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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학을 공부하다 보면 문자 속에 사라진 역사가 많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전라도의 한적한 고장인 森西라는 지명에서 이 고장에서 사라진 삼한시대의 역사를 복원해 내어 <장성군 삼서면
지명예찬>이라는 제목을 붙여 인터넷에 올렸을 때 단 며칠 사이에 1만 명 이상이 검색한 것을 보고서 검색자가 그 고장
사람들이거나 그 고장 출신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우리문자인 한자桓字(주,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후한의 문자로 재해석하기
이전의 조선의 문자인 한자)에 사라진 우리의 역사가 숨어 있다.
▲ 필자가 모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봉래 연태(단군조선의 국도에 속했던 지역)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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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금년 칠석제에 동참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이번 칠석제에서 고려시대 길례吉禮 중에서 대사大祀로 모국시조牟國始祖인 견우牽牛와 직녀織女에게 제사를 지내
줌으로서, 견우·직녀가 농경문화를 시작한 우리 시조임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2011년 칠석제는 1 달이나 앞 댕겨서 7월 5일, 6일, 7일 3일 동안 청계천이 시작되는 청계천 광장에서 뜻 깊은 3일을
보냈다.
음력 7월7석 날 칠석제를 해야 제격인데, 그때 칠석제를 해야 한다는 의식이 장소사용승인권을 쥐고 있는 당국이 전혀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7월로 앞당겨 하게 된 것이다.
칠석제를 하면서 보니까 사정을 알지 못하는 시민들이 칠석제를 망친다고 한마디씩 비난을 퍼붓고 돌아갔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5일, 6일은 무더웠고, 7일은 온종일 비가 왔다.
비가 가끔 그치기는 했지만 이어서 억수로 쏟아지기도 하여 온종일 비가 온 셈이되었다.
| ▲ 조선왕조 명종 때(500여년 전) 격암 남사고 선생은 성주산에서 소울음소리가 울면 세계가 하나로 통일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소울음소리에는 [견우의 후손]이라는 비의秘義가 숨어 있다. 이 비의를 잊지 않기 위하여 기리는 제사가 견우직녀칠석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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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청계천 하류 쪽을 향하여 위패를 좌정시키되 북쪽을 향하도록
하였다.
대사에서는 제물을 65가지나 진설하도록 되어 있다.
왜 대사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돌아가신 임금님 부부에게 지내드리는 제사이므로 대사라 한 것이다.
대사란 큰 제사라는 뜻이다.
지나간 시대의 임금에게 올리는 제사가 대사이다.
나는 견우와 직녀를 조선시대에 조선 대국大國 9국, 소국小國 12국에
속했던 모국牟國의 시조부부始祖夫婦로 보기 때문에 마땅히 대사를 지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고려시대의 길례吉禮 중에서 제사법인 대사로
제사를 지내 드리기로 하였다.
고려의 길례 중에서 대사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고려의 왕건태조王建太祖는 신라를 멸망시키고 나서, 신라의 중신들을
고려왕조에 등용하여 신라의 문물을 고려가 이어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차별성을 두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고려의 제사문화의 으뜸인 대사는 신라의 대사를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대사에 쓰이는 제수祭需에 양념을 전혀 쓰지 않는 것을 보면 옛날에는 양념이 없어서 양념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의 대사는 어디에서 이어받은 것일까? 이 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비밀을 풀려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내세워 신라新羅(새 나라라는 뜻)를 세운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서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벌도리는 신라의 초대 황백和白인 육부촌장六部村長의 우두牛頭 머리가 되는 분이다.
우두머리란 소시모리라고도 했는데, 쇠머리라는 뜻이다.
쇠머리는 소머리 형상의 투구를 말하는 것으로 임금을 뜻하는 말이다.
소벌도리를 해석해 보면 몇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의 역사를 찾기 위하여 해석해 보기로 한다.
①. 소도蘇塗를 정벌征伐하여 도읍都邑을 이利로 하였다.
②. 모계족성母系族姓은 소蘇, 이름은 벌伐, 나라를 세워 이利롭게 하였다.
여기에서의 이利는 조선朝鮮의 국시國是인 홍익인간弘益人間에 들어 있는 익益과 같은 뜻으로 쓴 말로 볼 수 있다.
