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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한문화 산책 (28) - 한 철학과 인식론. 존재론

작성일 19-09-2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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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화강 (210.♡.92.119) 조회 7,46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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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화 산책 (28) - 한 철학과 인식론. 존재론

솔롱고

한 철학과 인식론



철학에서 인식론이라 하면 참과 거짓을 밝히는 분야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리관이다.

철학으로서 한은 인식론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는 점을 정리해 본다.




먼저 한은 진리의 기준을 ‘상대성 원리’에 두고 있다.

전체적인 큰 하나라는 관점으로 양극으로 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서구철학의 인식론처럼 합리론(合理論)이나 경험론(經驗論)처럼 이분법적 입장이 아니다.

즉, 모든 진리는 상대적인 원리에서 앞과 뒤를 다 살펴야 완전한 진리가 파악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상대적 진리관에는 현실세계처럼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두 개로 보지 않는다.

있고 없음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에 의해 불가피한 일시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있음에 치우치면 없음을 보지 못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있고 없음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란 것이다.

 

‘한’ 철학은 삶과 죽음도 별개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본다.

살아 있음은 죽음의 유예이고, 죽음도 끝이 아니라 저 세상에로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한 철학의 부정일치(否定一致)의 진리관을 본다.

사람이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수많은 시간적 변화를 겪고 있는 숙명적 존재로 보는 관점이 ‘한’ 철학의

중심내용이다.

 

용강에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았을 때와 꼭 같은 생활을 한다.

그런가 하면 측실 벽화에는 부부의 영혼이 살고 있는 방을 따로 마련해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같은 생사일여관은 ‘한’ 철학에서 말하는 상대성 진리관을 설명하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수서(隨書)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 풍속 중 사람이 죽어 장례 시에 가무(歌舞)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사람이 죽으면 저 세상으로 가는 여정을 송별하기 위해 큰 소리로 울면서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환송했다는 것이다.

이런 풍속은 신라에도 있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전한다.

죽음도 삶도 하나로 보고, 있음도 없음도 같은 것으로 보는 점이 한 철학의 상대적 진리관의 중심내용이다.

 

반면, 절대적 진리관은 서구 철학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많은 사상가들이 영원히 변함없는 절대적 진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 진리와 법칙을 밝히려고 연구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2500년을 경과한 오늘까지 아직도 절대적 진리나 체계를 밝힌 학자는 없고 누구도

자기 학설이 절대적임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한 철학은 이런 절대적 진리관을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절대적 진리관은 신(神)의 영역일 뿐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은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존재이므로 절대적 진리를 소유할 수 있지만 인간은 시간적, 역사적으로 제한된 존재임으로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진리관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언어 속에도 독특한 ‘한’적 인식론을 찾을 수 있다.


우리말에 일인칭 ‘나’와 이인칭 ‘너’는 같은 자음으로 시작되고 다만 모음에서만 ‘ㅏ’와 ‘ㅓ’로 차이가 날

뿐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은 주객(主客)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

즉, 나와 너는 어원상 같은 줄기이다.


영어의 같은 낱말인 I나 You처럼 전혀 별개의 어원들인 것과는 다르다.

독일어나 일본어 등도 별개의 어원임은 마찬가지다.

한국어에는 나와 너의 구별이 없고 소유격인 내것과 네것일 때는 거의 발음상의 구별이 어려워진다.

 

또한 나에 대한 타인을 의미할 때는 ‘남’이 된다.

이것은 음으로만 분석하면 나에서 나왔다(生)는 것을 의미한다.

즉, 남은 나에서 난 존재이다.

한국인의 심성으로는 나와 남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려 애쓰기 이전에 생리적

으로 하나로 인식해 왔던 것이다.

여기에 단군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의 민족 얼이 생기게 된 것이다.

 

아울러 나와 우리도 구별 짓지 않은지 오래다.

일본인들이 이런 한국인을 비웃으며 ‘엽전’이라고 비하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한번 싸우면 평생 원수로 살지만 우리 경우는 저녁에 싸우고 아침이면 화해할 수

있는 것은 독특한 ‘우리’라는 인식 때문이다.

 

종종 ‘우리’ 의식이 빚어내는 불편함도 있지만 객관을 주관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상대적 인식론이 ‘한’적 인식이다.

이런 인식을 화이트 헤드는 과정철학에서 ‘개혁된 주관주의’라 명명했다.





'한'의 존재론



 

어떤 사상이 철학으로 정립되려면 세 가지 근원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존재론과

인식론,

가치론이 그것이다.


철학의 골격을 이루는 이 세 가지 요소 중

존재론은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인식론은 근대에,

가치론은 현대에 이르러 활발해졌다.

‘한’ 사상 역시 철학으로 정립되려면 위의 세 가지 명제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한사상의 존재론에 대한 학자들의 논증들을 정리해 본다.

