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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학] 중·일의 날조역사를 본다-일본 원류 부여기마족

송화강 2019-05-05 (일) 17:14 6년전 9028  

중·일의 날조역사를 본다-일본 원류 부여기마족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3-06-29 00:02:5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부여 기마민족’이 일본을 정벌했다
 
필자는 일본의 역사날조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 등과 관련해 그 기만성·허구성·죄악성에 좌시할 수 없어 본란을 통해 진실을 언급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일본은 고고학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5~6세기 한국은 왜보다 월등하게 앞선 선진국이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저명한 외국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개리 레저드(Gari Ledyard) 교수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든 것은 한국인들이었다. 일본의 전통 역사서인 712년에 고사기(古事記)와 720년에 완성한 일본서기(日本書紀) 두 사서(史書)는 당시 정치권력을 잡은 측에 좋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때문에 선진조선의 지배와 정벌을 부인함으로 일본 왕실의 뿌리를 감추고 진실을 숨겼을 뿐 아니라 조선을 애써 무시하려는 그릇된 역사관은 명치유신이후 노골적으로 교육에 반영됐다. 이는 군국주의 체제를 유지할 대의명분과 권위를 과시할 필요 때문이었다. 그리고 끝내는 대한 침략사관으로 변질돼 오늘날에도 한·일문제의 큰 장애로 남아 있다. 이 거짓의 역사만을 믿는 일본의 무지한 정치인과 우익사람들은 왜곡된 역사를 믿고 한국을 멸시하며 무례한 언행을 하며 우리를 불쾌하게 하고 있다. 결국 이 같은 언행은 역사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은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왜곡된 역사를 진짜 역사인양 조작하고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은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그 허구성이 드러나고 있다”
 
1920년대와 우경화가 진행된 30년대의 학자들은 천황의 ‘신성한 족보’를 캐는 일을 저지당했다. 또 서기전 660년의 진무왕(神武王)이 일본을 건국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진무왕의 존재 자체가 허구다. 4세기 기마민족이 왜로 침입해 왔음은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고대 사학에 숨통이 터지는 일이 생겨났다. 그것은 한 일본 학자가 용감하게 “서기전 660년의 진무왕(神武王)이 일본을 건국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진무왕의 존재도 허구이고 4세기 기마민족이 왜로 침입해 왔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사람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 개리 레저드(Gari Ledyard) 교수와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박사의 ‘부여기마민족 정벌론’과 같은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아들 역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4세기 기마민족의 일본 침입’이란 예술사를 연구해 냈는데, 이것은 이 방면의 연구가 일본보다 미국이 앞서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철기와 말을 사용하고 왜의 원주민보다 월등했던 한반도 부여 기마족은 369년~370년에 걸쳐서 왜국을 손쉽게 정벌하고 일본 최초의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해 ‘신성한 왕권’을 누렸다.
 
부여족 혈통을 화족(和族) 혈통으로 변조
 
일본은 일본 왕에 대해 한국부여족 혈통 보다 일본적인 화족(和族) 혈통으로 변조했다. 일본은 그 정당성을 위해 720년 편찬된 관찬사서(官撰史書)를 각색했다. 즉, 나라시대에 왕명을 받아 일본의 초기 역사서를 편찬했던 사가들은 일본 왕가의 계보가 신의 시대부터 내려온 것으로 꾸몄다. 일본 왕실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전통성을 내세우나 모두 거짓된 허구일 뿐이다. 개리 레저드(Gari Ledyard) 교수와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 왕족 간 형제자매 살해만도 여러 건이라고 한다. 예컨대, 14세기 고다이고(後醍醐;재위 1318~1339)는 장자로서 일왕 자리를 상속받았지만 현 일왕 가계는 그의 동생 가계에서 내려 왔다는 것이다. 장자상속이 최우선시 된다면 이는 불법이다. 일본은 제멋대로 왕도 조작하고 호칭도 제멋대로 부르고 있다. 천황이라는 호칭도 최소한 8세기 이전의 왕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중국식의 이런 칭호는 8세기에 비로서 시작됐다. 실제로 8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본 왕실은 전적으로 한국의 감독과 후견 아래 있었다. 부여 기마족으로 왜를 다스린 첫 왕은 순수 기마 족 혈통의 호무다 왕이다. 즉, 단군의 73대손이며 백제 근초고왕의 자손인 오진(應神)이라는 왕이다. 이 오진(應神)이 일본의 첫번째 왕이라는 것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일본은 이러한 한국유민의 부여 기마민족 자취를 없애려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논리를 적용했다. 그들은 오진(應神)왕에 대해 ‘그 어머니 진구우 왕후(神功王后)가 한국을 정벌하면서 출산을 늦추기 위해 자궁에 돌을 끼어 막았다가 일본으로 돌아와 10개월 열나흘 만에 낳은 아들이다. 이 오진(應神)왕은 130여 년간 살았다’고 썼다. 이것은 한국의 부여 기마족이 규슈(九州)를 거쳐 일본 본토를 정벌한 것을 역으로 뒤집어 쓴 것이다. 부여 기마족의 일본 정벌은 일본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30여 년간 지속된 부여족 지배는 일본에 처음으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것이었다. 3세기경 무녀 히미코(卑弥呼)가 규슈 수십 부족을 통일해서 세웠다는 야마다이국(邪馬台國=伊都國)은 2대 종녀(宗女)여왕2대로 없어졌다. 이후 부여 기마족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먼저 규슈(九州)를 정복하고 이어 서부 혼슈(本州)를 점령, 지금의 오사카-나라일대 야마토(大和) 평원에 수도를 건설했다. 부여 기마족은 기병을 이용한 월등한 전투력으로 신속히 정벌을 이뤄낼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미개한 왜 원주민들은 쉽게 굴복했다. 506년 내부 분열로 왕권이 끊길 때까지 왜를 보다 조직적으로 통합되고 개선된 군사력을 갖춘 국가로 이끌었다.
 
