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시대의 천문학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재 또는 자료로는 크게 네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첫째는 고구려 고분이나
첨성대와 같은 유적, 둘째로는 옛 천문도나 해시계와 같은 유물, 셋째로 사서 등에 전해오는 천문학 관련 사건이나
고대 천문관측 기록, 그리고 사서와 옛 학자들의 문집 등에 나오는 천문학적 지식이나 해석에 관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출처들로부터 얻은 천문관련 자료들을 현대적 관점에서 분야에 따라 다시 분류하면 ?. 천문관측의기(儀器),
遁. 고대 천문관측자료, ?. 역법, ?. 천문사상, ?. 천문 관련 제도 등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우리는 현전 문화재들로부터
우리의 전통 천문학이 이 각 분야들에서 어떻게 발달해 왔으며, 그 수준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과학을 살펴보고자 하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는 우리나라에서 전통과학이 어떠한 필요에 의해 언제 시작
하였으며, 그 발전과 굴곡의 양상과 계기들이 무엇이었고, 현재의 과학과 어떠한 연결을 짓고 있느냐일 것이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문화 발달의 수단과 양식에 있어서 전통시대와 비록 다른 면이 많지만, 과학을 비롯한 제 문화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과학이 흥기하고 쇠락하는 과거사를 돌이켜보는 일은
오늘날 과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많은 것을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전통 천문학의 내용을 위에서 언급한 분류에 따라 구체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우선 우리나라에서 천문학
이 발달해온 과정과 그 의의를 전체적 관점에서 간단하게나마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전통 천문학의 발달과 의의
우리나라에서 천문학은 실용적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필요에 의해 발달하였다. 하늘의 해와 달의 움직임, 계절에
따른 별자리의 변화, 유성과 혜성의 출현 등과 같이 생생하고도 경이로운 천문현상에 대한 이해는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문제이었을 것이다.
천문현상을 관찰하고 이용한 사례가 세계의 여러 고대 문화에서 발견되는 데에는 이러한 인간의 공통된 성향에 기인
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천문현상 중에 가장 두드러진 현상인 해와 달과 별들의 움직임을 주목하면 쉽게 그 주기성과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일년 중의 시기, 즉 절기나 하루 중의 시간, 그리고 방위를 천체들의 위치 변화로부터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각과 절기와 방위를 정확히 알아내는 일은 농경민들에게나 유목 또는 해양민들의 생활에 있어 모두 필수적인 과제
들이다. 따라서 당시의 지식인과 지배 계층은 자연히 이러한 의무와 특권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가 위치한 동북아시아에서도 수 천년 전부터 천문학이 정치와 종교에 결부되어 제왕의 학문으로서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고대천문학이 발달해온 과정의 특징을 보면 중국문화권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 중국의 정치 문화적 세력권 안에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당연한 결과이었다. 따라서 약 2000천년 전
부터 상고할 수 있는 우리의 천문학이 체계적으로 시작한 시점은 중국식 별자리나 천문도와 같은 천문지식이나 천문
제도의 전래, 불교를 매개로 한 인도와 서양 천문학의 중국을 경유한 전래 등에서 일단 더듬을 수 있다.
이러한 천문학 전래 기록이 알려져 있는 삼국시대 이전에는 우리나라의 천문학이 어떠한 수준이었는지를 가늠하기에
사료나 유물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 천문학이 발달해 온 과정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특징은 천문학의
수행이 왕조의 극히 중요한 임무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지위가 매우 높은 천문관청과 관리가 지속적이고 철저하게
천문현상을 관측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관제에서 관상감이 정일품 영의정을 영사(領事)로 한 대규모 조직으로 구성되었던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나라는 중국과 함께 세계에서 유일하게 2000년 이상의 기간동안 천문현상을 체계적으로 관측하여 방대한 기록을 남겼고, 관측자료의 질에 있어서 신빙성과 이용가치가 매우 높은 기록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우리의 전통 천문학의 발달에는 중요한 내부적 외부적 계기들이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주로 통치자인 왕의 의지와 왕조의 안정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왕조가 안정된 시기인 15세기에 세종대왕의 의지로 말미암아 천체관측기기의 제작이나 역법의 완성, 천문서의 발간과 연구, 천문학자의 양성이 강력히 추진되어 우리나라의 천문학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것은 주목하여야 할 사실이다.
