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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

송화강 2019-05-12 (일) 23:45 6년전 12933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

<동방문화 뿌리는 漢族 아닌 韓族 >

●우리의 조상 동이는 개벽 이래 중국에 살았다
●동이는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민족의 뿌리
●강태공, 맹자, 묵자도 동이족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는 동일 민족


[‘사고전서’에서 단군과 동이족의 실체]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여러 ‘고기(古記)’ 들을 인용하고 있어 우리나라고대국가에 관한 역사서적이 적
지 않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
記)’ 삼성기(三聖記)’ 등과 같은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한 여러 책들이 거명되고 있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삼국사기’ ‘삼국
유사’ 이외에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기록들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병란을 거치고 또 36년에 달하는 일제 강점기를 경유하면서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이 말살되고 인멸
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처럼 우리 상고사를 밝혀줄 문헌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현실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국내자료만으로 고조선 역사를
비롯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날 잃어버린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내에 남아 있는 일부 문헌
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국내외 사료(史料)를 광범위하게 조사·연구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는 그동안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고조선 역사를 적극적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 역사의 뿌리요 또 반만년 역사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고조선 역사의 복원이야말로 이 시대의 중요한 과제이며 이러한 노력은
고조선사 복원은 물론, 단절된 부여·고구려·백제·신라의뿌리를 찾는 길 연결되어진다고 하겠다.

그러면‘사고전서’ 동이 사료 중에서 동이와 고조선의 실체를 밝혀준 새로운 내용 몇 가지를 골라 설명해보기로 한다.


-동이의 터전이었던 중국 -


동양 문헌에서 동이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서경(書經)’ 주서(周書) 주관편(周官篇)으로 다음과 같다.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征伐)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하례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

성왕은 중국의 서방세력이 동방의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뒤 세운 서주(西周)의 제2대 왕으로 주 무왕(周武王)의 아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주세력이 집권하면서부터 동방의 이민족(夷民族)을 서주세력과 구분하여 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이라는
용어가 출현한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서주가 지배하기 이전에 이족이 먼저 지배했고, 따라서 서주의 건국은 동서
남북 사방에 퍼져 있는 이족의 거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까지도 서주에 저항한 것이 바로 동이족이었다.


그렇다면 서주세력이 동이라는 호칭을 쓰기 이전에 동방민족의 본래 호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夷)’였다. 예컨대 ‘서경’
에 등장하는 우이(퍉夷)·회이(淮夷)·도이(島夷)·내이(萊夷) 등이 그것이다. 이(夷) 앞에 지역명칭을 덧붙여 회하(淮河) 부근에
살면 회이(淮夷), 내산(萊山) 밑에 살면 내이(萊夷)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夷)에서 더 거슬러올라가 여(黎), 즉 구려(九黎)가
이(夷)의 원형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족(夷族)들은 언제부터 중국에서 살게 됐을까. ‘사고전서’ 경부 ‘모시계고편(毛詩稽古編)’ 16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
이 나온다.

“‘서경’의 우공편(禹貢篇)을 살펴보면 회이·우이·도이·내이·서융(西戎)이 다 구주(九州)의 경내(境內)에 살고 있었다. 이것
은 시기적으로 우(虞)·하(夏)시대로서 중국 안에 존재하는 융적(戎狄)의 유래가 깊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리고 이 자료는 이 이적(夷狄)들이 멀리 당(唐)·우(虞)시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 개벽(開闢) 이래로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던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어느 국한된 지역이 아닌 중국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살았으나 나중에 화하족(華夏族)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이(夷)를 동이, 서방에 사는 이를 서융, 남방에 사는 이를 남만, 북방에 사는 이를 북적이라 폄하하여 불렀던 것이다.
실제 삼대(三代)시대, 특히 주(周)시대의 순수한 중국이란 9주(九州) 중 연주(탏州), 예주(豫州), 즉 오늘의 하동성과 하남성 정도
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순수한 중국인뿐만 아닌 동이족들이 함께 사는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오랑캐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


동이가 중국의 토착민족이냐 아니면 외부의 침략세력이냐에 대해 고대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동이족이
삼대(三代) 이전부터 중국에 토착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진시황(秦始皇)이 이들을 축출했다는 것으로, 한나라 때 학자 공안국
(孔安國)이 대표적인 토착론자다. 다른 하나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 융적(戎狄)이 중국에 침략해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으로 왕숙(王肅)이 주장한 학설이다.

