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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일주일만 빨리 항복했어도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다"

송화강 2019-04-16 (화) 15:20 6년전 6144  

"일본이 일주일만 빨리 항복했어도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다"

15년에 걸쳐 현대사 집필한 어느 6ㆍ25 참전 소년병의 집념

조선pub 2016-04-05
 
기자가 류형석(柳亨錫82)씨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세무사로 있던 2004년이다. 그가 펴낸 ‘625 참전 소년지원병’ 수기를 《월간조선》에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625 당시 입대 의무가 없었던 18세 미만(17세 이하)의 소년들이 자원입대한 경우를 ‘소년지원병’이라고 부른다. 이 수기는 류형석씨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류 씨는 1950년 8월 21일 16세 되던 중학교 2학년 때 자원입대를 한 소년지원병출신이다.
 
당시 류씨는 동료 소년지원병들을 일일이 찾아 구술을 받거나 그들이 쓴 육필 원고를 직접 다듬어 수기를 펴냈다. 영원히 묻힐 뻔한 소년병 45명의 귀중한 개인 참전수기와 대구 학도병훈련소에 입대한 2000명의 학도병, 인천학도의용대의 3000명과 태백공업중학교의 127명의 학도특공대를 통하여 입대한 학도병에 포함된 소년병(학도병의 약 50%)의 참전기록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 무렵 그는 기자에게 “625 관련 책을 하나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기자는 솔직히 그의 말을 그냥 흘러들었다. 625 관련 전사(戰史)나 수기는 이미 수없이 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담을 펴내는 작업 정도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11년 어느 날 류형석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예전에 이야기했던 625 관련 책이 드디어 완간되었다”는 것이다. 류 씨의 전화를 받고서야 기자는 오래전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책 제목은 《낙동강》이었다.
 
책을 받아든 기자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노령에 8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혼자서 집필한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이 책은 기자가 보았던 그 어떤 625 전사보다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었다. 기자도 625 관련 책을 많이 보았지만 625전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관련 자료를 이렇게 충실하고 꼼꼼하게 수록한 책은 처음 접했다. 그는 《낙동강》이라는 책을 펴내는 데 10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다.
 
“38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알아야”
 
책이 인쇄되자마자 그는 또다시 집필에 매달렸다. 2011년 당시 그는 기자에게 “해방 직후부터 625가 발발하기까지 해방공간 5년간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제목은 《삼팔선》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지난 2월 드디어 4권 분량의 《삼팔선》이라는 책이 나왔다. 625 전쟁사인 《낙동강》의 집필 시간까지 포함하면 15년에 걸친 현대사 대장정을 마친 것이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대조하고, 고증한 그의 집념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해방 전후사와 625 전쟁사가 없다는 것이 아쉬워서 직접 관련 책을 집필하게 됐다”며 “이 책이 젊은이들이 역사를 있는 그대로 균형 있게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래는 류형석씨와 일문일답(一問一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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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의 류형석씨, 맨앞줄 왼쪽.


-책 제목을 왜 《삼팔선》으로 지었는지?
 
“삼팔선이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반도의 남북분계선으로 정해졌다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없어진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른 위도상의 선이다. 곧 북위 38도 선을 말한다. 삼팔선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서 각기 다른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고, 그 결과 625라는 미증유의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을 일으켰다.
 
삼팔선은 북한군의 남침과 함께 없어졌지만, 실제로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휴전선’으로 이름만 바뀌어 존재하는 ‘통한의 선(線)’이다. 결국 대한민국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팔선이 왜 생겼는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단과정을 제대로 이해해야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제대로 알 수가 있다.”
 
-우리는 흔히 38선을 ‘냉전의 산물’로 인식하거나 그렇게 배우고 있다.
 
“전후세대는 38선을 잘 모르고 있고, 아는 사람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기 위하여 정한 선’이라고만 알고 있다. 반면에 공산당(당시의 공산당 남로당 북한 그리고 오늘의 종북세력을 통칭한 저자의 표현)은 ‘미국이 남쪽에 미 제국주의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방적으로 정한 선’이라고 선동했다. 그런 주장을 바탕으로 미제(美帝)의 주구 이승만(李承晩)이 남조선에 괴뢰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을 분단했다고 선전했다.”
 
