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 Re: 단군 신화(檀君神話) 심화자료
이 개국신화는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라 많은 해석이 나왔다. 한 예로서 이 신화는 고조선의 한 부족신화이던 것이, 훗날 고려 시대에 대몽항쟁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를 맞아서 민족의 시조로 받들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단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편찬시기가 앞에서 언급한 시대와 거의 같다는 점도 유의할 만하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평양에 사당을 짓고, 단군과 고구려의 동명왕을 함께 모시기도 하였다. 한편, 민족의 형성과정과 관련된 단군 신화에서 중심이 되는 곰 숭배사상이 한국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등지에 널리 퍼져 있던 고아시아족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조상신이라는 점에서, 단군 신화의 시대와 성격을 한국의 신석기 시대 주민과 관련시키는 견해도 있다. 물론 이 신화를 청동기 시대의 산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지배자의 출현을 빛내는 신화로 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단군 신화 시대를 무문토기문화와 관련시키면서 환웅족의 등장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이와 반대로, 역사과학의 입장에서 신화라는 것은 고대인의 한 관념형태이므로 단군 신화를 곧 역사적 사실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담겨있는 역사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으므로 어떤 맥락으로든 간에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신화가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도 무리이다. 아무튼 단군 신화는 한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적(求心體的) 역할을 해 왔다.
역사학자들은 건국신화를 통해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즉 이 시기에는 사람들은 신석기인으로 구릉 지대에 거주하면서 농경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환웅 부족이 청동기를 갖추고 내려와 이들을 정복하고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다고 본다. 선진적인 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여 갔고 그 와중에서 곰을 숭배하는 부족(곰 토템)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하고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신석기 말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발전하는 시기를 알려 주는 것이다. 또한 풍백, 운사, 우사의 존재는 당시 사회가 농경 사회임을 보여 주고 단군 왕검이라는 명칭은 제정일치 사회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한핏줄, 한겨레, 몇 천 만 동포, 단군의 자손' 이라는 구호에 응축되어 있는 의미의 하나는 우리 민족 구성원 모두가 민족의 이름 앞에서 대등한 자격으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런 의식은 만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시민사회의 논리와 결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위의 구호가 내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측면은 민족의 집단성을, 핏줄로 결합된 숙명적 운명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외세의 억압에 대한 저항과 민족적 통일과 단결을 촉구하는 의식을 담았으며, 나아가 민족의 공동체성을 실제적인 사회적 균등화를 통해 구현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진전될 수도 있는 요소를 지녔다. 그러나 이는 개인을 도외시한 채 지배 권력에 의한 전제적 억압의 논리로 치달을 가능성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위의 구호에 나타난, 동포의식과 결합된 단군 인식은 중세기의 단군 인식에 비해 분명 한 단계 질적 전환을 이룩한 근대적 민족의식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단 근대적인 단군 인식이 대두한 이후 이 인식에 내포되어 있는 집단성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즉 그것이 시민사회의 논리와 결합한 민주적 민족공동체 의식으로 전개될 것인지, 아니면 전체주의 논리와 결속하여 파시즘의 국가지상주의를 지향하는 의식으로 전개될 것인지, 혹은 사회주의와 결합한 제3의 형태로 진전될 것인지는 일단 형식논리상 다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났던가가 문제이다. 이 면에선 일단 남한의 경우, 이승만 정권 하에서 횡행하였던 일민주의와 1980년대 군부 정권 하에서 '웅대한 고조선'을 강조하던 논리 등이 어떤 성격과 의미를 지녔던가를 되새겨 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단군은 오랜 기간 동안 민족적 상징으로 한국인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아 왔고 역사의 진전과 함께 단군에 대한 인식도 질적인 전환을 해 왔다. 앞으로 단군에 대한 인식의 바람직한 방향은 단군을 민주적 민족공동체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점은 남한이나 북한 모두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그럴 때 단군은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지닌 우리 민족의 소중한 유산으로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출처 : 노태돈, '남북한 역사 인식 비교')
우리나라 시조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하고 즉위한 BC 2333년을 원년으로 하는 연호.
줄여서 '단기'라고도 한다.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 魏書〉에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단군왕검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부르니 중국의 고(高:堯) 임금과 같은 때"라 했고, 같이 인용한 〈고기 古記〉에는 "단군왕검이 당고(唐高: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庚寅年)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조선이라 불렀다"고 했는데 이것이 연대환산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단군의 건국사실을 전해주는 우리 문헌으로는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 帝王韻記〉를 비롯하여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통감〉, 권람(權擥)의 〈응제시주 應製詩註〉 등이 있지만 단군기원의 연대환산에 대하여 언급한 가장 오랜된 기록은 고려시대 백문보(白文寶)이다. 가령 〈고려사〉 열전 백문보조에 보면 "하늘의 기수(氣數)는 순환하여 700년이 한 소원(小元)이 되고, 3,600년이 쌓이면 한 대주원(大周元)이 되니, 이것이 황제(皇帝)와 왕패(王覇)의 치난흥쇠(治難興衰)의 기회가 됩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므로 주년(周年)의 기회가 됩니다"라고 공민왕에게 글을 올려 단군기원을 언급한 대목이 있다. 20세기에 들어 대종교(大倧敎)가 창설되면서 단군기원을 썼는데 이 종교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을 체계화했다. 1909년(융희 3) 1월 15일 나철(羅喆)이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교리를 알리면서 시작되었는데 그밖에 대종교에서 갈라선 단군교(檀君敎)에서도 단군기원을 썼다. 