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설의 아시아 신화로 읽는 세상] (30) 단군·탐라·신라…단일민족 신화 아닌 ‘종족 통합 신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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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서 여몽연합군에 패배한 삼별초가 김통정의 지휘로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계속 항전을 벌인 항파두리성 유적지. 제주시 애월읍에 있다. 〈고려사〉는 김통정을 ‘도둑들의 우두머리(賊酋·적추)’로 기록하지만 제주 사람들은 신화 <고내리본향당>에서 그를 제주 물산이 탐나 대국 천자가 파견한 인물로 형상화해 오히려 천자와 맞선 영웅으로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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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 집단, 토착민 맥족·예족과 어울려 나라 세운 ‘외래자들’
고내리본향당 등 낯선 이들과 공존 고민했던 제주 신화 많아
사실 우리도 반쯤 유이민이자 정치·경제·환경적 난민의 후예
낯설지만 ‘제주 예멘 난민’들 우리 집 온 손님으로 맞이했으면
망명을 신청한 정치적 난민은 이전에도 종종 있었지만 2018년 4월 시작된 ‘제주예멘난민’은 난민 문제를 우리 사회의 현안으로 떠밀었다. 우리에게는 좀 낯설지만 이런 난민은 도처에 있다. 내전과 빈곤의 땅 아프리카를 떠나 지중해로 뛰어드는 난민들의 행렬이 있고, 미얀마 등지에서 벼랑까지 내몰리고 있는 무슬림 난민 로힝야족이 있고, 자기 땅에서 내몰려 고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발루치스탄 난민도 있다. 탈북민들도 일종의 정치적 난민이 아닌가! 2017년 말 기준으로 세계 각처를 떠도는 난민이 약 7000만명(‘주간경향’ 1300호)이다.
예멘 난민 건으로 화제에 오른 제주도에는 적잖은 난민들이 도래한 역사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사건은 1271년 진도에서 여몽연합군한테 패배한 삼별초의 입도였을 것이다. 이들은 난민 정도가 아니라 군대였다. 이미 자신들이 진짜 고려 정부라고 표방한 바 있는 삼별초, 제주로 거점을 옮긴 삼별초의 지휘자는 김통정이었다. 그는 애월읍에 항파두리성을 쌓고 항전하다가 1273년 다시 패전에 이른다. 그러나 김통정은 부하 70여명과 더불어 투항을 거부하고 한라산으로 들어가 자살하고 만다.
여기까지가 삼별초와 김통정에 대해 역사서가 말하고 있는 바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은 <고려사>의 기록처럼 김통정을 ‘도둑들의 우두머리(賊酋)’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항파두리성에 가까운 고내리본향당의 유래를 말하는 본풀이(신화)가 그 기억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이 신화는 엉뚱하게도 김통정을, 제주 물산이 탐이 나서 대국 천자가 파견한 인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한데 제주에 온 김통정은 도리어 제주도를 자기가 먹을 요량으로 천자와 맞선다. 항파두리성을 쌓고 쇠문을 닫아건다. 그것도 모자라 말꼬리에 빗자루를 달아 재를 날려 제주 섬을 숨겨버린다. 천자가 배신자를 잡으려고 세 장수를 보냈지만 쇠문을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그때 아이를 업은 계집아이가 지나가는 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군. 불로 녹이고 잡으면 되지’라고 한다. 삼장수가 석 달 열흘 불을 질러 쇠문을 녹이자 김통정은 임신한 처를 죽이고 도망친다.
이 신화에서 우리를 착잡하게 하는 것은 아이 업은 여자아이(애기업개)의 ‘밀고’다. 왜 그랬을까? 전설에 따라서는 애기업개를 밖에 두고 성문을 닫은 탓이라고 설명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 애기업개는 사실 지역 여산신의 현현이다. 그렇다면 왜 여산신은 반(反)김통정 쪽에 섰을까? 그것은 고내리본향당의 정체와 관계가 있다. 삼장수는 새와 새우로 변신하여 무쇠방석을 타고 도망치는 김통정을 따라가 결국은 죽인다. 뜻을 이룬 삼장수는 어쩐 일인지 돌아가지 않고 용왕국 막내따님애기한테 반해 고내리에 자리 잡고 당신이 된다. 고내리본향당은 김통정이 아니라 삼장수를 모신 신당이었기 때문에 애기업개가 삼장수를 도와준 것이다.