"38선 없었으면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
 
-책에는 일본의 항복 과정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굳이 공산당이나 종북좌파가 아니라도 38선 분할의 책임을 미국으로 돌리는 것이 대부분 사람의 보편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 그 책임을 돌리는 경우는 없다. 지금까지 내가 본 어느 학자도 어느 책도 똑같았다.”
 
류 씨는 “한반도의 분단 과정에서 일본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소련은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8월 9일 부랴부랴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하고, 함경북도로 진격했다. 미국은 미군(美軍)의 희생을 줄이고 전쟁을 일찍 종결하려는 방편으로 소련의 참전을 갈망해 왔다. 그런데 막상 소련군이 한반도로 진격하여 급속한 속도로 남진을 계속하자 머지않아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반도를 소련이 독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미군도 한반도에 진출해야 하는데 이때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미군은 600마일이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다. 더구나 그곳의 미군은 아직도 전쟁 중이어서 한반도에 병력을 진격시킬 형편이 되지 않았다.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한 후에는 소련군을 물러가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소련군의 남진을 어느 선에서 저지해야 했고, 그래서 정한 선이 38선이다.”
 
그는 “결국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지 않고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소련이 참전했고 그 여파로 38선이 그러진 것이므로 38선 분할의 책임이 일본에 있다고 보아 그 과정을 소상하게 다루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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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북한에 먼저 공산정권을 수립한 후, 남한마저 공산화 하려고 시도했다. 소련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은 동족을 상대로 참혹한 전쟁도 서슴치 않았다.
 
-38선은 언제,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하였는지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1945년 8월 10일 밤에 미국 펜타곤(Pentagon)에 있는 육군차관보실에서 3부 조정위원회 긴급회의가 열렸다. 당시 미국에는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같은 전쟁을 또는 군을 총괄하는 기구가 없었다. 그래서 전쟁을 종합적으로 지도관리하는 임시적인 조치로 3부 조정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그 구성원은 국무부, 전쟁부(육군부), 해군부의 각 차관보였다. 이날 긴급회의에서 일본의 항복과 관련하여 미국 태평양방면육군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사후조치에 대한 일반명령 안을 결정하였고, 함께 소련군의 한반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38선이 결정되었다.”
 
남북 분단의 근원적 책임은 일본
 
-그러니까 미군이 38선을 긋기로 결정한 것인가?
 
“결국 미군이 38선을 정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미군이 남쪽을 차지하기 위해 그은 것이 아니라 진주하는 소련군에게 그 이상 진출하지 말라고 정한 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하여 북위 38도 선을 기준으로 하여 미소 양군의 진주 경계선으로 삼은 것이다. 만일 미군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소련군이 부산까지 진격하여 한반도는 소련군이 점령하였을 것이고 결국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어 우리가 북한주민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몸서리쳐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류 씨는 “이후 김일성은 38선은 미제가 남조선을 차지하기 위하여 정한 선이고 그렇게 해서 남조선에 미 제국주의식민지 괴뢰정부를 수립하여 조국의 통일을 방해했다고 주장했다”며 “김일성의 이런 주장을 오늘날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이 동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동조세력이 편찬한 국사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에게 오도하고 있으니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38선 결정 과정에서 일본의 책임이 크다고 하셨는데.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한 모리타 요시오는 《조선종전기록》에서 ‘일본이 포츠담선언 수락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어전 회의는 8월 9일 밤이었지만 만약에 그것이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이었다면 소련은 참전의 기회를 잃었을 것이며, 조선의 38선 분할의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한 ‘9일 밤 어전 회의에서 군부 강경론이 이겼더라면 소련은 남부 사할린북해도오우(奧羽)까지 진출함으로써 일본은 미소로 분단될 뻔했다. 실로 8월 9일 밤의 천황의 재단(裁斷)은 일본을 이 운명에서 건졌으나 조선이 일본을 대신해서 둘로 갈라지는 결과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경우 한반도는 모두 소련군의 점령하에 들어간다. 이것은 모리타의 의견이 아니라 사실이다. 우리가 여러모로 운이 없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류 씨는 “연합국의 최후통첩인 포츠담선언이 일본에 전달된 것은 1945년 7월 26일인데 이 선언을 일본이 수락하지 않으면 8월 3일 이후 일본의 정해진 주요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되어 있었다”며 “하지만 일본은 이 선언을 묵살했다”고 말했다. 
 