그러나 단군기원을 공식적인 국가연호로 처음 쓴 것은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이다. 1948년 9월 25일 대한민국 법률 제4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고 하고 그 부칙에서 "본 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고 법제화하여 단군기원을 국가공용연호로 쓰게 되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이후 1961년 12월 2일 법률 제775호 '연호에 관한 법률'에서 "대한민국의 공용연호는 서력기원으로 한다"고 하고 그 부칙에서 "본 법은 서기 1962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 법률 제4호에 관한 법률은 이를 폐지한다. 본 법 시행 당시의 공문서 중 단기로 표시된 연대는 당해 연대에서 2,333년을 감해 이를 서력연대로 간주한다"고 법제화하면서 단군기원 대신에 서력기원을 쓰게 되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단군 신화'는 우리 민족의 개국신화인 동시에 국조신앙(國祖信仰)을 곁들이고 있어서 민족사의 시발(始發)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이 신화는 우리 민족의 긍지로서 천제(天帝)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라는 성소(聖所)에 강림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바탕으로 개국의 터전을 닦고 그의 아들 단군 왕검이 조선을 세웠다는 웅장한 규모의 건국신화이다. 천신(天神)께서 택하신 땅에서 천신(天神)의 후예를 모시고 세운 나라라는 강한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이 신화는 고조선 건국 서사시의 줄거리 일부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 생각되므로, 원래 있었던 내용이나 존재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추리를 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신화는 '삼국유사'뿐 아니라, '제왕운기(帝王韻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응제시주(應製詩註)' 등에도 실려 있다. 건국신화인 이 신화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신화의 기본 특성과 관련지어 살펴보도록 하자. 신화의 전승자는 신화는 진실되고 신성하다고 인식한다. 신화의 생명력은 바로 이 신성성에 있다. 신화는 일상적인 경험을 넘어선 아득한 옛날의 일이고 특별히 신성한 장소를 무대로 삼는다. 신화의 주인공은 보통 사람보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신성한 인물이다. 끝으로 신화는 민족적인 범위 내에서 전승된다. 이에 비추어 보면 '단군 신화'는 우리 민족 모두가 그 신성성을 믿어 의심하지 않으며, 또 민족 모두가 그 전승자이다. '단군 신화'의 주인공은 신과 그 아들들이며 태백산, 신시라는 신성 공간이 중심 무대이다. 또 신화는 증거물이 포괄적이라고 했는데 우리의 민족 모두가 단군의 자손인 만큼 증거물이 된다. 그리고 태양신인 환웅과 지신인 웅녀의 결합에서 단군이 탄생했다는 것은 태양신과 대지신의 결합이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신화화한 것이다. 이런 신화의 유형을 천부지모형(天父地母型) 신화라 한다. 또 이 '단군 신화'는 '주몽 신화'와 마찬가지로 북방신화 특유의 하강(下降) 모티프(중심 소재, 또는 사상)를 가지고 있는데, 이 경우 하강하는 주체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이제 우리는 '단군 신화'의 내용을 몇 가지의 기준을 세워 분석해 보자. '단군 신화'는 현존하는 우리 나라 신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민족적 심상이 깊이 배어 있으며 아울러 신화 생성 당시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 신화'는 역사·민속·문학의 다방면에서 해석되어 있다.
(1) 역사적 해석 「단군 신화」는 신석기 문화 전통을 지닌 초기 청동기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웅녀로 대표되는 신석기 시대의 즐문토기(빗살무늬토기) 문화와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시대의 무문토기(무늬없는토기) 문화의 결합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주몽 신화」를 형성시킨 사회가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좋은 비교가 된다.
또한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 왕검(檀君王儉)'은 제정일치 시대의 군장을 의미하는 용어로 본다. 즉 '단군'이란 하늘을 의미하는 몽고어 '텡그리'와 통하는 것으로 제사장(祭祀長)의 의미이고, '왕검'이란 임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군 조선, 또는 고조선은 일종의 신정 국가(神政國家)인 셈이다. 단군이 죽어서 산신(山神)이 되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농경 생활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데, 풍백 · 우사 · 운사 등 농경과 관련된 것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혹자에 따라서는 곰을 토템으로 하던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이동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국호 '조선'도 원래는 '아사달(아침의 땅)이었던 듯한데 이것이 한자'阿斯達(아사달)'로 표기되고, 나중엔 '조선'으로 바뀌었다. '朝鮮'으로 바뀐 것은 늦어도 B.C. 7세기경에는 이미 이루어져 있었음을 당시의 문헌인『관자(管子)』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민속학적 해석 「단군 신화」에는 민속학적 해석을 요하는 요소들이 많다. 우선 천부인이라는 것을,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칼 · 거울 ·방울의 세 가지로 볼 때, 이는 단군을 무당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된다. 왜 천부인이 세 개냐 하는 것은 환웅이 데리고 온 세 신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역사적 해석에서도 본 바와 같이, '단군'이란 무당(텡그리)과 유사한 존재로서 'Shaman-King'(Shaman은 무당이라는 의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토템(Totem)으로 보이는 곰과 호랑이의 존재, 쑥과 마늘의 주술적 효력, 삼칠일의 출산 ·금기적 의미 등은 민속학적으로 중요한 요소들이다. 쑥과 마늘의 경우, 『본초강목(本草綱目)』이라는 책의 설명에 의해 각각 인간 형성과 독성 제거라는 주술적 효력을 가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또 삼칠일(三七日)은 산모의 건강이 거의 회복이 되는 시기이며, 백일(百일)과 돌은 유아에게 있어서 기념일로 중요시되어왔다. 이것은 그 당시 산속(産俗;해산의 풍속)이나 유아의 성장에 대한 예민한 관찰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3) 문학적 해석 문학적으로 보면, 「단군 신화」는 하나의 정형적인 신화이다. 이 신화의 논리는 크게 보아 천상과 지상의 결합, 광명(태양신의 아들 환웅)과 암흑(웅녀의 不見日光)의 조화 속에서 인간(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신과 인간의 결합, 동물과 식물의 매개가 있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태백산이나 신단수는 세계 알타이계 신화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세계산, 세계수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 신화 속의 신화적 요소는 우리 민족의 생성과 국가 건립의 신성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신화는 건국 시조와 그 원조의 생애담을 줄거리로 하여 일정한 유형을 지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이(神異)한 탄생→신성한 결혼→등극(登極)→사후의 이적(異蹟)'이 그 유형이다. 신이한 탄생의 모티프가 지상으로의 하강 모티프로 변화할 수 있는데, 그러므로 이 신화 속의 천손(하느님의 후손) 하강 모티프 등의 신화적 요소는 한국 서사문학의 한 원형을 보여 주므로 중요하다.
