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의 수수께끼] <17> 백의민족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어 생긴 말이다. 그런가 하면 `백의종군'이라는 말도 정치권에서 심심찮게 쓰인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흰옷을 입고 군대를 따라 전장에 간다'는 뜻의 이 말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일반인으로 내려 앉아 봉사한다'는 속뜻 을 지니고 있다. 백의종군이란 말에서 기득권을 가진 지배층은 흰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의 유추가 가능하다. 흰옷을 즐겨 입는 우리 민족을 일 컫는 백의민족이라는 상식적인 말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가 자 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흰옷을 즐겨 입었을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기원전 1세기부터 3백년 동안 존속한) 부 여는 흰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널리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우리 민족이 흰옷을 입기 시작한 역사는 꽤 오래된 것 같다.
삼국시대에도 우리 민족은 일부 지배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흰옷을 즐겨 입었다. 고구려벽화 등 유물 및 문헌들은, 당대 지배층이 중국 복색을받아들여 화려한 색깔의 옷을 선택함으로써 일반 백성들과 차별성을 추구했으며, 일반 백성들은 흰옷을 선호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흰옷 선호도는 바뀌지 않았다. 조선 성종 19년에 명나라 사신으로 왔었던 둥웨가 <조선부>에 “조선사람들이 모두 흰옷을 입는다”고 묘사하고, 1868년 대원군의 양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 하러 왔던 독일의 항해가 오페르트가 <금단의 나라, 조선에의 여행>에서 “남자나 여자나 옷빛깔이 모두 희다”고 기록한 것은 당대 백성들이 흰 옷을 즐겨 입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흰옷 입는 것이 금지됐던 때도 있었다. 고려말 충렬왕(1275년)은 “오 행사상으로 고려는 동(東)이므로 목(木)이 되고 , 목은 청(靑)이니 흰옷 을 입지 말고 푸른옷(靑衣)을 입으라”는 영을 내렸다. 조선시대에는 태 조·세종·연산군·인조·현종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푸른옷을 권 장하였으며, 숙종은 아예 푸른옷 착용을 국명으로 내렸다.
구한말 서구열강의 영향권에 편입되면서 흰옷은 더욱 노골적으로 홀대 를 받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검은옷을 입으라는 칙령이 반포된 데 이 어, 1897년 광무개혁 때는 아예 흰옷 입는 것을 금했다. 장터에서 흰옷 입은 사람에게 먹물을 뿌리기도 했다.
일반 백성들이 지킨 흰옷에는 저항의 철학이 있었던 듯하다. 일제의 단발령과 더불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선 의병대열은 모두 흰옷을 입었다.
3·1운동 때도 흰옷을 입은 무리가 전국을 휩쓸었다.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흰옷이 피로 붉게 물들어 가는 비극의 상흔 속에서 백성들은 하나로 뭉쳤었다. 일제침략이 오히려 흰옷을 더욱 고수하게 한 셈이다.
동양3국 가운데 중국인은 검정옷, 일본인은 남색옷을 즐겨 입었는데 우리는 왜 흰옷일까. 중국인들은 흰옷을 아예 죽은 옷이라 부르기까지 했는데 우리 민족이 흰옷을 그토록 오래동안 고수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많은 복식학자들은 “염색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옷감을 짠 그대로 입게하였으리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그러나 지배층이 입은 현란한 색깔의 옷감으로 미루어 보면, 우리 민족이 단지 염색기술 때문에 흰옷을 많이 입은 것 같지는 않다. 염료값이 비싸서 물감을 들일 수 없었다고도 하지 만, 동양3국에서 우리만 흰옷을 선호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일제시기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의 흰옷 입기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내 놓기도 했다. 도리야마 같은 사람은 “고려가 몽고족에 망하면서 조의를 표하기 위해 입은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보았고, 야나기는 “조선민족이겪은 고통이 한으로 맺힌 옷”이라고 했다. 흰옷을 우리 민족의 순결, 한따위와 연결지은 이들의 분석은 식민통치를 온당화하려 한 의도에서 비롯한 `백의민족론'이다.
그러나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태양의 자손으로서 광명을표시하는 흰빛을 자랑삼아 흰옷을 입다가 나중에는 온겨레의 풍속이 된 것”이라 하였다. 민족의 발생시기부터 하얀 것을 좋아했고 그것이 집단 무의식화 과정을 거쳐 흰옷 선호사상으로 발전하지 않았느냐는 추측이다.
흰 소머리를 하늘에 바쳐 제사를 지낸 데서 백두산의 이름이 유래했다 는 속설이 전해지거니와, 가장 원초적인 제물이 백설기이고, 태양의 아들과 왕을 동일시한 이집트인들이 흰색을 숭배했고, 동북아시아 기마민족이흰색 말을 숭배했다는 사실은 육당의 견해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이런 역사성을 지닌 `백의문화'는 해방 이후 무너졌다. 미국문화와 더 불어 윈색문화가 대대적으로 몰려 들어오면서 점차 퇴조의 길을 걷기 시 작해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흰옷을 멀리하는 경향이다. 미국문화가 유입된 지 불과 50여년 만에 흰옷이 퇴장한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우리 가 정말 백의민족이었던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백의민족이 분명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왜 흰옷을 선호했는지를 제대로 밝혀놓은 사료나 연구서 하나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강현 민속학자·경희대 강사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