“1944년 일본은 이미 전세(戰勢)가 기울었음을 스스로 판단해놓고도 시간을 끌어 수많은 자국민을 희생시키고, 한반도까지 분할시킨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1943년 11월에 들어 일본은 태평양에서의 전황(戰況)이 불리해 지자 태평양함대의 주력을 일본 본토로 철수하였고, 대본영(합동참모본부 같은 기구)은 사이판을 최전선으로 하여 태평양에서 총퇴각을 결정했다. 이 시점에서는 일본이 연합국에 대하여 종전협정이 아니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가 있었다. 일본의 기득권을 보장받으면서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지만, 군부 실세가 실기한 것이다.”
 
-일본 군부가 이미 전쟁에서 패한 것임을 알고도 전쟁을 계속 끌고 갔다는 것인가.
 
“그렇다. 1944년 6월 15일 미국이 사이판을 공격하였다. 사이판이 미군에 점령되면 일본은 패한다고 내다보고 있는 마지노선이다. 이 일본 최후의 전선 사이판 전투는 7월 9일 끝이 났다. 이때가 첫 번째로 종전협정을 해야 했을 기회였다. 종전협정 대신에 일본 군부는 ‘1억(일본인구) 옥쇄(玉碎)’를 떠버리며 자살 특공작전에 들어갔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했고, 미군기들이 대규모로 일본 본토를 공습했다. 전쟁국면은 일본의 패망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5월 7일 맹방 독일이 항복했고, 소련이 8∼9월에 대일참전을 할 것이라는 참모본부의 판단이 나왔다. 이때가 두 번째 종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무조건항복이라는 수모를 면하고 국체를 보존하는 등 일본이 최소한도의 체면을 유지하는 선에서 종전협정을 맺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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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월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사진 왼쪽에서 순서대로)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다. 미국은 이때 소련으로부터 대일참전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소련군은 왜 일본으로 바로 진격하지 않았나
 
-한마디로 군국주의에 물든 군부와 천황이 도무지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보인다.
 
“말했듯이 일본이 항복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마지막으로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라도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무조건 포츠담선언을 수락했어야 했다. 이때가 한반도의 분단을 면할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나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8월 9일 밤에 열린 어전 회의에서 군부 강경실세는 한 술 더 떴다.
 
아나미 육군대신이 본토에서 최후의 자살적 백병전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최후 방어계획인 결행작전을 상기시키면서 연합군의 본토침공을 물리칠 수 있는 산술적인 복안을 피력했다. 235만 명의 병력과 400만 명의 추가병력을 소집해서 본토를 지킬 수 있고, 여기에 15∼60세의 남자와 17∼45세의 여자를 모두 동원하면 2800만 명에 이르고 이들에게 영웅적인 최후의 저항을 감행하도록 죽창과 몽둥이 등 원시적인 무기로 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했다.”
 
-그 결과 일본은 천황제 유지는 물론, 전범(戰犯)인 천황의 안전은 확실히 담보 받은 것 같다.
 
“결국 일본군부의 강경한 태도로 원자폭탄을 한 개 더 얻어맞고 중립조약을 맺고 있는 소련의 공격까지 받고야 손을 든 멍청한 일본은 저도 망하고 한국도 망하게 한 것이다. 일본이 최소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만 항복을 했으면 소련군의 대일참전기회는 없었고 38선은 생겨나지 않았다. 한민족의 운명이다.”
  