또한 각 왕조들이 500-1000년의 오랜 기간 동안 지속해 오면서 천문관련 관청이 꾸준히 천문학 연구와 천체관측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타민족에서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며, 우리나라 천문학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천문학 발전의 외부적 계기로는 국제적 교류에 의한 새로운 천문지식과 제도의 전래를 들 수 있다. 사료에 따르면 늦어도 삼국시대 초기에는 이미 중국의 천문지식과 제도가 우리에게 수용되었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중국과는 다른 유형의
천문관측과 기록이 수행되었었다는 증거들이 있지만 중국 천문학은 삼국의 천문학에 분명히 큰 영향을 미쳤었다.
중국식 우주구조론을 따른 건축양식을 보이는 유적이나 고구려 고분의 천문도 등에서 그러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천문학은 우리나라의 전통 천문지식을 대표하게 되었고, 그것은 조선 후반기에 서양 천문학이 전래될 때까지도 큰 변화가 없었다.
또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의 천문학은 일본의 천문기술과 사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전통
천문학이 다소 침체된 시기였던 16세기 말부터 전래되기 시작한 서양 천문학은 조선의 학자들에게 있어서 천문학에
대한 기본 자세부터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하늘의 천체들이 운행하는 상황을 현상적으로 더욱 정교하게 묘사할 수 있는 모형을 만들려는 노력 대신, 그러한 운행의 이면에 있는 자연의 실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관심의 변화와 확장이 일어났다. 프톨레마이오스와 티코 브라헤의 우주구조론, 망원경을 사용한 갈릴레오의 관측 등이 소개되면서 우리나라의 천문학은 전통적 천문지식을 넘어서서 새로운
발전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서양 천문지식과 방법의 전래는 천문학에 대한 전통적 인식과 뒤섞이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천문 유물과 유적
전통 천문학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으로서의 천체 관측의기나 천문도, 고대 천문대, 그리고 사서에 설명된 고대 역법과 천문 관제에 대한 내용과 의의 등은 과학사적인 문제들로서, 많은 과학사 서적들이나 문화재 소개서 등에 상세한 설명이 있다.
1. 천문대
먼저 천문관측을 수행하는 공식적 장소로서의 천문대를 보면 신라 선덕여왕 때(7세기 초) 축조된 첨성대, 고구려 평양성 안에 있던 첨성대 (세종실록의 기록), 개성 만월대 서쪽에 있는 고려시대의 첨성대, 늦어도 고려시대에는 축조되어 사용된 강화도 마니산 잠성단(暫星壇), 경복궁 안에 있던 대간의대(大簡儀臺, 임진왜란때 파손)와 조선의 세종대왕 때 세워졌다고 추정되는, 현재 비원 옆에 있는 관천대(觀天臺), 숙종 14년(1688)에 세워져 현재 창경궁에 있는 관천대 등등이 있다.
신라 첨성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 고대 천문대로서 그 우아한 미와 천문지식의 용융과 조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천문관측대이다. 몸통을 원으로 머리를 정사각형으로 만들어 당시의 우주구조론이었던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담았고, 기단부에서 상단부까지 29층으로 석재를 쌓아 음력 한 달의 날수와 일치시키고, 석재의 총 개수가 일년의 날수 365와 거의 같도록 축조되었다.
높이는 9.5 m이어서 높이가 24 m 정도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천문대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이 경주 첨성대는 백제 점성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첨성대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당나라에서는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가, 일본에서는 점성대(占星臺)가 축조됐다.
개성 만월대 서쪽에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천문대에 대해서는 제작연대와 사용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상고할 수 없지만 고려시대의 많은 천문관측 기록들이 이와 같은 천문대에서 수행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또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있는 잠성단은 몽고의 침공을 피해 고려시대에 강화도 피난했던 때에 천문관측이 수행되었던 점성대였다고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혜성 등의 관측을 위해 관상감 관원이 파견되기도 한 곳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세종 16년(1434)에는 경복궁 안에 대간의대가 설치되어 혼천의(渾天儀), 혼상(渾象), 규표 등 천문관측의기가 설치되고 관측이 수행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같은 때에 북부 광화방 관삼감터에 설치된 소간의대는 현재 비원옆 현대건설 사옥 앞에 남아 있다.
