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 어느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사진 기록
무라야마 치준(村山智順) 所藏寫眞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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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の鬼神』 | 調査資料 第二十五輯 | 1929 | |
| 『휸魔久╈æ?/TD> | 調査資料 第三十一輯 | 1931 | |
| 『朝鮮の巫覡』 | 調査資料 第三十六輯 | 1932 | |
| 『朝鮮の占卜と豫言』 | 調査資料 第三十七輯 | 1933 | |
| 『朝鮮の類似宗敎』 | 調査資料 第四十二輯 | 1935 | |
| 『部落祭』 | 調査資料 第四十四輯 | 1937 | |
| 『釋奠·祈雨·安宅』 | 調査資料 第四十五輯 | 1938 | |
| 『朝鮮の鄕土娛樂』 | 調査資料 第四十七輯 | 1941 |
무라야마는 13년 동안에 8권의 저서를 저술하였다. 그 저서들은 모두 상당한 분량의 것이며, 게다가 자료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고 무라야마 나름대로의 기술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 서술의 하나 하나를 논평할 여유는 없으나, 10여년 동안에 '페이지 수를 다 합쳐서 5,371페이지'(본인의 기술)라고 하니 여하튼 정력적인 활동을 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13年のあいだに8冊の著書を殘した. これらはどれもかなり大部のもので, しかも單なる資料の羅列ではなく, 村山なりの敍述も含まれている. ここでは, その個個の敍述を論評するいとまはないが, 10年餘りのあいだに「ペ-ジ數合わせて五三七一ペ-ジ」(本人の記述)というから, とにかく精力的な活動をしたことは確かである.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조사자료라는 성격상, 각급관공서(各級官公署)의 관리를 동원하여 조사시킨 내용이 많은 듯 싶은 점, 또 무라야마 자신은 '사람에 대하여 언제나 온화하게 접하였다'고 하였지만(앞의 인용, 아사쿠라씨가 들어 적은 글), 발표된 글을 통해서 보면 조선 민중과의 거리는 그다지 가까운 것이 아니었다. 첫 저서라고 해도 좋을 『朝鮮の鬼神』의 서언에서 그는 조선의 귀신신앙의 뿌리에 있는 것을 포착하여 다음과 같이 적었다.
ただし, 總督府の調査資料という性格上, 各級官公署の役人を動員して調査させた內容が多いとみられること, また, 村山自身は「人に對して常におだやかに接し」たというものの(前引, 朝倉氏の聞書), 發表された文を通してみると, その朝鮮民衆との距離は殘念ながらさほど密接なものではなかった. 最初の著書ともいえる『朝鮮の鬼神』の緖言において, かれは朝鮮の鬼神信仰の根底にあるものを捉えて次のようにいっている.
... 조선에 있어서의 귀신신앙은 양귀(禳鬼)로써 재화(災禍)를 제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생의 행복을 누리려는 소극적 생활 유지의 욕구에서 출발, 발달하여,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 부분은 김희경씨의 변역을 인용하였다. 김희경 옮김,『朝鮮의 鬼神』,東文選, 서울, 1990, p.14 참조)
朝鮮に於ける鬼神信仰は禳鬼に依りて災禍を除き, 而して人生の幸福を全ふせむとする消極的生活維持の欲求から出發し, 發達し, 而して今猶ほ存在するのであって…
여기에서 보이는 관점은 요컨대 조선의 민중은 인생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의지하면서 요행(僥倖)을 기원하여 왔으며, 그것이 심해져 오늘날에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조선전토에 걸쳐 민중의 행위나 습속을 꽤 상세하게 기술하면서도, 끝끝내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에 그치고 있다는 감이 든다.
ここにみられる視點は要するに, 朝鮮の民衆は人生を積極的に切り開くのではなく, 「カミ賴み」から出發して, 僥倖を願うもので, それが高じて今にいたっているのだという見方である. そのためであろうか, 朝鮮全土にわたってかなり詳細な民衆の行爲, 習俗を記述しながらも, ついに上から俯瞰しただけに終わったかのような感も殘る.
아사쿠라씨의 조사에 의하면 무라야마는 1941년 50세 때 일본에 돌아왔다. 나이로 보아도 더 할 만한 일이 많았을 터이나, 그 경위는 알 수 없다. 일본에 돌아온 후 곧 조선총독부 지소와 같은 성격인 조선장학회(朝鮮奬學會)에서 근무하였으며, 1945년 실가(實家)인 니이가타(新潟)의 절에 돌아가서 주지가 되었다. 13년 후, 또 다시 도쿄(東京)로 거처를 옮겼으나 조선과 관계된 이렇다 할 만한 발표없이 1968년 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7세였다.