그러나 전설에 따르면 김통정은 후백제 견훤과 마찬가지로 밤마다 찾아온 지렁이와 과부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이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았을 뿐만 아니라 온몸에 비늘이 있어 화살이 박히지 않는 전사였다. 제주 사람들이 야래자(夜來者) 전설 또는 아기장수 전설이라는 그릇에 김통정을 담았다는 것은 그를 그리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견훤의 역사적 실패에 대한 호남 지역 전설의 애잔한 태도와 다르지 않다. <고내리본향당>의 본풀이와 전설 사이에는 심리적 격차가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내리본향당> 신화의 흥미로운 점은 지역민들이 대국에서 온 외래자를 지역의 당신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삼장수는 대국에서 파견한 장수들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고내리에 주저앉음으로써 난민이 되어버린 외국인들이다. 이들은 삼별초를 진압한 뒤 제주에 남은 1000명이 넘는 몽골군들과 무관치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제주민들과 제주의 신화가 이들을 배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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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도 경주에 있는 석탈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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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지만 외래자로 주목되는 신들이 <세화본향당본풀이>의 백줏도와 금상님이다. 이 신화는 구좌읍 세화리 본향당 당신들의 내력을 풀어놓고 있는데, 먼저 등장하는 백줏도는 서울 서대문 밖 대나무밭 출신이다. 그녀는 일곱 살에 부모한테 죄를 지어 쫓겨난다. 외삼촌들이 있는 용왕국에 가서 주술을 배운 뒤 외할아버지 천자또가 있는 제주에 입도한다.
백줏도는 제주와 전혀 인연이 없는 외래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착하는 동안 불협화음이 발생한다. 선주자인 소천국과 갈등을 겪는다. 갈등의 원인은 성폭력이다. 소천국은 천자또의 집사인 양 백줏도를 속인 뒤 겁탈하려고 했을 때 백줏도는 그의 손목을 칼로 잘라버렸던 것이다. 이 피비린내가 나는 결연실패담은 두 신을 모시는 집단 사이에 갈등이 컸음을 시사한다. 사실을 알게 된 외조부 천자또가 땅을 가르고 물을 갈라 소천국 자손들과는 교류를 못하도록 했다는 데서 그 파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백줏도는 더 나중에 입도한 금상님과는 화해에 이른다. 금상님은 보통 인물이 아니라 서울 남산에서 솟아난 천하명장이었다. 그러나 조정과 맞서자 역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 금상님은 조정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장수였다. 무쇠 방에 가두고 불을 지펴 죽이려 했으나 죽일 수 없었던 영웅이었다. 금상님은 스스로 서울을 떠나 제주로 들어간다. 세화리 당신 천자또를 찾아가 백줏도와 배필을 맺으러 왔다며 명함을 드린다.
금상님은 서울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역적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서울을 떠나 제주로 온, 말하자면 정치적 난민이었다. 문제는 제주민들이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데 있었다. 결혼 의사를 밝히자 천자또는 금상님한테 식성을 묻는다. 같은 신당에서 한 상을 받으려면 서로 식성이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제주 신화에서 신의 식성은 정치적·문화적 코드의 다른 이름이다. 천자또와 백줏도는 고기 냄새를 꺼리는데 금상님은 육식만 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한집에서 살 수 있겠는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양자는 일단의 조정 과정을 거친다. 먼저 외래자인 금상님이 백줏도의 제안을 받아들여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참아본다. 현지 문화 적응과정인데, 비유하자면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먹거나 기도를 참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금상님의 피골이 상접해 가자 백줏도는 이번에는 천자또를 설득한다. 천하명장을 죽일 수 없으니 상을 따로 받자는 조정안을 제시한다. 그래서 세화리본향당은 마을굿을 할 때 돼지고기가 있는 금상님의 상과 고기가 없는 천자또·백줏도의 상을 따로 차린다는 것이다. 외래자와 더불어 사는 절적한 길을 찾은 셈이다.