조선의 천문대로서 또 남아 있는 것으로는 숙종14년(1688)에 세종대 소간의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축조된 관천대가 있다. 현재 창경궁에 있는데 상단부 가운데에 관측기구를 올려놓을 수 있는 석대가 위아래로 포개져 있는데 위에는 관측기구를 고정하는데 쓰였던 구멍이 5개 파여있다. 우리나라에서 2000년 이상의 역사동안 천문학이 발전해 온 사실은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오는 천문관측 장소로서의 천문대들이 입증하고 있다.
2. 시간 측정기기
일상생활에서 또는 농업과 천체관측 등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로 인해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종류의 전통 시간측정의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시간을 측정하는 기기로는 그 사용 목적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하루나 일년 중의 시각을 알고자 하는 일반시계와 천체관측에 이용하고자 하는 천문시계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물로서 전해오는 일반시계는 시간 측정 방법에 따라 해시계와 물시계로 나뉜다. 천문시계로는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전통적인 중국식 혼천의와 그 전통을 이어받아 혼천의와 일반시계가 결합된 천문시계 등이 만들어졌었다.
해시계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시계로서 중국에서는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1세기 초부터 일자(日者)나 일관부가 존재했었는데 이 사실로부터 우리나라에서도 표(表, 막대기, gnomon) 등을 사용하여 기원전부터 시간을 측정해 왔다고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유물로는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서기 6, 7세기경의 해시계가 있다. 오늘날까지 풍부하게 전해오는 해시계들은 해시계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져 일반에게까지 사용되었던 조선시대의 것들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19년(1437)에 몽고의 원나라 때 곽수경이 만들었던 방식을 따라 정초, 장영실 등이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제작하여 공중 해시계를 설치하였다.
현존 앙부일구는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서울대와 고려대와 성신여대 박물관, 기상청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1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나 기본 형식이 동일한 점으로 보아 세종 때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들로 추정된다. 앙부일구는 영침(影針)에서 드리워진 해그림자가 오목한 시반(時盤)에 떨어지는 위치로부터 시간을 측정하도록 되어 있다.
시반에는 가로 방향으로 13개 나란한 줄이 그어 있는데 해의 고도를 이용하여 일년 중의 24절기를 알아내고, 이에 수직한 세로 선들을 지나서 해그림자가 이동하는 것으로부터 하루 중의 시각을 알아내도록 되어 있다. 앙부일구를 제작하려면 관측지의 북극고도, 또는 위도를 알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유물에 북극고도가 새겨져 있다.
앙부일구의 경우 해그림자가 떨어지는 면을 오목하게 만들어 시반에서 해가 직선상을 움직이도록 만든 반면, 시반을 평면으로 만든 평면해시계들도 다수 전해온다. 이들은 세종대에 만든 것과 서양천문학이 들어온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로 나뉜다.
물시계는 물통에서 떨어지는 물의 양을 이용하여 밤중에도 시간을 잴 수 있기 때문에 해시계와 함께 많이 사용되었다. 서기 671년에 제작된 일본 최초의 물시계 누각(漏刻)은 백제 천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서기 718년에 신라에서 누각이라는 물시계가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때는 태조 7년(1398)에 경루라는 표준 물시계가 만들어져 밤의 시각을 알렸다. 또한 세종 때에는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 옥루 등과 같은 자동물시계가 사용되었다.
3. 천문도
천체를 관측하려면 천문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별자리 그림이 그려져 있는 유물로서 현재 가장 오래된 것은 고인돌이나 더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각종 천문현상기록의 내용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적어도 서기전 1세기인 삼국시대부터는 천문도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약 서기 4세기경부터 고구려의 석실 고분의 벽화에는 천문도들이 그려져 있어 당시에 알려진 별자리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별자리가 확인된 고구려 고분은 21기에 이른다. 해와 달과 북두칠성 등을 간단히 그린 것부터 100개가 훨씬 넘는 별들을 그린 것까지 다양하다. 특히 평양의 진파리 4호분의 천장 그림에는 136개 이상의 별들이 크고 작은 원들로 그려져 있는데 28수의 별자리들을 별의 밝기를 구별하여 그려놨다고 생각된다.
