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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조선 성리학의 큰 산 이황(1501-1570)

송화강 2019-05-30 (목) 22:13 6년전 12368  

조선 성리학의 큰 산 이황(1501-1570)


이황은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북 안동시)에서 좌찬성을 지낸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후실이었지만 현부였던 생모

박씨의 가르침으로 총명한 자질을 키워나갔다. 12세에 숙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 때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도연명의 시를 즐겨 외웠으며,

20대에 들어 침식을 잊고 (주역)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쳐 병약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

등과 교류하고 (심경부주)를 입수하여 탐독, 심취하였다.


34세(1534년)가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사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37세에 모친상을 다하자 고향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김인후가 낙향하는 것을 보고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핑계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짓고 산운야학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돌입하였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으니, 그의 나이 46세 때의 일이다.


그 뒤에도 그는 몇 번에 걸쳐 임관의 명을 받게 되자 중앙을 떠나 지방으로

외직을 지망하여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 경상도 풍기 군수 등을 지냈다. 풍기

군수 시절에는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서적, 편액, 학전 등을

마련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하지만 49세가 되던 해에 그는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자 취임하였다. 이후 홍문관 부제학,

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고, 낙향하여 도산서당을 짓고

학문 정진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아호를 도옹이라고 개칭하고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 수양, 저술 등에 매진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명종은 그의 학문과 인품을 높게 보고 자주 그에게 조정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지만

듣지 않자,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초현부지탄(현인을 초빙했으나

오지 않으니 한탄스럽구나)'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다 송인으로 하여금 (도산기) 및

(도산잡엽)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고는, 그것을 밤낮으로 쳐다보며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명종은 그 이후에도 자헌대부, 공조판서, 대제학 등의 현직을 내려 이황을

초빙하려 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때

명나라 신경의 사절이 당도하여 조정에서 상경을 강권하자 그는 마지못해 한양

길에 올랐다.


이후 명종이 돌연 병사하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

및 예조 판서에 임명했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명망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여러 차례 고사 끝에 선조의 간청을 물리치기 어려워 68세의

노구에 대제학, 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통치 철학이 되는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단 한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고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논어집주), (주역) 등을 강의했고 노환 때문에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성학집도)를 저술해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직을 간청하여

마침내 낙향을 허락받았다. 낙향한 후 이듬해 11월 평소에 아끼던 매화에 물을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떴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면서 그를 영의정의 예로 장사

지내도록 했다.


이황이 학문에 본격적으로 정진한 것은 (주자대전)을 읽고 난 다음부터였다.

그가 이 책을 입수한 것은 43세 때였다. 하지만 그는 풍기 군수를 사퇴하고

퇴계에 칩거하고 있던 49세 때에 비로소 이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이미 (심경주부), (태극도설), (주역), (논어집) 등을 공부한 이후였기에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던 터였다. (주자대전)을 섭렵함으로써 그는 성리학에 대한

깊고 새로운 시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본격적인 학구 활동은 50세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황은 53세에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개정하고, (연평답문)을 교정하였다. 54세에 노수신의

(숙흥야매잠주)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56세에 향약을 기초하고, 57세에 (역학계몽전의)를

완성하였다. 또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하여 서문을 썼고,

59세에 황중거의 물음에 답하여 (백록동규집해)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에 응답하였고, 61세에 이언적의 (태극무변)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후 그는 70세에 죽을 때까지 이언적의 유고와 행장을 정리하는

한편, 성리학에 관한 숱한 논문들을 작성하였다.


이황은 이 같은 만학을 통해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에 이르는 한편, 동양 유학의

한 산맥을 이룰 수 있었다. 젊어서는 학문을 위한 준비에 게으르지 않았고, 중년에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실천했으며, 노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학문을 쌓고 제자를 길러

맹자가 말하던 인생삼락을 철저히 즐긴 사람이었다.


그의 학풍을 따른 학자로는 당대의 유성룡을 비롯하여, 김성일, 기대승, 조목,

이산해, 이강이, 황준량 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달하고, 나아가서는 성혼, 정시한,

이현일, 이재, 이익, 이항로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 사류 모두이다.

이는 조선 주리철학의 한 산맥을 형성하였으니 실로 한국 유학사상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이황의 산은 골이 깊고 봉우리가 높았던 것이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고, 골이 깊어야 넓은 강을 낼 수 있다는 이치가 바로 이황에

적합한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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