이 두 견해 가운데서 ‘모시계고편’의 저자는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했다. 그가 왕숙보다 공안국의 견해를 지지한 이유는, 공안국이
시기적으로 진(秦)나라와 100년이 넘지 않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가 전해들은 내용이 비교적 정확하리라는 이유에서
였다.

그러나 위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은 본래 중국의 변방세력도 아니고, 침략세력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개벽 이래 줄곧 중국 땅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토착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사부’와 ‘후한서(後漢書)’ 115권에는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東方曰夷)”는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의
내용을 인용하고 나서 이(夷)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夷)란 것은 저(흲)이다(夷者흲也).”

여기서 이(夷)를 저(흲)와 동일한 의미로 풀이했는데 그렇다면 저(흲)란 과연 무엇인가. 저(흲)란 ‘노자(老子)’의 ‘심근고저
(深根固흲)’란 말에서 보듯이 일반적으로 근저(根흲)·근본(根本)·근기(根基)·기초(基礎) 등의 의미, 즉 뿌리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후한서’는 저(흲)의 의미를 다시 저지(흲地), 즉 “모든 만물이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나는 것(萬物 地而出)”이라고
설명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땅에 뿌리 내리고 움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는 근(根)·묘(苗)·
화(花)·실(實)의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런데 이 만물이 땅에 뿌리를 두고 생장하는 만물저지(萬物흲地)의 저와 동이의
이(夷)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저와 이(夷)를 동일한 개념으로 본 이 고대 중국의 해석에서 동이의 이(夷)는 우리가 그동안 알아왔던 오랑캐 이(夷)가 아니라
동방의 뿌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숭고한 뜻을 지닌 동이의 이(夷)자가 어째서 오랑캐라는 뜻으로 변질되었는
지, 우리 스스로 비하하여 오랑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강태공·맹자·묵자도 동이족-


‘사고전서’에는 “맹자가 추나라 사람으로, 추나라는 춘추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동이국가”라고 기록돼 있다.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
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사고전서·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은 동이지사(東夷之士)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강태공
(姜太公)은 문왕(文王)을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고 서주(西周)왕조를 건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원래
동이(東夷) 사람이었던 사실이 여기서 증명되고 있다.

‘사고전서·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죽국(孤竹國)은 은(殷)나라 현자인 백이(伯夷)와 숙제
(叔齊)가 살던 나라로 동이 국가였으며,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高麗本孤竹國)”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겸상애(兼相愛)·교상이(交相利)를 제창한 위대한 사상가 묵자 또한 동이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고전서·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권 하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나라였고 주나라는 본래 동이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 사람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도 나온다. 주는 노(魯)나라
부근에 있던 동이 국가로 공자가 쓴 ‘춘추(春秋)’에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맹자가 본래 이 주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
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대(宋代) 4대사서(四大史書)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보면 맹자가 “요(堯)는 북적지인(北狄之人)”이고 “순(舜)
은 동이지인(東夷之人)”이라고 말한 것이 나온다. 공자는 은(殷)의 후예인데 탕왕(湯王)이 건립한 은이 동이의 선민(先民)이 세운
나라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뿐 아니라 하우(夏禹)·강태공·묵자·맹자도 모두 동이 출신이었다고 한다면
중국의 화하족(華夏族) 가운데 문왕·주공 이외에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를 일군 핵심 인물은 거의가 동이에서 배출됐다는 이야기가 되고, 따라서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중화사상·중국문화가 아니라 동이족에 의해 형성된 동이사상·동이문화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꿀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한 위대한 인물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강태공·묵자·맹자 등은 동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동안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으로만 알아왔던 이 위대한
인물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인 동이족으로 밝혀진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 잃어버렸다 찾은 돈은 잃어버리지 않은 돈보다 더 귀하
게 느껴지듯 잃어버렸다 되찾은 조상은 잃어버리지 않은 다른 조상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書經’의 ‘우이’가 바로 고조선 -


‘사고전서·경부’‘우공추지(禹貢錐指)’ 4권에는 “동이 9족(族)을 우이(퍉夷)로 보고 우이를 고조선으로 본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우이라는 말은 ‘서경’ 요전(堯典)에 나온다(堯分命羲仲 宅夷 曰?谷). 우이는 바로 요(堯) 당시 존재했던 동양 고전의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이’의 명칭이다. 그런데 이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면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이 9족의 뿌리요
원류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절된 고조선 역사를 복원하는 데 이런 자료 한 장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100권의 가치를
능가한다고 할 수 있다.

