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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7> 숫자 3의 비밀

송화강 2019-05-22 (수) 14:02 6년전 5377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7> 숫자 3의 비밀

 

강의시간에 대학생 1백여명에게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가 무어냐'고 물어보았다. 내심 3이 단연 우위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많은 학생들이 7을 꼽고 난 다음에야 3에 표를 던졌다. 3보다 7이 앞선 것은 아무래도 서양식의 `럭키 세븐' `세븐 스타'의 영향 탓이 아닌가 싶다.


선호도가 바뀌고 안바뀌고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일상적으로 3을 쓰고있다. 내기를 해도 `삼세번'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의사봉도 `3번'을 두드려야 가결이 선포된다. 3.1독립선언문에 `33인'이 등장하고, 결의대회도 `만세삼창'으로 끝낸다. 한글 창제원리도 하늘.땅.사람 셋을 중심으로 삼았고, 간장.고추장.된장의 `3장'은 민족음식문화의 기초를 이룬다. 같은 노리개를 만들어도 `이작'이나 `오작'이 아니라 `삼작' 노리개로만든다.


이렇듯 우리 생활 곳곳에 3이 깃들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족의 집단적 무의식에 3이란 숫자가 깊게 각인되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3은 저 혼자 쓰이는 것만은 아니다. 3이3번 반복돼 9를 이루면서 강한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서말.서되.서홉으로 쌀을 준비하는 마을굿에서는 3의 의미가 한결 강해진다. 아홉수라고 하여 29살에 결혼을 피한다는관념 속에는 이미 `삼재'라고 하는 액이 3번 반복된 마지막 해라는 계산법이 숨겨져 있다. 삼현육각.삼정승 육판서처럼 3과 3의 배수인 6이 결합되어 강조되기도 한다. 3은 양수(양수)이고 길한 숫자인 탓으로 양수가겹쳐진 삼월 삼짓날(3월3일) 따위를 길일로 친 것도 반복의 원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3이 완성.최고.안정.신성.종합성 따위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만 3을 중시한다고 볼 수는 없다. 서양의삼위일체.삼각형구도도 완성.안정을 뜻한다. 사진기와 측량기의 다리가`삼각'인 것은 좋은 본보기다. 중국에서도 3이 두루 쓰인다. 주자가례(주자가례)가 강화되면서 귀착된 삼일장(삼일장).삼배(삼배).삼색실과(삼색실과).삼탕(삼탕) 따위는 중국 영향이다. 삼황(삼황).삼도(삼도).삼족(삼족).삼계(삼계)도 전래품이다.


반면에 우리에겐 `3번'하던 고시레처럼 극히 원초적인 수 관념들도 있다. 신화시대 또는 신화의 전승체인 무속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3의 원초성이 보인다.


단군신화의 천부인 3개, 무리 3천명, 풍백.우사.운사, 삼칠일간(21일)의 금기, 환인.환웅.단군의 `3대'(삼대)로 이루어지는 `삼신'(삼신)체계는 고대 서사문학의 원형이다. 해모수.동명왕.유리왕으로 이어진 부여족의 `3대'도 마찬가지다. 구월산에 `삼신'을 제사하는 `삼성사'가 있고, 곳곳에 `삼신산'이 퍼져 있는 것도 신화시대의 산물이다.


민족의 탄생을 장식하던 `삼신'은 그대로 민족 구성원의 개개인의 탄생으로 이어져서 아기낳는 안방의 신이 되었다. `삼신 할머니'가 그것이다.


`삼줄'(탯줄)을 끊고 나오면, 밥과 국 `세그릇'을 바치며 `삼칠일'간의금기를 행한다. 아기가 클 때까지 `삼신'이 도와준다고 믿어 `삼신바가지' `삼신주머니' 따위로 모신다.


3의 원초적 뿌리를 더 파고 들어가면 제주도신화의 `삼명두'를 만날 수있다. 삼명두는 제주도 무당의 조상신격이자 3대 무구(무구)인 `요령.신칼.산판'을 일컫는다. `세 쌍둥이' `삼형제'가 양반 `삼천'을 죽인 뒤천.지.인을 관장하는 신격이 되어 제주도 무당의 원조가 된다는 삼명두이야기는 3의 원형질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3이 신화시대에만 머물면서 피동적으로만 작동해 왔을까. 아니다. 사람들은 3을 민중적 세계관을 관철시키는 것으로도 사용했다. `삼재수'가 그것이다. 오늘날은 개인적 액막이 정도로만 축소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나잘못된 것이다. `큰삼재'라 하여 불, 물, 바람의 재액을 일컬었고, `작은삼재'로는 역병, 굶주림, 병난(병난) 따위를 꼽았다. 자연재해와 인위적재해를 삼재로 본 것이다.


`삼재'를 당한 사람은`세마리'의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였다. 조선후기의 역동적인 삼두일족응(삼두일족응) 부적들이 그것이다. 자연재해는물론이고 가렴주구로 시달리던 민중들에게 세개의 머리는 힘의 상징, 그대로였다. 민중의 항거를 담은 황해도 장산곶의 장수매설화도 같은 의미다.


반대로 고구려의 삼족오(삼족오)는 다리가 셋에 머리가 하나인 까마귀다. 무덤의 수호신으로서 고구려인의 힘찬 기상을 상징하는 삼족오와 삼두일족응은 똑같이 3에 기초한 제의적 상징물이다. 고구려시대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에 걸쳐 3은 민족사에서 결코 제 역할을포기하지 않았던 셈이다.


주강현 민속학자.경희대 강사


한겨레신문9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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