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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 한국신화 기행 5

송화강 2019-05-12 (일) 22:48 6년전 4576  

21. 편모 슬하에서 사람되기

 

어린 시절,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소설을 여러 권 읽었다.

그런 책들이, 표지가 아이들이 치고 놀던 딱지처럼 울긋불긋하다고 해서 ‘딱지본’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나중에

배워서 알았다. 전집으로 된 ‘옥루몽’이 가장 재미있었다.

‘권익중전’, ‘조웅전’, ‘자룡전’, ‘숙영낭자전’, ‘유충렬전’의, 원근법이 깡그리 무시된 표지 그림은 아직도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언제 다시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다시 손에 잡지 못했다.

내 정신의 고향, 다시 찾아가 보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그런데 책을 읽을 때마다 어린 나의 뇌리를 맴도는 의문이 여러 가지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주인공들이 유복자(遺腹子) 아니면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라나는 까닭,

또 하나가 주인공의 탄생이 신이(神異)한, 말하자면 신기하고 이상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 까닭을 물어볼 데가 없었다. 그저, 훌륭한 사람은 신이하게 태어나 편모 슬하에서 자라는구나,

이렇게만 생각했다. 안중근 의사의 아명(兒名)이, 태어날 당시 등에 일곱 개의 점이 박혀 있어서 ‘칠성(七星)’

이었다는 이야기를 읽고는 옷을 벗고 내 등을 거울에 비추어 본 적도 있다. 내 등에는 점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래서 은밀하게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의 탄생에는 혹시 신이함이 없었는가.

어머니의 태몽에 혹시 신이함은 없었는가. 어머니에게 물어볼 염치는 없었다.

나이 차이가 많은 형님들 이야기에서도, 누님들 이야기에서도 나의 탄생을 둘러싼 신이한 스토리 같은 것은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나는 신이함이 조금도 없는 세상을 심심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하늘을 자주 원망했다.

‘광복절 아침이 여느 아침과 똑같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어째서 하늘은 광복절 아침 하늘에 무지개라도 하나

걸어주지 않는 거야.’

‘육이오 기념일 아침인데 하늘은 어째서 핏빛으로 물들지 않는 거야.’

철 없는 아이도, 당돌한 질문은 삼갈 줄 알던 시절이었다. 나는 참고 또 참다가 기어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가 태어나기 전후에 뭐 신기하고 이상한 일 없었어요? 이상한, 혹은 특별한 태몽 같은 것은 꾸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대답했다.

“없다. 저녁 8시쯤 되었지 아마, 쇠죽 먹이고 들어가서 너를 낳았다. 그것뿐이다.”

그 대답을 들었을 때의 허망함이라니. 갑자기 세상이 텅 비어 보였다. 내 존재론적 ‘주변성(周邊性)’의 자각에서

온 ‘허망함’과 ‘텅 비어 보임’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흐르고나서야 나는, 영웅이란 시련을 통하여 허망한 자신의 주변성을 소통의 중심으로 바꾼

사람이라는 것을, 영웅의 탄생을 둘러싼 이야기의 신이함은, 영웅이 살아낸 편모 슬하라고 하는 존재론적 악조건을

미화하기 위한 화사한 수사에 지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렵 시대에서 농경 시대로

‘동명왕편’으로 돌아가자. 먼저 분주(分註)를 읽어 본다.

‘… 이별할 때가 되었는데도 주몽은 차마 떠나지 못했다. 어머니 버들꽃 부인이 말했다.

“어미로 인하여 너무 근심하지 말라.”

버들꽃 부인은 이러면서 오곡의 씨앗을 싸주었다. 주몽이 어머니를 생이별하는 마음이 너무 애절해서 보리씨를

미처 챙기지 못하고 떠났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쉬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은 그 비둘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필시 신모(神母)께서 보리씨를 보내신 것이리라.’

주몽이 이러면서 활을 쏘아 한 화살에 비둘기 두 마리를 떨어뜨렸다.

주몽이 떨어진 비둘기의 목구멍을 벌리자 보리씨가 나왔다. 주몽이 보리씨를 거두고 물을 뿜자 두 마리의 비둘기가

소생하여 다시 날아갔다.

