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4세기 일본이 조선에 대군 파송 어림도 없는 일
고대 가야가 일본을 정복해 지배하고 백제가 그 뒤를 이어 세력을 확대했다. 신라가 오진왕(應神王) 22년에 일본을 정벌해 오사카(大阪) 근처 명석포(明石浦)까지 들어가니 일본이 항복해 백마를 잡아 조선에 승복 맹세 받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은 제 아무리 역사왜곡을 했어도 우리 한민족이 고대부터 중세까지 일본을 정벌하고 우리의 지배를 받은 것은 숨길 수 없다. 고대의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그것은 가야, 신라, 백제, 고구려, 발해, 고려, 그 어느 나라도 일본이 격파 할 수 없는, 일본이 넘볼 수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고대 일본은 우리의 은혜로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사가(史家)들도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도입된 문물과 사상이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에 미친 작용은 일본인이 상상 이상으로 크다고 했다. (日本と 朝鮮)の 2千年)/신화(神話時代)~近世 15面).
오늘은 가야가 일본을 정복하고 일본에 식민지를 두고 일본을 통치했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 일본사의 과정단계를 보면서 이에 대해 살펴보고 져 한다.
일본사의 단계에서 보는 일본역사
일본역사의 단계를 보면 일본열도에 어느 시기부터 인간이 거주했다고 추정한다. 그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일본은 1~2세기에 많은 소국가가 분립했다. 이때에 가야가 일본에 진출해 식민지를 두고 일본을 통치했다.
그리고 일본이 3~4세기에 그 중에 강대한 자가 부근의 소국가를 통일했으나 전국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 그 강대한 자중에 조선 무녀(巫女) 히미고(卑彌呼)가 북구주(北九州)에 이도국(伊都國)이라는 사마국(邪馬臺國)을 세웠다.
이 때는 부족 간의 투쟁으로 그 국가가 혼란에 빠지고 신라가 웅습(熊襲)을 앞잡이로 일본을 정복하고 소위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화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남구주(南九州)의 구노국(狗奴國)을 한국유민이 대부분 정복했다.
5세기에는 고구려가 일본을 정벌하니 일본이 저항치 못해 송(宋)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5세기 말~6세기 초에 야마도(大和)를 중심으로 부족연합이 형성되고 6세기 말~7세기 초에 호족(豪族)이 분립해 자기세력을 부식(扶植)했는데 그 호족(豪族) 중 대표가 가야계의 소가(蘇我)씨이다.
이 소가씨가 스슝왕(崇峻王)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스이코왕(推古王-서기393~628년)이 등극하고 쇼도크 다이시(聖德太子)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정치를 대행하고 대화개신(大化改新)을 시도했다.
당시까지 덴노(天皇)라는 명칭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8세기에 나온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서물(書物)에서는 제1대 진무(神武) 이후 대대(代代)의 천황(天皇)이 통치했다고 역대 왕을 배달국이 천황(天皇)이라고 부르는 명칭을 부르게 됐다.
그러나 일본이 덴노(天皇)라고 쓰기 시작한 것은 16대 닌도크(仁德王)왕까지는 실재하지 않았다. 천황의 명칭이 실재로 쓰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쇼도크 다이시(聖德太子) 때부터 쓰기 시작 했다. 즉 야마토(大和)시대에 와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에 고구려가 혜자법사(惠慈法師)를 일본에 보내어 대화개신(大化改新)을 지도했다. 이때까지 천황의 권위가 서지 못하고 7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비로소 천황의 권위가 확립했다. 7세기이전은 대왕(大王)이라 칭하고 7세기부터 천황이라 칭했다.
여기서 한민족인 임나가 일본을 정벌하고 식민지를 두어 다스린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일본이 가증스럽게도 ‘가야를 정벌했다’는 것은 말이 아니 되는 어불성설의 허구이고 조작인 것이다.
고대 가야 계 임나가 일본을 통치했다
그러면 임나는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 이미 언급해서 다 아는 사실이나 그 명칭과 위치를 보면, 일본서기(日本書紀) 킨메이기(欽明紀) 23년 조(條) 주(註)에 임나는, 가라국(伽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嗟國), 자타국(自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손국(乞飡國). 임례국(稔禮國)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일본의 역사왜곡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도 임나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임나의 본명이 가라(加羅)요, 대가락국(大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이 건설한 나라”라고 했다. (海東繹史 卷中四十一 通日本始末). 임나는 가라, 대가락국을 중심으로 구성된 나라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대(大)가락국은 가야국이요, 6가야의 하나인데, 동은 황산강(黃山江=낙동강), 서남은 창해(滄海=동해), 서북은 지리산(智里山=(智異山), 동북은 가야산남(伽倻山南)으로 국경을 삼았다고 했다.