-이 과정에서 미군이 일본의 전력(戰力)을 과대평가한 면도 있다고 들었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20일 남긴 7월 26일 포츠담선언을 한 시점에서도 일본은 최소한 1년 이상은 버틸 것이라고 생각하고 ‘1946년 말까지는 전쟁을 종결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본토 상륙 계획을 세웠는데, 일본 본토 상륙전에 미군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할 것으로 예상했고 희생을 치르지 않고 일본을 항복시키는 방법은 소련을 참전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소련이 빨리 참전해 주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 보면 달리 방안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작부터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해 주기를 바랐고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크림반도에 있는 얄타에서 미소 3 거두(巨頭)가 회담을 갖고 얄타비밀협정을 체결했는데, 이때 소련으로부터 대일참전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대일참전의 실리를 재면서 계속 기회만 보고 있었다. 답답한 미국은 소련에 대하여 기회 있을 때마다 참전을 종용해 왔었다.
 
소련은 독일이 항복하자 그로부터 2~3개월 후면 참전할 수 있다고 시기를 알려왔고, 루스벨트는 그 시기를 목매어 기다려 왔던 터였다. 그러나 독일이 항복하고 3개월에 이른 시점에서도 소련은 참전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미군의 손실은 자꾸만 늘어갔다. 소련은 감이 익어서 떨어질 때를 기다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숙시작전(熟柿作戰)’이다.”
 
-소련군이 한반도가 아닌 일본 본토로 진격하는 방법은 없었는지.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일본을 공격한다면 마땅히 일본본토를 공격했어야 했다. 그런데 소련군은 한반도의 북단 함경북도를 침공했다. 물론 국경이 접해 있어 지상군이 진격하는데 편리했고,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전쟁 상대는 일본이다. 당연히 일본 본토로 진격했어야 했다.
 
지척에 있는 사할린을 거쳐 일본의 북해도로 진격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움이 아니었다. 한반도로 진격하는 것보다 부담은 다소 크겠으나 일본본토를 공격하는 것과 그 식민지 한반도를 공격하는 것과는 실리 면에서 천양지차가 있다. 일본을 공산화할 수가 있었고 그것은 아시아를 거머쥔 것과 같은 실리가 따른다. 미국을 아시아에서 밀어내는데 그보다 더한 이익이 있겠는가? 결국 얄궂은 한국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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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르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일본이 항복을 질질끔으로써 한반도가 분단되었고, 한반도의 분단은 패망한 일본의 행운으로 이어졌다.  
 
 
늑장 항복이 일본의 전화위복이 돼
 
-미국은 원자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굳이 소련의 참전을 요청할 필요가 있었는가?
 
“1945년 7월 16일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소련의 참전 없이도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실제 전황을 봐도 소련이 참전하지 않았어도 일본은 8월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7월 22일 포츠담회담에서 원자폭탄 사용 문제가 논의되었고, 처칠 영국 수상은 전쟁을 조속히 종결하기 위하여 원자폭탄을 되도록 빨리 사용할 것을 종용하면서 소련의 대일 참전이 필요 없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루스벹르 후임인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상황에 대한 판단은 물론 전후에 전개될 정치적 외교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오직 자국의 희생을 줄이겠다는 단견(短見)에서 소련을 대일전에 끌어들이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무조건 항복으로 패망한 일본은 정작 625 전쟁을 통해 경제가 부흥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 틈에 일본은 경제부흥의 기회를 잡았다. 한국전에 참전한 UN군의 군수조달을 일본이 맡음으로써 일본이 오늘날 세계경제 3대 대국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온갖 인적(人的) 물적(物的) 수탈로 한국을 착취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운 일본이, 정작 늑장 항복으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았고, 그 ‘덕’으로 패전의 잿더미에서 경제를 부흥시켰으니 결과적으로 항복을 늦게 한 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결과가 되었다. 한반도 분단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죽어라 죽어라’ 했고, 일본은 ‘살아라 살아라’ 한 꼴이니 괴기(怪奇)한 역사의 운명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미군정(美軍政)이 들어섰다. 미군정이 점령한 한반도의 남쪽에 중립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는데.
 
