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의 수수께끼] <22> 구들
사람들은 흔한 것을 귀한 줄 모른다. `구들'(온돌의 순우리말)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따끈한 아랫목에 지져야 몸이 개운하다”는 말까지 만들어낸 구들은 재래식 구들에서 보일러식 구들을 거쳐 요즘엔 `온돌침대'까지 등장할 정도로 발전했다. 고층 아파트, 침대문화가 자리잡은 초현대적 생활에까지 도 구들은 여전히 이어져 21세기로 온전하게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가장 원초적인 문화유산의 하나이면서도 우리의 생활과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인지 구들은 `화끈한' 주목거리에서 벗어나 있다.
구들은 우리 고유의 독특한 문화일까 아닐까. 이웃나라 일본은 습기를 피해 다다미를 깐 방 가운데 화덕을 둔다. 중국의 북부 사람들은 `캉'이 라고 하여 우리의 구들과 뿌리를 같이 하는 주거양식을 지니고 있다. 우 리의 구들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좌식생활임에 반하여 캉은 입식생활이다.
동양 3국 가운데 우리만 구들을 발전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정확한 답 변은 어렵지만, 삼한사온이 분명한 기후조건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다. 겨울의 뜨듯한 방바닥과 여름의 시원한 방바닥을 상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구들은 천천히 데워지고 천천히 식는다. 한국인의 속성인 ‘은근과 끈기’도 바로 구들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구들의 첫 발생은 단순한 모닥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달구어진 돌이 열을 보존한다는 아주 평범한 사실이 구들의 발생을 부추겼을 터이다. 청동기시대 함북 웅기지방 움집터에 이르면 화덕을 개량한 것으로 보이는 구들흔적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온돌고>를 발표한 민속학의 태두 손진태는, 구들이 고구려에서 본격적으로 발달하여 중국에도 영향을 주었고, 한국의 남쪽에도 후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았다.
구들문화를 기록한 최초의 문헌은 10세기 초 중국에서 편찬된 <구당서>의 `고구려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긴 겨울을 나기 위해 길다란 갱( 坑)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고 했으니, 갱이 바로 구들의 원초형으로 보인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구들이 당대 `민중의 문화'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지배층의 생활을 묘사한 고구려 벽화엔 의자에 앉은 입식문화와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구들문화가 혼재돼 있어, 구들문화가 민중의 전유 물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입식문화는 실내에서 화로에 숯을 피워 난방과 취사를 하는 게 보통이다. 통일신라의 경우 수도 서라벌이 숯을 이용해 밥을 지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구들문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방에서 시작된 구들문화는 남방에서 시작된 마루문화와 만나 우리 주거생활을 통일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고구려식 주거생활과 백제·신라식 주거생활이 통일되는 형식이 바로 구들과 마루의 조화가 아니었을까. 김홍식 교수(명지대 건축학)는 방마다 구들을 놓는 전면적인 구들 문화로 발전해간 시기를 고려 중엽쯤인 12∼13세기께로 잡는다.
그러나 훨씬 후대로 내려와 17세기 후반, 제주 목사를 역임했던 이형상의 <남환박물지>에 따르면 제주도 살림집에는 그때까지도 구들이 없었다.
18세기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넓은 집에 구들을 깐 방이 두어칸 밖에 안돼 나머지는 판자를 깔았다고 했다. 전국이 본격적인 구들문화권 에 들어선 것은 매우 늦은 시기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추운 평안도나 함경도에서는 근년까지도 부엌과 방의 경계가 없었다.
부뚜막의 열기가 벽을 거치지 않고 방으로 직접 전달되었다. 반면에 남부의 주거양식에서는 부엌과 방이 벽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마루방으로향하는 불기운을 정확히 차단시킬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들문화의 전개는 상당한 수준의 열관리 지식의 보편화 과정이었다.
연기를 잘 배출하고 구들을 골고루 데우기 위해서는 바람과 기후조건을 잘 따져서 아궁이와 굴뚝을 배치하고, 아랫목은 낮고 웃목은 높게 구들장을 놓고, 아랫목은 두껍게 흙을 바르고 웃목엔 얇게 발라 열전도율의 균 형을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목민처럼 연기 안나는 말똥을 태웠던 제주도에서는 굴뚝없는 구들이 존재하기도 했다.
국학자 정인섭이 1927년에 설화집 <온돌야화>를 펴냈을 때만 해도 구들방은 구전문학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살쾡이 우는 깊은 겨울밤, 따스한 웃묵에서 화롯불가에 둘러앉아 `호랑이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던풍경은 어느덧 사라지고, 텔레비전문화가 안방을 차지했다. 또 불을 넣는불아궁, 불아궁 안쪽의 연료가 타는 장소인 불목, 불아궁 위의 부뚜막, 불기가 빠져나가는 구들고래, 고래 옆에 쌓아 구들장을 받치는 두둑, 편 편하게 덮은 구들장 등 구들문화의 토속어들도 거의 잊혀져 가고 있어 안타깝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해방 이후 반백년이 지나도록 열축적에서 뛰어난 강점을 지닌 구들을 개량 발전시켜 세계에 내놓을 문화유산으로 만들려는노력조차 제대로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끝>
주강현 민속학자·경희대 강사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