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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10회 금줄

송화강 2019-05-22 (수) 14:05 6년전 5680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10회 금줄


요즘 남편들은 출산일이 다가와도 준비할 게 거의 없지만, 우리 아버지들만 해도 손이 바빴다. 미역.가위.실.대야를 준비하는 일 말고도 반드시 깨끗한 볏짚으로 새끼를 꼬아두어야 했고, 새끼에 매달 숯.청솔가지.붉은 고추를 마련해야 했다.


새끼줄과 그 장식품들은 `이곳은 아기를 갓 출산한 집이니 출입을 삼가해달라'는 의미로 대문밖에 내걸 금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아들이요, 딸이요?', 따져물을 것도 없다. 빈부격차, 신분고하, 지방차이를 막론하고 빨간고추가 걸리면 아들, 솔가지만 걸리면 딸이었으니 금줄은 신생아의 상징과 기호, 그 자체였다. 인줄, 검줄이라고도 불리던 이 금줄이걸린 집은 삼칠일(21일) 동안 출입통제구역이 된다. 아무리 가까운 친인척도 예외가 아니다. 저항력 약한 신생아와 산모가 외부의 질병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과학적 인식이 그 바탕에는 깔려 있었다. 아무튼금줄은 닫힘과 열림, 성역과 속계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정작 금줄의 오랜 역사는 알려진 게 없다. 문자를 독점했던 지배계급은 어느 누구도 금줄 따위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금줄의 명맥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은 금줄을 신성시한 민족의 집단적 무의식이 알게모르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일제시기 국학자 이능화는 일찍이 이것이 금지한다는 `금(금)줄'이 아니라, `검줄'이리라 추정하면서, 그 `금'을 한국고대사회의 신성어인 검.금.곰.한 등과 한 맥락으로 보았다. 역사민속학자 손진태는 아예 금줄을 `검질'로 표기하면서, 그것이 단순한 금지표시 이상임을 강조하였다.

 

금줄은 우리들 잠재의식의 밑뿌리에 드리운 독특한 의례문화다. 새끼를꼬고, 줄을 걸쳐놓는 행위는 그 자체, 하나의 엄숙한 의례다. 게다가 여느 줄이 아니다. 새끼는 보통 오른쪽으로 꼰다. 그런데 금줄은 반드시 왼쪽으로 꼰 왼새끼다. 왜 하필 왼새끼여야 할까. 왼쪽과 오른쪽, 둘 중 정상은 늘 오른쪽이다. 금줄 쳐진 곳을 범하려던 것들이 일상적이지 않은왼쪽의 `도발적 방어'에 놀라 선을 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금줄의 적용폭은 의외로 넓다. 이내 장독대로 옮겨간다. 된장.고추장.간장이 우리 음식문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거니와 장을 담그는 데도 금줄이 빠질 수 있었겠는가. 심지어 술 담글 때도술독에 쳤다. 이때는 고추나 한지, 숯을 끼운다. 때로는 한지를 오려만든버선본을 거꾸로 붙인다. 왼새끼와 거꾸로 선 버선본 같은 비정상의 `괴력' 앞에서 귀신인들 범접할 수 있겠는가.

 

이제, 금줄은 마을의 당집, 당나무, 대동우물로 옮겨진다. 담양군 월산면 회룡마을의 당산제를 찾아가보니 제관집은 물론이고 마을로 들어오는동구밖 곳곳에 금줄을 둘렀다. 당산제를 올리기까지 어느 누구도 바깥 출입을 삼간다. 물론 당산의 소나무에도 금줄이 쳐져 있다. 당산제가 끝나야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간다. 미국의 종교학자 M. 엘리아데 식으로 말하자면 성과 속의 세계의 변환이다.

 

금줄에 병을 매달고 그 안에 버들가지를 꽂아두면 병의 물이 조금씩 떨어진다. 비를 비는 금줄이다. 이 금줄을 걸면 작은 기우제를 올리는 셈이된다. `이름있는 날' 가정에서 성주.칠성 따위의 집안고사를 올릴 때도금줄은 빠지지 않았다. 함경도에서는 물건을 버릴 때 왼새끼에 매어서 던지는 관습이 있었다고도 한다.

 

이런 금줄에 그중 자주 달리는 고추는 우선 남아를 상징한다. 그 붉은색은 악귀를 쫓는 벽사색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고추가 들어왔으니 그리오래되지는 않은 풍습이 분명하다. 요즘도 `정수기필터' 기능을 하는 숯에는 정화의 의미와 기능이 부여되지 않았을까. 늘푸른 솔가지가 생명의상징임은 말할 것도 없다. 평안도에서는 금줄에 솔가지를 꽂아 이름도 `송침(송침)'이라 붙였다. 이밖에 밤에도 표식을 분명히 하기 위해 한지를매다는가 하면, 지방에 따라서는 악귀를 쫓기 위해 게껍질을 달기도 했다.

 

금줄은 멀리 북방의 시베리아로부터 몽고, 중국과 만주를 거쳐 일본과오키나와, 대만에 이르기까지 널리 발견된다. 시베리아 사하(Saha)공화국에 갔을 때 본 금줄은 말총으로 만든 줄에 울긋불긋 서낭당처럼 오색천을붙들어 매놓은 것이었다. 유목민족인 탓이다. 반면에 오키나와 같은 남방에서는 우리처럼 짚으로 만들고 있었다. 농경민족인 탓이다.

 

여기서 하나의 단서가 잡힐 듯 하다. 비교문화사적으로 볼 때 우리의금줄문화는 오키나와나 일본남부의 금줄과 더불어 바로 쌀문화의 소산임이 분명해진다. 마을 경계 표식, 신당의 정화기능, 심지어 왼새끼인 것까지 똑같다. 다만 우리 금줄은 아기출산, 장담그기, 심지어 술담그기에 이르기까지 더욱 세분화되었다는 데서 금줄문화가 고도로 발달했음이 엿보인다.

 

이제 아파트 같은 공동주거문화 확산으로 금줄을 걸 만한 대문 자체가사라졌다. 출생지가 병원인 아이들에게 금줄문화를 알려주는 건 바로 한민족생활사의 뿌리를 가르쳐주는 일, 그 자체가 아닌가.

 

주강현 민속학자.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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