부여 기마족, 말을 이용 월등한 전투력으로 왜 정벌
 
이 부여족은 원래 고구려에 인접한 한반도 북방계부족으로 고구려에게 망한 뒤 남쪽으로 이동해 왔으며 일부는 선비족(鮮卑族)에게 정복됐다. 부여세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한강까지 접했으며 부족 일부는 백제와 합하고 일부는 가야를 거쳐 부산(김해)으로 이주·정착했다. 당시엔 문자가 일반화 되지 못해서 기록으로 남지 않았고 새로운 사회를 형성해 가는 와중에 일어났던 어렴풋한 고대사가 됐을 뿐이다. 이 때문에 8세기 나라의 사가(史家)들은 한국의 왜 침입을 부정하고 반대로 왜의 한국침입으로 바꿔서 설정한 것이다. 이는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허구의 역사가 다 밝혀지고 있다. 부여 기마족은 서양에서 로마제국이 야만인들에 짓밟혀 있을 무렵 아시아에서 전투에 필수적인 말과 무기 등으로 잘 무장된 전사들이었다. 일본 땅을 쉽게 정복한 이유였다. 왜 정복에서 말이 중요한 전력이 됐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기마민족의 장거(壯擧) 이후 1000년이 지나 스페인의 피자로가 단 50기의 기병대를 이끌고 남미 페루의 전설적인 부(富)를 탈취했다. 그 당시 남미나 북미대륙엔 말이 없었기 때문에 페루가 황금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건 간에 손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또한 스페인 모험가 코르테스도 말 탄 기병대를 이용해 멕시코 전역을 정복했다. 규슈에는 한반도에서 바다건너 일본에 상륙한 부여 기마족을 묘사한 벽화가 전해지고 있다. 부여 기마족은 항해를 성공적으로 해내고 왜를 정복 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정복에 말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왜는 무기나 장비 면에서 부여 기마족과는 비교가 안 됐다. 더구나 왜에는 말이 없었다. 기마병의 존재는 이처럼 왜를 정벌하는데 획기적이었다. 한국사에서 말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경주고분을 통해서도 입증됐지만 왜를 정복하는 데도 말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말이 아니더라도 대륙에 보편화된 철기에 힘입어 신예무기도 왜는 이에 미치지 못했다. 부여 기마족은 369년 왜를 정복하고 그 곳에 중앙집권의 나라를 세운 것이다. 개리 레저드(Gari Ledyard) 교수에 따르면 부여족이 일본을 통치한 시기는 서기 369년부터 506년까지다. 이는 일본이 내세우는 15대 오진(應神)왕대부터 26대 게이타이(繼体)왕에 이르는 것이다. 북한 사학자 김석형(金錫亨:1915~1996, 김일성대학교수, 북한사화 과학원장)의 논문도 고구려 식민지에 보다 큰 비중을 부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코벨(Jon Carter Covell) 박사의 부여족이 일본에 식민지를 두었다는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김석형(金錫亨)은 왜 땅의 한국식민지는 4세기 들어 강력한 정치적 집단이 됐으며 세곳의 중심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는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동부지역에 거점을 마련한 가야 이주민들이고, 두 번째는 이즈모와 기비지역의 신라 이주민이고, 나머지 하나는 규슈 북부를 차지한 백제 이주민들이라고 했다.
 
