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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학] 제1강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는 왜 중요한가?

송화강 2019-05-12 (일) 22:29 6년전 12591  

제1강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는 왜 중요한가?

 


 차례

 

1.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란 무엇인가?

2. 도당굿과 잃어버린 신화를 되살리는 방법

3. 경제인류학과 하늘의 헌법  

4. 우리의 신화를 왜 군국주의자들과 봉건주의자들은 두려워 했는가?

5. 일연(一然)의 신화관 -  문명비판적 문명배태론

6. 신화 격하 방법의 세 번째 유형 -  희화화

7. 왜 우리나라는 유달리 국가수명이 긴가?  

8. 우리 신화만의 특질

9. 우리 신화의 구조론적 특이성  - 쌍본성

 

 

 

1.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란 무엇인가?

  '흐르는 나라의 꿈(vision), 세계시민 칸(Khan)의 신화'

 


오늘은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라는 길고 긴 강좌를 꾸려나가는 첫날이기에, 이 신화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라는 제목부터 설명 드리는 것이 옳을 듯싶습니다.

조선(朝鮮)이란 고조선 시대의 중심 언어였던 만주어 토덴(toden) 즉 떠돌이, 유목(遊牧)에서 왔습니다.

명확히 오늘날의 뜻으로 말하자면, '흐르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뭐? 나라가 흘러? 그런 나라도 있나?"라고 의아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삼국(三國)의 창건신화를 보면 한결같이 자기 지역에서 나라를 만든 임금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온조는 고구려에 있다가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한강 지역에 와서 백가제해(百家濟海)의 꿈을 이루는 백제를

세웁니다. 또 허황옥은 인도 아요디아국의 공주로 있으면서,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자신의 연인인 김수로가

있는 가야까지 흘러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왜 우리 역사에서 나라세우는 모델은 항시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외부인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왜 이들이 자신의 모국에서 떠나갈 때, 이런 엑소더스(탈주)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흔적도 없고,

또 새로운 지역에서 이런 떠돌이들의 흐름을 막는 항거의 흔적도 전혀 없는 기이한 모델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류학적으로 이는 신기하기 그지없는 노릇입니다.


삼국, 가야(伽倻)까지 쳐서 사국(四國)이 되겠습니다만, 이 사국의 건국에 외부세력이 평화적으로 흘러 들어와서 평화

스럽게 '나라를 이루었다'는 모델에서 단 한 나라도 예외가 없다는

 

 사실과 이러한 사실의 원형(原型)이 바로 조선이라고 볼 때, 조선의 뜻   떠돌아다니는, 흘러 다니는  이 무척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인류는 우리가 알고 있는 화폐로 물건을 사고 파는 '자본주의적 시장'말고, 잃어버린 두 가지 시장이 있습니다.

그 하나가 '자급자족시장'이고, 또 하나가 '호혜시장'입니다.

그런데 호혜시장은 국가를 하나의 저축으로 파악하고 있는 시장입니다. 다시 말해 온조는 고구려라는 이름의 국가은행

에 자신의 구좌를 트고 있다가, 고구려가 마음에 안 들면, 그곳에 걸어두었던 자신의 지분을  이것은 물론 궁상각치우

(宮商角徵羽)라고 음율(音律)에 비유한 아주 독특한 화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만 인출해 내서 이동, 한강 주변에서

백가제해(百家濟海)할 수 있는 나라를 세웠던 것입니다.

또 허황옥 역시 아요디아국에 저축해 두었던 자신의 화폐를 인출해서 가야 쪽으로 온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나라가 흘러 다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흘러 다니는 나라'가 최초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 즉  널리 인류를 두텁게 돕고, 세대간의

합리적인 조화를 펴는 사상이 공감대를 받으면서 설립된 최초의 나라 이름이 바로 조선이라는 것이지요.

제가 굳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그것은 이 조선(朝鮮)이라는 나라가 흘러다니기 전에 '환국(桓國)'이라는 나라

가 역시 흘러다녔다는 것이 신화와 역사상에 그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桓)이란 한자로 '씩씩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한자의 의미를 빌려온 것이지 원래 뜻은 그냥 한국어로 '환한 빛을

주는' 그런 뜻입니다.

아무튼, 태고시대 때 인류의 절망에 용기를 주면서 빛을 주던 나라가 떠돌다가, 이윽고 그 빛을 준 내용으로서 '인류를

두텁게 이롭게 하자. 또 세대간의 합리적인 조화를 이룩하자'는 적극적인 목표에 큰 공감대를 이루어 최초로 등장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라는 것입니다.

금문에서도 이 조선의 조(朝)란 글자는 솟대에 태양들, 그리고 이를 받들어 이동하는 기구와 배의 모습이 합성해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의미 조합에는 각기 심원한 뜻이 있지만, 일단 이 안에 배[선(船)]가 있다는 것에 유의해 주시길 바랍

니다. 이는 '떠돌아다니는'뜻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고조선의 신화를, 저는 '떠돌아다니는' 나라들이 세계적으로 본격화된 사건이 바로 고조선 창건 신화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 한국(韓國)의 한(韓)을 저는 고구려어, 몽고어로 '다루칸(darukhan: 세계시민 칸)'의 약자인 칸과 한의 뜻으로 파악합

니다.  

일반적으로 사회는 피라미드 구조를 취합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사람을 칸(왕)이라고 하는데, 주로 한 사람이 그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칸인, 그래서 지극히 민주적인 나라가 바로 한국(韓國)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설마'하고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 김수로왕조에 보면 수로왕이 구지봉(龜旨峰)에 내려올 때, 이때 노래 구지가(龜旨歌)를 부른 아홉 명(?)

의 칸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이름이 한자로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吾刀干)' 하는 식

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향찰(鄕札)임을 고려해서 오늘날의 말로 고치면, '나도 칸, 너도 칸, 그대도 칸, 우리도 칸 '하는 식의 용어로 바뀝

니다. 모두가 칸인 나라, 그것이 한국(韓國)이란 뜻인 것이지요.

따라서 한(韓)이란 국가의 장벽을 허물고 세계로 흘러다니는 나라의 시민 칸이기에 당연히 세계시민 칸으로

 

 현대적으로 번역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韓)을 뜻하는 금문도 마치 '강강수월래'하듯 여러 발[족(足)]이 돌아가면서, 그 공동체성을 지키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 중국지방에 있던 다루칸들이 구지가를 불렀던 모양을 한자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를 현대어로 번역하자면, '흐르는 나라의 꿈(vision), 세계시민 칸의 신화'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2. 도당굿과 잃어버린 신화를 되살리는 방법

   서사적 흔적을 취합해 가는 홀로그램적 방법

 

고대 제천(祭天)의 잔존인 도당굿

 

제가 이 신화에 착안하게 된 동기와 과정을 말씀드리는 것이 이 길고 긴 강좌를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될 듯싶습니다.

김원호라는 굿쟁이 아우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런데, 이 아우분이 하루는 "형님, 저 경기 도당굿을 보러 갑시다."라는

제안을 했어요. 그리고 그 도당굿을 보고 난 다음에 깊은 충격을 맛보았습니다.


이미 고대의 제천행사를 나타내는 수많은 용어, 예를 들면 부여의 맞이굿[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등과 같이

예(濊)의 제천의 명칭이 '춤추는 하늘굿[무천(舞天)]'과 도당굿[도당제(都堂祭)]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 내용의 첫머리가 제석천 거리라는 점에 몹시 놀랐습니다.


제석천은 불교 및 인도 용어로 하늘을 뜻합니다. 좀더 세밀히 살펴보자면, '환인, 제석천, 인다라'입니다. 즉 수많은 하늘

의 별들이 자신의 영롱한 별빛을 서로 주고받아 각자 개체의 아름다움 안에 남의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그런 네트워크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환인이 환웅을 낳고, 환웅이 단군을 낳았다'는 우리 신화 이야기가 그리 단순한 이야기

가 아님을 눈치 챌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환인이 '별들의 네트워크'를 뜻하기 때문에 결코 한 사람이 될 수 없고,

그 결과 그의 아들로 묘사된 환웅과 손자 역시 엄청난 수로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상은 '우리의 생명 자체가 별에서 왔다'고 믿어왔습니다. 즉 별제사를 초제(醮祭)라고 하고, 별들끼리의 결혼인

스타 웨딩(star wedding)을 초례(醮禮)라고 합니다.  

하늘의 별에서 와도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저 별들이 배달화백을 하는 북두칠성에서 합의를 받아 누구네 집 몇째로 태어

났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우리 할아버지 때만 하더라도 당연한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회심곡(回心曲)을 알고 계시죠. 서산대사가 지은 이 노래 가사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버님한테 뼈를 빌고, 어머님한테 살을 빌고, 제석천님한테 복(福)을 빌고, 칠성(七星)님 한테 명(命)을 받아 .'

 

 

다시 말하면, 북두칠성에서 배달화백을 해서, 뭇 별들의 합의로써 당당하게 태어남을 우리 할아버지 때까지 당연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박한 민속적 믿음과 단군신화 '환인이 환웅을 낳고, 환웅이 단군을 낳고 '하는 체계가 도대체 어찌 연결되는가?

하는 혼란을 도당굿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이윽고 이 혼란은 깊은 충격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도당굿이 충격을 준 최초의 진원은 물론 첫머리가 '제석천 거리'이긴 하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뒤에 나타나는 '신청

(神聽) 울림'이 자꾸 어떤 환상을 일깨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저 신화의 파편 속에 묻어 있는 고대문명을 접촉해 마치 알라딘의 램프에서 거인이 나타

나 여러 신기한 광경을 보여주는 이른바 공시성(共時性) 현상이 내 머리 속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인도 신화에 드러난 영산 줄다리기로 일어나는 천지창조

 

하늘이 왜 파래졌는가?