“ ‘후한서’와 ‘두씨통전(杜氏通典)’에 모두 동이 9종(九種)을 우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땅이 한(漢)의 낙랑(樂浪)·현토군
(玄?郡)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서경’ 우공(禹貢)에 청주(靑州)를 설명하면서 맨 먼저 우이를 언급한 것을 본다면 조선(朝鮮)·
구려(句麗) 등 여러 나라가 우(禹) 임금시대에 실제 다 청주지역에 있었다(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域).”

이것은 ‘경패(經稗)’ 3권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자료는 구이(九夷)가 우이(퍉夷)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에는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현토·낙랑 두 군(郡)이 다 옛 ‘우이’의 땅으로 청주(靑州)지역에
있었다”는 것과 “연(燕)과 진(秦)이 경략(經略)했던 조선은 대체로 우공(禹貢)의 우이지역이었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우이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현토·낙랑으로 변화된 고조선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연(燕)·진(秦)시대
의 조선과 한 무제가 설치한 현토·낙랑이 모두 오늘의 한반도가 아닌 옛 청주지역, 즉 산동성과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이 자료는 밝혀주고 있다.

‘사고전서·사부’ ‘통감기사본말(通鑑紀事本末)’ 29권에는 “당(唐)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
(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퍉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에서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다
는 것은 중국인들이 신라와 백제를 우이의 후예국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에서 건국시조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는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짧은 기록만 가지고는 고조선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다.

단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라고 한 이 기록은 고조선 2000여년의 역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다.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 비길 만한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동양문헌상에서 우이를 추적하면 그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고조선의 전모를 복원할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나라 ‘구이-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명의고(名義考)’ 5권은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고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
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해 자칭 군자라고 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
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고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
(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의 소(疏)에는 ‘정의(正義)’를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여기 말한 동이는 비단 회수상(淮水上)의 동이만이 아니기
에 해동의 제이(諸夷)라고 한 것이다. 구려·부여·한·맥의 무리는 다 공안국의 시기에도 이런 명칭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공안국의 말처럼 주 무왕이 당시에 정벌했던 동이가 해동에 있던 여러 동이, 즉 구려·부여·한·맥의 무리였다고 한다면 구려·
부여·한·맥은 한대(漢代) 훨씬 이전인 주(周)나라 시기에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공안국은 한(漢)나라 때 유명한 학자로 그의 학설은 어느 누구의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자료는 한·당
(漢唐)나라 이전 고구려·부여·삼한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중국 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갑자년(甲子年)(B.C 57)에, 고구려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계미년(癸未年)(B.C 38)에, 백제가 전한 성제(成帝) 영시(永始) 을사년(乙巳年)(B.C 16)에 각각 건국된 것으로 기술했다. 고구려·
백제·신라의 상한이 모두 중국 한(漢)나라 시대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에 쌍벽을 이루는 자료지만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의 기술을 삼국시대로
국한시킨 한계를 갖고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 및 고조선의 역사까지 다루고 있지만 고구려·백제·신라의 출발을 모두 중국
서한(西漢)시대로 한정시켰다.

그것은 일연이 승려의 신분으로 몇몇 제한된 자료에 의존하고 ‘사고전서’와 같은 방대한 중국의 사료를 섭렵할 수 없다 보니 역부
족에서 온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부여·삼한 등의 뿌리가 확인된 만큼
잘못된 국사교과서의 내용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입으로는 반만년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삼국사기’‘삼국유사’ 위주로 고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한·당시
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백제·신라가 우리 역사의 뿌리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중국의 동이와 한반도의 동이 -


현재 한국의 강단 사학자들은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반도의 동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
장을 뒷받침할 만한 뚜렷한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동이와 중국의
동이를 연결시킬 경우, 고구려·백제·신라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켜온 종래 주장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한·당 이후 한민족의 동이가 동일하며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사고전서’의 여러 사료
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동이 9족이 우이고 우이가 바로 고조선이다”라는 ‘우공추지’의 기록, “구이(九夷)는 현토·
낙랑·고구려 등을 말한다”는 ‘사서혹문’의 기록,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
총관으로 삼았다”는 ‘통감기사본말’ 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한·당 이전 중국의 동이와 고구려·백제·신라의 동이는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신라는 조선의 유민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기록
이 있는데 고조선이 동이라면 그 뒤를 계승한 신라가 고조선의 동이와 동일한 동이임은 너무나 자명한 이치다.

