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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고대사 연구가 단국대 윤내현 교수 (신동아)

송화강 2019-06-07 (금) 13:51 6년전 13393  



[인물 탐구]


고대사 연구가 단국대 윤내현 교수 - 질타·모함·의혹과 싸운 고조선 연구 30년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른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1980년대 초 윤내현 교수의 주장은 사학계의 통설을 뒤엎으며 끝내 국사교과서를 수정하게 만들었다. 정년을 앞둔 노학자로부터 한국 고대사 연구 30년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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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내현 교수는 1939년 전남 해남 출생으로 단국대 사학과,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했다.


평소 윤내현 교수(64·단국대 대학원장·동양사)는 말을 아끼고 몸을 낮추는 스타일이다. 30년 가까이 한국 고대사에 매달리면서 ‘비정통 역사학자’ ‘국수주의자’ ‘과도한 민족주의자’ 심지어 ‘북한 추종자’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기에 자연스레 몸에 밴 조심성이리라 짐작된다. 그런 윤교수가 요즘 부쩍 말수가 늘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정년퇴임까지 2년도 채 남지 않은 마당에 이것저것 가릴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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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가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한민족의 기원과 중심세력’에 대한 글을 발표하는 윤내현 교수(오른쪽).


지난 9월1일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가 추죄한 학술회의에 참가해 ‘한민족의 기원과 중심세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윤교수는 “우리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자신감 부족 아닌가”라며 “초창기에는 우리 학문의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학계의 통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윤교수가 주장해온 ‘한민족 자생설’은 한민족이 외부에서 이동해온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만주지역 토착인들이 연합해 우리 민족과 문화를 형성했다는 내용이다. 우리 민족과 문화의 기원을 끊임없이 몽골이나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등지에서 찾아온 ‘한민족 외래설’ 혹은 ‘민족이동설’을 정면에서 부정한 것이다. 


최근 윤교수는 ‘우리 고대사-상상에서 현실로’(지식산업사)라는 책도 내놓았다. 1978년 첫 저서 ‘상왕조사(商王朝史)의 연구’를 발표한 이래 ‘상주사(商周史)’ ‘한국 고대사 신론’ ‘고조선 연구’ 등 중국사와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교과서나 다름없는 책과 논문을 썼지만 전문 학술서가 아닌 대중서를 낸 것은 처음이다. 그 책이 발매 몇 주 만에 2쇄에 들어갔다. 


‘우리 고대사’에는 고대사 분야에서 새로운 학설을 발표할 때마다 쏟아진 질타와 모함과 의혹의 눈길을 묵묵히 감내하며 학문적 홀로 서기에 매진해온 한 노학자의 삶이 담겨 있다. 책에서 윤교수는 “학자들이 할 일은 그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밝혀내거나 잘못 전해온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주장을 한 학자는 그것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학자가 나타날 때까지 홀로 서기를 해야 한다. 윤교수의 홀로 서기는 길었지만 이제 그는 외롭지 않다. 그의 견해에 동조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장실에서 윤내현 교수와 마주했다. 요즘 그가 무엇보다 비중을 두는 일이 북한 역사학계와의 교류다. 지난 10월 개천절을 맞아 평양에서 제2차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윤교수가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남한의 ‘단군학회’와 북한의 ‘조선력사학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행사였다. 1년 전 제1회 행사 때는 “평양에서 남북한이 공동 개최한 최초의 학술대회”라며 언론의 반응이 야단스러웠던 것에 비해 2회는 소문 없이 지나갔다. 윤교수는 첫 행사가 물꼬를 튼 수준이라면 이제야 남북한이 서로 말문을 텄는데 막상 관심 갖는 이가 별로 없다며 아쉬운 기색이다. 


남북한 공동발굴 기대 


“각자 준비해간 논문을 발표하고 끝난 1회 때와 달리 꽤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토론과 질의응답이 이어졌습니다. 남측 학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1993년 발굴한 단군릉이죠. 알다시피 단군릉의 발굴로 북한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령에서 평양으로 수정됐고, 고조선 건국 시기도 기원전 3000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또 최근 북한에서 발굴된 청동기 유적들의 연대가 기원전 3000~2800년이라고 발표됐는데 우리 쪽에서는 북한이 의도적으로 연대를 올린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해요. 실제 이번 학술대회에서 남측 학자들이 ‘당신들이 제시한 연대에 의문을 갖고 있다, 방사선탄소를 이용한 연대측정 등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시 조사할 생각은 없느냐, 객관성을 위해 외국기관에 의뢰하는 것은 어떠냐’ 등등의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북측은 ‘우리는 방사성탄소 측정시설이 없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시료 채취과정에서 뼈에 손상을 주기 때문에 곤란하지 않느냐, 대신 전자상자성공명법으로 2개 기관에서 각각 24번, 30번씩 측정한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은 확보됐다고 본다’고 답했죠. 이번 학술대회의 수확은 공동연구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북측에 의문이 있으면 함께 풀어보자, 어렵더라도 발굴현장을 직접 답사할 기회와 발굴보고서를 제공해달라고 했습니다.”


윤교수는 또 북한측 학자들이 예상외로 남한의 연구 동향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놀랐다고 전한다. 