なお, 朝倉氏の聞書によると, 村山智順は1941年, 50歲のとき, 日本にもどる. 年齡からいってもなおやるべきことは多かったのではないかとおもわれるが, この間の經緯はわからない. もどってすぐ, 朝鮮總督府の支所のような性格の朝鮮奬學會に勤務するが, 1945年, 新潟の實家である寺にもどり住職となる. 13年後, ふたたび東京に居を移すが, 朝鮮學關係のめだった發表はなく, 1968年,逝去する. 享年77歲であった.
무라야마는 조사자료집을 낼 때 사진도 수집하여 그 중의 상당 부분은 자료집에 실려 있다. 대부분은 무라야마 자신이 찍은 것으로 짐작되나, 그 중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임에 확실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1945년 이후에도 자기 곁에 남겨 둔 사진들은 3백 수십 장에 이른다. 6권의 앨범에 A5 사이즈에서 증명사진 정도까지 여러 크기의 흑백사진이 붙어 있다. 일부는 풍화되었으나 보존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村山は調査資料集を出すにあたって, 寫眞も收集し, そのうちのかなりのものは資料集に收められた. それらの大半は自身で撮したものとおもわれるが, なかには明らかに他者から讓られたものも含まれている. 1945年以後も手元に殘しておいたものが三百數十點におよぶ. 6冊のアルバムに, キャビネ版のものから證明寫眞ていどのものまで, 大小さまざまな大きさの白黑寫眞が竝べられている. 一部は風化しているが, 保存狀態は比較的よい.
무라야마가 죽은 후 이 앨범은, 케이오(慶應)대학 동양사학과의 이토우 세이지(伊藤淸司)씨가 유족으로부터 기증 받았다. 이토우씨는 적당한 사례를 하고 이것을 받아 보관하였으며 후에 쿄우린(杏林)대학으로 옮겨, 거기서 정년 퇴직할 때 필자(노무라)에게 연구자료로 물려주었다.
村山が物故したあと, このアルバムは遺族の手により, 慶應義塾大學東洋史學科の伊藤淸司氏に寄贈された. 伊藤氏はしかるべき謝禮とともにこれを預かり, 保管しておいたが, のち杏林大學に移られ, さらにそこを定年退職する際, 筆者野村に硏究の具にと讓ってくれた.
이상과 같은 경위로 귀중한 연구자료를 입수하였으나 오랫동안 발표할 준비를 하지 못했다. 이 사진들에 대한 메모같은 것도 거의 없고, 그 배경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의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 시기는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이라는 농지수탈(農地收奪)에 의해서 자작농(自作農)이 광범위하게 붕괴되어, 농촌의 갈등이 심화되어 간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일까, 이 사진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그 표정이 딱딱하다. 당시는 아직 사진에 익숙해지지 않았던 때라는 것도 고려해야 하나, 찍을 때의 환경, 찍은 이의 자세에도 문제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혹시나 사람을 위압하는 분위기 속에서 찍은 것도 있었지 않았는가 싶다.
以上のような經緯で貴重な硏究資料を入手はしたものの, 發表する準備が長らく整わなかった.これらの寫眞にはメモのようなものがほとんどなく, 十分にその背景を說くことができないものが多いのである. おそらくその大多數は1920年代から30年代のものであろうとおもわれる. 1910年代の土地調査事業という名の農地收奪により, 自作農が廣範圍に崩壞し, 農村の葛藤が深刻化していく時代であった. それかあらぬか, これらの寫眞に現れる人物はいずれも表情が硬い. 當時はまだ寫眞に慣れないこともあったであろうが, 撮るときの環境, 撮る者の姿勢にも問題が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おもわれる. あるいは人を威壓するようなものものしさのなかで撮った寫眞もあるのかもしれない.