그리고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삼대기(三代記) 구조를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존재 양식을 비교해 볼 때, 환인은 하늘에 있어 역사적인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고 있으며, 환웅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초월적인 시간에서 역사적인 시간으로 들어오고, 단군은 태어나 역사적인 시간 속에서 일정한 수명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천상의 것보다는 지상의 것이, 초월적인 시간보다는 역사적인 시간이 중요하다는 사유 방식의 소산이다. 환웅은 '수의천하 탐구인세(數意天下貪求人世)'하야 '홍익 인간(弘益人間)'을 하러 이 세상에 내려왔다. 결코 천신을 숭배하기 위해 또는 영화롭게 하기 위해 내려온 것은 아니다. 인간 중심의 사상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이제는 신화적인 측면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동명왕 신화」와 잠깐 비교하기로 하자, 구조적인 면에서 「단군 신화」와 「동명왕 신화」는 신화의 뼈대를 이루는 사유 방식에서 같다. 이를 정리해 보면 둘 다 삼대기(三代記) 구조이며, 시간 구조에 있어 일치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웅녀와 유화도 대응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에도 불구하고, 두 신화는 다음과 같은 차이를 보여 준다. 첫째, 「단군 산화」는 투쟁이나 갈등이 거의 없는 조화로운 세계인 데 반해, 「동명왕신화」의 경우는 투쟁과 갈등의 세계이다. 해모수와 하백의 대결, 주몽과 부여국 왕자의 갈등, 주몽과 송양의 대결 등이 그런 것을 보여 준다. 둘째, 「단군 신화」의 경우 최초의 여자격인 웅녀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변한 것이고,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인간이 태어난다. 그러나「동명왕 신화」의 경우 해모수의 상대는 이미 인간이었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것은 알이었다. 즉 난생설화의 요소가 중요한 것으로 들어있는 것이다. 이 난생설화는 동북 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것인데「동명왕 신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앞서 우리는 「단군 신화」가 여러 문헌에 실려 있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각 문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보다 10여 년 뒤에 나온 이승휴의 『제왕운기 (帝王韻紀)』중의 단군 기록은 『삼국유사』와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① 『삼국유사』에서는 壇君'이라 했는데, 『제왕운기』에서는 '檀군이라 하였다.
② 『삼국유사』에서는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했으나, 『제왕운기』에서는 단웅(檀雄)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인신(人身)을 이루게 한 뒤 단수신(壇樹神)과 결혼시켜 단군을 낳았다고 하였다.
③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제왕운기』에는 신라, 고구려,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맥 등을 그 치하에 두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여야겠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기 (檀紀)는 도대체 어떻게 산출된 것인가? 『삼국유사』에는 단군 개국이 중국의 요(堯) 임금 즉위 50년인 경인년(庚寅年)에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연 자신이 주석을 달아놓은 바와 같이, 요 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년(戊辰年)이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丁巳年)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반면 이승휴의 『제왕운기』, 권람의 『응제시주』,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무진년(戊辰年)으로 되어 있다. 모두 단군이 요 임금과 같은 해에 즉위하였으며, 그해는 '무진년'이라는 것이다. 이 요 임금 즉위 연도인 '무진년'을 연대로 환산해 보면 B.C. 2333년이 된다. 오늘날 단기(檀紀), 즉 '단군 기원(檀君紀元) 몇 년'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 신화에서 등장하는 소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곰이다. 시베리아의 원시 민족의 가장 큰 제의가 바로 곰제[熊祭]였는데, 곰을 신격시한 데서 비롯된다. 이것이 「단군신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 일본의 아이누 족도 곰제를 지낸다.
이 신화에서 곰은 이상적이고 내적인 힘의 상징이다. 어려움을 참고 내적인 투쟁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 우리 민족의 사고를 말해 준다. 이 곰이 신화에서 토템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곰의 생활 주기가 대지(자연)와 같다는 것(겨울잠)이 '웅녀'로 전환되어 생산력을 나타내는 지모신(地母神)의 상징을 갖는다고 할 수도 있다. 재생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다. 이런 곰이 외적인 힘을 상징하고 현실적인 호랑이와 대비되어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 결국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에게 승리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앞서도 잠시 이야기했지만 쑥의 상징성도 매우 크다. 일반적으로 쑥을 단옷날 사람의 형상이나 호랑이의 형상으로 만들어 걸어 나쁜 기운을 쫓는 데 썼고, 이사를 하면 그 집의 나쁜 기운을 없애기 위해 쑥을 태우기도 하였다. 또 동물적인 존재에 영성(靈性)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종교의 역사에서 나무는 항상 성스러운 사물로 나타난다. 하늘을 향하여 높이 치솟은 형상, 무한히 반복되는 죽음과 재생의 생명력은 나무가 어떤 거룩한 실재를 표현하고 있다는 종교적 직관을 탄생시켰다. 그러므로 세계적으로 널리 발견되는 나무에 대한 신앙은 나무 자체를 신격화한 것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실재가 나무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나무가 나타내는 거룩한 실재는 생명의 근원, 우주의 창조성, 우주의 중심, 지혜의 원천이 되는 신적 존재를 지칭한다. 생명의 나무는 우주목, 세계수, 중심축, 지혜의 나무라고도 한다.(출처 : 엘리아데의 '성과 속')
「단군 신화」에서 확립된 천부지모(天父地母)형 신화의 틀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동명왕 신화」나 무속 신화인 「제석 본풀이」등으로 이어진 우리 신화의 기본틀이다. 한편 이 신화 속의 곰의 수난은 「정읍사」, 「가시리」 등 고려가요에 나타난 여성의 애환과 서사무가 등에 나타난 여성의 한과 고뇌, 그리고 수동적 피해 의식과도 그 뿌리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서정주는 이것을 바탕으로 「단군」, 「하느님의 생각」, 「곰색시」, 「환웅의 생각」, 「신시와 선경」이라는 시를 썼고, 이광수는 「여명기」라는 희곡을 쓴 바 있다. 좀 거리가 있지만 황순원의 「별과 같이 살다」라는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곰녀」인데 이는 웅녀의 암시적 상징이다. 따라서 인종(忍從)과 성실을 내재하고 있다. (자료 출처 : 인터넷에서자료실에서 정확한 출처 불명)
우리 민족의 시조이고 고조선의 창업왕인 단군에 관한 신화. 내용은 7개의 이야기토막으로 엮어져 있다. ①환인(桓因)과 그 아들 환웅(桓雄), 그리고 환웅의 아들인 단군에 이르기까지의 삼대에 걸친 가계.