문학과 역사가 다른 점은 문학이 있을 수 있는 일을 쓰는 것이라면 역사는 있었던 일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참이어야지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해서도 안되고 없었던 일을 있었다고 해서도 안되며 동일한 것을 다르다고 해서도
안되고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동양역사의 진짜 주역은 누구인가 -


7만90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고전서’에서 동이에 관련한 사료만 따로 추려 묶으니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이에 관한 새로운 기록을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이는 동양의 지류가 아닌 본류, 피지배자가 아닌 지배자, 아시아의 조역이 아닌 주역, 변방이 아닌 중심, 동양문화의 아류
가 아닌 원류였다.

둘째, 동이가 바로 고조선이다.

셋째,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요순과 공자, 백이, 숙제, 강태공, 맹자, 묵자 등이 동이족 출신이다.

넷째,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고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며, 고구려는 한나라 때 생긴 신생국가가 아니라 하우(夏禹)시대에도
존재했으며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내몽골 지역 적봉시(중국 요서지역 홍산문화유적지)가 고구려의 서쪽 영토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에는 몽골족, 만족, 묘족, 회족, 장족 등 한족(漢族) 이외에 55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동이족과
한족에서 분파된 지류와 지맥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동양 역사 발전의 양대 주역인 동이족과 한족, 두 민족 가운데 동방민족의 뿌리는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해 어느 민족이 동양 역사의 여명을 열었으며 동양 역사를 추동시킨 원동력인가. 바로 동이족이다.

한족의 시조는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다. 사마천은 ‘사기’에 황제를 한족의 시조로 기술하였고, 오늘날 한족들은 자신들을
염제의 자손이라 말한다. 그런데 동이족의 시조는 신농과 황제보다 앞선 시기에 중국의 주인으로 군림한 태호 복희씨다. 공자는 ‘
주역’ 계사(繫辭)에서 “복희 시대를 지나 신농씨 시대가 도래하고 신농씨 시대가 지나 황제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당 이후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한족(漢族)이 본래 중국의 중심세력이었던 동이의 역사를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로
왜곡·말살하기 시작했다. 또 동이의 중심세력이었던 한민족(韓民族)이 신라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조선조에 접어들어 중국의
아류인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함으로써 동이의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린 것이다.


-출발점 없는 한국사 -


우리나라는 이집트·바빌로니아·인도·중국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다. 그러나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역사
는 지금 뿌리가 없다. 고조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1권은 없이 2권부터 발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42권이 뿌리
없는 한국사의 몰골을 단적으로 반영한다고 하겠다.

한 나라에서 역사의 단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그 나라의 얼과 정신과 문화와 정기의 단절을 의미한다. 광복 후 60년이
다 되어가지만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다시 동서로 나뉘고 동서가 다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갈래로
갈려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원인은 역사의 단절, 그리고 그로 인한 민족얼의 상실에 있다.

국사교과서는 출발부터 기형이다. 왜냐하면 단군 조선 1000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취급하고, 기자조선은 ‘기자동래설’이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해 우리의 실제 역사가 침략자 신분인 연나라 사람(燕人) 위만(衛滿)의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뿌
리가 잘려나간 이런 역사교육이 국민에게 민족적 긍지와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줄 리 없다.

최근 일본 이시하라 도쿄(東京) 도지사가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는 망언(妄言)을 하고 중국에서는 한국의
고구려사가 자기들의 역사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허점투성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광복 이후 1960~70년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대적인 과제였고, 1980~90년대는 민주화가 시대적 요청이었다면, 오늘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단절된 역사의 복원과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실증사학을 주장하는 강단사학계는 자료의 결핍을 이유로 고조선사의 연구와 복원에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고전서’와 같은 국내외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자료를 통해 고조선의 실체 및 고구려·백제·신라의 뿌리가 밝혀진 이상 이런
사료를 토대로 고조선 및 삼국사를 위시한 한국의 고대사를 다시 정립하여 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동이 9족이 하나로 뭉쳐 대화합과 통일의 시대를 연 위대한 시대 고조선의 역사가 되살아난다면, 아직도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민족이 분단의 장벽을 넘어 화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는 돌파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아, 고구려.. 고구려 민족의 기원]


고구려는 부여족의 한 갈래인 예맥족에 의해 세워졌다.
부여는 285년 선비족 모용씨가 공격하여 왕이 죽고 국운이 쇠락하면서 멸망의 길을 걷다가 346년 모용씨의 재침입으로 결국 운을 다
하였다. 그 후 부여족의 일부가 나라를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고구려에 의해 494년 흡수, 통합된다.

