 고려 같은 작은 나라가 어찌 왕을 황제라고 일컬을 수 있고, 연호를 제정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공연히 대금국을 격동시켜서는 안된다고 몰아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는 왕조의 사실기록에 충실했다하더라도, 그 편제는 물론, 역사에 대한 관점은 사마천의 <사기>와 같이 지나 중심사상에서 한걸음도 벗어남이 없이 그냥 그대로 답습했다. 그 뿐 아니라, 우리 고대사에서 그 당시까지는 많은 옛 기록이 전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연 언급이 없다. 그것은 역사를 보는 관점이 남의 눈, 남이 생각한 것을 옮겨 놓기만 한 것이고, 내 눈으로 보고,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주체의식이 결여되었음을 의미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대한 지적은, 그 책의 개개의 사실 여부에 대한 것이 아니고, 총체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대주의를 역사기록으로 처음 남긴 사람이 김부식이라면, 사대주의를 몸으로 실천하여 조선왕조를 세운 사람이 이성계(李成桂)라 하겠다.
다음은 이성계의 위화도( 化島) 회군(回軍)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왕조시대는 언제나 임금을 중심으로한 지배계층은 피지배층을 시혜의 대상으로 보고, 입으로는 항상 왕도정치를 내세웠으나 백성 위에 군림하여 수직적인 충성만 요구하고, 지배계층은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세력유지와 그 다툼에만 급급했다. 따라서 고려왕조가 조선왕조로 바뀐 것도 임금의 성이 바뀐 역성혁명(易姓革命)일 뿐으로 일반민인(民人)의 생활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몽골족 원(元)이 망하고, 한족(漢族)인 주원장(朱元璋)이 명(明)을 건국하는 일대혼란의 과도기로서 고구려의 고토는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공백기였다. 고려의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이 요동원정군을 파병한 것은 고구려 고토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영토중심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고 할는지 모르나, 무력위주의 패권주의가 국경을 확정짓는 그 시대의 상황을 지적한 것이고, 또한 영토와 맞물려 우리의 정신력이 위축되어 본정신을 잃고 사대주의에 함몰된 것을 일깨우기 위하여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개인적 집권야욕으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사대주의의 명분을 내세워 철군하고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죽였다. 이어서 집권한 일당은 끝끝내 굴복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에 숨은 의로운 사람들을 불을 질러서 죽였다.
이성계가 우리나라의 강토를 한반도 안으로 고착시키고, 쿠데타 과정에서 집권야욕만 충족시키려는 폭거는 어쩌면 대한민국을 건국한 과정에서 남한 단독정권으로 집권야망을 충족시킨 이승만(李承晩)과 유사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집권야욕을 제일의적 목표로 삼고, 그것을 위하여 무소불위의 행패를 부린 점이다. 이성계 일당이 두문동 72현과 최영, 정몽주(鄭夢周) 등, 기개가 높은 인사들을 무참하게 희생시킨 것과 이승만 일당이 우리 임시정부를 끝까지 사수하고, 환국하여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위하여 38도선을 넘나든, 기개 높은 김구(金九)와 그리고 또 여운형(呂運亨), 조봉암(曺奉岩) 등을 희생시킨 점이며, 둘째로 이성계는 우리나라 강토를 한반도 안으로 고착시킨데 비하여 이승만은 우리 민족과 국토를 양단시킨 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분단의 고통을 유산으로 남겼다. 또 한가지 이승만은 시대가 바뀌어서 주권이 국민에 있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왕조시대와 마찬가지로 민인 위에 군림하여 민인을 우습게 여겨 우민정책으로 일관했다. 민주주의 원칙의 선거제도마저 창녀적 선거로 타락시키는 악폐를 남기고, 학생들의 피로 물던 4 19 민주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은 막을 내렸다.
어쨌든 8 15 해방정국에서 남과 북, 우익과 좌익이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상대방 생각의 장점과 이론을 새겨듣고, 서로 절충하려고 하는 마음의 여유와 냉철한 이성으로 대처하려는 생각을 배제하고,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몰아서 격멸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투쟁일변도의 역사관으로 일관한 점은 깊이 반성하고 다시 생각해야 한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세계제패 파고 속에서 각 나라들은 양대 진영으로 나뉘어 패권적 이익을 챙기고, 나라 안에서는 대개 대세론에 휩싸여 힘의 논리에 종속되었다.