② 환웅이 아버지 환인의 도움과 허락을 얻어서 하늘에서 태백산(太白山 : 지금의 백두산)으로 내려오는 것. ③신단수(神壇樹) 아래 신시(神市)를 베풀고는 스스로 환웅천왕이라 칭하면서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된 일. ④ 곰이 호랑이와 함께 사람되기를 원하였다가 곰만 사람 여자로 화신한 것. ⑤ 그리고 이 여인, 곧 웅녀(熊女)가 사람의 몸으로 현신한 환웅과 혼인한 것.
⑥ 그 부부가 낳은 아기를 이름지어 단군왕검이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한 것. ⑦ 그가 1908세의 수(壽)를 누린 끝에 아사달산에 숨어 산신이 된 것 등이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지하고 있지만,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와는 다소간의 변화가 있다. 실제로 ①에서 ③까지는 별로 다를 바 없으나, ④와 ⑤ 사이에서 크게 달라진다.
즉, ≪삼국유사≫의 웅녀가 사라지고 그 대신 환웅의 손녀가 등장한다. 환웅이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을 갖추게 한 후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한다. 이어 그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니 이름하여 단군이라 했고, 그가 조선의 지경에 의지해서 왕이 되었다고 ≪제왕운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④∼⑤에서는 크게 변화가 일어났다가 ⑥∼⑦에서는 다시 이들 문헌 사이에 크게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변화가 많은 ④∼⑤부분을 두고 이들 문헌의 기록을 대비시켜보면, 적어도 주어진 겉문맥상으로는 매우 심각한 것임을 알게 된다.
단군의 어머니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인물인데도 한쪽은 곰이 화신한 여인이고, 다른 한쪽은 신이 화신한 여인이다. 단적으로 ‘동물(곰)/신’의 대립이 두 기록 사이에 있게 된다. 이 ‘동물/신’의 대립은 다시 ‘지상/하늘’이라는 양분적 대립을 함축할 수 있다. 또한 다 같이 단군의 어머니이면서도 ≪삼국유사≫에서는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부계(남계)의 가통(家統)에 혼인해 들어온 여성임에 비해, ≪제왕운기≫에서는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부계 그 자체의 혈통에 딸린 여인이다.
전자가 가통 바깥이라면 후자는 가통 안이다. 말하자면, 양자 사이에는 ‘바깥 존재/안의 존재’라는 대립이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어머니가 지닌 ‘안/밖’의 대립을 존중한다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단군의 출자(出自)에 대해서도 당연히 서로 다른 대립성을 보이게 된다.
곧 ≪삼국유사≫에서 단군은 환인/환웅의 뒤를 이은 부계의 3대인 데 비해, ≪제왕운기≫에서 단군은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가계로서는 4대째에 속하는 여인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왕운기≫는 단군을 환인/환웅으로 이어지는 가통의 5대째 외손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들 문헌 사이에서 ‘3대 부계/5대 모계’라는 대립을 지적할 수 있게 된다.
≪삼국유사≫에서는 부계(남계)를 따른 3대에 걸친 일종의 신통기(神統紀), 곧 신족보(神族譜)가 기술되고 있음에 비해, ≪제왕운기≫에서는 모계(여계)를 따른 5대에 걸친 신족보가 기술되어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이들 문헌 사이에는 이야기토막 ④와 ⑤를 두고 ‘동물(곰)/신’, ‘안/밖’, ‘부계 3대/모계 5대’라는 대립적인 양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제왕운기≫는 ≪삼국유사≫보다 불과 십여 년 늦게 간행된 책이다. 그 짧은 시기 사이에 이만큼 큰 변화를 지닌 신화가 전승되어 있었다는 것은 고려 때 와서 이미 단군신화의 서사구조상의 안정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 ‘곰(동물)/신’, ‘안/밖‘, ’부계/모계‘라는 대립은 보통 차이가 아니며, 의미작용이 거꾸로 뒤집힐 만큼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 겹의 대립 가운데서 ’곰/신’ 사이의 대립은 비교적 쉽게 조정될 수 있다. ≪삼국유사≫의 “곰이 약을 먹고 사람 몸을 얻어 여자가 되다.”와 ≪제왕운기≫의 “신의 손녀가 약을 먹고 사람몸을 얻어 여자가 되다.”라고 하는 이 두 표현 사이에는 기층적인 공질성이 있는 듯이 보인다. 공질성은 곰도 신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착안함으로써 얻어내게 된다.
이로써 양 기록의 문제된 부분에 담겨 있는 공통의 기층을 요약하면, “사람 아니던 존재가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을 얻어 여자가 된다.”와 같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공질의 기층을 가진 게 사실이라면 ‘곰/신’ 사이의 대립을 조정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 아닌 다른 존재가 약을 먹고 변신해서 혼인함으로써 단군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두 기록 사이에 차이가 없다.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및 극동의 북부지방에 깔려 있던 이른바 곰신앙을 고려한다면 ‘곰/신’의 대립의 조정은 더욱더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두 기록 사이의 대립의 조정은 여기서 그치고 만다. ‘안/밖’, 그리고 ‘부계/모계’의 조정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왕조의 전설에 부계와 모계가 엇갈리고 있다는 사실이 참고가 될만하나, 어떤 직접적인 해답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편 단군신화가 전승된 기록으로 평가되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에 관한 기록 중에서, 문제된 ④와 ⑤의 이야기토막은 ≪제왕운기≫를 답습하고 있다.