분주 끝에 이규보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 쌍의 비둘기 보리 물고 날아(쌍구함맥비·雙鳩含麥飛)
신모의 심부름꾼 되어 왔네(래작신모사·來作神母使)’

‘삼국유사’의 박혁거세와 그 부인 알영의 탄생 신화에는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가 등장하지 않는다.

선도성모는 ‘감통(感通)’ 편에 ‘선도성모가 불사(佛事)를 좋아하다’라는 독립된 이야기로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중국을 의식해서, 혹은 중국 문화에다 젖줄을 대기 위해 혁거세와 알영을 낳은 중국 여성 사소(娑蘇)를

선도성모로 추존(追尊), 혹은 추숭(追崇)한 듯하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고구려 건국 신화에도 버들꽃 부인, 곧 유화(柳花) 부인이 주몽에게 보리씨를 주어 보냈다는 이야기는

실려 있지 않다.

유화 부인이 ‘신모’라고 불리면서, 농신(農神) 혹은 곡신(穀神)으로 묘사하는 신화 역시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 역시 추존의 성격이 엿보인다.

동명왕 신화는 수렵 민족 신화의 전형을 드러낸다. 동명왕의 이름이 ‘활 잘 쏘는 이(선사·善射)’라는 뜻을 지닌

‘주몽’이었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알로 태어난 주몽이 버려진 곳도 마구간이다. 태어난 지 한 달이 채 못 되어, 어머니 유화 부인이 만들어준 활로

파리를 쏘는데 쏘는 족족 명중이었다는 대목도 그렇다. ‘활’과 ‘말’이 어우러지는 곳이 바로 사냥터다.

이 사냥터에서 왕자들 및 그들을 따르는 부하 40명이 잡은 사슴은 겨우 한 마리인데 견주어, 주몽이 활을 쏘아

잡은 사슴은 여러 마리였다.

왕자들이 주몽을 시기하여 참소하자 금와왕이 주몽에게 맡긴 일 역시 말돌보기였다. 주몽 신화는 말에서 시작되어

말에서 끝난다. ‘동명왕편’은 동명왕 이야기를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아서 태자는 왕이 남긴, 옥으로

만든 말채찍을 장사지냈다’로 마무리한다.

유화 부인이 농신 혹은 곡신으로 추존된 듯한 이 이야기가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농경의 흔적이 드러

나기 때문이다.

어차피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농신 혹은 곡신 이미지를 유화 부인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여성에게 덧씌운 것도

흥미롭다. 어느 나라 신화에든, 추상적인 이미지로든, 구체적인 이미지로든 빠짐없이 등장하는 농신, 혹은 곡신의

역할을 건국 시조의 어머니에게 맡긴 것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어 보인다. 고구려는 이렇게 선다.

‘형세 빼어난 땅에 왕도를 여니(형승개왕도·形勝開王都)
산천이 울창하고 높고 컸다.(산천울죄규·山川鬱퇨罪山歸)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자좌불절상·自坐툺弗툺絶上)
군신의 자리를 대강 정하였다(약정군신위·略定君臣位)’

아무래도, 우리 태어날 때 하늘이 신이함을 베풀지 않았다고 쓸쓸해할 것은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처한 삶의 주변성을 소통의 중심으로 바꾸어내면 일연 스님이나 이규보 같은 이가 잘 써줄 것 같으니….

 

 

 

 

22. 아버지,아버지,우리 아버지

 

 

 

우리는 모두 한 통속이다

1998년 9월, 비가 우중충하게 내리는 날, 런던의 ‘브리티시 뮤지엄(대영 박물관)’에서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아들

유리 태자를 만났다. 아버지 고주몽이 남겨놓고 떠난, 왕자의 신표(信標)인 칼도막을 꺼내기 위해 주춧돌을 들어

올리는 유리 태자를 만났다. 유리 태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만난 돋을새김의 명찰은 ‘유리 태자’가 아니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테세우스’였다.

“그리스 신화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나요.”

내가 자주 받는 질문이다. 내가, 그리스·로마 신화 읽는 것을 좋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풀어서 다시 쓰기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주의 쪽으로 가파른 기울기를 보이는 사람이 던질 경우 이런 질문은 약간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그가 말하는 ‘우리’는 조선 민족으로서의 ‘우리’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우리’는 인류의 한 갈래로서의 ‘우리’다.