별자리가 그려진 고구려 벽화들에는 때로 별자리 이름이 한자로 적혀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고구려의 경우 중국식 천문지식이 늦어도 4세기에는 들어와 널리 보급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이전과 백제나 신라의 경우 무덤 양식이 벽화를 그릴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별자리 그림이 나타나지 않는다.
삼국시대의 천문도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양촌 권근이 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도설에 고구려 천문도가 있었다는 석문이다. 평양성에 석각천문도가 있었는데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렸으나 그 인본이 남아 이를 바탕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새긴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구려 천문도를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뒤 하대 신라기인 효소왕 1년(692)에는 당나라로부터 중 도증이 천문도를 가져와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관측 천문학이 활발히 수행되었던 고려시대에도 많은 천문도가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은 석실형 고분에 그려진 벽화뿐이다. 현재 10기 정도에서 별자리 벽화가 확인되었다. 이 중 서삼동 고분의 경우 천장에 28수의 별자리들을 빙 둘러 그리고 가운데에는 해와 달과 북두칠성을 그려 넣어 고구려의 고분 천문도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조선시대에는 개국과 더불어 천문도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고구려 천문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석각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이다. 태조 4년(1395)에 제작되었는데 전천 석각천문도로서는 중국의 순우 천문도(1247)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고, 천문도에 새겨진 하늘의 모습은 서기 1세기 경이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하늘의 형상을 표현한 희귀과학유물이다. 이 태조본은 국보 228호로 지정되어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1467개의 별들과 은하수, 주극원, 적도, 황도, 28수의 구역 등이 새겨져 있다. 별들은 실제 밝기에 정비례하는 크기로 새겨졌으며, 천문도 중심에서의 직선거리가 실제 북극에서부터의 각거리에 정비례하도록(polar equidistance) 천문도에 투영되었다.
또한 천문도 중심부인 주극원 내부에서는 별자리 위치가 조선초에, 외부에서는 약 2000년 전에 맞춰져 있다. 이는 당시에 천문도를 수정하였기 때문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의 全 시대를 통해 지식인들의 전통 천문학 지식을 대표하였다. 숙종 때에 복각되었으며, 숙종본을 탑본한 탁본들과 필사본들이 다수 있다.
17세기부터는 서양의 천문지식이 중국 선교사를 통하여 들어와 천문도의 실측과 확장이 이루워졌다. 전통 별자리들이 실측되었으며, 남극 주변의 별들이 새로이 추가 되었고, 천문도는 북반구와 남반구 두 개의 원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영조 18년(1742)에 쾌글러의 황도총성도를 원본으로 하여 제작되어 현재 법주사에 보관되어 있는 황도남북총성도가 이 신법천문도의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1861년에는 남병길이 중국의 흠정의상고성 속편을 세차운동 보정을 하여 성경(星鏡)이라는 별목록 겸 별그림책을 제작하였는데 별의 좌표와 등급과 성도가 수록하여, 신법보천가와 함께 조선 후기 전통천문지식을 대변해 주고 있다. 별의 좌표의 경우 오차가 23′이내에 불과하다. 또한 거의 100 % 가까이 실제 별들과 동정(同定)이 되어 실측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천문관측자료
중국과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천문현상을 체계적으로 관측하여 기록을 남겼다. 이 자료는 현대과학에서 지구와 천체의 장기적 변화를 연구하거나 고대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자료들이다.
우리나라의 고대 왕조들이 남긴 천문현상기록들은 중국의 기록에 비해 전체적인 양은 적으나 특정현상의 경우 기록이 더 풍부한 경우가 있고, 특히 그 관측사실의 신빙성이 중국에 비해 일반적으로 높고 안정되어 있다. 고대 천문기록들을 현상 종류별로 모두 거론할 수는 없으므로 그 가운데에 특기할만한 경우만을 소개하겠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서기전부터 일식과 혜성과 행성의 움직임, 달과 행성의 엄폐현상, 유성과 운석의 낙하, 오로라 등등에 대하여 240개가 넘는 관측기록이 나온다. 이 중 서기 45세기 이전의 기록들은 삼국의 초기 역사를 검증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들이다.
