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의 수수께끼] <8> 두레와 황두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풍습들에서 짜임새있는 연결고리가밝혀진다면 우리 문화의 속알맹이를 벗겨내는 데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두레와 황두, 향도(향도), 상두꾼의 고리는 하나의 모범사례 보고서 같다. 이들은 한국사상 가장 대표적인 생활조직이자 노동과 제의, 놀이가 함께 어우러진 상부상조하는 생활공동체였다.
첫째 고리인 두레를 풀어보자. 일제하 식민지 농촌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기영의 소설 <고향>에는 바로 이 무렵, 한여름 옛 농촌의 두레패 김매기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장목을 해 꽂은 깃대에는 기폭이 펄펄 날리었다. 그들은 정자나무 밑에다 농기를 내꽂고 우선 한바탕 뛰고 놀아보았다.. 아침해가 뿌주름이솟을 무렵에 이슬은 함함하게 풀 끝에 맺히고 시원한 바람이 산들산들 내건너 저편으로 불어온다. 깃발이 펄펄 날린다. 장잎을 내뽑는 벼포기 위로는 일면으로 퍼렇게 푸른물결이 굼실거린다."
해방전후 시기까지만 해도 존재하다 제초제가 들어오면서 완전히 소멸한 두레는 소설에서 식민지 농민들을 단결시키는 `전통적'인 무기가 되고있다. "두레가 난 뒤로 마을사람들의 기분이 통일되었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으로, 두레박.용두레.두레길쌈 등 우리말 조어를 낳기도 한 두레가 농사일의 어려움을 상부상조로 극복하던 가장 전형적인 공동체 조직이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두번째 고리인 황두의 기원을 살펴보자. 서북지방에서는 해방 당시까지도 두레 대신 황두로 김매기를 했다. 황두는 마을당 20~30명의 농민들이`군대'처럼 엄격한 작업단위가 되어 김매기 작업을 수행한 조직으로 알려진다. 새벽에 신호용 박주라를 불면 빠른 시간에 모여 그날 작업에 들어갔다. 여럿이 무리지어 악기를 치고 노래하며 일했지만 워낙 빠르게 일을해 달리는 사람을 두고 `황두꾼 같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황두가 개괄적으로나마 밝혀진 것은 1957년 이후의 일이다. 북한에서한창 사회주의협동농장을 만들어갈 때, 황철산(당시 사회과학원 민속학연구실장) 같은 이들이 청천강 건갈이(건답)지역 답사에 나선 길에 황두를본격 조사하게 된다. 안주.문덕.숙천.평원을 포괄하는 `열두 삼천리벌'이 대상이었다.
왜 남쪽은 두레로 농사를 지었는데 북쪽에선 황두로 농사를 지었을까.
황두는 마른 땅에 그대로 볍씨를 뿌려 농사짓는 건갈이농법에 적합한조직이었다. 건갈이는 일찍이 조선전기 농서 <농사직설>에 향명으로 `건삶이'로 선보인 농법이다. 그러나 모를 옮겨심는 이앙법의 지속적 확산으로 조선후기에는 남부지역의 경우 대부분 물을 대는 `무삶이'로 농사를짓게 되었다. 다만 서북지방은 물이 잘 빠지는 토양이라 전통적으로 건갈이를 하고 있었다. 이앙법이 확산된 남부지방에서 두레가 발달하는 동안, 전통적인 건갈이 지역에서는 여전히 황두가 쓰였다. 두레보다는 황두의역사가 오래된 셈이다.
세번째 고리인 향도로 넘어가야 할 차례다. 향도를 살펴 보려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라 문헌들에서는 화랑집단의 조직으로 나타난다. 고려에 들어와서 향촌사회는 불교를 모시는 제의공동체인 향도로유지되었다. 고려후기 이후에는 자연촌들이 자기성장을 거쳐 일개 자연촌이 독자적인 리(리)로 성장하게 된다.
이런 변화에 따라 거군적(거군적) 규모의 공동체 모습을 보이던 향도는변질되어 갔고, 향도공동체를 낳은 불교의 쇠퇴에 따라 종교성이 탈색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향도는 급격히 분화했고 후대의 민중조직들을 잉태할 수 있는 모태 노릇을 한다. 향도가 분화하면서 서북지방에 황두라는형식으로 잔재를 남겼고, 남쪽은 당시로서는 선진농법인 이앙법에 걸맞게두레라는 새로운 노동조직을 발생시켰던 셈이다.
이태진 교수(서울대.한국사)는 이를 `조선후기 향도의 분화와 두레의발생'으로 정리한다. 음운학적으로도 `향도<>향두<>황두'로의 발전도식이엿보인다.
이제 네번째 고리인 상두꾼만 풀면 된다. 조선전기 문헌인 성현의 <용재총화>는 일찍이 해답을 던져주었다. "지금은 풍속이 날로 야박해져 있지만, 오직 향도만은 아름다운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대체로 이웃의 천인들이 모두 모여서 회합을 하는데 적으면 7~9인이요, 많으면 1백여인이되며, 매달 돌아가면서 술을 마시고, 초상을 당한 자가있으면 같은 향도사람들끼리 상복을 마련하거나 관을 마련하거나.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
상두꾼의 기원을 짐작케 해주는 기록이다. 지금도 지역에 따라 상여소리를 `향도가'라 부르는 곳이 더러 있다. 과거 향도에서 부르던 만가(만가)전통이 그대로 이어졌다는 증거물이 아닐까. 요컨대 향도는 껨관 잔존시켰고, 장례풍습인 상두꾼에도 고스란히 흔적을 남겼던 셈이다.
두레, 황두, 향도, 상두꾼 네가지는 각각의 성격을 지니되, 한뿌리로설명해 볼 수 있는 `같은 집안'인 셈이다.현재 모두 사라진 풍습이 되고말았지만, 이나마 연결고리를 찾게 된 것도 남쪽과 북쪽의 학계의 성과가`이산가족 상봉'을 한 덕분이다. 어느 일방의 연구만으로는 도저히 풀 수없는 주제들이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한겨레신문 97.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