“미 국무부는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있는 한반도의 남쪽에 친미(親美)적인 이승만과 김구(金九)를 제쳐 놓고 중도우파인 김규식(金奎植)을 내세워서 중립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북쪽에도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지 말고 중립정부를 수립해 줄 것을 소련 군정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6년 10월 초 국무부장관 한국문제 보좌관 랭던이 평양에 가서 소련군사령부 관계자 및 김일성조만식 등과 면담을 했고, 이때 랭던은 중립정부수립구상에 대하여 소련 군정과 협의를 했는데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 군정은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이 점령한 북한지역에 부르주아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류 씨는 “남쪽에서 ‘야전군’인 미군정이 갈피를 못 잡고 어정쩡하게 어물거리는 사이 북한을 점령한 ‘정치군’인 소련 군정은 일사불란하게 정부조직에 착수하여 1946년 2월 8일 이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김일성을 위원장에 앉혀 1인 지도체제의 강력한 공산주의정부형태를 갖추어 놓았다. 다만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을 붙여 대외적으로는 국가가 아닌 것처럼 위장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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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뒤, 북한 주민들이 스탈린과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소련 군정은 1946년 모스크바의 신탁통치 결의안에 반대한 조만식 조선민주당 당수 등 민족주의 세력을 ‘친일반동분자’로 몰아 숙청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련의 사주에 따라 공산당 정권을 먼저 세운 김일성
 
-말씀하신 대로 소련의 계획에 의해 북쪽에 이미 정부가 들어선 것은 역사적 사실인데, 남쪽의 종북 좌파들은 마치 남한이 먼저 정부를 수립해서 분단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선동한다.
 
“38선 분할이 불가피했음은 앞에 말한 것으로 충분히 이해했을 것으로 믿는다. 문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책임문제다. 이것 역시 북에 진주한 소련 군정은 앞에 말한 바와 같이 1946년 2월 8일 공산주의정부형태를 갖추어 놓은 상태에 있었으므로 이런 상황에서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답이 정해져 있다. 곧 남쪽이 북쪽에 흡수되지 않는 한 통일정부수립은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미군정이 제시한 남북에 다 같이 중립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은 동질성을 가지고 통일을 쉽게 하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북에 이미 공산주의정부형태가 갖추어 있는 상태에서 그것도 실현가능성은 ‘0’(제로) 상태가 되었다.”
 
-이미 북에 공산 정부가 들어선 이상 협상으로는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인가.
 
“북에 공산 정부가 들어선 상황에서 남쪽이 어떻게 해야 했는가? 남쪽에 공산주의정부를 수립하지 않은 한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분단의 책임이 소련 군정(북한)에 있다는 것은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면 알 수 있는 문제다. 분단의 책임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 때문이라는 그런 돼먹지 않은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일성의 북한, 남쪽의 공산당과 그 동조세력 즉 오늘의 종북 좌파는 ‘초록은 동색’이라는 속담이 어울리게 한 통속이다. 우리가 점잖게 ‘종북 좌파’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저들이 북에 있든 남에 있든 똑같은 ‘공산당’이다. 따라서 저들은 한반도의 남쪽에 자유민주주의국가가 있다는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입만 열면 이구동성으로 대한민국을 비방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와는 공존할 수 없는 세력들이라 탓할 가치조차 없다. 다만 명백히 국가를 부정하는 세력이 생겨나고 제약 없이 활동하도록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정부가 막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을 뿐이다.” 
 
-미군정의 중립정부 수립방안과 소련 군정에 의한 북한의 공산주의정부 수립 틈바구니에서 대한민국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는가?
 
“한반도의 독립 문제를 결정한 것이 모스크바 3상 회의다. 미국소련영국의 외상이 모스크바에서 회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크게 두 가지가 결정되었다. 조선을 5년간 미소 4개국이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과 신탁통치기간에 존재할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미소 군정이 협의하여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기 하기위한 회의가 서울에서 진행 중에 있었다. 이렇게 되자 전 국민적인 신탁통치반대운동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열화같이 일어나서 연일 장안을 들끓게 하였다. 소련 군정은 1950년 12월 말경 공산당 대표 박헌영을 평양으로 불러 신탁통치를 찬성하도록 지령을 내렸고 조선공산당은 1946년 1월 2일 성명을 발표하고 하루아침에 신탁통치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섰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설 수 있었는지.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각 정당사회단체대표와 협의를 하여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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