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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6> 유랑예인집단

송화강 2019-05-22 (수) 14:01 6년전 5387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6> 유랑예인집단

 

조선후기에 장터와 마을을 떠돌면서 춤과 노래.곡예를 생활수단으로 살아가던 무리들이 있었다. 이름하여 유랑예인집단. 남사당패, 사당패, 솟대쟁이패, 대광대패, 초라니패, 걸림패, 중매구패, 광대패, 굿중패, 각설이패, 애기장사 따위로 불린 이들 집단은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하던 당대`대중스타'이자 오늘날 대중연예인들의 선조격이었다.


사실 장르구분과연예인 범주가 세분화된 현대와 예술.놀이.연예의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던 전통시대의 예인 개념을 그대로 연결시키기는 쉽지 않다. 전통사회의 예인집단이 세습적인 천민집단으로 존재했다면, 오늘날은 전 계층적으로 연예인 공급이 이루어질뿐더러 선망의 대상이 되고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유랑예인만이 연예인의 조상격은 아닐 것이다. 삼국사기 <악지(악지)>에 전하는 오기(금환.월전.대면.속독.산예의 다섯재주), 고구려 수산리벽화에 등장하는 재주꾼, 후대로 내려와 고려시기의 괴뢰패(꼭두극), 또한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춤꾼, 악공이 모두 원조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창우 기생 무당 판소리꾼 심지어 마을의 아마추어적인 탈춤꾼, 풍물꾼도 포함된다. 특히나 소학지희(소학지희)라는 말을 낳게 한창우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봇물터지듯 생겨난 유랑예인집단처럼 조직적 결집력과 전문성을 아우르면서 곳곳을 누비면서 서민대중을직접 상대했던 민중적인 연예인들은 드물었다. 자신도 민중이었던 유랑예인들은 유사시에 민란에 동참하는 등 민중적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주기도했다.

 

수많은 떠돌이 예인들 가운데 아무래도 가장 오래된 집단은 사당패였을것이다. 유독 사당이란 말이 일찍이 조선전기에 보일뿐더러, 다른 집단들이 보유한 레퍼토리가 사당패연희로부터 분화된 것들이 많은 탓이다.

 

사당패는 연예를 파는 사당(여자)과 일종의 `기둥서방' 역할을 하던 거사로 이루어졌고, 후대에 사당패에서 분화된 남사당패는 순전히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졌다. 훗날 남사당패로 흡수된 솟대쟁이패는 오늘날 서커스의원조격이었다. 초라니패는 탈놀이가 전문이었다. 광대패는 프리랜서격인뜬광대와 전속예인인 대령광대로 나뉘었으며 명인명창도 나왔다.

 

레퍼토리는 풍물 법고춤 줄타기 땅재주 얼른(요술) 죽방울치기 비나리삼현육각 판소리 민요창 버나(대접돌리기) 따위를 망라했다. 훈병떪모특성에 따라 주력으로 삼는 레퍼토리가 달랐다. 오늘날로 치면 사물놀이 서커스 요술 고사반 노래 춤 악기연주 따위가 모두 망라되었다. 텀블링을하면서 재주넘기와 노래.춤.악기연주를 곁들이는 요즘의 `만능가수'를보면 영낙없이 조선시대의 유랑예인들을 보는 듯하다.

 

어느 시대나 예인의 생명은 높은 기량이다. 낯익은 각설이패 장타령조차 고도의 반복훈련에 의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공연단장격인 꼭두쇠, 기획의 곰뱅이쇠, 전문연희자인 뜬쇠, 초입자인 삐리로 이루어진 남사당패 조직 자체가 바로 고난도의 예능훈련을 암시한다. 따지고 보면 `학삐리.고삐리'라는 속어들이 바로 남사당의 변(은어)에서 비롯된 것이니,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들 패거리의 언어에 가깝게 다가서 있는 것이다.

 

유랑예인들은 늘 장터와 마을을 옮겨다니며 서민대중들의 애환과 더불어 살았다. 그 자신 천민집단으로서 사회적 멸시를 받으면서도 뛰어난 기량으로 민중들의 찌든 삶을 윤기있게 해주었다.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던전통사회에서 유랑예인의 존재는 그 자체가 `스타'였다. 분칠을 한 여사당을 바라보는 더벅머리 총각의 가슴은 늘 설레게 마련이었고, 양반들도저잣거리의 줄타기를 바라보며 모처럼 신명을 돋우었다.

 

그렇다면 조선전기 유랑예인의 원조가 될 만한 집단으로 누구를 꼽을수 있을까. 사당패의 뿌리는 조선전기 숭유억불 정책과 관련 있는 거사패로 거슬러 올라간다. 승려 감축이 진행되면서 집에서 불도를 닦는 비승비속(비승비속)의 거사(거사)들이 속가에서 불교를 믿는 여자를 지칭하는사당(사당)과 함께 무리를 이룬 게 거사패로 불렸다.

 

이들은 사주.관상.손금보기, 떠돌이장사치, 심지어 남녀가 한곳에 뒤섞이어 징과 북 울리기 등 안하는 짓이 없다는 비난까지 받는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거사패가 이미 유랑예인 집단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뒤의 조선사회는 극도로 어수선해진다. 먹고살기힘들어 유랑민이 갑자기 급증하고 대거 예인집단으로 편입된다. 이제까지그런대로 종교성을 지녔던 거사패들은 사당과 함께 다니면서 본격적인 예인의 길로 나선다. 이때 명칭마저 사당패로 바꾸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종교세계의 인물들이 당시대의 이런 특수한 사회사정 때문에 세속적 무리로 전락해 간 것"(한림대 전신재 교수)이다.

 

오늘날은 경기도 안성땅에 있는 작은 암자 청룡사를 찾아가본다. 절에서 받은 신표(신표)를 들고다니면서 마을로 걸립을 다녔던 남사당패들이한겨울을 절에서 나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안성장터는 물론이고 전국을 떠돌면서 연희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곳. 유랑예인집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에 예인들이 살던 청룡사에서나마 발자취를 반추해보는 것이다. 룰라, 노이즈, 이경실, 이경규, 신은경, 정우성, 서태지, 김원준, 김건모. 요즈음 한창 줏가를 올리는 그이들이 반드시 한번쯤은 찾아가야 할 `메카'로 권해보고 싶다.

 

유랑예인집단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한국 대중연예사의 앞 페이지를 장식하면서, 그 정신의 일부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물놀이패의 뿌리도 조선후기 유랑예인이 아닌가! 그들이 치는 전문예인적인 풍물굿가락에는 바로 유랑예인집단의 전문적굿가락이 생생하게 살아 흐르고 있다.


주강현:민속학자.경희대 강사


한겨레신문.95/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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