 

인도 신화에 의하면, 천지창조 때 선신과 악신이 줄다리기 시합을 통해 서로가 저 바다 밑으로부터 생명수를 건져 올

리는 게임을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민속에 있는 '영산 줄다리기'의 모형은 이처럼 고대 아시아인이 믿고 있던 천지창조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줄에 있었습니다.

혼돈의 뱀인 바쑤끼(Vasuki)를 밧줄로 서로 당기니까, 괴로워서 그랬는지 모르나 이 뱀이 천하를 죽음으로 물들이는

독을 내뿜습니다. 그런데 이 독을 시바 여신이 마셔서 그 다음부터는 하늘이 '파래졌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신화가 불교 쪽에 오면 그 당시 독을 마셔버린 존재가 시바가 아닌 환인(桓因), 제석천(帝釋天), 인다라(因多羅)

혹은 관음보살(觀音菩薩) 등 다른 이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대문화  신화나 여러 사설(辭說)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가운데, 원형이 온전하게 그대로 내려오는 것은 결코 아님을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전체 모습 가운데 일부분은 이탈해 잃어버리는 과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이를 전수하는

사람 자체가 흥행성이나, 여러 정치적 고려 등의 현실과의 타협으로 원래의 내용을 지키되, 표현의 각도를 약간 틀어서

결과적으로 내용을 변형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다양한 서사적 흔적을 잇는 홀로그램적 방법과 공시성(共時性)  

 

따라서 고대문화의 올바른 모습을 그대로 들추어내기 위해서는 이른바 홀로그램적 사고를 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부분의 총합이 전체보다 더 크다'라는 것이 홀로그램 이론이지요.

칼 융은 이런 홀로그램적으로 문명의 파편을 연결하는 작업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공시성 현상이라고 규명한 바가 있습

니다. 즉 공시성이란 어떤 잃어버린 문명의 파편들의 만남이 기존의 인과적인 흐름을 깨고 나타나서 실재(實在)를 일깨

워주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과적인 세계는 시간에 예속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간에도 종속됩니다. 즉 인과적인 세계는 순수 논리의 세계를

제외하고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사는 '시공간이라는 틀' 안에서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런 시공간이라는 틀 '밖'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의 만남에서 공시성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공시성의 예를 가장 쉽게 설명하자면, '아침이 오면 새가 울고, 새가 울면 신문배달부가 온다'라는 명제를 들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인과요소 아침이 오는 것, 새가 우는 것, 신문배달부가 신문을 던지는 것의 선후관계가 앞뒤가 바뀌어 어느 때에

오더라도, 논리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융이 말한 공시성 시간은 기존의 세계관의 틀, 즉 시공관의 틀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잉태하는 순간에 이런 공시성의

현상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현실이라는 시공간 전체 속에 매몰되지 않고, 벗어나 관찰하면서 어떤 진지한 '잉태의 순간'을 품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 체험 속에서 회상할 때 쉽게 납득이 갑니다.

어린 시절, 소풍을 간다고 했을 때 미지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밤을 설치는 경우가 생각이 나십니까?

또 누군가에 대해 사랑을 품었을 때 '수많은 여러 가지 꿈의 파편을 이것저것 끼워 맞추면서 밤을 하얗게 새운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현상이 모두 공시성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제가 도당굿을 보고 일으킨 공시성 현상은 그것이 사라진 제천(祭天)행사 속에 일어났던 신화와 현실을 통합하는 거대한 축

제의 광경이 이런저런 내용이 서로 뒤엉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그런 신기한 현상이었습니다.  

 

도당(都堂)굿의 중요 장면

 

아주 옛날 모든 인류가 '별에서 왔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람을 쥐어짜는 듯한 경쟁성이 뿜어대는 독이 이 세상에 퍼져

인류 종말을 가져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만든 이 죄값을 서로가 '대속(代贖)하겠다'는 각오로

강화의 갯벌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반드시 새로운 세계를 잉태하겠다고 그 쓰디쓴 '마고초 즉 익모초'를 한 사발

마시고, 독이 얼굴에 퍼지는 모양을 창포(菖蒲)물을 들여 '파란 얼굴'로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천행사에 동원되는 여러 도구들을 들고 '원래 하늘에서의 자신의 아름다움   환인, 제석천, 인다라의 아름

다움을 발휘하기 위해 저 마니산 꼭대기에 오르는 정경이 자꾸 그려진 것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제천행사를 망제(望祭)와 교제(郊祭)로 분류했는데, 망제는 바로 '희망의 제사'를 뜻합니다.

사람이 얼굴이 파랗게 변해서 자꾸 높은 산으로 올라가니깐, 이를 새[조(鳥)]에 비유하는 것도 당연하겠고, 그 파란 얼굴

때문에, 파랑새라고 불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듯싶습니다. 파랑새가 희망의 새로 불려지는 것은 태고시대 때

부터 유라시아 전역에 있던 제천(祭天) 즉 희망의 제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제천에 대한 기억'을 동학혁명 때까지 민중들은 계속 전승해 왔음이 노래에 나타납니다.

전봉준이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일부 동학도들은 이를 말리는 의미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녹두장군 전봉준의 진영을 뜻함)에 앉지 마라. 녹두밭에 앉으면은 창포장수 울고 간다.'

이처럼 이런 정보, 저런 정보가 계속 들끓듯이 일어나는 공시성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생각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도당굿이란 제천행사 자체가 우리가 잃어버린 신화를 축제화했다'

는 지평에 대한 인식입니다.

즉 신화 속에 있는 내용을 축제화한 것이 도당굿이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파란 얼굴을 한 사람들이 하늘 사다리로 표현되는 돌함[석함(石函)] 속에 자신의 서원(誓願)을 적고 이를

지고는 마니산 참성단(塹城壇)에 몰려들었을 겁니다.

이 사람들은 단지 오늘날 한국인만이 아니라, 몽고인도 있었을 것이며, 중국인도 있었을 것이며, 오월(吳越)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일본인도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이 돌함을 재료로써 하늘을 상징하는 원구단(圓丘壇)을 한 겹 쌓고 오르락내리락 하며, 지신밟기를 하는 곡조가

신청 울림으로 내 귀에 들렸다는 것입니다.

각 나라 사람들이 이 원구단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어떤 명령을 내리는 광경이 연상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다음과 같이 말했겠지요.    


"나는 환인이다. 열국의 왕들은 내 명을 받을지어다. 본디 하느님(하늘에서 온 분)인 사람을 국가란 장벽에 가두고, 서로

싸우는 노예로 부리는 죄를 범하지 말라. 국가는 하느님의 감옥이 아니라, 하느님이 지구라는 땅에 늘 타고 다닐 수 있는

배[우주선(宇宙船)]에 불과하니라. 그래서 인종과 문화가 다를지라도 흐르는 나라를 타고 자유롭게 다니며, 서로가 편히

만나 하늘에서와 같이 그 아름다움을 다시 피워낼지어다."  


이런 명령을 들은 외국인들은 마치 '쾌지나칭칭'에서와 같이 이국(異國)의 언어를 따라 똑같이 후렴으로써 합창해 부

르는 그런 모습이 내 뇌리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한 층이 쌓이면 또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 예를 들어 일본 사람은 "나는 천조대신이다. 열국의 왕들은… 지어다."하는

말을 일본말로 하고, 또 이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따라 하는 의식을 신청 울림 속에서 역력히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층 한층 쌓아 올라가며, 서로 다른 언어를 지닌 민족들이 서로가 신(神)이 되어 명령을 하고, 또 이를 따라

하기에 이름 자체가 신청(神聽)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쌓아올린 제단 위에 거대한 황금 독수리를 올려놓고,  외비비로써 신시화백의 불을 피우는 광경이 또 나

타나는 등 뒤죽박죽 저 고대에 세계평화를 잉태하는 '실재시간'의 그 성스런 순간에 대한 모습이 흩어진 당시의 문명의

파편인 정보들을 끌어 모으면서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황금 독수리와  외비비의 사례  - 사라진 신화를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서사적 정보의 홀로

그램적 통합을 전제로 한다.  

 

여러분은 지금 제가 황금 독수리나 외비비 이야기를 하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하고 막연해할 것입니다.

인간의 인지는 '시공간의 객관화'가 안정이 안 되면, 인지 자체가 힘듭니다. 즉 외비비의 모양과 작용이 객관화되어 인지

된 연후에야 느낌이 정확히 온다는 것입니다. 즉 전체 모습이 그려져야 그 실상에 대해서 비로소 인지가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부분의 파편 자체가 지금까지의 전체상을 뒤집어엎고, 그 허점을 내려다보는 어떤 상(像) 자체를 그려

내는 직관성을 띠고 맹렬히 움직여 나가는 경향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를 자아내는 홀로그램적 작용이지요.  


율려(律呂)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부도지의 이야기, 율려와 음악이란 문자학적인 모습, 또 만파식적(萬波息笛)의 피리

의 모양, 고대문명과 불의 상관성, 불을 피우는 활비비, 구지(龜旨)와 굿불의 상관성, 그리고 성화 기단으로 거북 모양과

독수리 모양, 인도 신화에서 태양조, 손가락과 음률을 동시에 뜻하는 가락이 같은 원형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 등등의

이 모든 파편들이 하나로 엉켜들어서 상(像)이 안정화되기까지의 과정이 바로 부분의 통합이라 할 수 있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모습이 지금까지 드러난 고대사에서 묘사한 전체적인 모습이 심각한 하자를 지니고 있으나, 안정된 모습으로

하나의 상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 이런

 

 하자성을 더욱 뚜렷이 하고 기존의 패러다임을 포괄하면서도 새로운 차원에 선 상(像)이 돌연히 형성되어 내려다보는, 이른바 전체보다 더 큰 전체로 형성되는 과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홀로그램적 통합을 주도하는 직관의 작용은 따라서 기존의 시공간에 대한 카오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코스모스를 위한 움직임입니다. 이 양자를 끊임없이 왕래하는 신기한 밀교적 체험 순간입니다.