 

“김일성대학의 한 젊은 학예연구사가 발표한 내용 중에 ‘천문학을 이용해 ‘환단고기’ 기록의 일부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나와 있지만’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9월1일부터 고등과학원 물리학부로 옮김)가 쓴 책의 내용이거든요. 아, 저 사람이 역사 전공자가 아닌 천문학자의 연구까지 벌써 읽었구나 하고 감탄했죠. 북한 학자들은 남한 학자들의 연구방향과 업적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어 만나면 금방 알아봅니다. 처음 만난 북한 학자가 내 책을 읽었다기에 어떻게 보았느냐고 했더니 강인숙, 손영종 교수 등 선생님의 책을 빌려보았다는 거예요. 예전에 그분들을 만났을 때 직접 책을 드린 적이 있거든요. 사실 북측은 연구비에 관심이 많아요. 재정 지원만 약속하면 공동 발굴도 가능하다고 봐요.” 


윤교수는 단군릉 발굴과 단군조선에 대한 북한의 관심이 설령 체제 유지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민족의 동질성이 회복되어 통일에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무조건 의심하기보다 남북한 공동연구를 통해 상고사 연구의 과학성과 실증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이로 인해 한때 윤교수에게는 ‘북한학설을 따르는 자’라는 의혹이 따라붙었다. 거꾸로 고대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거나 민족 정체성을 강조하면 독재정권에 협력하는 학자로 매도당하던 시절도 있었다. 요즘은 고대사를 논하거나 민족의 가치관을 말하면 세계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윤교수는 자신의 고대사 연구 30년을 이렇게 자평한다. 


“우리 고대사, 특히 고조선을 연구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을 발표한 탓에 선배교수에 대한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놈,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놈, 남의 것을 베껴먹기나 하는 놈,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하지 못한 놈, 독재정권에 도움을 준 놈, 비민주적인 사고를 가진 놈, 세계화에 발 맞추지 못한 시대에 뒤떨어진 놈 등으로 매도된 셈이다.”(‘우리 고대사’에서) 

 

갑골문 연구에서 한국고대사로 


원래 그의 전공은 동양사, 그 중에서도 중국고대사였다. 1960년대에 동양 고대사를 전공한다고 하면 당연히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사였지 한국사는 생각지도 않았다.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던 중 자연스럽게 갑골문을 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갑골문을 봤다는 사람도 드물 만큼 자료가 귀해서 그는 일본, 홍콩, 방콕을 드나들며 자료를 긁어모아 논문을 썼다. 석사논문 제목은 ‘갑골문을 통해 본 은왕조의 숭신사상과 왕권변천’이었고 박사논문은 ‘상왕조사 연구-갑골문을 중심으로’였다. 

 

“당시 동양사학회 원로 교수들이 논문심사를 하셨는데 ‘정말 갑골문에 이런 기록이 나오느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이 분야가 얼마나 생소했는지 알 수 있죠. 학위는 받았으나 연구는 미진해서 다시 하버드대로 갔습니다.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의 중국 자료들을 보는데 한국 관련 부분들이 자꾸 눈에 띄는 겁니다. 특히 기자(箕子)에서 눈을 뗄 수 없더군요. 조선시대까지는 기자조선을 인정했어요. 오히려 단군을 부정하고 중국의 기자로부터 역사가 시작됐다는 기자동래설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적인 역사 연구가 시작되면서 고조선(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가운데 기자조선의 존재를 부인하게 됐죠. 곧 기자조선은 중국인이 꾸며낸 이야기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갑골문에 엄연히 기후(箕侯)라 해서 기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실존인물임에 틀림없는데 조선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습니다.” 


윤교수는 ‘중국의 원시시대’와 ‘상주사’의 집필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기자’와 한국 고대사 문제에 파고들었다. 기록에 따르면 기자는 상(商)나라 왕실의 후예로 기(箕)라는 곳에 봉해진 제후였으나 상나라가 서주 무왕에 의해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했다. 중국 ‘사기’의 ‘송미자세가’를 보면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는 아니었다(武王乃封箕子於朝鮮 而不臣也)’고 되어 있다. 그동안 이 문구는 기자가 제후에 봉해져 고조선을 통치했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됐다. 


그러나 윤교수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 국경이 요동지역까지라고 기술된 부분을 떠올렸다. 당시 요동의 경계는 북경 바로 옆 갈석산이었다. 만약 그곳이 국경이었다면 갈석산 동쪽지역인 한반도와 만주 일대가 모두 고조선 땅이 된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렇게 고조선의 강역(疆域·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을 설정해놓고 보니 다음 이야기들이 딱딱 아귀가 맞았다. 기자가 망명한 조선은 중심지인 평양이 아니라 갈석산 부근이었다. 기자는 평소 친분이 있던 서주 무왕의 동생 소공이 다스리는 연나라(제후국)와 접해 있던 고조선의 변방을 망명지로 택한 것이다. 물론 여차하면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기자는 ‘고조선 변방의 제후’가 됐던 것이다. 


윤교수는 이와 같은 내용의 학설을 정리해 1982년 ‘기자신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중국사 전공자의 외도를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고조선을 대동강 유역의 조그만 부족집단 정도로 인식해온 국내 사학계에서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르는 고조선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후 학계의 역풍이 몰아쳤다. 


“제 학설이 자꾸 문제가 되니까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현종 선생께서 ‘내친김에 중국 고대문헌에 고조선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 논문을 써보라’고 하셨습니다. 1984년 무역회관 대강당에서 그 논문을 발표하게 됐죠. 그런데 대선배 교수 한 분이 ‘오늘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안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농담인 줄 알고 그냥 쓴 대로 읽었어요. 토론시간이 되자 그 분이 책상을 마구 치면서 ‘영토만 넓으면 좋은 줄 아느냐,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며 화를 내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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