나는 전자의 ‘우리’보다는 후자의 ‘우리’ 쪽으로 자주 기운다.

민족에 관한 한 우리는 그리스 인과 다르고 아프리카인이나 인도인과도 당연히 다르다.

하지만 인류의 한 갈래로서의 ‘우리’라고 할 때의 우리는 몇가지 기본적인 경험을 공유한다. 그 경험은 이런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의 태를 열고 이 세상에 나온다.

이렇게 태어난 인간은, 자신을 이 세상에 나오게 한 사건의 배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다가 사람

한살이의 봄철에 해당하는 사춘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근본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는 이 즈음에 어머니나 아버지를 잃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해답을 마련하기 전에 어머니나 아버지가 어디로 가는지 목격하게 된다.

사춘기를 건너면서 그는 본능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때 나타나는 성징(性徵)은 그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사건의

배후에서 있었던 일, 즉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일어났던 일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되풀이함으로써 또 하나의 인간으로 하여금, 영문도 모른 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 그러고는 나이를 먹으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뒤를 이어 ‘죽음’의 경험을 되풀이한다.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하는 경험이다. 이 공통된 경험의 굽이굽이에 잠복해 있는 많은 사건을 설명하는 이야기,

나는 바로 이것이 신화라고 생각한다.

그리스 신화는 조선 민족으로서의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인류의 한 갈래로서의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류가 공유하는 경험 중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성행위 경험이다.

성기나 성교를 상징하는 몸짓은 세계 어느 나라나 거의 비슷한 것은 이 때문이다. 몸짓으로 하는 욕 시늉은 지구

반대편에 갔다고 해서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의 유리 태자 이야기1

우리 신화를 읽기 전에 먼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파에톤 신화’를 읽어 본다.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은 에파포스와는 나이나 기질이 비슷하다. 어느날 파에톤은, 족보를 자랑하는 에파포스

에게 지기 싫어 자기도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자랑했다. 그러자 에파포스가 말했다.

‘멍텅구리같이, 너는 네 어머니 말을 고스란히 믿는구나. 네 아버지도 아닌 분을 네 아버지라고 우기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파에톤은 얼굴을 붉혔다. 너무 부끄러워 차마 화를 내지 못한 파에톤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클뤼메네에게 말했다.

‘어머니, 정말 견딜 수 없습니다. 저는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큰소리를 쳤다가 망신을 당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런 모욕을 당했다는 게 부끄럽고, 말대답을 할 수 없었다는 게 창피합니다.

어머니, 제가 만일 태양신의 아들이라면 그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파에톤은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고, 자신의 머리, 의부(義父) 메로프스의 머리, 혼인을 앞둔 누이의

행복에 걸고,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아들 파에톤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들에 대한 모욕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고 화가

나서 그랬는지, 어쨌든 클뤼메네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작열하는 태양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외쳤다.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고, 내 말을 듣고 계시는, 찬연히 빛나는 태양에 걸고 맹세하거니와, 너는 네가 우러러보고

있는 태양, 온세상을 밝히는 태양신의 아들이다.

만일에 내 말이 거짓이면 그분이 내 눈을 앗아가실 것인즉, 내가 세상을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러니 네 아버지를 찾아가거라. 네가 네 아버지 처소로 가는 일은 어렵지도 않고, 그 길이 그리 먼 것도 아니다.’”

유리 태자 이야기는 운문으로 쓰인 ‘동국이상국집’ 중 ‘동명왕편’에 산문으로 된 분주(分註)에 실려 전한다.

주몽이 남쪽으로 떠나면서 부여에다 남겨놓고 떠난 여인은 어머니 유화 부인뿐만이 아니다.

애인 예씨(禮氏) 역시 주몽이 부여에다 남겨놓고 떠난 여인이다. 주몽이 떠날 당시 예씨는 ‘임께서 주신 씨앗’을

복중에 잉태하고 있었다. 예씨가 낳은 아들이 바로 유리 태자다. 유리 태자 이야기를 읽어 본다.

“…유리는 어려서부터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팔매질로 참새를 곧잘 잡았다. 하루는 팔매질로, 한 아낙이 이고

가는 물동이를 뚫었다. 아낙이 유리를 질책했다.

‘아비 없이 자란 자식이라 내 물동이를 뚫었구나.’

