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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왜곡에 침묵한 대가…거짓역사가 진실로 둔갑

송화강 2019-05-05 (일) 16:41 6년전 10667  

왜곡에 침묵한 대가…거짓역사가 진실로 둔갑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7-07-06 00:50:13


 ▲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그 대담함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손을 놓고 있다. 도를 넘어서는 역사왜곡이 결국 진실을 삼키고 진실인냥 둔갑하는 모습이다.
 
기자조선은 허구다. 위만조선과 한사군도 보잘 것 없음에도 중국과 일본은 이 논리만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잠식하고 있다. 오늘은 한사군에 대한 중국의 역사날조와 대륙의 낙랑군과 최리(崔理)가 세운 평양에 있는 낙랑국은 전혀 다른 것으로 중국과 일본이 의도적으로 꾸민 역사조작 등에 관해 살펴보겠다.
 
중원대륙 호령한 예맥과 기자, 위만, 한사군관계
 
고조선의 서쪽 변경 난하(灤河)유역에 자리했던 위만(衛滿)이 서기108년 한나라에 망하고 그 자리에 낙랑(樂浪) 임둔(臨屯), 진번(眞番) 3군이 다음해에 현토군이 설치됐다고 하나 중국인들은 이 4군 당시의 지역도 대지 못했을 뿐더러 얼마 안가 포기한 기록과 함께 예맥인의 수가 많아 어쩔 수 없는 말을 남겼다.
 
즉, 이것은 중국 측이 말하는 한사군은 껍데기만 있고 내용은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중국 측이 말하는 한사군의 지배야욕은 실현된 적이 없다는 것을 최태영 정인보 최동 선생은 말하고 있다. 당시중국대륙을 지배하고 있었던 주역은 한(漢)이 아니고 우리한민족인 예맥조선이었다.
 
먼저 기자조선은 이미 상세히 밝혔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40여대를 계승했다하나 그 군주(君主)의 이름이나 기자조선에 대한기록이 전혀 없다. 이는 망명정권으로서 유명무실한 존재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국사가(中國史家)가 ‘주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임명하고 주무왕의 임명을 받아 동래(東來)해 한민족을 지배 했다고 위조했다. 이 허위조작은 다 판명 나고 있는 것이다.
 
위만조선역시 역사적 기록이 없다. 한 지방에서 명맥을 이어온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중국사를 검토해 보면 이미 다 살펴 본대로 위만이 한민족(韓民族)을 지배치 못한 사실이 판명된다.
 
한사군도 3군(郡)을 예맥에게 빼앗긴 것을 보면 아주 미약한 존재로 내 세울 것이 없다. 당시 예맥조선의 실력과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실력과 비교 해보면 예맥에게 맥도 못 추는 존재일 뿐이다. 예맥이 이들을 지배하고 예속된 것이 분명하다.
 
예맥조선은 매우 강대해 위만의 상전(上典)인 한고조(漢高祖)를 지원하고 위만을 책동해 한고조를 배반하게도 했고 또한 이미 밝힌바 있는 바와 같이 한무제(漢武帝)가 4군을 설치한 후 26년 만에 예맥이 진번, 임둔 2군을 탈취하고 현토군도 대부분 탈취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모든 역사를 다 조작해 자기들 역사라 하나 말이 되지 않는다. 한사군도 교묘하게 몇 번이고 남쪽에서 동북쪽으로 몇 번이고 옮기고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
 
현토군의 경우를 봐도 현토군은 동 옥저의 땅 으로 서족은 개마산맥이고 동쪽은 물가(원래의 창해, 발해)로 동서가 좁고 남쪽은 넓은 곳이다. 동족과 남쪽은 숙신, 읍루, 예맥으로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중심민족이며 남쪽은 낙랑이 있는데 이동된 현토와 낙랑은 요하에 붙어 있다.
 
동북아시아 전체에서 동옥저 땅인 현토군의 지리적 위치를 찾아보면 지금 중국 감숙성 녕하외족자치구 은천지역 한 곳 뿐이다. 그런데 중국은 1931년까지 중국의 모든 역사책들을 완전히 조작을 끝낸 후에 발행한 ‘중국고명 대사전’에 현토군을 한반도로 이동 조작한다.
 
즉, 지금의 함경도 및 길림성의 남쪽 한반도에 함경도를 만들어 역사조작을 했다. 현토군을 한반도 함경도로 유도했다. 이는 허구인 것이다. 제대로 알고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은 1927년 최초의 길림성을 두만강 북쪽에 설치한 것은 원래의 감숙성 두만강 남북에 길림성이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대륙에서 한반도로 두만강에 비슷하게 맞추려 한 것이다.
 