③. 조선시대에 완성한 역사서歷史書이자 천문서天文書이고 예언서豫言書이기도 한 <역경易經>의 가르침인 이섭대천
利涉大川(큰 강을 건너면 이롭다는 뜻)를 실천한 분이 소벌도리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소벌도리가 소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 조선의 전신인 단국檀國의 형세도이다. 단국의 곤오가 홍제 8년에 수분하를 넘어 단국을 공격해 들어왔으나 곤오가 이를 격퇴하였다. 이 공을 인정받아 홍제로부터 蘇성을 사성하였다. 그는 진주소씨의 시조로 청동기시대를 열어간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후손 소벌도리蘇伐都利가 박혁거세를 내세워 신라를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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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蘇姓의 사성賜姓의 역사를 보면, 소성은 원래 풍이족風夷族 출신으로 한국桓國을 세운 한인천제桓因天帝의 적통
으로서 풍이족의 장자가 이어오는 족성이었다.
그는 풍성의 시조성始祖姓인 사巳성에서 분파分派하여 기성己姓이 되었다가, 조선의 전신인 단국檀國의 홍제洪帝로부터
홍제8년에 황하黃河의 지류인 수분하綏芬河에서 단국을 침공한 제곡고신帝嚳高辛을 물리친 공로로 소성蘇姓을 사성賜姓
하였다.
이때 소성을 사성한 분이 기성己姓 곤오昆吾였다.
기성 곤오는 배달나라의 커발한이었던 청구靑邱의 자오지천왕(치우천왕)의 다음 대에 속한 사람이다.
그는 풍이족의 나라인 삼소三蘇의 왕王으로서 황하 일대에서 하백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당시에 하백은 소도의 우두머리가 맡고 있었다.
| ▲ 동녀가 들고 있는 것이 신선도의 상징은 복숭아이다. 복숭아는 장차 태어날 도부신인桃符神人을 상징한다. 그가 미래에 세상에 태어나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된다. 동녀가 그를 낳으면 하백녀河白女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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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는 국가권력이 침범할 수 없는 종교적이고 사상적인 성역이었다.
그렇다면 왜 소도의 우두머리가 한반도의 남쪽 변방인 경주 남산 밑에 가서
남산이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선도산仙桃山을 열었던 것일까?
선도산이란 선仙(격암 남사고는 선을 천지인天地人으로 해석하였다)에서
미래의 메시아가 태어나는 산이라는 뜻이다.
아마 선에서 미래의 메시아로 태어난 분이 박혁거세(세상을 밝혀 새롭게
한다는 뜻)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자의 발달과정으로 보아서 박朴이 도桃에서 나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도의 우두머리인 소벌도리는 어디에서 온 분일까?
역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경기도 부천은 삼한시대엔 추체모탁국優體牟涿國으로 불렸던 곳이다.
우체모탁국은 소와 돼지를 기르는 국이라는 뜻이다.
아마 대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체優體는 살찐 몸이라는 뜻이다.
모탁이 소와 돼지이므로 우체모탁하면 살찐 소와 돼지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래서 우체모탁국은 소와 돼지가 살찐 국이라는 뜻이 된다.
우체를 달리 말하면 살찐 소로도 볼 수 있는 말이다.
이런 곳이 소도를 설치할만한 곳의 배후지역이 된다고 볼 수 있다. 부천의 남쪽에는 격암 남사고가 조선왕조 명종 때 삼신산三神山으로 명명한
성주산聖主山(지금 부천의 주산主山), 소래산蘇萊山(시흥始興과 인천仁川에 걸쳐 있는 산), 노고산老姑山(부천에 속한 산)이 있다.
이들 산은 규모가 큰 산은 아닌데 특이한 것은 복숭아밭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이다.
일제 때는 도원에서부터 이곳까지 복숭아밭을 일구어 복숭아를 생산해서
수밀도水蜜桃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수출하였다.
| ▲ [한국제례연구원] 회원들이 모국의 시조왕인 견우와 그의 부인 직녀에게 대사大祀를 올리기 위하여 청계천 광장 바닥에 제기를 진설해 놓았다. ©노중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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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제례연구원] 회원들이 제물진설홀기를 낭독하는 순서에 따라 제상 위에 제물을 진설하고 있다. 상을 든 남자는 견우시자, 상을 든 여자는 직녀시자, 서있는 두 사람은 남자는 견우집사, 여자는 직녀집사이다. 책을 들고 서있는 두 사람은 각각 사회와 홀기봉독이다. ©노즁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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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모탁국의 우체優體에서 임금을 의미하는 인亻을 띠어내면 상당할우憂자만 남게 된다.