‘한’을 우주만상의 근본적인 실체로 보았다. 한없이 크고 깊고 넓기 때문에 사람을 비롯한 그 밖의 모든

만물을 포괄하며 또한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한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다.

또한 한은 처음도 끝도 없는 존재이고 인간의 오관으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신비적

존재이다.

 

하늘도 땅도 형성되기 이전에 그 모양을 알 수 없는 근원이 있어서 그것이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긴 것이 ‘한’이다.

따라서 모든 만물의 원천이요 근본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많다.

그중 민족경전인 천부경의 시작이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요, 끝이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다.

일(一)이 처음도 끝도 없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이 일(一)은 앞에서 본 ‘한’을 의미하며 존재론상 무한의 크기에서 오는 신비적 존재이므로 말과 글로

표현되지 않는다.

시작도 끝도, 있음도 없음도 결국 ‘한’ 안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물의 근본적인 실재이다.

단군철학석의(檀君哲學釋義)에도 ‘한’의 기록이 있다.

한(一)은 돌고 돌아서 그치지 않는다.

또 그것은 너무 커서 밖이 없고 너무 미세하여 안이 없고 또 처음이 없어서 앞이 없고 끝이 없어서 뒤가

없다.

이렇게 넓고 큰 한은 모든 만물의 근본적인 실재가 된다.


중국의 노자도 도덕경에서 도가 하나를 낳아 천지만물의 시원(始原)임을 주장했다.

노자의 일(一)과 우리의 한은 무한성, 신비성을 가지고 만물의 근본적인 실체가 된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한의 존재론은 양적 의미로 ‘일원론’이다.

우주의 근본적인 실재는 오직 하나인 한에 있다.

바다에서 생기는 파도는 여러 가지 모양이지만 그 근본은 물인 것과 같다.

모든 개체는 ‘한’의 여러 가지 다른 양상이다.

한의 존재론은 질적 의미에서도 큰 하나로 본다.

서양철학의 존재론인 유물론과 유신론을 모두 포괄한다.

서양철학이 정신과 물질을 두 개의 실체로 생각한다면 이 이원론의 밑바닥에 궁극적 실체로서의 ‘한’이

있다는 것이다.

즉,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포괄하는 진정한 실체가 ‘한’이라는 설명이다.

이 심오한 한이 둘로 나뉘어져 물질과 정신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위와 같이 서양철학의 유심론이나 유물론을 지양(止揚)한 근원적인 실재론을 주장한 것이 ‘한’철학의

입장이다.

 

따라서 한은 우주 사이에 홀로 있으며 항상 존재하며 또한 한은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또한 한에 관계되지 않는 물건은 하나도 없게 된다.

마치 태양이 온 누리에 만물을 편중 없이 비추는 것과 같다, 즉, 한은 독립성, 항존성, 보편성, 불멸성을

가진다.

서양철학의 존재론이 변함없이 ‘있음’을 추구하여 유(有)의 철학이었다면, 동양철학의 큰 흐름은 ‘없음’을

추구한 무(無)의 철학이었다.

특히 불교는 모든 존재는 연기되어 잇달아 일어나고 있으며 변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여 무(無)를

강조했다.


서양 철학도 근대에 이르러 궤도를 수정한다.

스피노자는 기독교의 유일신을 부정함으로서 파문을 당했지만 한평생 안경알을 닦으면서도 그의 철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신은 티끌 속에도 있고 자연 속에 가득 차 있으며 이 상태는 스스로 발생하고 창조한다고 본 ‘범신론

(汎神論)’을 주장했다.

신의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원인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매우 혁신적이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기존의 서양철학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며 패러다임을 바꾸게 했던 철학자가 화이트

헤드로 그의 과정철학은 불교의 연기설을 연상케 한다.

신과학의 양자 이론에 힘입어 실체란 말 대신 ‘과정’이란 용어를 쓰며 모든 존재는 상호 연관된 유기체임을 강조했다.

‘유(有)’의 철학에 머물면서 폐쇄적인 사고를 했던 서양철학의 존재론이 많이 완화되어 동서양 철학의

절충된 양상을 보게 된다.

우리 언어에도 독특한 존재론적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우리말에 존재를 의미하는 낱말은 있다와 있음이다.

있음은 이것이 저것에 ‘이어짐’에 있다.

즉, ‘있다’와 ‘잇다’는 어근이 같고 소리 값도 거의 비슷하다.

고대 한국인들은 존재의 구조를 이해할 때 어떤 존재이든 따로 떨어져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존재끼리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이어진 현상으로 보았다.

언어에서도 한국인들의 존재론은 이처럼 ‘한’적이다.

하나로 이어진 무엇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태일)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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