유리는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진흙 덩어리를 이겨 던져, 뚫린 구멍을 막아 물동이를 온전하게 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물었다.

‘제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유리가 어린지라 어머니는 희롱삼아 말했다.

‘너에게는 일정한 아버지가 없다.’

유리가 울면서 한탄했다.

‘일정한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 무슨 면목으로 남을 대하겠습니까.’

그러고는 칼로 제 목을 찌르려 하자 깜짝 놀란 어머니가 그제서야 말했다.

‘조금 전에는 희롱삼아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손자이자 강신(江神)의 외손이시다.

부여 나라 신하되는 것을 싫어 해서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셨다. 네가 능히 가보겠느냐’….”

무협지 혹은 무협 영화의 한 대목을 떠올려도 좋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 아버지는 누구일까.

아이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그 무협지 혹은 무협 영화는 대번에 의미심장해진다.

나는 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호부·呼父)지 못하고, 형님을 형님이라고 부르(호형·呼兄)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홍길동전’이 의미심장해지는 것을 보라. 늙은 부모가 아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 드라마는 아연 활기를 띤다.

“도련님, 사실은 저희들은 도련님의 친부모가 아닙니다.”

 

 

 

23. 아버지 찾아 삼만리

 

나는 1947년 5월 3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1948년 12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내 나이 ‘한 살 반’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흔하디 흔한 도민증(道民證) 사진 한 장도 남긴 것이 없어서 좋은 화가를 만나도

나는 아버지의 초상을 그리게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의 무덤에서 백 미터도 채 안 떨어진 생가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 무의식에는 찍혀 있을 테지만 내 의식으로는 그것을 재생할 수 없다. 사춘기 때부터 아버지의 사진 한 장이

그렇게 가지고 싶었다. 주위 어른들은, 일본에는 아버지의 사진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숙부댁을 자주 드나들었고, 징용 근로자가 아닌 자유 근로자로 일본에서 일한

경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 쉰 살이 거의 다 되어서야, 숙부가 살던 오사카 위성도시 후세시(布施市)를 찾아갔다.

‘아라카와 산초메(荒川三丁目)’…어린 시절 동요의 노랫말처럼 외고 다니던 숙부님댁 주소다.

숙부는 재일교포 북송을 지휘하던 사회주의자였다. 며칠을 머물면서 뒤졌지만 나는 끝내 아버지의 사진은 물론

돌아가신 숙부와, 사촌 형제들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돌아오기 전날 밤, 깊숙한 데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숙소를 함께 쓰던 사람은 내가 ‘소처럼’ 울더라고 했다. 나의 아버지는 나를 두고 멀리 떠난 분이 아니다.

돌아가신 분일 뿐이다. 아버지의 사진을 갖고 싶다는 생각,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아버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아비 찾기‘ 이야기는 언제나 내 마음 깊은 데를 울린다. ‘아비 찾기’는 결국 ‘나 찾기’다.

‘동명왕편’에 따르면, 어머니 예씨부인이 남쪽으로 떠난 아버지 주몽을 찾아가겠느냐고 물었을 때 유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버지는 임금이신데 아들인 저는 남의 신하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저 비록 재주 없는 아이이기는 하나 심히

부끄럽습니다(아버지 찾아 떠나겠습니다).”

어머니 예씨부인은 아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 준다.

“너의 아버지가 떠나면서, 만일에 아들을 낳거든 들려주라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아버지는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 밑(칠릉석상송하·七稜石上松下)에다 신표(信標)를 숨겨 두었으니, 능히 이것을 찾아내어 나에게 오는

자가 있으면 아들이라 할 것’이라고 했다.”

‘동명왕편’의 유리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유리가 산골짜기를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지쳐서 돌아온 유리의 귀에, 기둥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가서 살펴 보니, 주춧돌을 타고 선 기둥은 모서리가 일곱이었다,

과연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기둥 밑으로 구멍이 있었다.

바로 그 구멍에서, 칼토막을 찾아내고 유리는 크게 기뻐했다.…유리는 그 칼토막을 가지고 고구려로 가서 주몽왕께

바쳤다. 왕이, 자신이 가진 칼토막을 꺼내어, 유리가 가져온 칼토막과 맞추니, 피가 흐르면서 이어져 한 자루의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 물었다.