신라가 대가락국을 합병한 후에 김관경(金官京), 혹은 김해부(金海府)라 칭했다. (三國遺事, 卷二 駕洛國記). ‘삼국사기’에는 김수로왕이 건설한 김관국(金官國)의 일명(一名)이 가야(伽倻)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김해경(金海京)이라고 개칭(改稱)했다고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 三十四 地理一).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임나는 김해를 중심으로 경상남도 동남에 위치한 것이 분명하다. 일본서기 스슝기 65년 추(秋) 7월조(條)에 임나는 계림(鷄林=경주慶州)의 서남에 있는데 북은 바다가 가로 막았다고 했다.
또한 동서(同書) 계례기(繼禮紀) 6년12월조(條)에 임나는 백제와 연결돼 두 나라가 조석으로 교통하고 계견(鷄犬)의 소리에 대하여 임나인지 백제인지 구별치 못한다고 했다. 동서(同書) 킨메이기(欽明紀) 2년 하(夏) 4월조(條)에는 ‘임나는 신라의 경(境)을 접했다’고 했다.
임나는 대마도라는 해석자도 있는데 스슝기(崇神紀)에서 보듯 북을 바다가 가로막았다함은 동, 서, 남이 육지라는 뜻이요 전기한 계례기(繼禮紀)에 백제와 연결돼 닭소리 개짓는 소리가 구별할 수 없다고 함은 백제와 분리돼 있지 않다는 뜻이다.
대마도는 사면이 다 바다가 가로 막았으며 백제와 바다를 격(隔)해 분리돼 있다. 또한 긴메이기(欽明紀)에 임나는 신라와 경(境)이 접했다 하고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임나는 지리산(智異山) 중간에 있다고 했다.
일본 측 사료에 없는 미나마 일본부 조작
일본은 일본의 일본문화사(日本文化史)에 ‘일본부’라는 말은 일본의 처음 왕인 오진(應神)이후 7번째 왕인 유우라쿠 덴노(雄略天皇(463~489)기(紀)에 비로소 보인다. 그런데 이 명칭이 어느 때에 지어졌는지 또한 과연 이와 같은 명칭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日本文化史 第1編 上古_奈良時代 第8章朝鮮半島との關係).
이노우에(井上秀雄)씨는 “임나일본부의 명칭은 ‘일본서기’에 있어서 신라 백제계의 사료에만 있고 일본 측의 사료에는 일본부의 명칭이 없다. 이와 같은 불확실한 사료를 기초로 임나일본부의 조직을 추측할 수 없다. 임나일본부는 본래 임나에 토착한 일본인의 정치연합이요 일본정부와 관계없다”고 했다.(井上秀雄, 朝鮮史入門92面).
최태영 선생은 삼국이 정립된 시기에 변한지역에서 일어난 가야를 두고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가 그곳에 있었다고 하며 신라보다 약 1백년 늦게 낙동강 하류에 고조선의 제후국인 한(韓)의 지배를 받던 변한(弁韓)지역에 김수로왕을 시조로 세워진 6부족(금관가야를 맹주로 한 아라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소가야 대가야)국가라고 했다.
가야국은 당시 쇠(철)와 농산물이 풍부해 자주 가야에 와서 교역을 했던 왜국에 진출해 그곳에 임나라는 작은 분국(分國-식민지)을 만들고 그들과 연맹해 신라, 백제에 대항했다. 임나는 왜 땅에 건설한 가야의 식민지인 것이다.
그런데 532년 신라가 금관가야(金官伽倻)를 병합하고 백제도 가야의 영토를 쳐서 빼앗았다. 세력이 약해진 가야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백제의 도움을 받아 신라를 공격했으나 562년 고령대가야 마저 신라에 병합됨으로서 6가야가 아주 멸망했다.
일본은 킨메이(欽明), 비다츠(敏達), 스슝(崇峻), 스이코(推古), 코우토쿠(孝德)등 역대 일본천황이 임나일본부를 회복하려고 전 국력을 다하여 싸웠다. 이는 고대 일본에 토착한 가야(임나)가 본토인 가야를 되살리려고 전력을 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은 미나마 일본부가 우리를 다스렸다고 왜곡하였으나 말이 안 된다. 우리민족을 통치한 정치기관이라면 이는 일본역사에 크게 자랑할 사건이다. 특히 역사를 위조하여 자랑하는 일본사가(日本史家)가 대서특필 할 것이다. 고대 일본은 우리를 다스린 적이 없다. 다스릴 능력도 여건도 아니었다.