이러한 변이에도 불구하고 단군신화는, 첫째, ‘하늘에서 하강한 천신이 비로소 나라를 열고 왕의 자리에 나아간다.’라는 서사진행에 있어서, 둘째, 신맞이굿의 절차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셋째, 신화·전설의 복합체라는 점에서 나머지의 이른바 ‘건국신화’ 또는 ‘왕권신화’라고 일컬어지는 신화들과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공통성을 기반으로 해서 시베리아의 무속적 서사시 및 일본의 일부 왕권신화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단군신화를 가장 오래된 신화로 잡게 된다면 단군신화가 지닌 세 유형상의 특질을 우리 나라 건국신화들의 원형으로 자리잡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단군신화의 기본적인 이야기의 축은 ‘하늘에서의 내림’과 ‘왕국의 건설’에 있음을 지적해도 좋을 것이다. 이 두개의 기본축에 ‘씨족의 건설’을 대입한다면 신라 6촌장의 씨족신화, 기타 여러 후대의 씨족신화의 기본적인 유형이 잡히게 된다.
≪삼국유사≫ 혁거세왕조의 기록으로 보아 씨족신화의 바탕 위에 왕권신화가 형성되었다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왕권신화와 씨족신화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나라/집(가문)’의 대립이 말해주는 차이밖에 없다.
‘하늘에서의 내림’과 ‘왕국의 건설’을 기본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단군신화도 그 밖의 건국신화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단군신화는 하늘에서 내린 제1세대가 직접 왕국을 건설하지 않고, 제2세대가 건설하게 된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두 세대 위에 하늘의 세대가 군림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신인 첫 세대는 보내는 사람(파송자) 구실을 하면서 하강하는 자를 도와준다.
첫 세대와 둘째 세대 사이에는 ‘천상의 신/지상의 신’, ‘파송자/파송되어 하강한 존재’라는 대립성이 있게 된다. 이 가운데 둘째 대립은 ‘과업을 위임한 자/과업을 맡은 자’라고 함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강한 신인 제2세대와 제3세대 사이에는 ‘천왕/왕검’, ‘산 위 신단수 아래의 신시/평양 도읍의 왕국’이라는 대립이 존재하고 있다. ‘천왕/왕검’ 사이에는 ‘하늘/땅’, ‘신성/세속’ 등의 대립이 끼어 있음직한 것이다. 그것은 ‘산 위의 신단수/평양이라는 도읍’ 이외에 ‘신시/왕국’이라는 대립에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환웅은 종교성 짙은 무속적인 통치자였고, 단군은 세속과 관련된 무속적 왕이었다고 구별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전자쪽에 무당 내지 샤먼으로서의 성격이 보다 더 강하게 투영되어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삼국유사≫의 “바람의 신〔風神〕, 비의 신〔雨神〕, 구름신〔雲神〕등을 거느리고는 곡식과 목숨과 질병과 형벌제도와 선악의 구별 등을 다스리면서 인간세상의 삼백예순 일들을 갈무리하였다.”고 하는 기록대로라면 환웅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이른바 ‘문화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며 제도를 비로소 창조해 ‘자연/문화’의 대립을 인간들에게 주면서 그 대립을 조절한 최초의 존재가 환웅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가 다스리는 곳의 중심은 신시라고 불렀다. 종교적 성역이었던 셈이다. 환웅은 천신으로서 다스리되, 산 속 신단수 주변의 성역을 중심으로 한 특정 공동체의 신령이자 제사장이자 통치자였던 셈이다. 그로부터 직접신인 복합관념을 찾아내기는 힘든 일이 아니다.
이러한 환웅에 의해 고조선의 기틀은 이미 잡혀진 것이다. 하늘에서 하강한 제1세대가 직접 지상의 통치자가 된다는 점에서 환웅은 오히려 혁거세나 수로왕에 견주어져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를 이야기할 때 이와 같은 기초를 놓은 자로서의 환웅의 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환웅과 단군 사이에는 ‘부/자’, ‘예비자/완성자’, ‘천신/지상원리에 감염된 신격’이라는 세 겹의 대립이 있음을 알게 된다.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3세대는 ‘과업을 위탁한 자-과업을 예비적으로 수행한 자-과업을 마무리지은 자’라는 연속성을 보인다.
나머지 건국신화에서는 단군신화와 같은 하늘의 세대가 보이지 않고, 단군신화에서의 제2·3세대의 기능이 하늘에서 직접 천강한 제1세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나타나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단군신화는 그 서사구조나 등장인물의 성격에 있어 나머지 건국신화들의 규범형식을 다 갖추고 있거니와, 그것은 고조선이 최초의 왕국으로 인식되어 있는 사실과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단군신화는 우리 나라 서사문학 일반의 3대기의 원형이 되고, 아울러 후대의 각종 마을굿의 원형으로서 마을굿을 통해 되풀이 반복, 실연되면서 이 땅 민속신앙의 지배적 이념구실을 다해온 것이다.
≪참고문헌≫ 檀君神話의 新硏究(金載元, 探求堂, 1976), 단군-그 이해와 자료-(윤이흠 외,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단군과 고조선(이형구 엮음, 살림터, 1999), 檀君神話와 토테미즘(金廷鶴, 歷史學報 7, 1954), 檀君神話의 한 硏究(黃浿江, 白山學報 3, 1967), 巫俗上으로 본 檀君神話(金泰坤, 史學硏究 20, 196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 민족의 시조(始祖)이며 고조선(古朝鮮:단군조선)의 첫 임금으로 단군왕검(檀君王儉) 또는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천제(天帝) 환인(桓因)의 손자이고, 환웅(桓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웅녀(熊女)이다. 우리나라 국조신화(國祖神話)인 〈단군신화〉의 주인공이다.