‘네가 실로 내 아들이라면 어떤 신성(神聖)함을 지니고 있느냐?’

그 말을 듣고 유리가 공중으로 몸을 솟구치자 해에 이르렀다. 왕은 유리의 신이(神異)함을 기특하게 여기고

태자로 삼았다….”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동명왕편’에는 ‘일곱 마루 일곱 골짜기, 돌 위의 소나무(칠령칠곡석상지송·七嶺七谷石上之松)’로 기록되어 있다.

‘상징’을 뜻하는 영어 ‘심벌(symbol)’은 고대 그리스 말 ‘쉼볼레인’(symbollein)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맞추어 본다’는 뜻이다. ‘거울을 깬다’는 뜻을 지닌 ‘파경’(破鏡)과 아주 비슷한 말이다.

‘죽고 못 사는’ 사람들이 어쩔 수없이 헤어질 때 한쪽씩 나누어 갖기 위해 거울을 깨트린 다음 이를 나누어 신표로

삼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맞추어 보기 위해, 금생(今生)에 안 되면 후손들에게라도 서로 맞추어 보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모양인데,

그 ‘파경’이 지금은 ‘이혼’의 대명사로 잘못 쓰인다.

‘쉼볼레인’은 그렇게 깨트린 접시나 동전 같은 것을 서로 ‘맞추어 보기’다. 주몽과 유리가 부러진 칼토막 둘을 맞추어

보는 현장에서 우리는 바로 ‘상징’이라는 말의 뿌리를 만난다.

테세우스, 칼과 가죽신을 찾아내다.

테세우스는 헤라클레스와 쌍벽을 이루는 그리스의 영웅이다. 적국의 미궁(迷宮)으로 들어가 반우반인(半牛半人)

미노타우로스를 때려죽인 영웅, 들어가면 아무도 살아나올 수 없는 미궁에서 적국 공주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덕분에 살아나온 영웅이다.

그리스인 플루타르코스(영어로는 ‘플루타크‘)가 쓴 ‘영웅 열전’의 ‘테세우스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아테나이 왕 아이게우스는 도시국가 이웃 나라를 방문했지만 술은 마실 수 없었다.

그 까닭은, ‘아테나이로 돌아가기까지는 포도주 부대의 끈을 풀지 말라’는 신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웃 나라의 현명한 왕 피테우스는 아이게우스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는 딸과 동침하게 했다…잠자리를 함께 한

여인이 그 나라 공주라는 것을 아침에야 안 아이게우스는 공주가 아들을 낳을 것임을 예감했다.

아이게우스는 아테나이로 떠나기 직전, 장정 서넛이 들어도 들릴까 말까한 왕궁 객사의 섬돌 한 귀퉁이를 들고 돌

놓였던 자리에다 가죽신 한 켤레와 칼 한 자루를 놓고는 돌을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이트라에게 은밀

하게 당부했다.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제 근본을 궁금해 할 나이가 되거든 아비 찾아 떠나 보내세요.

내가 섬돌 밑에다 신표(token)를 감추어 두었으니, 제 힘으로 섬돌을 들만한 힘이 생기거든 보내세요.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보내세요.’

테세우스는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아들이 자신의 근본을 궁금해 할 나이가 되자) 어머니 아이트라는 섬돌이

있는 곳으로 아들을 데리고 가서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테세우스는 쉽게 섬돌을 들고는 밑에 숨겨져 있던 칼과 가죽신을 꺼내어… 길을 떠났다….”

유리 신화와 테세우스 신화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소지한 자의 신분을 증명하는 ‘신표’다. 바로 상징이다.

유리가 주몽의 아들임을 상징하는 칼은 정확하게는 칼토막이다.

주몽은 유리가 가져온 칼토막을 자기가 가지고 있던 칼토막과 ‘맞추어 봄’으로써, 유리를 자신의 아들로 승인한다.

말하자면 상징을 실체로 승인하는 것이다.

신화는 상징적이다. 신화는 우리가 떠나면서 숨겨놓고 온, 혹은 우리의 아버지가 숨겨놓고 떠난, 인간의 꿈과

진실이 서려 있는 신표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칼토막, 혹은 칼과 신발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신화를 읽는 일은, 우리가 오래 전에 이국에다 두고 온 아들을 맞는 일이자 아버지가 두고간

신표를 들고가서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다.