결국 이 체험은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오가는 구성과 재구성이 공존하는 시간입니다.

현실을 안정화시키는 시공간의 앞과 뒤가 엉키면서 나타나는 순간인 것입니다.

 

홀로그램적 통합  ―  - 창조성과 뫼비우스 띠로 역(逆)의 합일(合一)을 이루는 신화  

 

일반적으로 이런 공시성의 과정을 창조성의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화라는 것은 결코 개인적인 창조성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이야기 즉 존재 심연을 떠올려 보게 하는

그런 서사성(narrative)의 걸름 과정과 동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완연히 다릅니다.

따라서 이 잃어버린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의 내용을 듣고, 여러분 자신에게도 자신의 한민족으로서의 서사성이 활발

히 일어나는 공시성의 체험을 맛본다면, 또 그 결과 기존의 역사관과 신화관보다 높은 위치에 서서 관조할 수 있게 된

다면, 이는 우리가 공통으로 잃어버린 고대의 우리 문명의 파편을 함께 엮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엘리아데는 신화를 가리켜, 시공간 속에서의 현실 무대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실재시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실재시간은 현실이란 시간 앞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 관계는 머리띠의 관계와 같습니다.

바깥쪽의 면은 도저히 안쪽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떤 정서적으로 절체절명의 순간, 이 띠는 뫼비우스

띠로 변하는 것이지요.

엘리아데를 해석하는 신화학자들이 신화는 현실에 대한 '역(逆)의 합일(合一)'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단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3. 경제인류학과 하늘의 헌법  

 

다른 민주주의와 다른 시장의 기제(機制)에 대해 엄격하고 건조한 경제인류학의 논리

 

제가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라는 이 길고 긴 주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 출발점이 사실, 신화 그 자체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는 점을 먼저 명확히 밝히는 것이, '왜 당신이 이것이 우리의 신화이다'라고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가 더 용이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이 의미 있는 것은, 저는 민속학자도 아니고, 문화이론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경제인류학자로서 평생의 주제로 연구해온 것은 흔히 신시(神市), 천시(天市)로 표현되

 

 어 있는 '인류가 잃어버린 시장 자급자족시장과 호혜시장'과 화백(和白) 즉 고대 아시아에 있었던 민주주의를 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흔적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지만, 기본적으로 관련된 정보를 모아보았자 그 전체상을 그려내기에는 턱없이 정보가 부족한 특이한 분야에서 연구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본적인 관련 문헌 경제인류학과 경제에 관련된 저술은 물론, 연관 있는 모든 분야는 그것이 민속이든, 고전이든,

외국 문헌이든, 무속이든 모두 닥치는 대로 섭렵하면서 수많은 가정과 또 경제인류학적 검증 과정을 거쳐야 하는 지리한

작업을 해나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아무튼 산일(散逸)된 이런 정보를 취합해서 그것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데

에는 독특한 장점이 경제인류학에 있음을 먼저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시장의 역사는 각 시대마다 생산력이나 산업구조에 의해서 변하지만 거래의 특질이나 시장의 가동원리 자체는 고대나

지금이나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과 같이 '시장적 교환'을 하는 환경에서는 돈을 버는 것과 돈을 쓰는 차액을 사적 소유로 하는 것은 매

한가지이며, 이를 개인적으로 축적하는 권리를 주지 않으면 이런 시장 자체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이 다른 시장에서도 그대로 존재하는지를 심지어 경제학자들까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무척 엄격하고, 건조한 논리입니다. 즉 인류가 잃어버린 두 가지 시장이 오늘날 자본주의적 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시장이 움직이는 기본적인 논리 자체가 오늘날의 시장논리와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어서 한 치의 잘못된 유추 과정을

용서치 않는 분야입니다.

그런데 아무튼 그런 시장이 있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옛날에는 돌아갔지만, 오늘날에는 안 돌아간다고 이야기하면 되겠습니까? 즉 고대에 돌아갔다면 현대에도

돌아가게 하는 아주 객관적인 논리를 추출해 내야 하는 분야가 경제인류학이라는 말씀입니다.

화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대에 직접민주주의 방식으로 '만장일치'가 이루어졌다면, 오늘날에도 똑같이 이루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어떤 기제가 명확해야 하지만, 이 기제는 사실 건조하기 짝이 없는 분야입니다.

즉 시대성에 구애를 받지 않는 지극히 객관적인 논리를 확보해야 되는 분야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제인류학적 논리가 의외로 고대와 현재, 신화와 현실의 갭을 메우고, 흩어진 정보들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검증수단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검증할 수 있는 논리는 있으나, 시장의 '자기 완결성'과 민주주의의 '비소외적 실현성'을 충분히 이루게 하는

정보 자체가 부족한 입장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구슬을 꿸 수 있는 실은 있어도, 실에 꿸 구슬은 없었다는 점입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충격성  

 천문(天文)으로 쓰여진 세계 인류가 따라야 하는 천헌(天憲)  

 

그러다가 김지하 선생이 주축이 되어, 각계각층의 전문인이 필진이 되어 중앙일보에서 추진하려다가 유산된 프로그램

'마고를 찾아서'에 기획위원으로 참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진행과정에서 알루 박희준 선생을 알게 되고 그의 소개로 한배달에서 청암 김대성 선생님과 고담 노중평 선생님이

주도했던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대한 해설과 금문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우리의 신화의 폭이 하늘에 펼쳐져 있고,

따라서 그 하늘 밑에 있는 지구 전체에 당연히 펼

 

 쳐져 있겠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이르렀고, 신화학 자체에 대한 깊은 관심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고구려 때부터 내려져 오는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놀랍게도 하늘의 뜨락을 '천시원, 자미원, 태미원'의 셋으로 구분합

니다.

이런 구분 자체가 제 자신을 경악하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 알다시피 헌법이란 성문법과 불문법으로 나누어집니다. 역사와 전통이 깊은 나라인 영국과 같은 경우,

중요한 헌법의 내용 자체가 민중의 심성에 각인된 사건으로 남아 있기에 불문법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지요.

그런데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인류가 따라야 할 헌법을 세 별뜨락에 천문으로 적어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시원은 경제체제를 신시로 함을 여러 별자리를 통해 설명하고 있고, 자미원은 정치체제를 화백으로 함이 또 여러

별자리를 통해 설명하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 태미원을 통해 이 두 체제의 주인이 일반 시민이라는

것과 이를 조화시키면서, 자신의 덕이 우주 가득히 뻗어나갈 수 있는 이치와 이를 돕는 여러 개념이 표현되어 있음이

명백히 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세 별뜨락 상호간의 의미에 대해서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학 및 경제인류학은 이미 말했듯이 기존 체제와 독립된 기제를 아주 엄격하고 건조하게 논리사슬로써 풀어서 증명

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독립된 기제가 없으면, 고대에 잃어버린 기제를 재현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런 독립된 기제로서의 논리사슬이 저 하늘에 쓰여 있는 천헌(天憲)으로부터 수많은 별의 상관성의

호관련성을 쉽게 파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입장에 서 있게 되었음이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간 신시(神市)와 화백(和白)에서 논리적으로 반드시 요청되는 이른바 'logically requirement"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 천시원, 자미원, 태미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경제적 논리 이는 economy의

번역어가 아니다.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약어로 쓴 것이다. 는 얽혀 있는 관계를 해명하는 하나의 열쇠일 뿐이었습니다.  

 

 

4. 우리의 신화를 왜 군국주의자들과 봉건주의자들은 두려워했는가?

 

우리 신화의 빙산의 일각인 고조선과 단군신화만으로도 두려워한 일본 군국주의

 

고조선은 인류사에서 중요한 역사이자, 그 신화는 그 이상 중요한 역사이다

 

인류가 '따라야 할 하늘의 헌법'을 쓴 민족이 잃어버린 신화의 진정한 모습이 도대체 무엇일까?  

'왜 일본학자들은 고조선은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다'라고 그토록 매도했는가? 왜 삼국사기

 

 

에는 신화가 신화답게 두텁지 못하고 마치 도배하듯이 얇게만 깔려 있는 것일까? 하는 본격적인 의문이 일어나게 되었

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질문에 먼저 답하는 것이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는 왜 중요한가?'하는 오늘 이야기를 듣기에 앞서 정리되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는 흔히 단군신화라는 이름으로 그 빙산의 일각을 보여주던 것을 빙산 전체를 드러내는 길고

긴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단초이자 빙산의 일각인 '단군신화 그 자체가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다'라고 맹공격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일제시대 때 금서룡(今西龍)입니다.

금서룡은 '단군신화는 일부 불승(佛僧) 혹은 무격참위가(巫覡讖緯家)들이 날조한 이야기이다'라는 한마디로 이 신화를

무시했습니다. 이런 공격이 무서운 것은 '단군과 고조선은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다'라는 공격성과 더불어, 또 다른 공격

이 숨어 있다는 점입니다.

'즉 단군과 고조선 이야기는 날조된 신화이지, 신화도 아니다'라는 숨어 있는 암격(暗擊)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금서룡으로 대변되는 일본 사학의 주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의 사학은 고조선의 역사를 밝히는 데 주력했고,

많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즉 '고조선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라는 점'을 진지하게 연구해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군과 고조선이 어떤 신화인가?' 그것이 과연 날조되었는가? 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길고 긴 역사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고, 변형된 것은 무엇인가? 하는 본격적인 질문에는 그동안 일부 몇몇 민속학자와 언어학자 이외

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금서룡이 날조라고 몰아세운 이유  

-  우주 평화(star peace)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인류는 지구에 태어났다는 환인 제석천의 신화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왜 금서룡이 '날조된 신화'로 몰아붙였는가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지금도 그렇지만, 일제시대 때에도 '불교도'가 많은 나라입니다.

불교 경전에는 환인 제석천 인다라의 신화가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신화의 내용을 이미 도당굿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소개드린 바가 있습니다.