일본왕가는 모두 한국인 혈통이다
 
이들은 현(福井 縣) 쓰루가(敦賀)에 배를 대고 왜 땅에 들어가 정착했다. 이들은 기원전 3~2세기 한국 땅을 떠난 사람들로 일본 서부 후쿠이 현(福井 縣)쓰루가(敦賀)에 배를 대고 왜 땅에 진입했다. 그 옛날 부산 김해 항을 떠난 한국인들은 우선 북규슈(北九州)를 거친 뒤 왜국 내륙으로 들어가 야마토(大和)지방에 정착했다. 이들은 왜 원주민들에게 철제기구의 사용과 논농사를 포함한 새로운 농업기술을 선보였다. 이러한 것을 일본 학자들도 말하고 있다. 1916년경 기다 사다기지(喜田貞吉)는 일본 왕실의 조상이 부여 백제였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교토대학의 우에다(上田正昭)교수는 제2차 대전 후 “기다 사다기지(喜田貞吉)박사의 귀중한 문제 제기는 당시 군국주의의 대세를 깨뜨리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패전 군국주의로부터 잠시 자유로워진 일본학계에서 일본의 농경, 그 외의 산업과 종교, 학문, 예술, 국가의 구성, 사회의 발전 등 모든 분야에 걸친 대변화를 한국인이 일본에 건너간 것과 관련시키는 연구가 많아졌다. 이들은 토지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지명을 가지고 왔다. 고국에서 살던 사람들이 옮겨 갔다는 것이다. 다카모도 마사토시(高本政俊)의 저서 ‘가락국과 임나국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행’은 일본인의 성씨와 지명 및 일반 명사 중에 가야와 관련된 것을 400개나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한인 조상을 밝히고 있다.
 
일본의 학자들도 한국 땅이 일본민족의 핵심의 발상이고 일본인 조상 중에는 수많은 도래인(渡來人)이 있으며 일본의 국왕가(國王家)는 환국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망명가 및 이주 한인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가시마(鹿島 昇)는 일본 왕실의 계보는 백제와 가락국 두 왕통을 합해 이룬 것이고, 38대 덴지천황은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夫餘豊야)이라고 주장한다. 사사(佐左克明)는 신라인 김다수(金多遂)가 제40대 일본왕 덴무(天武)라고 하고 다니가와(谷川健一)는 일본왕가의 1대 진무(神武)부터 14대 중애(仲哀)까지는 모두 가공인물이고, 15대 오진(應神)이 실존한 최초의 일본 왕이며 오진의 혈통은 한국태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일본 왕가가 한국혈통에서 나온 것임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5~7세기에 걸쳐서 많은 한국인이 일본에 도래했다.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지배층을 형성한 중앙정부에서 인정한 정치적 자격을 갖춘 가문의 일람표로 좌우수도와 기나이(畿內) 지방만을 기록했는데 전체 1059개의 성씨 가운데 324개로 약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을 개회시킨 한국 유민들
 
5세기에 도일한 대규모의 이주집단 중 대표적인 것은 진(秦)씨와 한(漢)씨 등으로 오진(應神)왕 때는 진씨의 조상 궁월군(弓月君)이 대집단을 거느리고 도일하여 양잠과 견직 업에 종사하게 됐다. 같은 시기 아직기(阿直岐; 阿知吉師)와 박사왕인(王仁; 화이길사(和邇易吉師)이 천자문과 논어로 한문과 유학을 전했다. 6세기 초 게이타이왕 때에는 오경박사, 긴메이 왕 때에는 의(醫), 역(易)박사가 초빙돼 일왕의 주변을 한국 지식인들이 차지하게 됐다. 이같이 유민들은 유교에 의한 정치사상, 국사의 기록, 양잠, 직조, 토목, 농업, 토기제작 등 모든 기술이 유민에 의해 장족의 발전을 해 야마토(大和) 조정의 대규모 고분, 조영을 가능케 했다. 인류학자 하니하라(埴原和郞)는 야요이시대(彌生時代)부터 나라시대에 이르는 약 1000년 동안에 약 100만명이라는 통계보고서를 발표해 대량집단 이주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도쿄대학 잡지 인류학 ‘고대일본 이주자수 추정’ 1987). 일본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는 85년 한국방문 시 “일본이 아직 미개했던 야요이(彌生) 문화 후기에 한인에 의해 쌀농사문화를 중심으로 한 대륙간 문화가 들어와 대변화가 일어났다. 백제로부터 도래한 한인 20만명이 일본율령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상은 한국인이다”고 밝혔다. 옛날에 한국유민이 얼마나 일본국가와 문화 건설에 큰 영향을 주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은 최태영 저 ‘한국고대사’ 외 다수 책과 ‘부여 기마족과 왜(倭)’(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임길채 지음) 등을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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