우리나라가 미 소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제1선에 자리하여 마침내 6 25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흔히들 그 전쟁의 책임을 상대방에게만 전가하면서 불가피한 전쟁이라고 한다.
역사사실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허용되지 않으나, 그 사실을 되새겨 생각해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불가피했다고 생각을 끊지 말고 되새겨 생각해 봄으로써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고귀한 인간정신을 드높은 차원으로 고양할 수가 있다.
양대 진영에서 다국적군이 참전하였으나,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북위 38도선이 휴전선으로 바뀌었을 뿐, 우리 민족상잔의 희생은 물론, 양 진영 참전자들의 수많은 희생이 있었을 뿐이고, 패권주의 힘의 논리가 그처럼 가혹하고, 그 치른 댓가가 엄청나게 컸음에도 남긴 것이라곤 존귀한 인간생명의 희생 뿐이었다.
양 진영 틈바구니 제 1선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남과 북의 우리 겨레는 그 역사적 사실에서 얻은 교훈을 온 누리 인류에게 말하고, 더 이상 그러한 악순환의 희생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소리높이 외쳐야 한다.
세계평화와 인류공존을 위해서 유일한 길은 ‘대화’이다.
그리하여 ‘옳은 말이 말로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그 원리를 우리 조상들의 고대정신에서 찾는다. 그것은 바로 ‘밝은 빛으로 세상를 비추어 올바른 이치로 사람들을 일깨워, 널리 온 누리의 사람들을 고루 복되게 한다’는 것이다.
이 고귀한 인간정신의 불씨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 북방계 아시아인으로서, 엉덩이에 ‘멍 자국(몽골반점)’이 있거나, 치우천왕 후손의 특징으로 새끼발가락 바깥쪽이 조금 갈라져 붙어있는 ‘며느리 발톱’이 있는 사람들은 우선 그 정신을 이어받았으므로 솔선하여 함께 그 정신을 체득하고, 온 누리 인류의 따뜻한 가슴에 호소하여 그 정신을 전파해 나가야 할 것이다.
다음은 서양사에서 콜럼버스가 유럽에서 아메리카대륙에 처음 간 사실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교과서에나 백과사전에는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적혀 있고, 또 전국의 선생님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왜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가르친다. 학생들은 그것을 시험답안지에 적어서 합격하고, 커서는 지식인으로 행세하고 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사족(蛇足)을 좀 달겠다.
1978년경 검인정 교과서 파동이 있은 뒤, 그 이듬해에 ‘2종교과서’ 제도로 처음 바뀔 때 고등학교 교과서를 만들어서 채택된 일이 있었다. 추가로 ‘세계문화연표’를 부록으로 만들어 당시 문교부 편수국에 제출했다.
그 항목 가운데 하나를 “1492년 콜럼버스가 유럽인으로는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가다”라고 했더니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고치라는 부전을 붙혀 보내왔다. 그래서 그 부록 전체를 싣지 않기로 하고 교과서를 발간한 일이 있다.
필자도 물론 ‘콜럼버스 아메리카대륙 발견’으로 배웠고, 서양인들이 만든 세계사에 그렇게 적어서 지구 각처로 전파했던 것이다. 과연 그것이 맞는 역사기록인가?
콜럼버스가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려는 꿈을 살려, 새로운 지식에 대한 탐구와 새로운 것에 대하여 도전하는 굳센 의지, 그 모험, 그 용기, 그 인내력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찬탄해 마지않는다.
그리고 콜럼버스의 먼 항해를 통하여 결과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구는 둥굴며 회전한다’는 주장이 확인된 셈이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고 말하는 서양인의 세계인류를 바라보는 인간관, 인류역사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류의 미래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관점과 그 발상법에는 심대한 오류가 있다. 또한 지금까지도 그렇게 역사를 왜곡함으로써 인류문화 발전의 방향정립을 크게 비뚤어지게 하고 있다.