환인 제석천 인다라의 신화는 요컨대 인류가 우주 평화(star-peace)를 실현하기 위해 지구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망각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제도 역시 하늘의 헌법으로 쓰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헌법에 의해 전세계의 모든 나라를 조선화 '흐르는 나라'화(化) 로 하기 위한 원형의 나라가 고조선이라는 것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을 겁니다.  

이는 침략국 입장에서 보면 매우 곤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테라우스(천조대신)로부터 신의 자손으로 만대로 내려오고 있는 민족'이라고 자신의 신화까지도 왜곡시켜 일본

서기가 자신의 신화를 왜곡시킨 원점이다. 그대로 자신의 민중에게 강요하는 것이 일본 군국주의의 본령(本領)입니다.

이런 군국주의로서는 '모든 인류가 다 하느님(별)이었다. 그 별들끼리의 아름다움을 이 지구상에 완성하기 위해서 만들

어진 나라가 고조선이다'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더구나 일본 천황가는 이미 여러 연구가 나왔지만, 한국의 무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황의 이름을 부르면서 옥쇄함을 영광으로 가르치던 일제의 정당성을 한국의 무

 

 속과 신화 자체가 부인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사실, 금서룡이나 일제 군국주의자에게 있어서는 고조선이라는 역사 자체가 두려울 리는 전혀 없습니다.

수천 년 전에 이미 역사상에서 사라진 나라가 무엇이 그리 두렵겠습니까? 또 그런 나라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

때문에 내선일체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오히려 고조선과 단군이 품고 있는 그 신화 자체가 훨씬 공포스러웠던 것입니다.

 

자기함정에 빠지는 군국주의

 

인류 역사상에는 군국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군사력(폭력)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무리를 뜻하지요.

군국주의는 그 자체가 악이기도 하지만, 그 폭력성보다도 나쁜 것이 피침략국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인정할 수 없는  

그러면 '나쁜 놈이니깐 복종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펼 수 없으니까요  그 왜소성, 자기 문화하고만 결합을 주장하는

문화 근친상간적 행위 자체가 더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체의 군국주의는 운명적으로 자기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침략국에, 자신의 문명에 부족한 것을 치유할 수 있는 소중한 신화와 문화가 있음을 어쩔 수 없이 깔아뭉

개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신병자가 정신치료사를 제일 먼저 죽이는 오류를 군국주의는 항시 범하기 쉬운 겁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군국주의는 힘이 강한 쪽에서 취하는 군사전략인데, 피침략국은 이와는 다른 문화 원형을 고수하느라, 대개 힘이 약해

진 상태에 있기 쉬운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약해서 패망하는 것하고, 강하지만 자기함정에 빠져 멸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일본이 한국 문화를 그 어떤 나라보다도 더욱 심각하게 말살한 것은 일본의 군국주의 전체를 뒤흔드는 이상한 신화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신화는 역사가 아닌 허구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근저에는 반드시 그 신화가 두려운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고 일반론으로 승화시켜도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재라도 창조하기 힘든 신화의 서사적 두께  

-  심원함과 포괄적인 방대성, 정신세계의 '불확정성 원리'

 

우리는 일본인들이 당시 세계 정복을 꿈꾸었고, 또 한국, 만주 등의 각종 사서(史書)를 수집해 갔고, 또 막강한 재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가정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신화와 역사에 대한 자료로써, 이미 사라진 신화를 떠올리는

서사적 홀로그램적 통합으로, 일본의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해서, 역으로 한국 신화를 껴안는 신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도저히 재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고, 또 문화적인 천재라고 할지라도 시도하기 힘든 불가능에 가까운 가설

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일반적으로 신화는 독특한 구조적 문제 때문에 그 층이 두터울 수밖에 없는 구조를 띤 서사학의 장르입니다.

수많은 신들의 계보와 수많은 사건의 연관성이 잘 구성되어 있는 특징을 신화는 구조론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성의 특징 때문에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라 하더라도 자신의 창조성만으로 구

 

 성(날조의 진지한 표현)하기에는 그 심원함과 스케일의 두터움 양쪽에 부하가 걸려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심원하려면 한 가지 사안에 깊게 파 들어가야 하며, 그 결과 제한된 분야에만 심원하지, 포괄적인 분야 전체에 대해서 심원하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 신화는 그 구성 영역이 단순히 이성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영역에 걸쳐 있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이 점이 더욱 창조적으로 만들어내기 힘들게 하는 분야입니다.

즉 정신과 영혼을 구성하는 신화의 경우는 구성하는 자가 구성하려는 정신과 영혼에 '참여'해야만 되는 아주 특이한 분야

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이 조직하고자 하는 정신에 깊게 참여하여야만, 그 정신세계가 구성된다는 일종의 '불확정 원리'가 통용되

는 것이 신화의 세계입니다.


실제 일본과 더불어 주축국이었던 독일은 고대 독일 신화와 주축국의 신화를 잇는 제3제국의 신화를 만들려고 광분

했으나 실제로 잘되지 않았습니다.  

정신이 물질이 아닌 것은 그것이 참여에 의해서만 발견되고 구성되며, 타인의 공감을 받지 못하면, 결코 정신이 사회

적인 힘으로 뻗어나가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바로 이런 특징 때문에, 신화는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내러티브'이긴 하나, 잘 만들어지기 힘든 '내러티브'로 그 가치

가 있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 신화를 호도한 봉건주의 사관

 

또 하나의 중요한 사례는 바로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화는 초창기의 건국신화로서만 잠깐 소개됩

니다. 이는 마치 빵에다 버터 바르듯이 신화를 발라놓고 그 다음에는 금방 역사시대로 들어갑니다.

신화는 처음에 등장해야 하는, 마지못해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이거나, 간혹 가끔 등장하는 에피소드 정도로 격하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지하다시피 삼국사기는 봉건주의 유학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화는 놀랍게도 가장 발달된 사회주의 모습과 민주주의 모습이 다 조화된 신화입니다.

도저히 봉건주의적이고 유학적인 세계관으로 새로운 나라를 꾸려가려는 고려 입장에서는 삼국에 있었던 민주적인

어떤 체제적 실상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신화를 두텁게 보여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지만, 싫어하는 내용은 편집상 빼버리면 그 빼버린 내용을 알아차리기 힘든 그런 속성을 지닙니다.

즉 삼국에 있었던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을 빼버려도 후세의 사가들이 기록되지 않은 내용을 눈치 채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화는 한 내용이 다른 내용 속에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 부분을 빼버리면 빠져버린 내용이 어떤

성격을 띤 것이라는 추측이 금방 가능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신화는 그것이 구성되는 층위가 인간의 두뇌(이성)에 있지 않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근저에서 구성

되고 있기에, 특정 정신을 설파하기 매우 용이합니다. '과학자의 정신은 무엇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들으면 그 정신이 홀연히 이해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는 일반 시민이 나라를 마치 저금 빼오듯 들고 와서 솥터[소도(蘇塗)]에서 용융시켜 나라

를 임의껏 만드는 내용을 가장 핵심으로 하는 신화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삼국사기 초두에 건국신화 자체도 상세히 적기 곤란한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 한국 신화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할 수없이 기술하려니 그야말로

호도(糊塗)  바르듯이 취급했던 것입니다.

 

 

5. 일연(一然)의 신화관 -  문명비판적 문명배태론

 


'우리의 신화가 사라졌다. 우리 신화가 있기나 한가?' 이런 문제의식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봉건주의와 군국

주의 때문에 한국 신화가 사라지게 되었다면, 이처럼 역사가 용납할 수 없는 신화와 실제 역사와의 관계를 어떤 면에서

관찰해야 하는가? 또 신화와 역사의 근본적인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또 다른 문제의식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겨집

니다.  

이 점이 사라져가는 여러 신화를 편집해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은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소론을 서문에서 적고 있는데,

가장 탁월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연의 이 서문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역사(문명)와 신화를 비교신화학의 관점에서 폭넓게 관찰할 수 있는 문명비판

적인 비교신화학의 관점까지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합니다.

 

'무릇 옛날 성인이 바야흐로 문화[예악(禮樂)]로 나라를 창건하여 도덕(道德)으로 교화를 베풀 때에 괴변이나 폭력이나

도깨비 이야기는 어디에서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고 할 때는 부명(符命)을 받는다 도록(圖 )을

받는다 하여 반드시 여느 사람과 다른 데가 있은 후에야 능히 큰 사변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고 큰 사업을 성취하였다.

그러므로 황하(黃河)에서 그림[하도(河圖)]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낙서(洛書)]가 나오면서 성인이 나타나게 되었

으며 무지개가 신모(神母)를 둘러싸서 희(羲)를 낳고 .'  

 

 

문명비판적인 관점의 잣대로서의 괴력난신

 

먼저 일연은 문화와 도덕이 있는 문명을 일으키는 사람은 공자가 말하는 바와 같은 신화라고 할지라도 '괴력난신(怪力

亂神)의 신화로는 절대 그 기조를 삼지 않는다'하는 것을 피력합니다.