천문현상기록은 천체역학적 계산에 의해 그 사실성을 검증할 수 있으므로 사서에 실린 천체 관측기록을 계산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사서의 신빙성을 검증하거나, 기록의 시점을 절대적 근거에서 찾아내거나, 관측과 기록의 내용으로부터 과학과 기록문화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계산에 의해 확인이 가능한 일식 현상의 경우 서기 이전부터 나오는 초기기록들의 약 9할이 실제 일어났었고 (중국의 당시 기록 실현율은 78 %), 일식 때의 달그림자가 지구상의 한 지역에 강하게 집중되는 현상이 확인이 된다.
이러한 일식기록의 성향은 바로 그들이 실측 자료임을 입증해준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이 실측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타 사서(즉 중국 사서)에 없는 독자기록이 실제로 일어났었던 천문현상임을 확인함으로써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달이 행성을 가리는 현상, 금성이 밝아져 낮에 보이는 현상 등에는 삼국사기에만 있는 기록이 있으면서 계산으로써 확인이 가능한 관측자료이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삼국시대 초기 천문현상 관측기록이 독자적 관측에 의한 것이라는 이 사실은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본 학자들이 연구하여 국내외적으로 인정되어 있는 학설, 즉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이 6세기까지는 중국의 기록을 차용했거나 지어낸 것이라는 주장과 반대되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신빙성과 집필 자세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요구한다.
수 천년의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관측된 천문현상기록은 단순히 역사적 또는 과학사적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현대과학을 수행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장기간의 관측자료가 필요한 천문현상의 경우 고대 관측자료는 필수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태양활동에 대한 기록들이다. 태양의 흑점은 흔히 과학사 서적에서 1611년에 요한 파브리시우스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처음 발견했다고 쓰여 있으나 중국에서는 서기 전부터 관측기록이 나오고,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후반부터 흑점과 관련된 기록이 나온다.
흑점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오는 고려 시대의 기록을 보면 흑점의 11년 주기와 약 100년의 장주기가 완연히 나타난다. 왕조가 빈번히 바뀌었던 중국 측의 흑점자료에서는 이러한 주기성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 사실은 우리의 관측기록이 정확성과 안정성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태양활동의 지표로서 거론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은 오로라 관측기록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오로라가 관측됐었다는 사실에 회의를 품는 의견들이 있었지만 최근 적기(赤氣)이나 적침(赤?)으로 주로 표현된 기록들이 오로라 현상임이 입증되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고대 오로라 기록을 가장 많이 남긴 국가이다.
1747년까지 조사된 중국과 일본의 오로라 기록은 292와 50개에 불과한 반면에 우리나라의 고대기록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만도 711개에 이른다. 또한 우리나라의 오로라 기록들의 시간적 분포를 보면 (푸리에 변환에 의한 파우어 스펙트럼 측정) 태양 활동을 반영하여 약 11년 주기가 강하게 나타나는 반면 중국측 기록은 이러한 주기성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태양의 활동이 수백년 간의 장주기 변화를 갖는지 알아내거나, 그 변화의 성질과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흑점이나 오로라나 날씨의 변화를 수 천년의 기간동안 관측한 기록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고대 왕조들이 남긴 정확하고 지속적인 자연현상 관측기록들은 인류의 매우 귀중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천문현상관측 자료로서 또 주목할만 한 것들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나는 핼리혜성을 비롯한 여러 혜성 기록, 오늘날 지구와 소행성이나 혜성과의 충돌 가능성을 가늠해 볼 자료를 제공해 주는 유성과 운석의 낙하 기록, 고려 문종 27년(1073)과 28년에 나타나는 세계 최초의 신성(新星, nova) 기록, 새로운 종류의 장주기 변광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고천문도 등을 들 수 있다.
우주론
우리나라의 고대 우주론은 우주기원론과 우주구조론으로 나뉜다. 이러한 천문사상의 기원은 신화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어 하늘과 땅의 이분법적 사고, 또는 천상, 지상, 지하의 삼분법적 사고로 우주를 이해하는 성향이 강하다. 우주가 이러한 구조로 창생되거나 사멸되는 과정에 대한 신화적 각본이 원시적 우주론으로 체계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고대 우주기원론은 문헌과 무속의 여러 신화를 통해 전해온다. 우리나라에서 우주기원론의 내용은 대개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 시공간과 물질계가 창생되는 각본(창조형)이 아니라, 어느 정도 원초적 우주가 존재하는 상태에서 공간과 물질계와 생명체가 창조되고 그 안에 새로운 질서가 갖춰지는 과정(개벽형 또는 진화형)을 담고 있다.