남 북 아메리카에는 당시에 이미 사람(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북미에는 마야문명이, 남미에는 잉카문명이 엄연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 처음 간 것을 가지고, 그것을 ‘발견’이라고 지금도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가령, 필자가 오늘 뉴욕에 처음 가서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다고, 말한다면 어떤가?
콜럼버스와 필자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첫째는 시간의 차이다. 무론 5백년이라는 역사조건의 차이를 필자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5백년 전의 인식수준을 그냥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 중대성이 있다.
그 관점의 바탕에는 서구중심주의 사상과 백인중심주의의 패권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당시 그들의 눈에 원주민은 사람이 아니고, 원주민과 자연은 한갓 정복의 대상에 불과했다. 살육과 약탈, 정신적으로는 이질적인 신앙의 대상까지 강요했다.
백인중심주의, 그 백인의 인간관이 아메리카에서 큰 변혁을 일으키기까지에는 다시 3백년의 세월이 소요됐다. 어쨌든 다인종(多人種)으로 나라를 세우고, 노예를 해방시킨 일은 획기적인 역사사실이며, 과연 미국은 인류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잔재로서 인종차별과 백인의 우월의식, 그 오만한 흔적은 도처에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도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이라고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우리의 역사인식과 인간관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김부식 류(類)의 자발적(?) ‘사대주의’와 조선왕조의 ‘소중화(小中華)’의 비자주성 역사인식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반증이다.
인간관의 수준은 긴 말을 생략하고, 3D현상에서 중국의 조선족 동포와 동남아에서 온 노동인력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지 한 가지만 묻고 싶다.
우리가 지구 위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잡고 ‘당당하고 겸허한 인간’으로 서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인간양심에 물어보고, 스스로에게 답을 받아내야 한다.
미국에 사는 백인들은 미주에 건너가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으며, 9 11사태에 대처하는 생각의 방향과 그 행동의 방식이 과연 정당했는가를 기독교인으로서 야훼에게 정중히 물어보고, 그 대답을 스스로의 양심에 깊게 간직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끝으로 남 북 아메리카에서 온 반가운 소식을 여기에 적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종전의 기록은 대개 미국의 서부개척이란 관점에서 인디언은 토벌의 대상으로만 서술되고, 토벌대장 커스트 장군의 무자비한 살인행위를 아메리카 건설사의 영웅으로 치켜세웠었다.
그러다가 근자에 와서 미국 서부 개척사 연구가인 로버트 M 어틀 리가 쓴, 인디언 수우족 추장으로 영적 지도자인 『시팅 불(Sitting Bull : ‘앉은 황소’, 1831~1890) - 인디언의 창과 방패』라는 책은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불굴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전통적 가치와 신념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이질적인 문화와 종교를 강요하는 외부의 침입자에 대하여 한 인간으로서 청체성(正體性)과 존엄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인디언의 불굴의 정신을 상징하는 ‘앉은 황소’의 삶을 당시 서부개척과 인디언 토벌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심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종전에는 인디언 문화에 대한 무지(無知)와 천시로 엉터리 결론을 내려왔으나. 이 책은 방대한 사료를 통하여 인디언의 관점에서 그의 삶을 재조명하고 있다.
앉은 황소의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동기를 천착해 간 저자가 얻은 결론은, 백인들에게 최고의 공포 대상이었던 앉은 황소가 뜻밖에도 자신의 땅을 지키고, 백인들과 평화롭게 지내며, 자신의 동족을 돌보고자 했던 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지상과제는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백인들로부터 자신의 영토와 종족을 지키려는 것이었는데, 인디언과의 약속은 하나도 지키지 않는 백인들이 그의 눈에는 욕망의 화신으로 보였다.
백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없음을 잘 알면서 백인과 평화조약을 맺고 그들의 시혜(施惠)로 연명하는 것보다 차라리 전쟁터에서 죽음을 택하겠다는 그의 말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는 단호한 의지의 표시였다.