어떤 나라, 문명의 배태에는 반드시 신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자학에서 강제력(폭력)이 알력을 소화해내는 질서를 넘는 것을 난(亂)이라 합니다. 강력한 힘으로 일어나는 나라는

폭력의 신화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로마가 그 예입니다. 그러나 난(亂)에 빠지지 않기 위해 로마의 신화는 질서 즉 법과 지중해적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그 근저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또 신(神)의 힘 오늘날 표현으로 말하자면, 유전자 조작과 같은 신기한 과학의 힘으로 새로운 문명이 배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괴상(怪狀)한 이야기, 예를 들면, '여불위의 아들이 진시황이 되었다'는 식의 신화나, '자신의 사격 명령을 듣지 않는

사람을 철저히 처벌하면서 그 사격 대상을 애마(愛馬), 애첩

 

 (愛妾), 친부(親父) 순서대로 옮겨가서 묵특이 흉노를 강성하게 하였다'라는 등등의 이야기는 이면사를 들추어내는 괴상한 이야기로서 이런 괴상한 신화를 기초로 일어난 역사와 문명은 일시적으로는 흥성할 수 있으나 절대로 오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 력(力), 현실적인 근면 성실함을 바탕으로 세워진 역사와 문명은 그것이 소외된 영혼과 정신을 껴안는 웅혼

(雄渾)함이 없어서 결코 튼튼한 역사의 기초로서 신화는 못 된다는 관점을 일연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일연의 이런 문명비판적인 신화관, 또 신화 문명 배태론은 그 어떤 역사학자나 신화학자보다 탁월한 이론이라는 점에서

깊은 경의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화 문명 배태론

 

일연은 이처럼 의미 있는 새로운 질서를 암시하는 어떤 신화체계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와 문명

이 일어선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남이 볼 때는 이런 신화가 신비하다 하지만, 일연은 신화의 기초 없는 역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이와 같은 일을 어찌 이루 다 기록하랴? 이렇게 본즉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기적으로부터

태어났다는 것도 무엇이 그리 괴이하다고 하랴.

이것이 신비로운 기적 이야기를 이 책의 첫머리에 싣게 된 까닭이며, 그 의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주 명쾌하게 일연은 '신화는 역사의 모태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이런 신화 문명 배태론의 '까닭이며, 의도(意圖)도 여기에 있다.'라는 끝 구절이 특히 중요합니다.  

저는 재야학자로서 우리 문화의 뿌리를 남이 보기에는 엉뚱한 곳, 따라서 서사적 홀로그램적 통합을 하고 있는 분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의 내용은 이런 분들이 선행 연구로 부분적인 통합을 한 것을 재통합

한 부분도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또 저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신화는 역사의 뿌리입니다. 우리의 뿌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21세기 지구촌 문명에 대해 유일

하게 인류 전체에 공감대를 줄 수 있는 신화가 우연히도 우리 신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저, 그리고 이 강좌를 듣는 여러분은 결국 새로운 문명을 세우는 공동의 기초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신화의 문명 배태론의 입장에 서면,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인류의 문명사를 거론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역사를 세우려면, 그것을 잉태하는 신화를 먼저 살려라' 또 반대로 이야기하면 '어떤 역사를 죽이려면, 그것의

바탕이 되는 신화를 먼저 죽여라'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면에서 최고의 정치는 바로 '신화 만들기'이긴 하나, 그 신화가 날조된 경우 아무래도, 문화 속에 내려오는 서사적

공감성이 부족해 일시적인 문화전략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화 만들기는 그만큼 인위적으로는 힘든 분야입니다.

이런 면에서,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전 인류가 하늘에서 별로서 그 아름다움을 공유했다가,

지상에서 만나 그 뜻을 이루기까지의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가 있는 신화체계는 그리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6. 신화 격하 방법의 세 번째 유형 -  희화화

 

신화에서 진지성을 빼버리는 희화화의 심각성

 

지금까지 우리는 신화를 격하시키는 대표적인 두 가지 전략인 '날조주의'와 '호도주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격하시키는 방법은 의외로 '희화주의(戱畵主意)'입니다.

모든 학문은 문제의 본질에 정면으로 인간정신이 부닥치는 절실함의 문제의식이 없으면 학문으로서의 생명이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학문이란 문자 그대로 본디 '자신의 문제의식 때문에 배우는 진지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심화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놀부와 흥부

-  경제적 삶의 유형이 다른 두 형제의 갈등을 묘사한 중요한 신화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의 한 자락으로 내려오는 것이 바로 '놀부와 흥부전'입니다.

여러분은 '판도라의 상자'를 알고 있을 겁니다. 운명의 상자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열게 하는 이유가 단순한 호기심

입니다. 호기심에 의해 금기의 상자를 열어서, 인류의 행불행이 결정나는 대사건이 터졌다고 이 이야기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부와 흥부전'은 전혀 다른 양상의 운명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비하고 관계에서 얻어진 씨앗, 또 이 씨앗을 키워내는 과정, 그리고 키워낸 박을 켠 결과 벌어지는 운명을 이야

기하고 있습니다.

 

호기심으로 연 판도라의 상자와 씨앗(자본)으로 심어 켠 박의 차이

 

미래에 대한 예측과 기대로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본이란 말이 씨앗(seed)에서 연원한 것인지 알고 계십

니까. 아무튼 인류의 행불행이 어떤 인자를 씨앗으로 키워낸 결과라는 관점에서, 키워서 '여는'과정에서 운명이 결정

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는 면에서 판도라의 상자와는 격조가 다른 것입니다.

'놀부와 흥부'이야기는 티베트 신화에도 똑같이 나오는 신화입니다. 이 점을 밝히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바로 부도지

에 나오는 마고성이 오늘날 티베트 지역의 카알라스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임을 고려하면, 아주 고대로부터 친연성이

있는 신화였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마고성의 이동, 그리고 이를 다시 찾으려는 결심, 그 결과 환국의 발생 등으로 대하(大河)와 같이 우리의 신화는 이어가

는데, 그런 인류 운명에 대한 관찰 가운데 한 요소로 등장한 신화 내용 가운데 바로 놀부와 흥부가 등장한다는 이야기입

니다.

오늘날 우리는 흥부적 가치관보다는 놀부적 가치관을 좀더 기리는 문명 쪽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흥부(興夫)처럼 사는 사람을 '착하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보답받을 수 없다'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경제적 삶이 다른 형제의 갈등 문제의 중요성

 

놀부와 흥부전은 서로 다른 경제관을 지닌 형제간의 문제에 관한 신화관입니다. 흥부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순환상생

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부를 만들어가는 그런 경제세계의 화신입니다.  

반면 놀부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경쟁적으로 살아가면서, 실질적으로는 상대가 경쟁 속에 매몰되게 하고, 자신은 불공정

이익을 독점하는 경제관 속에 살아가는 사람의 화신입니다.  

다시 말해, 흥부의 경제적 삶은 어떤 지역 내에서 서로가 소득과 지출을 순환상생적으로 꾸려나가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경우 타인의 존재 자체가 저축이 되고, 순환상생하는 흐름 자체가 공동체적 이윤이 되고, 자신이 손해

보는 증여도 이상하게 이윤으로 전환되는 구조를 선호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또 놀부의 경제적 삶은 남의 이윤과 잉여를 이전해 오는 데 주력하는 삶을 사는 유형입니다.

흥부의 삶이 수단과 목적이 순환상생하는 모델이어서 수단이 곧 목적이고, 목적이 곧 수단인 그런 세계여서 씨앗을

받는 계기가 '제비 다리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얻습니다. 반면 놀부의 삶은 목적에 수단이 철저히 종속되어야만 하는

삶을 사는 유형입니다.

따라서 씨앗을 받는 계기 역시 '제비다리를 부러뜨리는 상처(傷處) 이전(移轉)'으로 그 씨앗을 형성합니다.  

 

도움의 요청에 던져진 응징무기로 채택된 '밥주걱'의 문제

 

이처럼 놀부, 흥부의 신화는 경제의 유형을 대비해온 인류역사상 보기 드문 주제를 품고 있는 신화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 자체가 모두 심상치 않는 일들입니다.  

예를 들어, '남 대신 곤장 맞아주고, 그 값으로 먹고산다.' 말하자면, 이웃의 죄를 대속하는 대가로 먹고산다는 이야기

이지요. 실제 사회운동권이나 민주투사 가운데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형제간의 갈등 문제가 신화에는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와 유사한 문제를 다룬 신화와 전설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카인와 아벨입니다.

그러나 형제의 갈등이 경제적 삶의 유형에서 오는 갈등을 주제로 한 신화는 거의 없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흥부가 놀부에게 도움을 청하러 찾아갔을 때, 흥부의 형수는 응징하는 수많은 무기 가운데, 하필이면 밥주걱을 선택합

니다. 그리고는 뺨을 칩니다. 그러자 아우는 뺨에 묻은 밥풀을 뜯어먹어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하냐면, 카인과 아벨은 신하고의 사랑싸움에 형제를 죽여요. 그리고 '카인아, 아벨이 어디 있는가?'

라고 묻자 그는 '내가 그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고 대답을 합니다. 중요한 신화적 모티브예요.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오늘날 아랍과 기독교 문명은 계속 전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왜 전쟁을 하는가?

하고 물으면 '내가 그를 지키는 자이니까?'하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아랍과 기독교 간의 갈등 문제가 정말 신하고의 사랑싸움 때문에 일어난 갈등관계만에 한정되는 것이겠습

니까? 오히려 문명의 자존심, 경제적 삶의 갈등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갈등 문제를 우리 신화 속에 있다는 것은 학자들이 깊게 연구해야 할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대부분의 갈등은 형제애로 묶여져 있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경제적인 갈등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심각한 경제적 결핍 상태에서 도움을 청하러 왔을 때, 다른 몽둥이도 아닌 '밥주걱으로 뺨을 친 사건'을 다룬

것은 너무도 위대한 신화소입니다.

그리고 뺨에 묻어 있는 밥풀을 떼어먹으면서 응전하는 흥부의 모습 역시 아주 위대한 신화소입니다.

 

작가의 창작소재로만 희화화될 경우의 두 가지 위험성  - 대형 콘텐츠 사업화에서의 실패, 교육 전승의 단절성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제관의 차이를 학술적으로 진지하게 문제의식으로 지니어 이의 뿌리까지 캐어 들어가

이를 '운명적인 시간'이나 '실재시간'의 사건으로 격조를 높이는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흥미 위주로 대번에 상업성 있게 하기 위해 잔재미를 중심으로 희화화시키는 것이 상례인데 그 결과가 현실적

으로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그 결과는 원래의 흥부와 놀부가 함축하고 있는 서로 다른 경제세계의 우애와 갈등, 그로 인한 길흉의 발생이라는 어마

어마한 문제가 우리 서사성의 공감대를 받고, 나아가 인류의 공감대를 받게 하는 서사성의 바다에서 코웃음으로 사라

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해서, 더 친근하게라는 구호 아래, 시류 그것이 상업성이든, 혹은 정치선전용이든 에 영합하는 것은

본질적인 면에서도 패배를 하게 되지만, 영합성이라는 면에서도 패배를 한다는 아이러니컬한 모습을 지닌다는 점입

니다.