〈단군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중국의 〈위서 魏書〉와 우리나라의 〈고기 古記〉를 인용한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을 들 수 있다. 그밖에 고려 후기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 조선 초기 권람(權擥)의 〈응제시주 應製詩註〉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내용이 풍부하여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고기〉의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랜 옛날에 환인의 서자(庶子: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을 가리킴)인 환웅이 항상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보내 인간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여기를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속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한번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여 3·7일(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고 호랑이는 이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하여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이다. 왕검이 당고(唐高:중국 3황 5제 중의 堯를 말함. 당시 고려의 제3대 왕인 정조의 이름이 요인 까닭에 이를 피하여 뜻이 같은 高자를 대신 쓴 것임) 즉위 50년 뒤인 경인년(庚寅年:당고의 즉위년은 무진년으로 50년뒤면 정사년이므로 경인년이란 표현은 아마 틀린 듯함)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弓忽山:弓자 대신 方자를 쓰기도 함)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했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의 호왕(虎王:주의 무왕을 말함. 고려 2대 혜종의 이름이 武이기 때문에 이를 피한 것임)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고, 자신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그밖의 다른 기록들도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단군신화〉는 우리 역사상 등장한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 관한 것인 만큼 오늘날에는 민족 전체의 국조신화로 여겨지고 있으며 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신화란 원래 당시의 현실 속에서 고대인이 경험한 것을 객관화시켜 형성된 관념이 간접적으로 표현된 사회적 의식형태의 하나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전하는 신화는 과거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완전한 형태로 정착된 것은 아니다. 역사발전과정을 거치는 동안 신화도 오랜 세월 변천을 거듭하여 내용의 일부가 소멸하기도 하고 첨가되기도 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때문에 학자들 사이에는 신화의 내용을 허구로 인식하여 〈단군신화〉와 관련된 고조선의 존재조차도 부정하는 견해로부터 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다양하다.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를 관점의 차이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볼 수 있다.
〈단군신화〉의 생성과정과 주인공에 관한 학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는 견해이다. 중앙아시아로부터 한반도와 일본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 사상 중심의 신앙과 사회조직을 가지는 종족들이 백산(白山)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종족적 관계는 여하튼 간에 이 문화가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실체가 바로 단군과 부루(夫婁)라고 본다. 둘째, 이 신화가 삼신(三神)사상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는 태양신화와 토테미즘 두 계통의 신화가 섞여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신화를 달리하는 두 종족이 정치·사회적으로 통합되면서 두 종족의 시조신화가 융합된 것으로 이해했다. 셋째, 천신족(天神族)인 환웅이 지신족(地神族)인 고마족의 여성과 혼인하여 단군이 출생했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이라는 호칭은 무군(巫君), 즉 제주(祭主)의 의미가 많고, 왕검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군장(君長)의 의의가 강하다고 보아 종교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이 명칭상에서 구분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넷째, 신화 또는 토테미즘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 우리 민족 태고의 의식을 보여주는 사실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단군신화〉의 농경관계 기사를 곡물재배민족의 제의(祭儀)로 파악하고 환웅과 웅녀를 쌍분체제(雙分體制 dual organization)로 간주하여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을 일광금기(日光禁忌)와 탈피(脫皮)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했다. 다섯째, 단군신화에 나타난 곰숭배사상에 주목하여 이 신화내용을 동북아시아 지역에 분포되어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Paleo Asiatic)과 연결시키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논거로 고아시아족의 시조설화에 곰숭배사상이 포함되어 있고 자신들은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었던 점, 최고의 샤먼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이 어원상으로 관련이 있다는 점, 텡그리의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界木:고대신화에서 하늘과의 통로로 여겨진 신성한 나무) 관념이 신단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민족의 개국신화로 정착되는 과정에 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원래 고조선의 한 종족신화였던 〈단군신화〉가 대몽항쟁(對蒙抗爭)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에 전체 민족의 신화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서는 단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편찬시기가 대몽항쟁기였던 점,〈제왕운기〉에서 구월산(九月山)을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아사달산으로 보고 거기에 사당이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이 무렵부터 단군신화가 민족 전체의 신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리고 조선 세종 때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을 모신 뒤로는 명실상부한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신화〉가 처음부터 우리민족의 건국사화(建國史話)로 인식되었다고 보고 있다. 즉 고조선은 이미 BC 12세기 이전에 북경 근처의 롼허 강[河]서쪽 경계로 하여 동북부는 헤이룽 강[黑龍江] 밖까지 이르는 만주일대와 한반도 전지역을 영토로 하는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실재하고 있던 국가이므로 〈단군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며 따라서 단군은 그뒤 줄곧 개국시조로 인식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신화에 담겨진 역사적 현실과 그 시기 및 사실성 여부에 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다.