더구나 일본주장이 허구인 것은 미나마 일본부의 명칭도 신라, 백제계의 사료에만 있고 일본 측의 사료에 없는 것을 보면 ‘미나마 일본부’는 일본이 우리민족을 통치한 정치기관이 아니고 우리가 일본을 통치한 기관인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사의 기원도 크게 잘못됐다
일본사에 있어서 임나문제의 기원은 그들이 조작한 일본서기 스진덴노(崇神天皇?~서기318) 65년 추(秋) 7월에 임나가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를 보내 조공했다는 조문(條文)이다. 다른 곳에 임나를 지배,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아무데도 없다.
일본은 이 스진덴노(崇神天皇) 65년 추(秋) 7월에 ‘임나조공 설’을 근거로 일본이 임나를 통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최초에 일본을 개국한 자는 진무(神武)가 아니고 스진(崇神)이다. 스진 시대는 일본은 서기전 97~30년이라 하나 이것도 조작이다.
와세다 대학의 미스노 유(水野 祐) 교수는 스진은 서기 ?~318년이라 주장한다. 그 이전의 일본의 천황(天皇)은 1~9대까지 다 가공(架空)의 천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본 바로는 1대~14대까지가 허구의 왕으로 왜곡되고 있다. 일본의 첫 천황은 서기 363~394년의 오진(應神)이 일본 1대 천황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스진 시대는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한 ‘씨족시대’로서 소부락생활을 하고 일본국내도 통일, 통치도 못하던 시대이다. 이러한 일본이 멀리 해외에 진출해 다른 민족을 통치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어불성설의 허구이다.
더구나 일본보다 문화와 무력이 발달한 선진국인 가야(임나)를 지배 할 수 없다. 일본인들이 은을 많이 가지고 가야에 와서 칼을 사가는 미개한 일본이었다. 일본에 임나는 가야의 식민지를 말하며 그 식민지의 일본인들도 가야와 왕래하며 생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미나마 일본부는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우리민족이 일본을 통치한 정치기관이다. 특히 가야(임나)는 일본보다 먼저 개국한 선진국으로 당시 미개한 일본을 가르치고 경제적으로도 일본을 후원하였다. 일본이 가야에 맞설 수 없는 상태였다.
신라가 가야를 정복하니 가야유민이 세운 일본은 역대천황이 떠나온 고국을 되찾으려고 전력을 다하여 싸운 것이다. ‘일본서기’에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이 웅략기(雄略紀)와 킨메이기(欽明紀)에 보이는데 유우랴쿠(雄略)는 왜왕 무(倭王 武. 463~489)이다.
왜왕 무 시대에 고구려가 일본을 정벌하니 일본은 고구려를 저항치 못해 송(宋)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킨메이(欽明)시대(536~570)에 신라가 일본을 누르고 임나를 탈취했다. 우리 민족이 일본을 누르고 우리 민족이 압박을 받을 때에 나타난 일본부는 분명히 우리 민족이 통치한 정부기관이지 일본기관이 아니다.
또한 일본역사의 기년(紀年)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이 서기전에 건국했다는 것도 조작된 허구이며 가공의 역사이다. 가야는 기마민족(騎馬民族)으로 일본에 일찍이 분국(分國)을 세우고 말(馬)을 처음으로 일본에 선보였으며 미개한 일본을 개화시키는데 백제, 신라, 고구려보다 먼저 기여한 것은 역사가 이를 잘 말해준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윤내현, 박선희, 하문식 공저 ‘고조선강역을 밝힌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유우찬 ‘마두부활과 되마사상’.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南帝 ‘命理속의 哲學’. ’태백과 압록‘ 黃聖圭, 韓泰鎬 共著 ’近代日本政治文化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朴炳植 ‘日本語の悲劇’. 高橋徹 古代の遠近法,. 猪俣幸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田畑喜作 ‘高天ケ原は實在した-原日本人の發見-’. 猪幸俣衛 ‘日本古代傳承の謎を解く’. 原田實 ‘幻想の超古代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 ‘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著 ‘ヤマト王權の成立’. 사회과학원 조선고고학 총서 52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인류학적으로 본 조선사람과 북방주민들’. 조희승 ‘일본에서 조선소국의 형성과 발전’.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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