먼저, 영합성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우리 신화나 전설을 단순히 정치선전이나 상업적 판매용의 소재로만 삼을 경우, 큰 실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화상품의 특성은 공감대를 바탕으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본질적인 면으로는 신화는 기본적으로 후세에게 대를 이어 나가는 고대인의 교육방식이었습니다.

희화화의 위험성은 가르치는 사람이 서사성에 대해 수용성이 큰 학생들에게 스승이 왜 전수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게 하는 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신화는 운명적인 시간에 대하여 관조케 하는 해석학의 밭

 

신화는 운명적인 시간에 대한 해석학입니다. 따라서 운명적인 시간에 사물을 어찌 해석해야하는가 하는 관점을 신화를

통해 우리는 관조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따라서 신화가 품고 있는 그 진지한 문제의식을 빼버리고, 손끝재미에서 희화한 경우, 그와 유사한 문제에 부닥쳤을 때,

자신을 관조할 수 있는 위치를 인간은 찾기가 힘든 것입니다.

스승이 학생의 운명적인 시간에 섰을 때, 이를 관조할 수 있게 하는 신화를 들려줄 수 없다면, 어찌 서사적인 교육을

가르칠 수 있을 겁니까?  바로 이 점이 희화화가 전승의 주범이고, 또 우리 신화를 격하시키는 세 번째의 위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화를 격하시킨 세 가지의 흐름 날조(捏造)로서의 매도, 호도(糊塗)로서의 외면, 희화(戱畵)로써의

천박화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라진 우리의 신화를 재구성해 떠올리게 되면 실재시간과 역사적 현실을 연결시키는 여러 철학자의 시각을

동시에 살펴보면서 이 강좌를 끌고 나가려고 합니다.

 

 

 

7. 왜 우리나라는 유달리 국가수명이 긴가?

  빠져 있는 중요한 질문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 긴 강좌를 끌고 가기 앞서서 먼저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신화가 역사의 모태이다'라는 관점에 서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역사 쪽에서 신화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인류 역사상 매우 특이한 역사입니다.

그것은 유달리 왕조체제가 수명이 길다는 것이지요. '천년을 간 로마 로마에 그 무엇이 있기에 천년을 끌고 갔을까?'는

관점이 서구의 역사에 가장 중심적인 패러다임을 형성하게 된 계기일 겁니다.

권력과 법의 분리, 뚜렷한 원칙과 관용, 그리고 이를 지킬 수 있는 힘의 세계에 대한 존중, 힘의 원천으로써의 규율 등등

이 로마를 천년 동안 흘러가게 한 힘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와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장수한 나라들이 한 나라도 아니고, 줄줄이 이어지는 나라 그 나라가 다름 아닌 우리나라

역사라는 관점에서 우리 역사가들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라 천년이고, 또 고구려는 칠백 년 내지 구백 년입니다. 중국은 왕조가 대개 길어야 이, 삼백 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짧아도 오백 년입니다.

왜 이런 장수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는가? 그것도 외침이 잦은 반도의 특성에 미루어보면 매우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장수국의 모델이 바로 고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고조선의 붕괴를 한나라하고 전쟁의 여파로 보고 있는

윤내현 씨의 견해가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잡아보면 약 이천이백 년가량 고조선은 유지되었던

나라인 셈이지요. 로마 문명보다 최소한 두 배가 됩니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국가가 장수하게 하는 그 근원은 고조선이고, 고조선 때부터 있던 어떤 문화적 특질이 인류역사상

유례없이 장수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이 강좌를 이끌어가게 되지만, 관련 분야  역사학이라든가 인류학 그리고 우리의 고대 사회

체제를 바라보는 사회학 역시 이 질문에 다른 각도로 참여할 길을 열어둘 예정입니다.

 

 


8. 우리 신화만의 특질

 

 

 

   만다라적 치유로서의 통합이 되는 내용(contents)의 함유성

 

이제 이 긴 강좌를 이끌어 가기에 앞서, 우리 신화가 구조론적으로 다른 신화와 비교해서 어떤 점이 다른가를 살필

때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라는 큰 주제에 수없는 공시성의 경험을 하면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줄곧 생각하게 된 것이,

왜 이 신화는 파괴되었고, 이 파편이 왜 이다지도 세계 각각에 흩어졌는가? 하는 질문으로, 그 파편 하나하나를 재구성

해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화 분열을 극복하는 만다라적 통합으로서의 내용 회복

 

이런 작업 가운데, 칼 융을 많이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인격분열적인 충격 앞에 사람이 다중화(多重化)되는 현상에 심리학자로서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의 통합 과정으로서 만다라 부분과 전체가 하나의 치유 소용돌이에서 회통하는 그 구조 말입니다.

융은 만다라적인 통합으로써 다중인격이 치유될 수 있다는 데 직관을 지니고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똑같은 관점이 우리의 신화에 적용됩니다.  

'원래 하나였던 신화체계'가 기존 문명에 위협이 되어 파편화되어 나갔다면, 이를 통합해서 원래의 신화체계를 엮어

나가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문적인 민속학자일수록 더욱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신화는 길고 긴 역사적인 과정을 밟는 가운데 이본

(異本)이 무척 많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을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를 명확히 구별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바리데기 모친의 이름  -  '신들의 전쟁에 씻김굿을 한 우사(雨師)'

 

한 예를 들어 '바리공주(바리데기)'의 경우, 그 어머니의 이름이 여러 이명(異名)이 있는데, 그 가운데 '검탈에 병오'란

명칭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감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이름도 있기 때문에, 이 중요한

의미 연결자를 젖혀놓은 채, 바리데기를 소재로 한 어떤 작품 활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검탈이란 말은 '검[신(神)]의 탈' 즉 신(神)들끼리의 전쟁이란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병오는 병호 혹은 병예는 탁록대전에서 잘 드러나듯이 우사(雨師)의 별칭입니다.

그렇다면 바리데기의 어머니는 '신들의 싸움에 우사로서 씻김굿을 한 어떤 인물상'을 그려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바리데기 신화 자체가 신들의 싸움, 현대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문명 충돌을 문명 화해로 이끈 어떤

집안의 일곱째 공주 이야기라는 것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리데기가 저승세계에서 무장승 물장승의 연음화 표현이며, 해치(해태)를 뜻함 과 결혼해서 낳은 자손 이야

기가 인도 신화에서는 성선(聖仙, rish) 이야기로 나옵니다.

그리고 바리데기의 남편인 무장승의 별칭이 동수자(銅守者)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몽고 신화와

 

 고구려 벽화 속에 나오는 '소인간'이 악마와 싸워서 내장이 다 불타고 그 가죽이 여덟 조각 나서 북두칠성과 북극성 자리에까지 날아가는데 북극성이 황금 말뚝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칭(異稱)과 이본(異本)이 오히려 바리데기 신화를 분열시킨 반대쪽의 세계관을 파악할 수 있게 합니다.

신에 의한 문명 충돌 오늘날 '근본주의'라는 관점입니다.

바리데기의 이본들은 이러한 관점에 대항하는 연결고리를 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오히려 해 주고 있습니다.  

근본주의적 다툼에 씻김굿을 하던 우사의 집안에 태어난 여자가 바로 바리데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문명 화해, 근본주의

의 화해를 가져오게 하는 그 무엇에 이 신화가 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바리데기 신화를 만다라적 치유로 재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지평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만다라적 치유의 소용돌이로 모호한 내용이 깨달음적 내용을 띠는 신화체계

 

바로 이 점이 우리 신화의 내용상 특질입니다. 즉 흩어진 내용 모두가 한결같이 만다라적 치유 과정에서 통합할 수

있는 내용으로의 연결고리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는 이처럼 이 신화가 분열되게 한 세계관을 먼저 의식화합니다.

그런 연후에 이러한 세계관에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에게 치유를 주는 흩어진 파편화된 신화소의 연결고리를 찾습

니다.

그런 연후에 이런 연결고리를 하나씩 연결지어 신화의 요소 내용 가운데 있는 모호한 내용을, 이것이 어떤 문제에 대응

해 나온 것인가를 분명히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있는 우리 신화의 내용 가운데 모호한 부분이 돌연히 의미를 띠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모호함을 뛰어넘어 확실한 의미를 알게 된다는 정도를 넘어서는 거의 깨달음에 가까운 특징을 지닙

니다.


사실 만다라는 탱화로서 흩어진 수많은 상(像)을 통합함으로써 전체로서의 돌연한 '깨달음'을 나타내는 대승적 세계관

이 아니겠습니까? 신기하게도 우리 신화는 이런 과정을 통해야만 재구성되는 이상한 특징이 있습니다.  


바리데기 신화의 특이성 - 부모의 회생보다 더 중요한 사명 '배달화백을 지상으로 옮기기'

 

이미 들은 바리데기의 경우를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해 보기로 하죠. 바리데기는 해치와 결혼 후 아홉 아들을 낳은 뒤,

죽은 부모님을 다시 살리는 일을 해냅니다.

보통의 경우 '부모의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이룬 이 대목이 신화의 대단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데기 신화에서는 이 대목이 대단원으로 끝나지 않고 살아난 부모가 그 보답으로 남편인 해치와 아홉 아들을

이 지상으로 불러들이는 일을 합니다.

