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핀 꽃 이순신(1545-1598)
이순신은 이정의 네 아들 중 셋째이며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로부터 내려오는 문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
손이 된다.
그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조광조 등의 소장파 사림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
때 참화를 당한 인물이었다. 그 후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 가세는 많이 기울어 있었다.
이순신의 형제들은 돌림자 신 자 앞에 모두 삼황오제 중에서 복희씨,
요순, 우임금을 순서대로 따서 붙인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위에서부터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순신은 문반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28세가 되던 1572년 무인 선발 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다. 그러나 이때는 낙마하여 시험에 떨어졌고, 4년 뒤인
1576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 1583년에 건원보권관,
훈련원참군을 역임하고, 1586년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는 이후 조산보만호가 되었지만 앞날은 순탄하지 못했다. 만호로 있던
그에게 중앙에서 국방 강화를 위해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적은
군사로 야인들의 침입을 막을 수 없다는 이유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이일로
그는 조정의 문책을 받게 되었고, 급기야 삭직되어 백의종군하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 선전관 등을 거쳐
1589년에 정읍현감이 되었으며, 그때 유성룡의 추천에 의해 고사리 첨사로
승진하였다. 이어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1591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 곧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군량 확보를 위해
해도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순신은 이틀 뒤에야 경상우수사 원균의 급보로
전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 이미 경상좌수사 박홍, 우수사 원균
등은 왜군에게 제해권을 내준 상태였다.
전란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일단 임전 태세를 갖춘 뒤 전황을 면밀히 분석했다.
그리고 몇 번에 걸친 작전 회의를 끝낸 다음 5월 4일 새벽, 처음으로 85척의
선단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이때 한산도에서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가
이끄는 병력은 전선 3척과 협선 2척뿐이었다. 이순신은 그와 연합 함대를 조성하고
5월 7일 옥포에서 왜군과 맞싸웠다.
이 싸움에서 적함 26척을 격파한 이순신 선단은 다음날 고성의 적진포에서
다시 적선 13척을 궤멸시켰다. 그 후 왜군 주력 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연합 함대를 조성하려 했으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척이 사천에 진출하였다는 통보를 받고 육지에 있는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거북선을 처음으로 진출시킨 가운데 왜군을 전멸시켰다.
이순신은 이 사천 싸움에서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이후 당포에서 왜선 20여 척, 이억기와 함께 당항포에서 20여 척, 가덕도
부근에서 60여 척을 궤멸시키고 드디어 왜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략할 계획을
세웠다.
전라도좌우수사 연합 선단 170여 척이 부산포에 도착한 것은 9월 1일이었다.
전날 밤을 새우며 작전을 짠 조선 함대가 그날 새벽 몰운대를 지나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에 이르렀을 때 부산포에는 적함 약 500여 척이 정박중이었다.
조선 함대는 그들을 급습했다. 이 해전에서 왜군은 약 100여 척의 전함이 격파된
채 육지로 도주하였으며, 조선 병력은 약 30여 명이 희생되었다. 왜군의 피해에
비하면 경미한 것이었지만 그 동안 벌어진 전투에 비해 제법 큰 피해를 입은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순신은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 본영을 설치했다. 그 후 명나라의 수군과 합세하여 왜군을 수차례
궤멸하여 그들의 서해안 진출을 완전히 봉쇄하였다. 1594년부터 약 3년 동안은
명과 일본의 강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순신은
이 기간을 이용하여 군사 훈련, 군비 확충, 피난민 생업 보장, 산업 장려 등에
주력하며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했다.
1597년 명,일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다시 재침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때 이순신은 원균의 상소와 서인 세력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고 만다. 유성룡, 이원익 등은 상소를 올려 그의 치죄를
반대했으나 선조는 이를 묵살하고 이순신을 삭직시켜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되자 삼도수군통제사는 원균이 맡았다. 하지만 전술에
뛰어나지 못했던 원균은 이순신이 애써 키워놓은 수군과 함대를 모두 잃고
자신도 전사하고 만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하게 된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재임명되었을 때 조선 수군의 병력은 120명에 함대 12척이
고작이었다. 이 병력과 함대로 이순신은 명량해협에서 적함 133척을 맞아
싸웠으며, 이 싸움에서 적함 31척이 파손되었으나 아군은 병사 몇 명이 부상을
당하는 데 그쳤다. 명량해전으로 제해권을 되찾은 이순신은 보화도, 고금도 등을
본거지로 삼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군량미를 위한 둔전을 경작시켰다.
이순신이 병영으로 돌아오자 다시 조선 수군의 주위에는 장병들이 모여들고
난민들도 줄을 이어 돌아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군진의 위용은 한산도 시절의
10배를 능가하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되찾고 수군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이순신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 11월 퇴로를 찾고 있던 왜군은 드디어 500척의 함대를 이끌고 노량으로
밀려왔다. 이 해전에서 적은 불과 50여 척만이 겨우 퇴로를 열고 탈출할 정도로
대패하지만, 이순신은 왜군의 유탄에 맞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때 이순신의
나이 54세였다.
최근 들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평가를 놓고 종래와 다른 견해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심지어는 이순신의 인물 됨됨이를 의심하고, 원균을 정의로운
사람으로 설정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순신의 공적을 강조하다보니 원균을
상대적으로 비하시킨 감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이순신의
인격과 공적을 한꺼번에 깔아뭉갤 만큼 대단한 발견은 못 된다는 점을 밝혀 두고자
한다.
근본적으로 원균과 이순신은 많은 부분에서 다른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평면적으로 비교하기에는 두 사람의 그릇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용병술과 처세에서 이순신은 원균과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여 상소하기를, 자신이 도와달라고
했는데 이순신이 도와주지 않아 적을 궤멸시킬 기회를 놓쳤다고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순신이 원균에게 응원군을 보내주지 않은 것은 근본적으로
원균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원균은 자신의 군사를 너무 함부로 전장에
내보내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지나친 승부욕으로 인해 많은 부하들을
죽이는 결과를 낳곤 했다. 이순신은 그런 원균에게 자신의 부하를 내맡길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이순신을 비판하는 또 다른 목소리는 그가 왕의 명령조차 거부하는 오만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인데, 이것 또한 문제가 있는 지적이다. 당시 조선 사회의
선비관으로 보면 왕이 내린 명령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대의와 도리에 맞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는 것이 왕에 대해 충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선비가
충성해야 할 대상은 왕 개인이 아니라 바로 나라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백성이고, 왕은 이에 대한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바로 이
같은 가치관에 따라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순신이 오만하여 왕의 명령조차 듣지 않았다는 것은 조선 사회의
충에 대한 개념을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