한편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의 건국전설에서는 고구려의 민족이 부여족의 이동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문헌
인 위서 에서도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이고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며..."라고 기록되어 있
다. 이는 아마도 당시 중국인들이 고구려의 건국전설을 고구려의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언급된 고구려의 건국전설의 내용을 잠시 살펴 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하백(물귀신)의 딸 유화에 의해 잉태되었다.
유화는 자칭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만나서 사귀게 되고 이로 인해 부모에게 쫓겨나 동부여의 왕 금와를 만나게 된다. 금와의
보살핌으로 주몽을 낳게 되고 주몽은 자라면서 금와의 다른 아들들에게 시기를 받아 죽을 고비를 맞으나 기사회생으로 도피한다.
주몽은 세 신하와 함께 이동하여 엄호수를 신통하게 건너 모둔곡에 이르렀다. 주몽은 거기서 다시 세 사람을 만나 그들을 신하로 삼
고 졸본천에 이르러 도읍을 정한다. 고구려를 세울 때 주몽은 나이 22살이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건국전설은 주몽의 탄생을 통하여 부여의 왕족 혈통이라는 것을 강조함과 아울러 이동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기존
의 약소부족을 암시하고, 이 부족들을 포용하면서 자체적인 집단을 결성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천제의
아들로부터 잉태한다는 부분은 고구려가 하늘로부터 혜택을 받은 국가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곧 당시 고구려인의 자신
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고구려는 처음에 송화강 유역에 부족이 모여 살았으나 B.C 2세기 경부터 남하하여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 자리를 잡았다가
다시 압록강 북쪽의 집안으로 근거를 옮겼다. 이는 지리적으로 산과 계곡이 많은 험한 지역이었다. 성이 산의 굴곡을 따라 있고 남
쪽으로는 강을 끼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당서의 고려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요건으로 인해 고구려는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하기 보다는 대외 정복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
려가 초기에는 현토군의 지배권 안에 있었으나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항쟁으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작용을 하게 된


[고구려를 바라보는 시각]



[베이징대 교수들도 고구려사 한국사로 인정]-한국사 다룬 1998년刊 중국 책자에 명시돼...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 정부의 역사프로젝트 ‘동북공정(東北工程)’ 사업이 진행 중인 가운데 베이징(北京)대
교수들이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기술한 베이징대 역사학과 교재로 사용된 책자가 공개됐다.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김우준(金佑俊) 교수는 3일 베이징대 장페이페이(蔣非非), 왕샤오푸(王小甫) 교수 등 학자 6명이 지난 9
8년 발간한 ‘중한관계사(中韓關係史·사회과학문헌출판사 간행)’를 공개했다.

베이징대 ‘한국학연구중심’이 발간한 한국학총서에 포함된 이 서적은 우선 서문에서 “중국에는 하·상·주·진·한·수·당·
송·원·명·청 등의 왕조가 있었고 그 중간에 춘추전국시대·위진남북조시대 등이 있었다”고 기술하면서 “한국에서는 고조선·
삼한·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 등의 왕조가 있어 양국 간의 정치·경제·외교·문화 관계를 기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이어 중국 각 왕조에 대응하는 같은 시기 한반도 왕조들을 한 쌍으로 묶어 각 시기별 국가 간 교류를 서술하면서, 고구려
를 중국 왕조에 대응하는 한국사의 왕조로 인정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사를 기술한 대목인 3장1절에서는 ‘위진남북조와 고구려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고구려 승려들이 중국에 유학을 많
이 했고 불경 외에 다른 분야 연구도 많이 했다” “북위는 고구려에 대해 특별한 예를 표시했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보통 중국인들 '고구려史는 한국史' 인식]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일반적으로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가 아니고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의 역사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베이징(北京)의 인기있는 일간지 베이징청년보 4일자 베이징 지명 유래를 설명하는 ‘베이징 지명’이라는 칼럼에 게재된 ‘당나라
때 가오리잉(高麗營)이라는 지명생겨’라는 제목의 칼럼을 보면 중국인들의 이같은 일반적인 관념이 감지돤다.