즉 혼돈(chaos)에서 질서(cosmos)로 우주가 진화하는 각본이다. 이러한 종류의 우주기원론들은 대개 민간에서 무속인들을 통해 다수가 전해오고 있다. 함경도에서 채록된 무녀 김쌍돌이의 창세가를 보면 태초에 우주는 땅과 하늘이 붙은 혼돈상태였다. 그러다 미륵이라는 초월자가 나타나 구리기둥을 세워 천지를 갈라놓음으로써 혼돈을 정리하고 하나의 해와 달을 돌게 하고 별들을 만들어 우주를 창조한다.
또한 민담 중에는 하늘과 땅이 다시 서로 붙어버리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역구조를 보이는 것이 있다. 창세가에서처럼 초월자에 의해 우주의 생성과 진화가 이루어지는 각본과는 대조적으로 제주도의 천지왕 본풀이나 초감제 같은 경우에는 천지가 어지러이 뒤섞여 있다가 특정 시간에 자연이 스스로 변화하며 개벽하여 만물이 생겨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우주창생과 진화에 대한 이러한 시나리오는 현대 우주론의 내용과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한편 전 우주의 창생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와 달과 같은 천체들의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도 있다. 대표적 예가 남매일월신화이다. 남매는 하늘에 올라 해와 달이 되었다가 누이가 밤길이 무서워 오빠와 자리를 바꾸는 내용이다. 마지막 내용은 천지와 일월과 남녀를 같은 음양관계의 등식으로 볼 때 남매의 자리바꿈은 하늘과 땅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것이며 변화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남매로서 살고 있던 때를 미분화된 원초적 우주 상태로 본다면 이 신화 역시 천지개벽형 신화의 형식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또 이 신화의 이본(異本)에는 삼 남매의 막내가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내용도 담고 있어 천체기원의 대상이 좀 더 확대되어 있다. 또한 여러 문헌을 통해 건국과 인류기원에 대한 신화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에 현재 전해지는 우주의 구조에 대한 전통적인 이론은 중국에서 들어온 우주관들이다.
우리나라의 천문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우주구조론은 개천설(蓋天說)과 혼천설(渾天設)이다. 개천설은 하늘은 원, 땅은 네모나게 생겼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설로서 하늘은 북극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뒤에 하늘과 땅 모두 곡면이고 북극부분이 높은 삿갓 모양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였다.
이 우주관은 고구려 고분의 일월성신도나 석굴암의 천장 등을 통해 우리의 고대 천문관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혼천설은 우주의 모습이 하늘이 땅을 둘러싸고 있는 새알과 같다는 생각이다. 하늘은 남북극을 지나는 축을 둘레로 수레바퀴와 같이 돌고, 일월성신이 따라 돈다는 모형이다. 모두 우주의 모양과 운행을 인간이 바라보는 입장에서 모형화한 이론들로서 우주의 구조와 역학에 대한 실상을 깨우치려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서양천문학은 17세기 초 조선 인조 대에 중국을 통해 서양천문서들이 들어오면서 소개되었다.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티코 브라헤 등의 우주구조와 운행 모형이 전통적 우주관인 혼천설을 대체하게 되었다.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전통 천문학과 관련된 물질적, 정신적 유산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우리나라의 모든 천문학 유산을 여기에서 정리하고 그 과학사적 상징성과 가치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주관적인 선택이 있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은 우리나라에서 천문과학의 역사는 상고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구하고, 주목할만한 천문 유물과 풍부한 천문현상 관측기록이 전해온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현대 천문학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것은 선대에서의 이러한 과학적 활동이 수천년에 걸쳐 꾸준히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된다. 또한 선조들이 남긴 귀중한 고대 관측자료의 가치를 인식하고 활용하는 것이 고대와 현대 과학 사이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작업임을 환기하고 싶다.
(박 창 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