『방패와 창』이 다른 부족과 백인들로부터 종족을 지키는 전사(戰士)로서 그의 삶을 상징한다면, ‘용감함, 인내심, 관대함, 지혜’라는 라코다족의 4가지 덕목은 그의 내적 인간의 됨됨이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쟁에서 용감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아내와 자식들을 살려주고, 무기가 없는 적에게 무기를 건넨 뒤에 싸움을 하는 모습 등에서 우리는 그의 관대함과 인간의 진정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앉은 황소가 창과 방패로 동족을 지켜낼 수 없었지만, 그가 지켜낸 것은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훨씬 더 숭고하고 아름다운 불굴의 인간정신이었다.
노스 다코타 주와 사우스 다코타 주가 그의 시신을 놓고 싸움을 벌이며, 서로 자기 주에 ‘앉은 황소’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마는 그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진정한 인간이기를 꿈꾸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이다. (성균관대학교 김원중님의 서평을 인용한 것임)
저자인 어틀리는 피부색이 우리와 다른 먼 나라에서 패권시대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사는 상황에 있으면서도 기본적 참 사람의 인간정신을 심층적으로 천착한, 그 인간관에 경의를 드린다.
앉은 황소가 싸워서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 차라리 전쟁터에서 죽음을 택했다는 것은 일제강점시기에 우리 항일 독립투사와 똑 같은 심정이다. 그 믿음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는, 단호한 인간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그 숭고한 인간정신은 오늘에 와서는 후사시대의 미래세계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이 공명공감하는 역사단계에 다다라 있다. 사람은 각각 다른 개별성과 차이점이 있으나, 모두가 같다는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그리고 남미 페루의 마추픽추 성전(聖殿)은 ‘하늘의 정원’, ‘공중의 도시’로 불리는 수수께끼의 유적이다. 잉카제국은 12세기부터 안데스산맥 원주민들의 나라로, 불가사의의 거석문화(巨石文化)와 정교한 금세공 기술이 놀랄 만큼 발전해 있었으나 16세기 초엽에 스페인 정복자들은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로 철저히 황폐화시키고 말았다.
그 뒤 오랫동안 패권주의 콧김에 시달림을 받다가. 이번(2001. 7. 28.)에 페루 최초로 원주민 출신의 알레한드로 톨레도 대통령이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남부 쿠스코의 마추픽추성전에서 전날 취임식에 이어 전통의식에 따라 다시 취임식을 하고 사제들에게서 잉카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금도끼’를 전달 받았다는 것을 신문이 전했다.
천도가 순환하는 조짐의 일환으로 보여, 먼 지역에 살면서 충심으로 축복의 인사를 보낸다.
오늘날 지금의 세계화 체제에서는 ‘경쟁’이 유일한 삶의 길이라고 핏대를 올리고 있지만, 그것은 한때의 세(勢)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소중한 가치의식이 있다. 가치의식은 인간양심에서 나온다. 양심에서 우러난 인간정신만이 오늘의 난국을 구제할 수 있다.
흔히 인지(人智)의 발달을 운위하지만, 인지의 발달이 몇 천년 사이에 발달한 것은 아니다. 지식의 양이 늘어서 지식의 질을 높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정확한 기록의 양이 늘고 실험의 결과가 누적되어 오늘의 성과를 얻어냈다.
현대인은 그 성과에 자만하고 오만해서는 안된다. 지금이 인류가 직면한 최대의 위기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양심의 참 소리에 귀를 기우려 고귀한 인간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 인간은 인간정신을 회복할 자생력을 스스로 지니고 있다. 그 자생력을 발양하여 ‘큰 고이’, ‘큰 슬기’, ‘큰 힘’을 얻어야 한다. 그 큰 힘은 인간양심의 화합에서 나온다. 화합이 조화(調和)를 이루고, 그 조화의 힘이 조화(造化)라는 변화를 성취한다. 화합의 힘보다 더 큰 힘은 어디에도 없다. 경쟁의식에 갇힌 상태의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힘이다.
그 큰 힘으로 “온 누리를 밝은 빛으로 비추어 사람들을 일깨우고, 온 누리의 사람들이 모두 고루 행복하게 살게 한다”는 이상을 가지는 것이 인류가 공유할 세계관이다.
이 추상적 이상의 세계관을 구체화하여 실천방안을 강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그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앞선 나라 사람들의 갈 길이며, 세계의 중심국이 되는 나라 사람들의 길이다.
2002년 가을에
연재 적음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