우優자를 亻+憂로 파자하면 亻(임금)이 상을 당할 때 憂는 임금의 시체(시尸)라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우체모탁국 사람들은 임금의 시체를 가지고 온 사람들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임금의 시체를 가지고 올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모牟자와 탁涿자에 있다고 본다.
모牟는 모국牟國, 탁涿은 청구靑邱가 있었던 탁록을 의미하는 문자로 볼 수 있다.
모국에서 시조의 시체나 위패를 가져온 사람들이 정착한 곳을 우체모탁국으로, 또한 탁록에서 치우천왕의 시체나
위패를 가져온 사람들이 정착한 곳을 우체모탁국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모국의 시조를 농경시대를 연 견우로 보고, 그의 비를 옷감을 짜기 시작한 직녀로 보기 때문에, 우체모탁국은
견우와 직녀를 받들어 모시던 사람들이 정착한 국으로 본다.
또한 태산泰山에는 태산감당泰山堪當이라는 신물神物이 있는데, 이 태산감당은 치우천왕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태산에
남고, 치우천왕의 신체는 우체모탁국으로 모셔져 갔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격암 남사고는 이 사실을 그의 예언서인 <남사고비결>에 후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의秘義로 남겨 두었다.
남사고 비의는 소울음모牟자에 숨겨져 있다.
그는 성주산(부천의 진산)에서 소울음소리가 울리면 조선이 멸망하고 세계가 단일국가로 통일 되고 이때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성주산에서 도부신인이 출현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앞의 그림 3에 복숭아를 들고 있는 동녀상은 남사고의 비의를 담고 있는 동녀상이다.
| ▲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북방현무칠수에 속한 직녀, 견우, 수녀도이다. 유월의 극심한 장마를 그치게 하기 위하여 견우가 7월 6일에 은하수를 건너가는데, 이때 견우의 측실인 수녀가 견우의 장도를 축원하기 위하여 제를 지낸다. ©노중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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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음이 울 때란 모국의 후예들이 스스로 깨어나 모국을 성주산에 다시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들의 시조로 볼 수 있는 분이 견우이다.
견우牽牛의 견자에서 현玄자는 견우와 직녀와 수녀가 속해 있는 북방현무
칠수를 말하고, 소울음모자는 모국을 의미한다.
견牽자에는 이러한 복합적인 의미가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견우를 모국의 시조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견자에는 견우가 하늘에서 소를 끌고 내려왔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그는 견우성에서 내려온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정실부인 직녀도 하늘 사람이고, 견우의 측실부인 수녀須女도 하늘
사람이다.
견우는 질월칠석 전날 밤에 직녀를 만나기 위하여 은하수로 떠나고 직녀는
견우를 만나기 위하여 은하수로 나온다.
그들이 만나게 되는 곳이 오작교이다.
한국제례연구원 회원들은 수녀가 견우의 장도를 축원하기 위하여 직녀
에게 드리는 제사를 올렸다.
이 날의 날자와 시간이 5일 18시 30분에서 19시까지이다.
우리는 고려의 길례吉禮 대사大祀를 모방하여 <견우직녀제사>를 지냈다.
견우직녀제사 참가자는 다음과 같다.
사회 : 노중평 / 홀기 : 김성원 / 견우집사 : 김상열 / 직녀집사 김기현
견우시자 정성엽 / 직녀시자 최옥희 / 집준자 조여사
| ▲ 드디어 대사가 시작되었다. 대사는 원래 종묘에서 지내나 지금 모국의 종묘가 없고 적통도 누구인지 알수 없게 되었으니 나이가 든 사람들이 제관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제관과 향관이 함께 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큰절을 올리고 있다. ©노중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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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헌(제주인 차옥덕)이 좌우집사의 도움을 받아서 작爵에 술을 부어 올리고 공수拱手, 읍揖, 궤跪, 배拜의 순서로 큰절을 올리고 있다. 모국의 시조왕인 견우와 왕비인 직녀에게 울리는 예이다. ©노중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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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는 사회자의 설명과 홀기봉독으로 시작되었다. 마치는 시간은 오후 7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