원래의 함경도는 대략 중국 섬서성 북쪽 장성이북, 산서성, 하북성인데, 이것을 중국이 제멋대로 조작한 것이다. 한사군을 산서성 하북성으로 이동조작하고 다시 한반도로 이동해 혼합하며 조작한 사실들을 이 현토군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현토군의 위조로도 한사군의 조작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은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58~61면 참조 인용).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당시의 예맥(銳麥)=(濊貊)은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을 제멋대로 지배하고 한(漢)나라도 예맥에 맞서지 못했다. 예맥은 동주시대(東周時代)부터 한무제시대(漢武帝時代)까지 중국의 남출(南出)해 한족(漢族)을 정벌 정복하고 지배했다.
 
동주(東周)시대부터 한무제시대(漢武帝時代)까지, 1천여 년 동안 중국을 정벌정복하고 지배한 예맥조선(銳麥朝鮮)=(濊貊)은 중국을 주름잡던 시대이다 그러기에 중국은 이 예맥을 지워버렸으나 예맥조선은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을 예맥조선에 예속시킨 것으로 본다.
 
당시 예맥이 실제 지배권자로서의 법적지위를 갖고 있었다. [삼국지(三國志)]에 “예맥인의 수가 하도 많아서 어찌 할 수 없었다.(皆其種也)”고 나와 있다. 종래의 ‘한반도설’은 국내학자들이 연구와 아무 논증과 고증 없이 중국과 일본의 일방적주장만 받아들인 결과 나온 것이다.
 
대륙의 낙랑군과 평양의 낙랑국은 다르다. 반도사관 자들은 낙랑국과 낙랑군을 혼동하는데 낙랑국과 낙랑군은 아주 다르다. 4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은 난하(灤河)유역 만리장성 밖의 조그마한 구역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평양부근의 낙랑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최리(崔理)의 왕국으로 이미 잘 알려진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죽음도 마다 않은 연애로 잘 알려진 나라이다. 그런데 같은 지명이 여러 개가 있는데서 학자가 역사연구를 하지 않은데서 이를 혼동하고 있다.
 
낙랑군은 요동의 북쪽은 현토이고 남쪽이 낙랑이다. 현토와 낙랑의 경계는 남북으로 여러 번 이동하거나 변동해 일정하지 않다. 낙랑에 합쳤을 때는 감숙성 북쪽 해성지역에서 남쪽의 란주-고평-개-경양지역까지 현토소속이다.
 
사마천은 ‘낙랑군은 고구려 땅이고 평양에 있다.’ 본래낙랑군은 왕험성에 있는데 이곳은 고조선의 영역이다.(司馬遷, 史記 卷六 本紀 十三)고 했다. 여기서 낙랑이 평양에 있다하니 역사연구를 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지금의 평안도 평양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다.
 
고조선은 도읍을 이동하면서 평양도 여러 번 옮겼다. 첫 번 째 평양은 왕험성으로 감숙성 은천 북쪽 ‘평라’ 이고, 두 번째 ‘왕험성 평양’은 감숙성 환도산의 고평, 개평, 팽양 지역이다.
 
후에 현토소속이 됐다. 그러나 이곳도 ‘임검성’으로 써야 하는데 ‘왕험성’, ‘왕검성’으로 쓴 것도 왜곡한 것이라는 것이 유우찬선생의 지적이다.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62~3면 참조).
 
‘태강지리지’에 낙랑군수성현에 갈석이 있는데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지금 조선경계에 있다. 중국사기는 위만조선의 왕험성 평양을 감숙성 ‘평라’와 ‘개원’두 곳을 말하고 있는데 어느 곳이 맞는지 분명치 않다. ‘평라’는 위만조선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만조선의 평양’ ‘왕험성의 평양’은 개원(조나, 국내성)이 대표적임으로 지금 평양 동북 경계에 있다‘고 써야 맞다. 여기서 연구를 하지 않은 학자는 “지금 조선 평양 남쪽경계 에 있다.”란 문구 때문에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지금의 평양을 말하는 것으로 아나 이는 전혀 아니다.
 
이것은 중국이 의도적으로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인식되도록 유도한 조작문장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역사를 중국 중심으로 역사를 조작왜곡하며 애매모호하게 그럴 듯이 조작해 왔다.
 