개개의 사진을 보면 사람 발바닥의 사진 등 무슨 의도로 찍었는지 판단할 수 없는 것도 있으나, 방상씨(方相氏)탈이 나오는 상렬(葬列)이나 각종 액을 물리치는 인형 제웅 등 지금은 없어진 민속의 현장(現場)도, 촬영되어 있다. 그것들이 지금으로서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들을 단지 증거사진으로만 보느냐, 아니면 이것을 계기로 그 깊숙한 데서 행해지고 있었던 민속세계의 표현행위로 들어가느냐는 것은 오로지 보는 이의 준비와 자세에 의해서 정해질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진의 구도와 촬영 시각(視角)의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고 아래와 같은 분류하에서 되도록 많은 사진을 공개 하려고 하는 바이다.
個個にみていくとき, 人の足裏の寫眞など, どういう意圖で撮ったのか判斷できないものもあるが, 方相氏の出る葬列とか各種の厄除け人形チェウンなど,今はなくなった民俗の現場も撮されている.これらが今となっては他に代えがたいものであることはいうまでもない. それらを單なる證據寫眞とだけみるのか, あるいはこれをきっかけに, その奧で營まれていたにちがいない民俗世界の表現行爲へとはいっていくのかは, みる側の準備と姿勢にかかっているだろう. それで, このたびは, 寫眞の構圖や撮影視角の好惡はさておき, 以下に揭げるような分類を施してできるだけ數多く公表することにした.
도판 설명은 상기한 무라야마의 조사자료를 참고하면서 간략하게 적었으나, 필자의 추측도 적지 않다. 또 인터넷에서 공개하기 위하여, 한국어판도 여기에 준비하였다.
圖版說明は, 村山の上記調査資料にあるものは, これを參考にして簡略に記したが, 筆者の推斷も少なからずある. またインタ-ネット上での公開のために, 韓國語版もここに準備した.
I. 일상생활
| 1. 제주도 서귀포의 테우. 濟州島西歸浦の筏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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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제주도의 목마. 濟州島の牧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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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주도의 화전민. 濟州島の火田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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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제주도의 해녀(1). 濟州島の海女(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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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제주도의 해녀(2). 출업의 모양. 濟州島の海女(2) なりわいのようす |
| 6. 제주도의 해녀(3). 참수 濟州島の海女(3). 潛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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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제주도의 해녀(4). 작업 후에 불을 쬐어 몸을 녹인다. 濟州島の海女(4). 作業後,たき火で暖をと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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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절구질. 臼つ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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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보리를 가는 작업. 麥挽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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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김장. キムチをつける |
| 11. 장독(1). 庭の甕(1) キムチやみそなどを保存す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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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장독(2). 庭の甕(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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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강가에서 하는 빨래(1). 川の洗濯(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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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강가에서 하는 빨래(2). 川の洗濯(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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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마루에서 다듬이질 한다(1). 板の間での砧打ち(1) |
| 16. 마루에서 다듬이질 한다(2). 板の間での砧打ち(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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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냇물에서의 목욕. 제주도? 小川での水浴び 濟州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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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처녀들이 당건을 만든다. むすめたちの宕巾作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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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대구의 사장 풍경. 大邱の市場風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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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신을 만드는 작업. くつ作り |
| 21. 상복 차림. 服喪姿の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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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산촌의 노인. 山村の老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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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지개를 진 사람(1). 背負子を背負った男(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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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지개를 진 사람(2). 背負子を背負った男(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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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평교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탄 것. 轎子. 平轎子ともいう.高官が乘った. |
| 31. 정월에 복조리를 파는 사람. 正月の福そう(ざる)賣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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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설날 세배. 元旦の歲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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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안방의 가구. 內房の家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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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양반 댁(1). 兩班の家(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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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양반 댁(2). 兩班の家(2) |
| 36. 제사. 祭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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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제사에 쓰이는 제물. 祭祀に用いる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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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세물전. 혼인이나 장사 때에 쓰이는 물건을 빌려 주는 가게. 貰物廛. 婚禮や葬式に用いる物を貸す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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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한옥. 朝鮮家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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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식상. 食膳 |
| 41. 치마, 고쟁이, 저고리. チマ,袴,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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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굴뚝(1). 煙突(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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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굴뚝(2). 煙突(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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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개성의 초가 지붕. 開城の藁屋根 |
