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기복신앙 -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일본 도쿄대학 나카무라 하지메(中村 元)씨는 <<동양인의 사유방법>>이
라는 일련의 동양철학시리즈를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다룬 동양이란 중국
인도 티벳 그리고 일본이며, 한국은 중국문화의 한 아류로 평가했다.
한국의 자료까지 소화하기에는 그의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면, 그가 빠뜨
린 한국적 사유방법은 보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중국을 통해 고급문화를 수용하였고 한문을 매개로 하여 철학
의 체계를 가진것이 사실이지만, 중국문화를 수용하기 전에 고유한 사고
가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카무라씨는 주로 불교적 사유방식이 인도와 중국에서 차이가 있음을 지
적하고 중국적인 풍토는 현세적 인간주의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처음 중국인에게 소개된 불교는 현실에 이익을 주는 신비한 주문이나 주술
형태로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로 주술이나 기도를 금지하는
소승불교가 용납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중국화된 불교의 사유방식을 수용했으므로 중국불교의 체계
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과연 그러한지 <<삼국유사>>에 나타난
불교적 신앙형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치료로서의 신앙
신라에 처음 불교를 전달한 묵호자는 병치료를 통하여 포교를 원활하게
하였다. 그는 향(香)을 설명하기를 향을 피워 향기가 풍기면 신성한 존재
에 정성이 통하는 것이라고 하고, 그 신성함이란 삼보(三寶)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삼보에 향을 사루어 발원하면 영험이 있다고 소개한 것이다.
신라의 왕녀가 병이 대단하였던 터라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우고 기도하
게 하니 왕녀의 병이 나았다는 것은 최초의 신앙의 형태가 기복적인 치료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도화상 역시 성국공주의 병을 치료하여 불교의 역할이 실리적이라는 것
을 검증받았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아도가 문득 속림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 3년이 되던 때에 성국공주
가 병이 들었는데 무의(巫醫)가 효험이 없으므로 사람을 사바으로 보내어
의사를 구하였다. 법의(法醫)가 문득 대궐로 들어가 그 병을 치료하니,
왕이 대단히 기뻐하고 그 소원을 물었다."
여기서는 병을 치료하는 기존의 무의(巫醫)가 있었지만 별로 영험이 없었
는데 새로 도래한 아도화상의 치료가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
대에는 질병의 원인이 죄나 죄의식에서 생긴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약물
치료이전에 그 죄를 정화하는 일이 우선한다고 보았는데, 새로운 불교신앙
은 이런 죄의 정화에 효과적인 면을 보여준 것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치료의 설화중 가장 드라마틱한 것이 눈먼 희명이
눈을 뜬 이야기다. 경덕왕때의 희명의 어머니는 5세에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희명을 위해 노래를 지어 분황사의 좌전 북쪽벽의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 앞
에서 기도를 한다. 그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두어서
천수관음(千手觀音)앞에 사뢰나이다.
즈믄(千) 눈을 가지셨사오니
하나를 내어
하나를 덜어
둘 없는 내오이 하나를랑 주시옵시사
아아 나에게 주시옵시사
나에게 주시면 자비가 클 것이로이다."
이런 절박한 기원에 힘입어 희명은 마침내 눈을 떳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신앙의 힘을 기대한다. 최초의
한국인의 신앙의 모습도 철학적인 내용이 아니라 치료를 위한 기복적 신앙
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다른나라에 비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호국의 신앙
석존이 왕자의 자리를 박차로 구도의 길을 걸었다는 것을 불교의 원래모습
이 초국가적 성격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중국에 수용된 불교는 국
가적 성격을 가지게 되며,王卽佛(왕이 곧 부처님)사상이 생겨난다.
한국은 그렇게 중국화된 불교를 받아들였음은 물론이다. 당나라의 도움으
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였지만 한편으로는 당나라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머물면서 김인문으로부터 당나라의 고종이 50만대군
으로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탐지하고 귀국하여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도록
한다. 그 대비책 가운데 하나가 밀교적 기도를 통해 적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중국을 통해 국가적 불교신앙이 전래되었지만 그 신앙은 중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위한 것이었다.
당나라 병사들이 해상에 순회하고 있을때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밀의 법을
지어 기도하니 당나라 병사들이 신라병사와 교전도 하기전에 풍랑으로 침몰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황룡사의 구층탑을 조성한 것도 여왕이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으므로,탑을
세워 나라의 위엄을 세우겠다는 뜻으로 만들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대궐 남쪽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침해를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제1층은 일본을,제2층은 중화를,제3층은 오월(五越)을,제
4층은 탁라를,제5층은 응유를,제6층은 말갈을,제7층은 단국을,제8층은 여
진을,제9층은 예맥을 진압시킨다."
이러한 호국의 신앙은 국가적 기복양재신앙이다. 불교가 왕실에 의해 적극
수용되어 그 다음에 민중의 신앙으로 퍼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치료로서의 신앙은 개인에 머물지 않고 국가의 수호라는 초개인적
신앙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인의 신앙은 비록 중국을 통해서 수용하기는
했지만 한국인을 위한 신앙이었지 인도나 중국을 위한 신앙이 아니었던 점을
유념해야 한다.
