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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한문화 산책 (30) - 「아름다움」에 대하여. 가방과 보자기

송화강 2019-09-21 (토) 22:18 6년전 5862  

한문화 산책 (30) - 「아름다움」에 대하여. 가방과 보자기

솔롱고

「아름다움」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관한 석학들의 수사도 다양하다. 우선 기발한 은유를 보자.


。미는 잘 익은 과일이다.
。미는 사랑의 자식이다.
。미는 참된 마음이다.
。미는 영원한 기쁨이다.
。미는 감춰진 자연 법칙이다.


교훈적인 것도 보인다.


。지혜는 과거에의 발췌이고 미는 미래에의 약속이다.
。미는 천재의 한 형식이다.
。미는 내부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빛이다.
。아름다움은 세상을 바꾼다.


어두운 면을 부각한 견해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쓸모없는 것이다.
。미는 존재계에는 속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존재를 무화시킨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미의 고전은 플라톤의 견해이다.

그는 미를 초감각적 존재로 여겼고 균형과 질서가 빚어내는 조화로 보았다.

그의 견해는 서구인들의 미의 전형으로서 오랫동안 정설로 내려왔다.


그러나 19세기 낭만파들은 미를 관능의 도취를 이끌어 내는 생명의 연소 또는 물거품같이 덧없는

찰나적인 감각으로 파격적인 반론을 제기한 바 있다.


미를 바라보는 동양인들의 시각은 형이상학적이다.

서양인들이 보는 잣대가 객관적이며 그 원형이 ‘아프로디테’라면 동양인들은 주관주의적 안목으로 ‘성자’

에서 풍기는 지혜로움으로 접근하고 있다.


사람은 기(氣)의 덩어리고 기를 공간에 두고 상호간에 흐르는 기운이 균형과 조화로움을 이룰 때 미를

감지할 수 있다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동양인들은 미를 기운생동(氣運生動)에서 찾고 있다.


순수 미의 극치는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탐미주의를 추구했던 소설가 윌리암 몰간의 작품 '달과 6펜스'는 런던의 한 증권회사 직원이던 주인공이

어느 날 처자식을 다 버리고 섬으로 가 그림에 몰두하게 되고 풍토병으로 고생하며 온 집안에다 대작을

그리지만 그는 집을 불사르며 작품과 함께 소진하고 만다.


이런 쇼킹한 스토리들이 당시 독서계를 풍미했으며 베스트셀러 자리를 오래도록 지켰다.

미를 갈구하는 구도자적인 자세가 감동적이며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보다 감동적인 미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먼저 마음이 아름답다. 사람을 사랑하고 훌륭한 인품을 지녀 주위에 향기로움을 풍긴다.


다음은 생각이 아름답다.

뜻이 올바르고 공명정대하므로 저절로 남을 따르게 한다. 끝으로 행동이 아름답다.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서슬 푸른 지성과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다.

인류를 이끌어온 지도자요, 빛이고 소금이며 씨알이었던 분들이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의인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반사로 거짓말에 말을 바꾸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들고 부정부패의 진흙탕에 이전투구만 일삼는

자들이 많다.

오십보백보를 두고 서로 헐뜯고 비방하는 정치권의 그 얼굴에 그 얼굴들에 모두가 식상해 하고 있다.


선거철이 다가오기만 하면 애드벌룬이 뜨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을 찾는 우리들의 숨바꼭질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기에 더욱 심각하다.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에 생기를 잃고 있는 시민들의 주권의식과 눈을 닦고 찾아도 아름다운 사람이

없으니 답답하다.

봄이 오면 우리 곁에 와 현란한 꽃들을 피울 것이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생식기를 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지금의 지도자들은 귀를 씻고 들어야

할 것이다.




가방과 보자기



후기산업사회에 걸 맞는 또 다른 한국적 기술원형은 ‘인간과 도구의 일체성’에서 찾을 수 있다.

물건을 넣고 다니는 도구로 한국인은 보자기를 만들고 서양인들은 가방을 만들었다.

얼른 생각하면 가방은 세련된 문화인 것 같고 보자기는 원시적인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양자는 인간과 도구와의 관계에서 분리와 일체라는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가방은 넣은 물건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다.

그러나 보자기는 그 싸는 물건의 부피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며 또 쌀 것이 없으면 하나의

평면으로 돌아가 사라져 버린다.

가방과는 달리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과 도구가 일체화 되어 있다.


서양의 식탁이나 침대도 인간과 도구가 가방처럼 따로따로 노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한국의 이불이나 요는 누울 때는 펴고 일어나면 갠다.

사람이 없을 때도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는 서양식의 침대와는 전혀 다르다.


오늘날 파괴공학이란 특수한 기술이 대두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서구의 기술이 지니고 있는 맹점을 알

수가 있다.

보자기식 기술에는 파괴를 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모든 도구의 기능이 그를 필요로 하고 있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유연한 가변의 기동성이 후기 산업사회에서 각광받는 새 기술이 된다.


보자기문화는 인간과 도구가 일체화되는 인간 우선의 사회를 만든다면 가방문화는 인간보다 이념이나

제도 우선의 사회가 되고 이런 사회일수록 인간이 소외될 수밖에 없다.


옷이 몸에 맞추어서 존재하는 사회가 보자기 문화라면 몸이 옷에 맞추어야 하는 사회가 가방문화이다.

오늘날 산업화 사회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병폐와 부작용도 근원적으로는 이러한 제도적 모순과 왜곡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방의 기능과 돈키호테를 연결시켜 보면 흥미 있는 결과를 볼 수 있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기사이기 때문에 기사의 갑옷을 입는다.


갑옷이란 상자 속에 자신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 무거운 갑옷 속에 들어가고 나면 몸을 자유롭게 운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절대 갑옷을 벗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갑옷이란 형식 속에 있어야 기사가 되기 때문이다.

형식이 그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산업사회의 특징이다.

사람이 위주가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옷이 중요하다.


서양의 산업시대는 이런 사고방식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후기 산업사회는 바로 보자기와 같은 다능적인 기능이 살아있는 사회가 된다는 것은 한국적 기술원형

에서 보면 고무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제갈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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