이 사건은 배달화백 고대 아시아에서 일반 시민이 나라를 통일시키고 독립시키는 일을 하던 민주적 회의 이 이 지상에

내려온 대사건을 묘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 지명 가운데 이성산(二聖山)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

도대체 두 성인이 누구인가? 하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화백회의 그것이 영산화백(靈山和白)이든

배달화백이든 의 두 주인공은 신라에서 차차웅(次次雄)으로 표현되고, 고구려에서 패자(沛者)로 표현되는 해치 즉

사법관과 이 회의 주재자인 단군입니다.

간혹 이 이성산은 여성 파트너였던 두 존재, 바리데기와 당금애기(단군애기)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화는 수많은 다른 정보를 만다라적인 치유의 소용돌이로써 통합해 갑니다.

 

 

문제는 이런 화백이성(和白二聖)의 주인공인 바리데기의 서사무가(敍事巫歌)에서 문득 모호한 내용이 나타난다는 점에

있습니다.

해치는 자신을 초대한 바리데기의 부모가 사는 궁궐을 허물고 들어옵니다.

이런 파격적인 행동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배달화백이 결국 나라의 벽을 허무는 화백회의니까요.

그리고 이 벽이 허물어진 나라 환국이 최초로 흘러다니게 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작 모호한 내용이 드러나는 것은 바리데기가 자신의 남편인지 아닌지를 묘하게도 '키를 재보는'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남편임을 알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9. 우리 신화의 구조론적 특이성 - 쌍본성

 

 

플라톤의 동굴이 없는 신화

 

도대체 왜 바리데기는 자신의 남편을 즉각적으로 알아보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하필이면 키를 재보아

야만 알 수 있는지, 또 키를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쟀는지, 그런 이야기가 원전인 바리데기 서사무가에는 없다는 말씀

입니다.  

이 문제하고 관련해서, 우리 신화에는 근본적으로 플라톤의 동굴이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어떤 이데아의 그림자로서의 현실이 전혀 없는 이상한 체계입니다.

즉 웅녀(熊女)의 동굴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나오는 동굴이지, 결코 그림자에 대해 실체가 따로 있는 동굴이 아닙니다.  

이러한 특질은 우리가 하늘의 별인 동시에 땅의 사람이라는 이상과 현실 양쪽에 본적을 두고 있는 현저한 특색 때문에

연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신화에는 주체가 되는 신의 모습이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인도적 분류체계를 따른다면, 본신(本身), 화신(化身), 응신(應身)이 바로 그것이지요.

본신은 그 신의 본모습이고, 화신은 본신이 자신의 도력이나 법력으로 변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또 응신은 타인의 간절한

기원에 응하여 나타남을 뜻합니다.  


우리 신화의 특징은 매우 특이하게도 이 본신의 쌍(雙) 즉 듀알(dual) 로 나타난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 자체가 인간이 우주의 별에서 왔고, 인간이 죽으면 다시 별이 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본신이 순환상생하는

모델이라는 점을 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 신화의 구조적인 특징입니다.

즉 만다라적 치유를 하기 위해 구조론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쌍본성(雙本性)과 하늘의 제도를 땅에 옮기기  

 

하늘에 위대한 태양이 있으면, 땅에도 염제(炎帝, 태양신을 뜻함)가 본신으로 있어야 하고,

 

 

하늘에 해치가 사는 북극성이 있으면, 땅에도 역시 그러한 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신화에 의하면 대구의 달성 북극성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 바로 땅의 북극성입니다.

이처럼 하늘에 있는 것이 땅에도 있어야 하는 쌍본신(雙本身)이란 아주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별들이 배달화백을 하는 '북두칠성'이 있으면, 땅에서도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무척 중요합니다. 의외로 땅에 있는 북두칠성의 모습이 세계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 모두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배달화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우리 신화의 쌍본신성(雙本身性)'을 들어 명쾌히 설명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 때 '배달화백이 있었는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 보면 스스로를 소개한 말 가운데 '국강상(國 上) 광개토경(廣開土境) 호태왕(好太王)'이란

구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 국강상의 강( )은 북두칠성 강( )입니다. '국가 배달화백 의회보다 높은 '이란 뜻으로 의역할 수 있는 문구입니다.

땅에 있는 북두칠성의 모습은 의외로 그 영역이 커서 한반도뿐만 아니라, 일본, 만주는 물론 더 멀리는 인도, 심지어는

수메르 문명에서도 그 흔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쌍본신이란 우리 신화의 유별난 특성이 우리나라는 '하늘의 제도를 그대로 옮겨온 나라이고, 하늘의 헌법을

그대로 따르는 나라이다.'는 문명적 자부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도의 표상인 고치(비단)  - 하늘과 땅을 잇는 징검다리로서의 의미

 

그렇다면 우리 신화의 이런 쌍본신성을 이해한 연후에 바리데기 신화로 되돌아가 원래의 질문을 음미해 보기로 합시다.

도대체 하늘의 해치와 땅의 해치가 둘 다 본신(本身)이라면, 이 둘의 상관관계는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로 여기서 얼[혼(魂)]과 넋[백(魄)]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쌍본신에 남아 있는 육체적 요소를 넋이라고 하고, 이를 이탈하여 땅의 본신이 하늘로 가고, 하늘의 본신이 땅으로 내려

오는 그것을 얼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해치가 내려왔다면 당연히 그의 얼이 그의 넋인 하늘의 븍극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겠지요.

그렇다면 땅이든 하늘이든 그 자리에 있는 넋은 이런 얼의 왕래에 의해서 점점 거듭되는 진화에 의해 진화되고 정화된

다는 것이 우리 신화의 또 다른 특징인 것입니다.

즉 얼의 왕래에 의해 넋은 맑아지기도 하고 탁해지기도 하는 과정을 밟는다는 것이죠.  


이런 얼과 넋의 관계는 결국 생명의 윤회를 전제로 한 것이기에,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얻은 신에게는 통용이 안 되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해치와 바리데기는 불사주(不死酒)를 직접 마시지는 않았지만, 악마와 싸우는 과정에서 죽음의 기운을

생명의 기운으로 바꾸는 저 황금 말뚝에서 살아가는 공덕(功德)으로 불사주를 마신 것과 진배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는 굳이 땅의 넋이나 하늘의 넋이 별개로 존재할 필요가 없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굳이 바리데기는 해치가 나타났을 때, 해치가 다른 화신으로 변치 않는 한 못 알아볼 이유까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치가 이 지상에 내려온 것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사법부'란 제도가 땅에 내려온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염제 신농이 하늘의 태양에서 내려온 것은 그 제도가 내려온 것이지요.

이 경우 제도를 마치 누에가 고치를 뚫고 나비가 될 때, 바로 누에의

 

 고치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고치로써의 제도의 하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월대(月臺)입니다.

달의 얼이 내려와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고치이자, 징검다리가 바로 월대라는 것이지요.  

이 점이 우리 신화, 즉 천손족의 신화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특이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해치가 내려올 때, 그는 이 세상에 남길 제도라는 고치를 업고 내려와야만 하는 소명이 있었고, 바리데기는 바로

그런 소명감을 일깨운 여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남편인지 아닌지를 이 고치를 재는 의식으로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둘 사이는 부부 사이입니다. 결국 바리데기는 남편과 함께 잠을 자던 침대를 재는 의식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해치와 바리데기가 맞서 싸운 악마의 변신술이 해치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능수능란한 악마라 할지라도, 이 배달화백이라는 고치를 뒤집어쓰면, 악마의 위력을 잃게 된다는 것을

바리데기와 해치는 잘 알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신화가 만다라적 치유의 소용돌이로 여러 신화에 관한 정보를 모으면 모을수록 문득 모호한 내용이

깨달음에 가까운 의미 비상(意味飛上)이 일어나는 과정을 알 수 있겠지요?  

 

 

 

갑비고차(甲比古次) 도당(都堂)굿의 신화적 함의

 

가슴고치(갑비고차)의 별제사 -  도당의 의미를 찾아서

 

여러분은 단군 때부터 유명했던 초제 별들의 제사를 지냈던 저 강화도의 고대 명칭이 갑비고차임을 잘 알고 있을 겁

니다.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가슴고치'입니다. 매우 아름다운 명칭이지요,

강화는 바다 속에서 인간의 얼굴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듯한 모양을 한 아주 특이한 섬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마니산 참성단은 바로 턱의 위치에 속합니다. 따라서 강화는 한쪽 귀는 대륙에서 인류의 소리를 듣고, 또 한쪽 귀는

바다에서 인류의 소리를 들어 하늘의 또 다른 짝의 본신(本身)인 별들에게 턱을 움직여 이야기하는 특이한 신화를

지닌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의 별들의 이야기를 가슴을 다해 대변해서 하늘의 사람들이 그들의 고치를 계속 지상에 하강시켜 달라는

기원을 하는 성지였음이 우리 신화의 특이성과 강화의 지명을 연관시키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제천행사를 할 때나, 혹은 시장에 참여할 때는 우리 조상들은 반드시 비단옷을 입음이 드러납니다.  

그 이유는 이제 자명합니다. 비단으로 상징되는 하늘 제도의 하강,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얼을 천인(天人)답게 고양

받을 수 있고, 사후에는 별이 되더라도, 그 비단의 공덕으로 별빛을 더 깨끗이 한다는 믿음이 바로, 비단옷 자체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비단길이란 말은 오늘날에는 비단이 무역되던 길의 의미로 많이 쓰이고 그 명칭 자체가 서

 

 양 사람들이 붙인 것입니다.


러나 원래 비단길의 개념은 이런 지상과 지상을 연결지어가는 교역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의 별과 땅의

사람이 이어지게 하는 우주적 통합의 길로 우리의 신화 속에서 드러납니다.

이런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신화만이 가지고 있는 만다라적 치유의 구조론적 특질입니다.