정토(淨土)신앙
정토란 극락의 다른 이름으로,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신앙이다. 세상을 떠나
사후의 세계의 복을 기원하는 것이기에 현세구복적인 면과 어긋나는 것이 아
니다.
문무왕때 광덕과 엄장이라는 사람은 신앙심이 깊어 먼저 서방극락세계에 가
면 알리기로 약속했다. 광덕은 서리(西里)에 숨어살면서, 신 삼는 직업에 종
사하며 처자를 거느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의 암자에서 살았는데 농
사일에 종사했다.
어느날 저녁무렵 광덕이 세상을 떠나면서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게' 라고 하는 소리가 창밖에서 들렸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구름밖에서 하늘의 음악소리가 울리고 광명이
땅에 뻗혔다. 다음날 엄장이 광덕의 집에 가니 세상을 떠난 뒤였고,광덕의
미망인과 유해를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
그 미망인을 처로 삼은 엄장이 밤이 되어 성관계를 요구하자 그 미망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잠자리를 거부했다.
"남편은 나와 10여년을 함께 살았지만 일찌기 하룻밤도 잠자리를 같이하고
자지 않았습니다. 더우기 서로 성관계를 했겠습니까? 밤마다 단정히 앉아
한결같은 소리로 아미타불의 이름만 불렀고, 혹은 16관(觀)을 들었으며
미혹을 깨치고 진리를 달관함이 이미 이루어지자,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에 올라가서 가부좌롤 앉았습니다. 정성이 이와 같았으니,비
록 서방정토로 가지 않으려고 해도 그곳을 가지 않고 어디를 가겠습니까?
대체 천리를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인데,지금 스님의
관(觀)은 동방으로 갈런지 서방으로 갈런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엄장은 부끄러워 물러나와,그 길로 원효대사의 처소에 가서 가르침을 청했
고, 뉘우쳐 정진하여 서방정토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광덕의 부인은 분황
사의 종이었지만 실은 관세음보살의 응신이었다고 한다. 일찌기 광덕은 다음
과 같이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달님이시여
이제 서방까지 가셔서
무량수불전에 일러다 사뢰소서
다짐 깊으신 존전을 우러러
두손모아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그리워 하는 사람 있다고 사뢰소서
아으,이 몸을 남겨두고
사십팔대원 이루실까
저어합니다."
이런 신앙은 중국을 통해 수용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중국인들이 현세
에 집착하여 불노장생들을 기원하였던 풍토와는 달리,신라인들은 본래의 불교
정신 그대로 청정한 계율과 수행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기원했음을 설화를 통
해 짐작할 수 있다.
名利를 구하는 신앙
불교의 가르침이 명리를 초월하고 부귀영화를 그림자나 환상처럼 여기는 무욕
무아의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통해 현세의 복락을 누린려는 경향이 강하
다.
탑돌이를 하며 소원을 빌다가 꿈을 이룬 김현감호(金現感虎)의 설화야 말로
대표적인 것이다. 신라의 풍속에 흥륜사의 전탑(殿塔)을 도는 복회(福會)를 행
하였다. 김현이라는 총각도 밤늦도록 소원성취를 빌며 탑돌이를 하다가 미모의
낭자와 눈이 맞아 깊은 관계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낭자는 호랑
이로서 인간으로 변신한 여인인데, 그만 김현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다. 호랑이는
김현을 위해 일부러 사람을 물어죽이는 호환(虎患)을 일으키는데, 그 위세를 누
를 사람이 없어 국가적으로 큰 현상금을 걸게되었다.
일을 저지른 낭자호랑이는 김현에게 호랑이에게 물려 중상을 입은 사람을 치료
하는 비법을 말해주고, 김현앞에서 스스로 죽음을 청하니, 순전히 탑돌이에서 맺
어진 사랑때문이었고, 결국 김현은 호환을 해결한 자로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됐
다는 설화다.
알고보면 호국의 불교도 개인의 차원이 아닐뿐 명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의 신앙형태는 일찍부터 승가가 아닌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현세
이익적인 면이 있었던 것이다.
소결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한국인의 신앙형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색이
있다.
최초의 신앙형태는 치료로서의 신앙이었다. 의약이 발전하지 않았던 고대의 사회
에서 불교신앙는 종래의 고유신앙보다 우월한 병치료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포교
가 원활했다. 이점은 중국불교의 형태와 다름이 없다.
일단 수용되어 뿌리를 내린 불교는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신앙적 면을 보
인다. 이는 또한 중국의 불교에서도 엿보이는 것이지만, 호국은 중국인을 위한 것
이 아니라 한국인을 위한 신앙형식이었다는 점에서 자주적인 문화로 진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상적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삶에 대한 종교적 관심이 있었고,이를 위해 계행을
철저히 수행한 정토신앙적인 면이 있었다.
명리를 구하는 기복신앙적 성격도 있었다. 승가가 아닌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신앙의 목표가 재앙을 소멸하고 복을 구하는데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렇게 볼때 중국적 사고체계와 크게 다름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한문경전
문화권인 일본의 경우도 중국의 경전에 의지하는 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한문경전을 이를 중국어로 발음하지 않고, 한국식 발음으로 독송해 왔다.
비록 문자는 중국의 글자를 수입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자국의 문화를 높이려는
자주의식하에 이를 수용했던 것이다.
(<<如是我聞>>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