칼럼은 베이징시 교외에 있는 순이(順義)현 가오리잉(高麗營)진의 지명 유래를 설명하면서 고려를 한민족을 통칭으로 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고구려를 압록강 동쪽에 있는 고려국이라고 지칭했다.

둥팡창(東方朝)라는 저자는 칼럼에서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서기 688년에 고려를 멸망시킨 후 투항한 고려 장군 흑치상지
(黑齒常之)와 그 가족들을 끌고 회군중 흑치상지의 가족들을 베이징 부근에 배치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이세민이 멸망시킨 것은 고구려이고 당나라 장군 설인귀(薛仁貴)에게 투항한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 운동을 이끈 백제인이었다.

“흑치상지 가족들은 고려인으로 이 곳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이들의 보호를 위해 군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가오리잉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칼럼은 말했다.

흑치상지는 이세민을 따라 당시 당나라 수도 창안(長安.지금의 서안<西安>)으로 간후 당나라를 위해 위업을 세웠으며. 이런 사실은
TV 연속극 ‘다밍관츠(大明官詞)’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칼럼은 “삼국시대 후기 이후 군벌들이 난무, 랴오닝(遼寧) 지방에 신경쓸 틈이 없어 압록강 동쪽의 고려국이 점령하도록 방치하다
수 문제(隨 文帝) 양견(楊堅)이 중국을 통일한후 고려 정벌에 나섰으나 국력 부족으로 실패했고, 이어 수양제(煬帝)양광(楊廣)과
당태조 이연(李淵)도 고려 정벌 랴오닝 실지 회복에 실패했다”고 쓰고있다.

이는 당시 고구려가 중국과 대치하며 전쟁을 벌인 한반도 국가로 묘사돼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칼럼은 “가오리잉의 고려 유민들은 명나라 때 랴오닝성 잉커우(營口)로 이주해 이 곳에는 이름만 남고 고려인(현재의 조선족)은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예전부터 상당수가 고려인을 한민족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고구려를 고려에 포함시킨 것을 보면 고구
려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가 아니라 한국사로 간주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중국 교과서의 한국 역사 왜곡에 대하여...]


한국의 역사는 고구려부터 시작됐다, 임진왜란은 중국의 조선 후원 전쟁이다, 가장 오래된 인쇄물은 둔황에서 발견된 금강경이다.’

이는 중국 초중고교에서 사용되는 역사 교과서에 나타난 한국사 서술 부분이다. 중국의 한국사 왜곡이 발해사나 고구려사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고구려사 귀속 문제를 놓고 한중(韓中)간 역사 논쟁이 치열한 가운데 국사편찬위원회가 현재 중국의 초중고교에서 사용 중인 역사
교과서를 분석한 보고서 ‘중국 교과서의 한국사 인식’을 최근 펴내 이 같은 사실들이 밝혀졌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는 한국사를 중국사 전개의 부수적인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보고서 작성자 중 한 사람인 송상헌 공주교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은 중화(中華)문화권으로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었으며, 중화가 아닌 외국의 침략을 받을 때는 중국이
도와줬다는 역사인식이 교과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 주목하는 이유는 교과서의 정치적 함의 때문. 작성자인 박영철 군산대 사학과 교수는 “역사 교과서는 후대의
역사의식을 형성하고 그것이 곧 직접적으로 현실의 정치관계에 작용하게 된다”며 “중국의 의도를 이해하려면 중국이 한국을 어떻
게 바라보는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한국의 검인정 교과서처럼 교육부가 발행하는 지침서에 따라 복수의 출판사가 정부 심사를 거쳐 교과서를 발행한다. 이 중
‘인민교육출판사’에서 간행한 교과서가 채택률 60%로 가장 널리 사용된다.

▽한국사의 시작은 고구려?=인민교육출판사에서 나온 세계사 교과서인 ‘세계근대현대사’는 한국사를 다루면서 고조선을 전혀 다루
지 않고 고구려부터 한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서술했다. 고대사에서 고조선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2002년 동북
공정(東北工程)이 시작되기 전 제작되어서인지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정은 하고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세계역사’는 한국이 외국과 치른 역대 전쟁에 대해 중국이 영원한 한중 우의를 위해 한국을 지원했다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은 ‘조선 후원’ 전쟁, 6·25전쟁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등으로 표현한다.
또 전쟁 때마다 조선의 요청에 따라 중국이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우방인 조선을 위해 군대를 파견해 원조해 줬다고 서술하고 있다.