한자에서는 덕(德), 헌(憲), 강( ) 등 '사(四)와 같은 모습'이 늘 들어 있는데 이는 그물망 요즘 말로 네트워크를 나타내는

부호입니다. 즉 하늘에 별들끼리 서로 빛을 주고받는 비단길을 뜻하는 것이고, 또 지상의 인간과 하늘의 별이 커뮤니케

이션하는 길이 원래 의미의 비단길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과의 비단길의 원점으로서 고조선 사람들은 저 가슴고치의 땅인 강화도를 택했던 것입니다.

 

신화에 보면, 원래 인간의 얼은 비단을 뿜어대는 누에가 그 원형이고, 또 넋은 무지개임이 명쾌히 드러납니다.

즉 다루칸들은 '우리의 얼은 누에, 우리의 넋은 무지개'임을 외쳤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과 땅의 쌍본신(雙本身)이 왕래할 때, 지상에 제도로써 고치(비단)를 가지고 온다는 특질은 우리 신화에

한결같이 일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도당굿의 신화적 모티브 -  태양이 땅에 내려오고 웃음을 되찾는 축제

 

한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기로 합시다.

마고가 천지를 나눈 후, 태양은 땅으로 내려가기로 한 약속을 거부하면서 한사코 내려가기를 싫어합니다.  

왜냐면 태양은 하늘과 땅으로 순환상생하는 길이 차단된 것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이 눈물이 떨어지는 통로가 저 몽고에서 황금 말뚝으로 묘사하고 있고, 산해경에 촉룡(燭龍)으로 묘사되어 있는 오로라

의 북극광입니다. 즉 태양의 눈물이 떨어지는 과정에서 거대한 촉룡의 황금 말뚝 오로라가 생겼고, 그 눈물이 바람을

타고 지상의 여러 곳에 흩어져서 된 것이 바로 황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고와 거북할아범의 논쟁 때 약속한 사회주의의 보증으로서의 흙이 이때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한자의 사(社)는 문자 그대로 흙 토(土)와 보일 시(示)의 회의(會意)입니다.

왜 약속을 어기냐 하는 질책으로써 흙을 바른 무지개 도기(陶器)에 태양은 그만 체포되어 내려오게 됩니다.  


이런 신화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시(神市)체제에서는 전 인류가 외환거래를 하지 않고, 계(契)를

묶어주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 수장을 단군이라고 하는데, 단군 위에 단군 하는 식으로 누층적으로 단군이 여럿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조직의 세포를 사(社)라고 합니다. 사(社)란 조직의 최정점에 도당(都堂)이 있게 됩니다.  

따라서 도당의 축제는 신시(神市)적 거래가 왜 순환상생을 하게 되어, 하늘의 일월성신과 땅의 다루칸이 모두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큰 주제로 축제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신화로 돌아갑시다. 태양은 억지로 이 지상에서 사회주의(社會主義) 서구에서온 socialism과 communism의

번역어가 결코 아님, 원래 동양에 있던 사(社)들의 모임이 만드는 경제체제를 뜻함 의 약속을 위해 끌려오면서, 눈물을

한없이 흘립니다.

 

 

그런데 이런 태양의 슬픔을 꺾기 위해 태양조 즉 황금 독수리는 저 남두육성(南斗六星)으로부터 북두칠성의 사이 즉

황금 말뚝을 관통시켜, 원래 죽음의 배달화백이 펼쳐지던 북두칠성에게 생명의 통로를 마련합니다.  

우리 무속에서는 별들이 회의하는 호수(湖水)를 두(斗)라고 하는데, 특히 남두육성은 생명의 탄생을 다루는 것이고,

북두칠성은 죽음의 기운을 별들끼리 회의를 해서 결정하던 곳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북두칠성의 죽음과 남두육성의 생명은 단절된 상태로 되어 있었고, 그 결과 생명력의 우주적인 순환상생이

막힌 것입니다.

황금 독수리가 인도에서 태양조로 불리는 까닭은 바로 이 태양의 슬픔을 거두게 한 새라는 뜻이죠.

아무튼 죽음과 삶의 기운을 단절시킨 황금 말뚝으로의 대비행 사건으로 태양은 다시 웃음을 되찾게 됩니다.

그 이후에 하늘의 태양은 울지 않고, 오히려 일본 신화에 드러나듯이 자신이 숨었을 때 사람이 웃으면, '왜 내가 없는데도

웃을까?' 하고 다시 닫았던 굴문(窟門)을 여는 존재로 변하게 되고 맙니다.

 

물론 이런 재구성 과정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만다라적인 치유 과정으로서 흩어진 신화들의 재통합'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통합해서 재구성된 내용을 보아도 또다시 우리는 우리 신화만이 지니는 구조상의 특질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제도가 하세(下世)하는 대표적인 상징이 비단의 원재료인 누에고치이고, 또 그것이 월대(月臺)로 묘사되고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월대를 또 다른 말로 당(堂)이라고 합니다.

전통적인 동양 집들은 문(門)이 있고, 그 다음에 월대인 당(堂)이 있고, 그 위에 일종의 열린 신전인 집이 있고,

그 집안의 방을 실(室)이라고 칭합니다.

공자는 이런 가옥 구조에 비교해서 학문 수준을 거론하기도 했지요. 즉 누구는 문(門)에 들었으나 당(堂)에 오르지

못했고, 누구는 당에 올랐으나, 실(室)에 들지 못했다는 식으로 그 경지를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옥 구조를 통한 설명보다는, 한옥(韓屋)의 모양 자체가 아주 특이하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듯싶습니다.

한옥은 마치 하늘이란 바다를 타고 가는 배[선(船)] 모양인 듯하기도 하고, 또 새[조(鳥)] 모양인 듯도 한 인상을 줍니다.

따라서 당(堂)을 그냥 배라고 보는 것이 가장 진솔한 비유가 될 듯싶습니다.

제가 다시 당(堂)의 의미를 누에고치와 월대와 연관시키고, 다시 이를 배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은 강화 참성단에서

베풀어졌던 '도당굿'을 재음미하기 위함입니다.

이 도당굿을 살펴보아도 우리 신화의 구조적 특성이 더욱더 뚜렷해짐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이미 도당(都堂)이 고대 경제제도의 세포조직인 사(社)의 최정점에 있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사(社)를 민속에서 우리말로는 서낭당이라 하는데, 이는 이를 한자로 쓸 경우 선왕당(船王堂)이라고 기록

하는 경우, 역시 고대의 우리 문명과의 깊은 연관성을 드러내기 위한 이두(吏讀)인 듯싶습니다.

즉 배달화백에서 타던 수상연단(水上演壇)이었던 가마를 타는 왕 즉 다루칸(darukhan)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루칸의 작은 집들의 최정점에 있는 도당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띠겠습니까?

바로 지구라는 대형 우주선 전체를 뜻하는 고대적 명칭이 아니겠습니까?

 

 

막힌 하늘과 땅의 순환상생을 회통시키기 위해, 지축인 황금 말뚝을 처음 뚫은 황금 독수리로 불을 피운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문자 그대로 도당 지구인이 모두 함께 탈수 있는 가장 큰 배 즉 지구(地球)라는 우주선 의 축제

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천인(天人, 하늘 사람)이 원래 하늘로 유유자적 배를 타고 다가가는 축제이고, 또 하늘이 그

징검다리를 놓아서 가까이하기에 두렵지 않게 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대축제일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류의 유일한 임무  - 스스로가 살맛나는 세상의 건설  

 

우리 신화의 구조적 특성이 중요한 것은 우리 굿 문화에 오해되고 있는 잘못된 개념과 용어를 바로잡고, 그 원형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황금 독수리가 남두육성과 북두칠성을 연결시키자, 태양은 웃고, 이 웃음이 바로 쌀( )입니다.

즉 인도신화에서 인기 있는 여신 '살'여신이 바로 황금 독수리가 지축인 황금 말뚝을 통과한 직후, 그 생명의 기운으로

탄생한 쌀 여신의 이름이 살이라는 것이지요.  


살은 '불사르다'에서 보다시피 원래 불을 뜻합니다. 따라서 살풀이는 살(殺)을 푸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불'을 뜻합니다.

황금 독수리에서 피운 불로써 화백(和白)의 불을 켰고, 또 신시(神市)의 불을 켰던 것입니다.

이 신시와 화백을 경제인류학적으로 재현시켜 보면, 결국 이런 사회체제는 전쟁, 테러, 부채에 대해 끊임없이 씻김굿이

일어나는 체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을 노예화하는 근본주의, 전쟁, 부채가 현실적으로 있을지라도, 이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즉 유토피아를 그려

낸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 있더라도 이를 받아들여 늘 씻김굿을 해내는 체제라는 것입니다.

천지를 회통시킨 저 황금 독수리의 비행이며, 또 자신의 속살을 끄집어내어 비단을 뿜어내는 누에고치의 신화는 현실

에 없는 이상세계를 그려낸 신화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과 부채, 테러가 만연한 현실을 그대로 두고 이를 씻김굿을

하는 징검다리 즉 월대를 쌓아가는 그런 신화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우리 신화가 다른 신화와 역시 크게 다른 궁극적인 차별성입니다.  

그리고 이 체제의 주인이 바로 다루칸, 즉 세계시민 칸이란 뜻입니다.


다루칸은 이 세상의 못된 구조를 그대로 안고, 살[불(화(火)]로써 달구어 이 사회 전체를 존재 변형을 시키는 그 주체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저 가야의 구지봉에서나 참성단의 황금 독수리로써 굿불을 피울 때, 영산 줄다리기를 할 때마다,

그들은 '나도 칸, 너도 칸, 그대도 칸…….'이란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들은 살( ) 즉 불을 피우는 것은 무척 단순한 이유일는지 모릅니다.

인류애, 인간애의 불맛 즉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일 겁니다.

 

따라서 '조선의 꿈, 한국의 신화'는 인류역사상 가장 긴 신화인 동시에 가장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살맛나는 세상을 위해서 모든 인류와 우주가 협동하려고 우주는 창조되었다는 가장 짧은 이야기입니다.




좌계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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