고려 전기에 한반도에 복속되었지만 독립 왕국이었던 탐라국의 건국신화에도 외래자가 있다. 일본국의 세 공주가 오곡의 종자와 송아지·망아지와 더불어 돌함에 실려 입도한다. 함께 온 사신이 말한다. “우리 임금님이 말씀하셨소. 세 신인이 장차 나라를 열려고 하는데 배필이 없으니 세 공주를 모시고 가서 배필을 삼게 하라.” 이렇게 하여 각각 고·양·부 세 성씨를 이루었고, 후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탐라국은 바다를 건너온 외래자와의 통합을 통해 건국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신화가 제주에는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렇게 보면 제주도 신화는 외래자와의 공존을 고민했던 섬사람들의 지혜를 온축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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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회원들과 국내 체류 난민들이 지난 7월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제주에 있는 예멘 난민들에 대한 조속한 난민심사 촉구와 예멘 난민법 개정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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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외래자와의 통합을 거쳐 이룩한 공동체에 관한 신화가 제주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라의 네 번째 왕인 석탈해는 머리가 큰 외래자였다. 그는 그 위치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있는 다파나국의 왕자 출신이다. 다파나국 왕비가 임신한 지 7년 만에 낳은 알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궤짝에 실려 바다에 버려진다. 탈해와 더불어 신라에 도래한 석씨 집단은, 신화는 말하지 않지만, 다파나국에서는 생존할 수 없었던 정치적 난민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석탈해가 호공의 집터를 빼앗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남해왕의 사위가 된다.
석탈해보다 먼저 오늘날 경주 월성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호공(瓠公) 또한 수수께끼 같은 도래인이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허리에 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온 왜인이었다. 그래서 호공으로 불렸다는 것인데, 그는 박혁거세의 신하로 마한에 사신으로 간 적도 있고, 신화에서는 탈해의 꾀에 눌려 집을 빼앗겼지만 역사 기록으로는 탈해왕의 대보(재상)가 되었으며, 탈해왕 9년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계림에서 탄생할 때는 첫 발견자가 되기도 했다. 왜 바다를 건너왔는지 알 수 없지만 호공과 그 씨족 역시 도래하여 신라인이 된 사람들이다.
가락국(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은 어떤가? 거창한 신부맞이 행사 끝에 침전에서 마주한 왕에게 허황옥은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아유타국 공주로 나이는 열여섯입니다. 올해 오월 부왕과 황후께서 ‘간밤에 상제를 만났더니 가락국 김수로왕을 하늘이 보냈는데,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먼 뱃길을 왔다는 것이다. 아유타국은 오늘날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주 아요디아시로 알려져 있다. 신화가 역사화되어 현지에는 허황옥 기념공원까지 세워져 있지만 허황옥 일행의 정체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허황옥의 신화가 도래자의 신화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도래 과정에 별다른 갈등이 보이지 않는 화합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신화는 우리를 단군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 단군을 낳은 환웅은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그가 천신 환인의 아들로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했다고 생각한다. 천손의 하강으로 신화화되어 있지만 사실 환웅 집단은 외래자들이다. 출신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압록강 유역으로 남하하여 그 지역에 이미 있던 토착민, 이를테면 곰과 범을 토템으로 삼고 있던 맥족이나 예족 등과 어울려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반쯤은 유이민, 혹은 정치적·경제적 혹은 환경적 난민의 후예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래 예멘 난민 가운데 362명이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았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 있어도 좋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들은 소망했던 난민 지위를 얻지 못했다. 한국은 난민인정률 0%를 유지하고 있는, 아직 난민에 대해 몹시 인색한 나라다. 단군신화에서 비롯된 단일민족이라는 오래된 관념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다. 단군신화는 단일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신화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 종족들의 통합과정을 보여주는 신화다. 앞서 살폈던 탐라국·가락국·신라국의 신화도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이따금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었다. 문둥병자들이었다. 할머니는 그들을 내치지 않았다. 밥도 주고 돈도 쥐여주셨다. 나에게는 겨울날 온돌 같은 기억이다. 난민은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다. 손님은 신이다.
*그동안 ‘아시아 신화로 세상 읽기’를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시리즈 끝>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