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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21> 어살/ 돌,대나무로 보막아 고..

송화강 2019-05-22 (수) 14:13 6년전 5556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21> 어살/ 돌,대나무로 보막아 고..


다산 정약용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친형 정약전은 조선 순조 때 흑산도 로 귀향가서 <자산어보(자산어보)>를 남겼다. 자산은 흑산도를 말함이니 섬에서 쓴 물고기책이다. 조선 정조 때 학자 서유구도 <난호어목지(난호 어목지)>를 남겨 선조들의 어업관을 잘 알려주고 있다.


이들 실학자를 빼놓고는 `비천한' 어업에 관해 제대로 된 저술을 남긴 이가 드물다. 삼면이 바다라는 천혜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어업기 술책들은 볼품이 없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적은 분량의 책들이나마 잘 들추어보면 어살(어전)이 자주 등장한다.

 

어살은 고대사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전통을 지닌 고기잡이 방법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오목하게 들어간 포구에 대나무나 싸리나 무, 돌멩이 따위로 보를 막아서 고기를 잡던 어로방식이다. 밀물에 밀려 온 고기들이 썰물이 빠져나가면서 그 안에 갇히게 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고대부터 연근해에서 고기잡이에 낚시.그물.작살 따위가 사용된 게 분명하나 그에 못지 않게 어살도 중요한 도구였다. 따라서 낚시와 그물로만 고기를 잡았다는 교과서의 천편일률적인 서술은 마땅히 고쳐져야 할 것이다.


어살에는 돌로 막은 독살(돌살, 돌발), 대나무로 막은 죽살 따위의 다 양한 종류가 있으며, 바닷물 속에 대나무나 갈대발을 세워 물고기를 잡는방렴(방류)도 어살의 일종이다.


어살은 언제 어디서 기원했을까.


어살은 아무래도 돌을 쌓아 고기를 잡던 독살이 원조격 같다. 서해안 일대의 어살은 본디 독살이었다가 나중에 대나무나 싸리나무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얼마전까지도 변산반도의 격포해수욕장 주변이나 전남 신안의 안좌도 같은 곳에 더러 독살이 남아있어 어살문화의 흔적을 보여주었 다. 그러나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서해안의 어살 분포가 강령.옹진.인천.태안.홍성.무장.영광 지역으로 크게 나뉜다. 이로 미루어 볼 때대부분의 어살이 황해도 강령만.해주만, 경기도 경기만.남양만, 충청도천수만, 전라도 곰소만 등 만 안을 중심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들 지역의 수심이 얕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데다 어살 설치가 쉽고 대 체로 한양과 가까워 수산물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었던 것과 관련이 깊은 듯하다.


경상도에는 어살의 일종인 방렴이 많았다. <일성록> 정조 14년(1790년)의 기사를 보면, "함경도 방렴어업은 영남의 백아무개가 가르쳐서 원산 에서 처음 시작했다"고 했으니 동해안에서 어살이 시작된 지는 2백여년 에 불과하다.


어살은 원시적인 어법이라 어획량이 적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않았다. "좋은 어살 자리는 못자리 하고도 안바꾼다"는 속담이 전해질 정도이니 고기가 꽤 많이 잡혔던 모양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헌을 보면 권문세가들이 목 좋은 어살을 장악했음이 드러난다. 요즘으로 치면, 재벌들이 땅투기하듯 어장을 독차지했던 것이다. 국가적으로도 어살은 중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궁궐에서 직접 경영하는 어살이 많았다. 과중한 세금 때문에 어민들이 큰 피해를 입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독살은 비교문화사적으로도 재미있는 흐름을 보여준다.


멀리 일본 오키나와에 가도 독살을 볼 수 있다. 오키나와의 수많은 섬 마다 독살이 있어 지금도 이 방식으로 고기를 잡고 있다. 해류를 따라서 북상해 제주도에 닿아도 곳곳에 독살이 전해진다. 제주도에서는 어살을 원, 원담, 객담이라고 부르는데 마을 공동 소유가 많다. 1개 마을의 원은여러개의 계조직으로 나뉜다. 북제주군 구좌읍의 행원리와 서귀포시 대포동은 각각 6개의 원으로 나뉘어 계장을 뽑고 계원들이 공동운영하고 있다.


파도에 밀리는 돌담을 보수하기 위해 수시로 계원을 동원하여 공동노동을 수행했기에 원은 공동체문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작은 원도 있지만 수천평에 이르는 것도 있어 어획량이 상당했다고 한다. 숙종 30년(1704년) 에 제주목사 이형상이 쓴 <남환박물(남환박물)>에서도 "제주도 사람들은그물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바다에 던져 놓은 돌멩이가 바로 그물 역 할을 한 것이다.


이처럼 독살문화는 오키나와로부터 제주도를 거쳐,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서 북쪽까지 하나의 띠를 형성하면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제주도와 오키나와 등지에 원시형의 독살이 주종 을 이루었고, 더러는 지금도 존속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어살은 거의 사라졌다. 연근해 어족이 사라지고 개펄이나 모래밭이 사라지게 된 탓이다. 그래서 누구나 고기는 그물로 잡는 줄로만 알지 담을 쌓아서 잡는 줄은 모르게 됐다. 어살이 가능할 만한환경을 되찾는 일은 바로 연안어족이 풍부하게 숨쉬는 생태환경으로의 원위치를 의미함이 아닐까.

 

주강현 민속학자·경희대 강사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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