고대의 평양은 모두 대륙에 있는 평양을 말하는 것이다. 북한평양에 있었던 나라는 낙랑국(樂浪國)뿐이다.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는 역사를 모르는 자이다.
 
그런데 일본은 평양부근의 낙랑국에서 발굴한 고물의 지명과 연대를 맞춰 보면 중국의 한(漢)나라가 몰려서 쫓겨 다닐 때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역사를 왜곡하는데 도사인 일본은 확실치도 않은 낙랑고적을 빌미로 낙랑국이 중국 것이라 하면서 ‘한사군 반도 설’을 끄집어냈다.
 
이러한 일본의 조작해 놓은 일본의 역사왜곡을 우리는 한번 도 그러한 주장의 배경을 연구하거나 고증하지도 반론도 않고 일본이 조작해놓은 ‘한반도한사군 설’을 멋모르고 그대로 따랐다. 분명한 것은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고 이미 밝힌바 대로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다.
 
정인보 선생의 [조선사연구]는 이를 밝혔다.
 
한국의 낳은 석학 정인보(鄭寅普)선생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었다고 [조선사연구]에서 밝히고 있다. 선생은 평양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한나라의 낙랑유물이라는 봉니의 위조설과 점제현신사비의 정체를 명확하게 파 헤쳐, 한사군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부인 했다.
 
그 이유인즉 그 용도나 재질 상 당연히 부스러지게 마련인 봉니가 어떤 과정으로 발굴됐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발굴한 70여개의 봉니는 유독 한자리에 모여 있었고, 낙랑의 명(名)을 나타내는 군명(郡名)과 관직명(官職名)이 어긋나 믿을 수 없으며 역사조작의 재주꾼인 일본인들이 당시 상황에 맞추어 조작해낸 것이 분명하다고 정인보 선생은 밝혔다.
 
또한 관인(官印)은 후인(後人)들이 속여서 팔기 위해 많이 위조한데 대한 경계가 일찍이 역사기록에 있는데 낙랑명(樂浪名) 봉니의 위조는 한사군 존재에 관한 것인 만큼 더욱 교묘(巧妙)하다. 점제현신사비란 것도 그 출처가 사뭇 수상 쩍인 것임을 갈파했다. ‘한사군의 역사는 왜곡이다.’ 는 것이 정인보선생의 연구 결과였다.
 
그동안 한사군(漢四郡)이 있는 것으로 전제한 것은 애초엔 그런 소리가 없다가 4군 설치 후 200년이 지나 중국인들의 역사에 한사군이 있었다고 기록한데서 시작 됐다. 그러나 중국이 한사군을 감당하거나 제대로 권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 그것은 당시 예맥이 워낙 강해서이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면서 정책적으로 제일 먼저 일본인들만의 참여로 낙랑국(樂浪國)을 발견해 봉니와 같이 조작된 유물로 우리가 일찍이 한사군의 지배를 받았다고 뒤집어씌웠다.
 
이를 본 중국인들도 일본처럼 지난날 자신들이 한사군(漢四郡)이란 것을 통해 조선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듯이 과장(誇張)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그들의 한사군역사위조의 내막이다.
 
한사군이 있었다는 것은 그런 사실이 있었더라면 하는! 그들의 야심표현에 불과 하다. 그들은 그 당시 소부분(小部分)의 지역을 그나마 더러는 포기하고 더러는 합치(合致)해서 자기네의 영토로 해보려고 애쓴 것에 불과 하다. 그러지도 못했으면서 여전히 허구역사를 말하고 있다.
 
우리민족이 너무나 많고 유세해서 중국은 그 희망을 단념한 것이 분명하다. 당시 예맥은 낙랑을 제외한 3군도 다 흡수했다.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최동 선생도 [조선상고민족사(朝鮮上古民族史)]에서 이를 밝히고 있다.(이상은 최태영[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49~51면 참조인용하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국가형성의 사회사‘.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智勝, ’우리上古史‘-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홍윤기,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일본속의 백제 구다라‘.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 ‘山海經’. 大連出版社, ‘行走 大黑山’.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石井進外, ‘詳說日本史,‘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井久義, ‘日本古代の親族と祭祀’. Georges Duby : L'HISTOIRE CONTINUE,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劉泳,海燕,‘赤蜂博物館’.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三省堂發行’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石井進, 笠原一男, 兒玉幸多, 笹山晴生, ‘詳說日本史’. 稻垣泰彦, 川村二郞, 村井益男, 甘粕 健 共著 ‘日本史’. 西東社出版部編 ‘日本の古墳, 古代遺跡’.외 다수의 서책(書冊)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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