첫째, 〈단군신화〉가 시대적 변화를 계기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1단계에서는 씨족사회에서의 단순한 씨족토템이 생겼고, 2단계에서는 군사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수장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했으며, 3단계에서는 계급국가 형성 뒤 고조선 국왕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한 것으로 보았다. 둘째,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고대국가의 성립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서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우사·운사·선·악·곡·형 등 360가지 인간사 등의 단어들이 갖는 의미를 분석하여 〈단군신화〉에 나타난 사회가 부권(父權) 중심의 농경사회 내에서 계급분화가 이루어지고 지배자가 등장한 청동기시대 초기라고 보았다. 또한 곰과 호랑이, 환웅과 웅녀의 결혼 등의 내용을 통하여 토템을 믿는 몇 개의 종족이 결합하여 부족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셋째, 〈단군신화〉가 포용하고 있는 역사의 시대를 고고학적인 연대와 관련하여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 지역과 관련되며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담당자가 고아시아족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단군신화〉의 시대적 성격이 신석기문화와 연결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넷째, 〈단군신화〉를 4단계의 역사적 발전단계가 압축된 것으로 보아 무리사회 단계인 환인시대, 부락사회 단계인 환웅시대, 부락연맹체사회 단계인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 국가사회 단계인 단군시대로 보아 한민족의 역사적 체험, 즉 인류사회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각 시대를 고고학 자료와 연결시켜 환인시대는 1만 년 이전의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 환웅시대는 1만 년 전 전후부터 6,000여 년 전까지의 전기신석기시대,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는 6,300~4,300여 년 전(BC 2300경)의 후기신석기시대, 고조선시대는 BC 2300년경부터 BC 2세기말까지로 보아 신화의 내용 대부분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함께 랴오닝[遼寧] 지역의 풍하문화(豊下文化:夏家店下層文化)가 청동기문화로서 단군의 개국연대와 연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 〈단군신화〉를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언급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즉 문헌에 보이는 자료를 토대로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석실 내의 화상석(畵像石)의 그림과 〈단군신화〉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이의 전파가 종족 이동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했다. 최근에는 이 견해의 바탕이 되는 무씨사당의 화상석이 단군신화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밖에 단군과 관련된 문헌 중 도가(道家) 계통의 역사서인 〈규원사화 揆園史話〉· 〈환단고기 桓檀古記〉 등을 제시하여 단군조선의 역사가 47대의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실사(實史)였음을 강조한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이 역사서가 한말과 일제하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라는 비판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해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한 점이 많다. 어쨌든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 역할을 해왔고 계속 이러한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민족의식의 고양과 관련하여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로 발전한 것이 대종교(大倧敎)이다. 대종교는 1909년(융희 3) 나철(羅喆)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대종교에서 단군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이던 개천절(開天節)을 8·15해방 후 정부가 정식으로 국경일로 지정했다. 1945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동시에 법령으로 공포되어 사용되던 단기(檀紀)는 고려말 우왕(禑王)의 사부였던 백문보(白文寶)가 사용한 예에서 처음 보인다. 요즘의 단기는 조선시대의 사서 〈동국통감 東國通鑑〉에서 고조선의 건국을 요 즉위 25년 무진년으로 본 것에 근거하여, 단군 원년을 BC 2333년으로 정한 것이다. 5·16군사정변으로 군사정부가 집권한 뒤인 1962년 1월 1일부터 단기 사용을 중지시키고 공식적으로는 서기(西紀)만을 쓰고 있다.(출처 : 李弼永 글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우리 나라의 신화는 건국 시조와 그 원조(元朝)의 생애담을 줄거리로 하는 일정한 유형을 보여 준다. '신이(神異)의 탄생→신성(神聖)의 결혼→등극(登極)→사후(死後)의 이적(異蹟)'이 그 유형이다. 이것은 탄생과 결혼과 취임 등의 일련의 통과제의(通過祭儀)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신화의 구성과 대응되는 유형이다. 그런데 이 유형은 전승 과정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신이의 탄생 모티프가 지상세계(地上世界)에의 하강(下降) 모티프로 대체(代替)되는 경우가 있다. 이 하강 모티프의 경우에는 하강하는 주체가 갓난아이가 아닌 성인이라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주체는 건국 시조이기보다는 원조(元朝)라고 보는 것이 옳다. '주몽신화'의 해모수는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제왕운기>의 '전조선기(前朝鮮紀)'에서는 상제인 환인이 그 아들 웅에게 인간세계로 내려갈 것을 권유한다눈 점에서 차이가 있다. 스스로 내려가는 것과 권유에 의해 내려간다는 것의 차이는 신적인 질서의 강조 여부를 말해 준다
서울 소재 - 단군전
북한 소재 단군릉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자연 대상물과 인간이 신비적 관계 또는 친족관계가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 복합적인 관념이나 의식.
토템이란 용어는 형제-자매 혈연관계를 의미하는 오지브와족(알공킨족 인디언)의 단어 오토테만에서 유래한 것이다. 토테미즘은 한 사회나 개인이 동물이나 자연물(토템)과 맺는 숭배관계 또는 친족관계를 포함하는 다양한 관계를 의미한다. 토테미즘은 많은 원시 부족들의 공동체나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인류학자들이 처음에 토테미즘이라는 말을 쓸 때는 한 인간 집단과 토템과의 관계를 뜻했다. 수호정령과 초자연적 힘의 근원은 한 동물이 단지 한 사람과만 관계를 가질 때는 토템이 되지 않았다. 어떤 임의적인 관계(예를 들어 인간이 늑대인간으로 변모하는 것, 동물정령에 의해 샤먼이 사로잡히는 것, 초자연적 동물의 지배자가 되는 것) 역시 토테미즘으로 지칭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개인적인 관계도 토테미즘에 포함되게 되었다. 한 사회가 동질적인 일정한 수의 씨족들로 나누어져 있고 각 씨족들이 어떤 생물이나 무생물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그 사회에 토테미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씨족의 구성원이 보통 그 씨족을 벗어나지 않고 서로 다른 토템 신앙을 갖고 있는 씨족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토테미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겁에 질려 있거나 다투거나 사냥꾼에게 잡혀 위험에 빠진 동물도 토템이 될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이나 어떤 중요한 식품도 토템이 될 수도 있다. 토템은 보통 기원설화나 사회 도덕과 관련되어 있어 거의 금기시되어 엄격한 제의를 통해서만 접촉할 수 있다. 한 집단 구성원의 토템 신앙은 유전되고 평생 지속되는데, 그것은 토템 신앙이 그의 자녀와 혈족과의 관계를 규제하고 심지어는 출산을 위한 배우자의 선정까지도 좌우하기 때문이다. 토템·타부·족외혼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토테미즘의 모든 기준을 이상적으로 충족시키는 사회는 없지만 많은 집단에서 토테미즘의 여러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토테미즘을 논의하는 데 중요하게 기여한 사람들 중에는 J. F. 맥레넌이 있는데, 그는 논문 〈동물과 식물의 숭배 The Worship of Animals and Plants〉(1869)에서 최초로 중요한 이론적 작업을 해냈다.
토테미즘의 현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다룬 것은 제임스 프레이저 경의 〈토테미즘 Totemism〉(1885)이었다. 토테미즘은 20세기 처음 10년 동안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이 융성하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예리한 비평은 토테미즘의 실재성을 거부한 것으로,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쓴 〈오늘날의 토테미즘 Le Totemisme aujourd'hui〉(1963)이다.