| 45. 생일 장치 誕生祝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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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설빔 옷? 正月の晴れ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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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아이의 독감을 고치는 목걸이. 가는 새끼를 스물한 개 꼬아서 만든다. 평안남도. 子の流感を治す首飾り 細い紐を21本よって作る. 平安南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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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마마가 유행할 때 아이를 지키는 자물쇠. 경기도. 子の呪具 天然痘がはやったとき子供を守る錠. 京畿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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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새를 이용해서 점을 친다. 鳥占い |
| 50. 점 보러 아기를 데리고 온 어머니. 鳥占いにきた母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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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결혼한 젊은이. 新婚の夫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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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부모 (1). 父母(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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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부모 (2). 父母(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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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신부의 신행(1)--시집으로 가는 것. 新婦の新行(1). 新行(嫁ぎ先にいくこ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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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신부의 신행(2) 新行(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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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가장. 家長 |
| 57. 봉산탈춤. 황해도 사리원에서 했던 타춤(1). 팔먹중의 얼굴. 鳳山假面戱(1) 黃海道沙里院でおこなった假面戱. 八墨僧の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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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사리원의 탈춤(2) 鳳山假面戱(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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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사리원의 탈춤(3) 鳳山假面戱(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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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양주별산대놀이 楊州別山臺戱 |
| 71. 무동. 舞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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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정월에 안동에서 했던 차전(車戰). 正月慶尙道安東の車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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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동래 줄 다리기. 東萊の綱引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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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단어의 그네 뛰기. 端午のぶらん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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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씨름. 相撲 |
| 76. 여자들의 활 쓰기. 부유층의 놀이. 女性の弓のあそび 富裕層のあそ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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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장흥의 강강술래. カンガンスッレ 全羅南道長興のカンガンスッ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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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무하야마에 의하면 기생 춤. 기생들은 官女여였다. 村山によれば「妓生舞」, 妓生は官女であった. |
| 79. 장례에 쓰이던 방상씨. 方相氏 葬禮に使われた方相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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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상여 앞에 서는 방상씨. 方相氏と葬列 柩の前に立つ方相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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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상복을 입은 가족. 喪服を着た家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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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상주. 喪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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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제주도의 장례. 여자는 흰 천을 뒤집어 쓴다. 濟州島の葬列 |
| 85. 마마에 의한 죽음은 하늘에 돌려야 한다고 해서 주검을 나무위에 안치했다. 樹上の弔い 天然痘による死は天に返さなければ ならないといって屍を樹上に安置し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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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묘(1). 墓(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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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묘(2). 墓(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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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성묘(1). 墓參り(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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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 성묘(2). 墓參り(2) |
| 90. 액운을 짊어진 제웅. 厄拂いの人形(ひとがた). 厄運を負わされたチェウ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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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 길가에 버려진 제웅(1). 道端に捨て置かれたチェウン(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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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 길가에 버려진 제웅(1). 道端に捨て置かれたチェウン(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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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 옷을 입힌 제웅. 병을 고치기를 위해서 이 제웅을 길가 또는 강에 버린다. 황해도. 衣を着せた人形(ひとがた). 病氣を治すためにこの人形を道路や川に棄てる. 黃海道. |
| 118. 무당(1). ム-ダン(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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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9. 무당(2). ム-ダン(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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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 무당(3). ム-ダン(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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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 제주도의 신방. 濟州島の神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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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 작두. 개성. クッ. 踏刃舞の一場面. 開城. |