▽현존 최고(最古)의 인쇄물은 금강경?=인민교육출판사에서 출간한 교과서는 둔황에서 발견된 868년의 금강경을 현존하는 세계 최고
의 인쇄물로 소개했다. 이는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돼 751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
經)’의 존재를 무시하는 내용이다.

상하이교육출판사에서 나온 교과서는 다라니경의 존재를 언급하면서도 ‘1966년 남조선에서, 당나라에서 인쇄한 무구정광대다라(니)
경이 발견됐다’며 중국에서 인쇄된 것이라고 단정해 서술하고 있다.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의 의도적 생략=중국과 일본은 1894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벌인 뒤 1895년 전후 처리를 위해 일
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강화조약을 맺는다. 시모노세키조약의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이다.

그러나 중국의 모든 교과서에서는 이 조약의 제1조가 생략돼 있다. 전인영 이화여대 사회생활과 교수는 “제1조는 조선과 청나라간
에 수백년간 유지돼온 관계를 폐기하는 결정적 상징이었다”며 “이를 부정하고 싶어 고의적으로 무시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움직임과 관련해 원로 국어학자인
서정범 경희대 명예교수(78)가 언어학적 차원에서 이를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그는 고대 한국어의 어원을 중심으로 중국과 고구려가 다른 나라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혔다.》


고구려, 신라, 가야 시조의 난생(卵生) 신화는 고구려가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실증한다. 옛날에는 사람의 뜻을 지닌 말
이 부족을 대표하고 나라이름까지도 되었다. 고구려(高句麗)의 처음 이름은 구려(句麗)였다고 한다. ‘구려’의 어근은 ‘굴’로서
사람의 뜻을 지닌다. 멍텅구리, 장난꾸러기의 ‘구리, 꾸러기’의 어근 ‘굴’이 사람의 뜻을 지닌다. 몽골, 위굴(위구르)의 ‘골 ·
굴’도 사람의 뜻을 지닌다. 일본에서는 멍청이를 ‘봉구라’라고 하는데 ‘구라’는 사람을 뜻한다. 멍텅구리의 ‘구리’와 같은
어원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고구려의 지명(地名)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고구려어의 편린을 찾을 수 있다.

곧(古次)’은 입을 뜻하는데 이 ‘곧(곶)’은 다른 알타이 언어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고유어다. 이 ‘곧(口)’이 일본으로 건너
가 ‘구찌(口)’로 변하는데 어근은 ‘굳’이다. ‘잠고대(잠꼬대)’의 ‘고대’는 말을 뜻하는데 어근은 ‘곧’으로 고구려어 ‘곧
(口)’과 같은 어원이다. 말이란 입에서 나오기 때문에 말의 어원은 입의 뜻을 지닌다.

‘곧’이 일본어에서는 ‘고도바(言)’인데 ‘고도(言)’의 어근이 ‘곧’, ‘잠고대’의 ‘곧’과 어원이 같다. 고구려어 ‘곧(口)
’은 고대 한국어이고 이것이 일본에 건너간 것이다.

일본어의 발생지가 기타큐슈(北九州)라고 하는 것은 일본학계의 견해다. 그러나 고구려어 ‘곧(口)’이 신라나 가야를 지나쳐 바로
기타큐슈로 건너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시로서는 강성한 고구려어가 고대 한국어의 틀이 되었을 것이고, 기타큐슈와 가까
운 한반도 남쪽지역에서 고대 한국어가 선사시대부터 건너갔을 것이다.

이렇듯 고구려어 ‘곧(口)’이 고대 한국어, 일본어와 맥을 같이한다는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나라였다는 주장을 부인하는 예증이
된다.

‘곧’은 다른 알타이 언어들과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한어(漢語) ‘口’와는 비교가 된다. 나는 한어도 조어시대(祖語時代)에는
알타이 언어들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고구려어 ‘곧(口)’이 한어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당시 고구려의 세력이
엄청나게 강성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의 수사(數詞) 중 네 개가 고구려의 지명어(地名語)에 나온다. 3을 가리키는 ‘미(密)’, 5를 가리키는 ‘이쓰(于次)’, 7을 뜻
하는 ‘나나(難隱)’, 10을 의미하는 ‘도(德)’가 그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시대의 고대 한국어가 일본에 건너갔음을 말해준다. 여기서도 고구려어인 고대 한국어와 고대 일본어가 맥을 같이한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중국의 나라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억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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