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벤키(Evenki)족 문화와 우리 민속
개인에게 열등의식이 있으면 족보를 숨기거나 미화시킨다, 내가 바로 중학교 시절 가정란을 기록할 때 그랬었다. 가난한 시골 농부였던 아버지 직업을 은행원으로, 무학이었던 그 분을 고보졸업에 한학에 능통한 분으로 둔갑시켰었다. 지금 우리 애들은 전혀 그런 열등의식없이 지낸다.
국가나 민족도 마찬가지다. 자기 나라 인민들의 배를 채워주지못해 배가 고파서 탈출하는 인민들에게 무자비하게 총질하여 죽이면서도 핵을 개발한다고 공갈치는 정권,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경멸당하고 있는 북한정권이 하는 짓만 보아도 우리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못난 정권, 형편없는 민족일수록 자신들의 과거를 숨기기를 좋하하고 미화시키기에 혈안이다. 개인도 국가도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을 줄 알고,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할 것은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사죄할 과거가 있으면 사죄하는 아량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열등의식없는 국가요 민족이다.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시아 권 국가에는 비일비재하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 한 아시아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EU같이 될수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그래서 나는 나부터 우리 문화를 이야기 할 때, 지상에서 우리에게만 독창적으로 있는 문화라는 개념에 고개를 갸웃둥거려왔다. 문화, 특히 민속문화라는 것은 인류가 수천년을 교류해 오면서 상호 영향을 끼친데서 발생한 것이 아닌가. 쌀(벼농사)괸련 문화는 중국, 베트남, 타이, 라오스 미안마 산악지대에 오늘날 분포되어 살고 있는 묘족(苗族)에게서 유래했다고 볼수있고, 우리 가족 숲과 산장이 있는 마을 입구에 있는 솟대와 장승백이는 그실 만주와 러시아 국경지대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 에벤키(Evenki)족으로부터 조선반도에 유래한 것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녀왔다.
그런 인식을 하노라면, 한반도 주변에 있는 소수민족들의 존재가 귀하게 느껴지고, 이런 지역들과 이제 교류를 하면서 우리 뿌리찾기 운동에 나서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제 우리국력과 국격은 우리 뿌리가 에스키모인이라 하더라도 이를 감추지 않고 자랑스럽게 찾고 받아드릴 만큼 자신감을 회복했다고 사료된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아래에 우리 솟대 민속과 장승백이 뿌리를 에벤키 족에게서 찾아보았다. 이 다음 evenki 족 출신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스스럼없이 다정하게 그들을 대할 것이다.

에벤키 족의 새 토템


우리 민속의 솟대


우리 민속의 장승백이

에벤키 족의 토템

우리 민속속에서의 장승백이


탈춤, 가면극, 광대놀이, 무당등 민속도 에벤키 족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역사상 조선과 일본간의 교류사를 연구한 학자들의 값진 저서에 의하면, 적어도 이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후,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사후, 일본에 새로운 도꾸가와 막부(德川幕府)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두 나라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통신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을 시작으로 새로운 쇼군(將軍)이 취임할 때 마다 조선은 일본의 요청에 의해 축하사절을 통신사절로 파견했었다. 정사(正使), 부사(副使)등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대사(大使), 부대사(副大使), 또는 조선국왕 특사, 부특사식의 사절단을 파견했었다. 그런데 그 규모가 어머어마했다. 정사, 부사등 3사(使)를 대표단으로 하여, 그 수행원이 무려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렀고, 이런 대규모 통신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기위해 대형 선박 2척, 중형선박 2척을 건조, 부산을 출발, 대마도를 거처 3개월만에 막부정권이 있던 동경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이들 통신사절단이 한성(서울)을 출발해서 부산까지 오는데만 20일 걸렸고, 해상을 통한 서울-동경 왕복에 보통 6개월이 소요되었다. 이런 이유로 4-500명의 대규모 조선 통신사 사절단에는 각 분야의 학자들과 전문가 단이 동승하였는 데, 흥미를 끄는 데목이 있다. 그 사절단에는 탈춤, 가면극, 광대놀이 팀이 반드시 동반했다는 것이다. 오늘의 해석을 붙이면 연예인 팀이 합류한 일종의 문화사절단 성격을 지니기도 했었다.
조선 사절단이 일본에 체류하는 수십일 기간동안에는 일본정부는 일본의 소위 전통놀이라는 가부끼(歌舞妓)나 교겡(狂言), 노(能)등 전통놀이가 공연되었고, 조선 사절단측에서는 동행한 양주탈춤팀이라거나 가면극 팀등이 조선 전통 예능프로로 공연되었던 것이다.
에벤키 족 민속설화에 멀리 살고있는 상대가 보고싶은데, 말(馬)이 없어서 보고 싶어도 얼른 달려가 만날수 없는 처지에 놓였을 때 부르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가 아리랑 스리랑으로 시작한다고 한다. 이때 <아리랑>은 에벤키어로 <맞이한다>(迎)를 의미하고, <스리랑>은 <마음으로 느낀다>를 표현한다고 한다. 어떤 것이 정설일런지 향후 더 연구가 필요한 분야인것 같으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인류문화는 흐르고 융합하여 내려온 것이므로, 주변 민족들의 설화나 문화에 더 큰 친근감과 호기심을 갖고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수년전 <20세기 세계미술사에서의 원시예술>이란 책이 출간되어, 미술학도들에게 널리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 책을 보면 그 유명했던 피카소도 아프리카 가봉의 Fang족이 쓰던 가면을 보고서 자기 미술의 뎃쌩을 구상했다는 말이 나온다. 1905년대 파리의 한다는 미술지망가들의 아뜰리에(Atelier)에는 아프리카 조각품들이 자신들 작품의 영감의 소스처럼 놓여있었다.
<20세기 세계미술에서의 원시미술>이란 책을 보면, 아프리카는 물론 인디안 사회. 폴리네시아등지에서 발견된 민속공예품들이 피카소, 마티스등 20세기 미술의 대가들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서 그런 원시조각품들이 영향을 받은 대가들의 작품과 함께 비교감상할 수 있도록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 도록속에서 한국의 원시예술품으로 유일하게 소개되었던 것이 새를 매달아논 솟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련과 중국이 당시 공산국가 체제가 아니고 외부인사들이 자유롭게 그들 국내를 취재할 수 있었더라면 솟대의 <영유권>도 하마트면 에벤키에 뺏길뻔 한 것 같다.
국가와 민족간에 문화에 대한 상호이해폭을 넓히는 것이 교류와 평화증진의 첩경이다. 나는 그런 직업에 종사해 왔으므로 남은 여생도 그런 이상 실현을 위해 살것이다.
Lyceum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