한국의 토테미즘 토테미즘은 동식물 숭배의식, 희생, 정화, 금기, 신화 등의 요소로 구성된다. 한국사회의 토테미즘은 〈단군신화〉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단군신화〉의 토템과 관련된 의례의 핵심은 재생을 나타내주는 신화적 표상과 입사식 때 이루어지는 일정 기간 동안의 성스러움을 지향하는 격리현상이다. 환웅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호랑이와 곰에게 쑥과 마늘을 주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한다. 호랑이는 이를 견디지 못하나 곰은 3·7일이라는 일정한 기간 동안에 원화위인(願化爲人)을 위한 혈거생활과 음식 금기를 지켜냈고, 인간화된 곰은 웅녀가 되고 이 웅녀와 환웅이 혼인한다. 이는 곰을 숭배하는 토템 사상이 존재했음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이러한 혼인이 개별의례 또는 집단의례로 이루어졌는지는 문헌상으로 알 수 없지만, 곰 토템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씨족 또는 어느 부족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추론해볼 수는 있다.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한 것은 정화의례에 따르는 시련과 신비화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입사식에서 남성적인 호랑이보다 상대적으로 여성적인 곰의 재생과정이 더 강조되는 것은 당시 여성 입사식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상징적으로 시사한다.
한편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토템과 관련된 신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양식이다. 밝음과 어두움의 상징은 이분법적 사고 구조를 나타낸다.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 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는 구절은 환웅천왕이 모든 신을 주재하는 중심이고 신계(神界)에 위계성이 있음을 나타내준다.(브리태니커백과사전)
1281년(충렬왕 7)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 5권. 목판본. 저자 일연에 의한 초간본의 간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제자 무극(無極)이 1310년대에 ≪삼국유사≫를 간행하였는데, 이때 그가 첨가한 기록이 두 곳에 있다. ‘무극기(無極記)’라고 표한 것이 그것이다. 무극의 간행이 초간인지 중간인지 분명하지 않다. 조선 초기에도 ≪삼국유사≫의 간행이 행하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이 시기 고판본의 인본(印本)인 석남본(石南本)과 송은본(松隱本)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보물 제419호로 지정된 송은본은 현재 곽영대(郭永大)가 소장하고 있다. 이 본은 3·4·5권만 있는데, 권3의 첫 6장까지와 권5의 끝부분 4장이 없는 잔본이다.
1512년(중종 7)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중간한 ≪삼국유사≫는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또는 정덕본(正德本)이라고 한다. 이 본의 권말에는 중간 경위를 밝힌 이계복의 발문이 붙어 있다. 이 발문에 의하면, 당시 경주부에는 옛 책판(冊板)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1행 중 겨우 4, 5자를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마멸이 심하였다. 이계복은 완전한 인본을 구해서 책판을 개간하였다. 발문에는 당시에 전 책판을 개간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전체 책판 290매 중 약 40매는 구각판(舊刻板)을 그대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다시 새겼다. 다시 새긴 판에 각자(刻字)의 양식이 다른 것들이 많음은 각 고을에 나누어 새긴 탓이기도 하고, 개각판은 복각(覆刻)과 필서보각(筆書補刻)의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정을 담당하였던 최기동(崔起潼)·이산보(李山甫)의 교정능력이 의심스럽다. 이계복이 중간한 책판은 19세기 중반까지 경주부에 보존되었지만, 전하지 않는다. 중종임신본을 인행(印行)한 몇 종의 간행본이 현재 국내외에 전한다. 5권이 갖추어진 완본인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은 이계복이 판각한 뒤 32년 이내에 인출된 것으로, 훗날 순암 안정복(安鼎福)이 소장하면서 가필을 한 때문에 이와 같이 불린다. 이 본은 이마니시(今西龍)가 1916년부터 소장하였는데(일인들은 흔히 今西本이라 칭한다),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의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본은 완본이지만 약간의 가필이 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본은 초기의 임신고인본으로 평가되고 가필과 가획이 없어 원형에 가까운 귀중본이다. 이 밖에도 중종임신본은 몇 가지 더 전한다.
이처럼 5권 9편 144항목으로 구성된 ≪삼국유사≫의 체재는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중국의 세 가지 고승전(高僧傳)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것과도 다른 체재이다. ≪삼국유사≫가 고려 후기의 전적에 인용된 예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 이후에 이루어진 여러 문헌에서는 이 책의 인용이 확인된다. 조선 초기 이후 이 책이 두루 유포되어 참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동국여지승람≫으로부터 ≪동사강목≫에 이르기까지 허황하여 믿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되었다.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조선 초기 이후의 많은 역사책에 인용되었고 영향을 주었다. 최근 이 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면서 그 간행과 유통 또한 활발해졌다. 활자본으로는 동대본(東大本, 東京帝國大學 문학부, 1904)·속장경본(續藏經本, 동대본을 정정하여 속장경 지나찬술부 사전부에 수록)·계명본(啓明本, 崔南善 교정, 啓明 제18호, 1927)·신증본(新增本, 최남선, 三中堂, 1943·1946)·증보본(增補本, 민중서관, 1954)·대정신수대장경본(大正新修大藏經本, 1927)·조선사학회본(1928)·한국불교전서본(韓國佛敎全書本, 동국대학교 출판부, 한국불교전서 제6책에 수록, 1984) 등이 있다. 일어번역본으로는, 원문화역대조삼국유사·초역삼국유사·국역일체경본·임영수(林英樹) 역본·완역삼국유사(金思燁 역, 朝日新聞社, 1979) 등이 있다. 1972년 연세대학교에서 영역본삼국유사를 간행하였다. ≪삼국유사≫의 주석서로는 미지나(三品彰英)의 ≪삼국유사고증≫ 상·중 2책이 있다. 색인으로는 이홍직(李弘稙)이 ≪역사학보≫ 5집에 발표한 것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삼국유사색인≫이 있다. 이홍직이 작성한 것은 최남선의 ≪증보삼국유사≫의 부록으로 소개되기도 하였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작성한 색인은 주제별 및 가나다 색인이다.
≪삼국유사≫는 신화와 설화의 보고이다. 또한, 차자표기(借字表記)로 된 자료인 향가, 서기체(誓記體)의 기록, 이두(吏讀)로 된 비문류, 전적에 전하는 지명 및 인명의 표기 등은 한국고대어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이 전해준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중 최대로 꼽히는 것의 하나는 향가이다. 14수의 향가는 우리 나라 고대문학연구의 값진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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