| 123. 양중. クッの樂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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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 제주도 심방에 의한 굿. 濟州島のクッ. 濟州島の神房によるク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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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 제주도의 개인굿. 濟州島の個人ク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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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 평안남도의 무당. 平安南道のム-ダ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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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 경주 무당들의 기우제. 강가에서 제단을 만들고 또 용의 그림, 배등을 준비해서 춤을 추었다. 雨乞い. 慶州の巫女たちによる雨乞い. 川に祭壇を設け, 龍の繪や船などを準備し踊りを踊った. |
| 128. 나주의 있었던 신청(神廳). 羅州の神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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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 별신굿(1). 江原道江陵の別神ク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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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 별신굿(2). 別神クッ(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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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 별신굿(3).강원도 강릉의 별신굿의 제물. 江原道江陵の別神クッに用いられた祭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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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 애기를 기원하는 바위(1). 서울 인왕산에 있는 부부암. 子授けの岩(1). ソウル仁旺山にある夫婦岩. |
| 138. 장승(2). 천하대장군. 長 天下大將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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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 장승(3). 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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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0. 장승(4). 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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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 풍년을 기원하는 낟가릿대. 豊作を祈るナッカリッ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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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 마을 입구에 세워진 마마 예방을 워한 나무(1). 天然痘よけ(1). ムラの入口に立てられた,天然痘除けの木. |
| 149. 호랑이를 탄 산신(3). 虎に乘る山神(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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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 여자 아이들이 하는 각시 놀음의 인형. 閣氏あそびの人形. 女の子たちのやる閣氏あそびの人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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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 덕물산 위에 있는 최영 장군 부부상(1). 德物山上の崔塋將軍夫婦(1). 開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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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 덕물산 위에 있는 최영 장군 부인당. 개성. 開城德物山上の夫人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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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 무당이 모시는 귀신. 조각. ム-ダンの勸請する鬼神彫刻 |
| 154. 국사당. 서울 남산. 國師堂 ソウル南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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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 서낭당과 바친 것. ソナン堂と供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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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 시장을 수호하는 솟대. 경남 군북. ソッテ(1). 市場を守るソッテ. 慶尙南道郡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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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 솟대(2). ソッテ(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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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 솟대(3). ソッテ(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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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 대전 시내에 있던 솟대. 黃昏のソッテ. 大田市內にあったソッテ. |
무라야마 치준이 이해하려고 한 조선인의 생활이나 정신세계는 총독부 정치 아래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 까닭일까? 서민들의 공동체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갖가지 노력을 하였다. 그것들을 미신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지만 그런 태도로서는 과연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村山智順が理解しようとした朝鮮人の生活や精神世界は總督府政治の下で深刻な葛藤を經ていた. そのためか, 庶民の共同體は秩序を維持するためにさまざまな努力をした. それらを迷信と斷定することはやさしいが, それでムラ人のこころがわかったことになるだろうか.
우리들은 미신이라는 행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마을과 나라가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가질 수 있었던 자연이나 인간세계와의 친화력(親和力)은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무라야마는 『朝鮮の類似宗敎』와 같은 책 속에서 그러한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도저히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다.
われわれは表面的には迷信とみえる行爲のなかにはいりこまなければならない.ムラとクニが危機に瀕したとき, 人びとが持つことのできた自然や人間世界との親和力はどのように表現されたのか. 村山智順は『朝鮮の類似宗敎』のような書のなかで, そうした接近を試みようとしていた. だが, 十分とはとうていいえない.
여기에 제시한 사진들도 그 나름대로 서민생활에 접근하여, 결코 위압적인 관헌(官憲)이 찍은 듯한 악감정(惡感情)은 감돌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사보고서 단계에 머물렀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여기에는 왜 웃음이 없을까. 그 괴로운 시대에도 복조리를 파는 아주마가 찾아왔고, 탈놀이에 귀신이나 '멍청이'를 등장시켜서 실컷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갖가지 괴질(怪疾)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이를 막기 위하여 인간의 상상력을 힘껏 발휘하여 자연 속에 살려고 하였다. 그것은 결코 소극적인 '삶' 따위가 아니라, 말하자면 흙과 같이 살고 흙 속으로 돌아간다는 적극적인 의사표시였다.
ここに提示した寫眞もそれなりに庶民生活に接近していて, けっして居丈高な官憲の撮ったものという惡感情は漂っていないのだが, にもかかわらず調査報告の段階にとどまっていたといわざるをえない. ここにはなぜ笑いがないのだろうか. あの苦しい時代にも, 福 を賣る女がやってきたし, 假面戱に鬼神やでくの坊を登場させ思い切り笑いあそぶ者たちがいた. さまざまな怪疾がはやる社會でそれを防ぐために人間の想像力を總動員しつつ自然のなかに生きようとした. それはけっして消極的な「生」などではなく, いわば土とともに生き, 土のなかに歸っていくことの積極的な意志表示であった.
무라야마가 남긴 것은 그러한 마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가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던 사진들이었으나, 또 한 걸음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다면 지금은 사라져 가고 있는 민속세계의 여러 면모가 더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村山の手元に殘ったものは, そうしたムラ人の生のなかにはいりかけてとどまった寫眞ではあるが, あと少しだけ人びとの胸のうちに踏みこむならば, 今は失せようとしている民俗世界の諸相がはっきりとみえてくるものとおもわれる.
『村山智順 所藏寫眞選』은 그러한 시각으로 다시 보아야 할 것이다.
「村山智順所藏寫眞選」はそうした思いでみなおされるべきものとおもわれる.
https://cafe.naver.com/walkingdaegu/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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