상징과 실체를 ‘맞추어 보는’일이다. 그래서 유리 신화와 테세우스 신화가 이렇게 비슷해도, 너무나 많이 놀라웠

으므로. 지금은 별로 놀라지 않는 것이다.

 

 

 

24. 신화 혹은 도돌이표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유서 깊은 도시 서안(西安)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비단길)’를 따라 중국의 끝 우루무치

까지 갔다. 근 열흘 동안 육로로만 물경 4000㎞를 이동하는 대장정이었다.

나는 여행 중에는, 특히 육로 여행 중에는 책을 읽지도 낮잠을 자지도 않는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식생(植生)의 변화에서 나는 눈을 거의 떼지 못하는 것이다.

식생과 문화의 관계 견주기는 전율의 연속이다. 한무제(漢武帝)가 군위(軍威)를 과시하기 위해 세웠다는 감숙성의

무위(武威)를 지나면서부터 내 시선에 붙잡히기 시작하는 식물이 있었다.

올리브였다. 중국인들은 ‘칸란(橄欖)’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감람(橄欖)’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올리브였다.

안내원에게 지명을 물어 보았다. 융창(永昌)을 지나고 있다면서 안내원이 한 설명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영창에는 지금도 20여호에 이르는 고대 로마 군의 자손들이 살고 있다고 해요.

2000여년 전 카이사르의 동방정벌(東邦征伐)을 따라나섰던 로마 군사 일부가 패잔병이 되어 중간에서 길을 잃었나

봐요…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으니까 여기에 눌러 산 것인데 이 지방에 ‘코가 크고 눈이 쑥 들어간(고비심안·高鼻

深眼)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하죠.”

바로 그 융창에서 나는 자생 올리브를 처음 보았다. 올리브는 서양 문화의 한 상징 노릇을 너끈하게 하는 나무다.

그리스의 아테나 여신이 한 도시 백성에게 선물로 내렸다는 나무다.

백성들은 여신의 은혜를 기려 그 도시를 ‘아테나이(아테나 여신의 도시)’라고 부르니, 이 도시가 바로 2004년

올림픽이 열리는 그리스 수도 아테네다.

‘올리브’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 어 ‘엘라이아’는 로마 시대의 라틴 어 ‘올레움’, 현대 이탈리아 어 ‘올리오’를 거쳐,

‘기름’을 뜻하는 영어 단어 ‘오일(oil)’로까지 진화하기에 이른다.

올리브는 히브리 문화와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나무다.

노아의 홍수 때 비둘기가 물어온, 홍수의 끝을 상징하는 것도 바로 그 올리브 가지였다.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애끊는 마지막 기도를 올린 곳도 감람산 올리브 밭이었다. 한무제가 서쪽으로 세력 범위(겨드랑이)를 한껏

늘려나가는 것을 과시하면서 세웠다는 도시 장예(張腋), 글자 그대로 ‘한 나라의 늘어난 겨드랑이’에 이르면서 계획

재배한 올리브 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스에서 무수히 본 뽕나무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에는 뽕나무가 지천이다.

수도 아테네의 가로수 중 상당수는 뽕나무다.

유럽 대륙의 끝이자 발칸 반도의 끝인 ‘펠로포네소스’는 어찌 보면 손가락을 늘어뜨린 손 모양 같고 어찌 보면

뽕나무 잎 모양 같다.

‘펠로포네소스’라는 이름은 후대에 지어진 것이고 원래 이름은 ‘무리아(Mouria)’다. ‘뽕나무 잎’이라는 뜻이다.

중국 신화에서 비단을 처음으로 짠 이는 황제(黃帝)의 아내인 유조(女累祖)다.

 ‘유조가 양잠을 시작하자 백성들도 뒤따라 시작하여 누에는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중국신화전설, 원가 지음,

전인초 김선자 옮김·민음사).

이렇게 만들어진 비단, 혹은 뽕나무 및 양잠 기술이 대량으로 유럽에 건너간 것은 진나라(Chin) 때의 일이다.

중국이 <차이나(China)>라고 불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스 땅에서, 중국 직조(織造)의 여신인 유조의 나무(뽕나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누구인가.

중국 땅에서, 그리스 직조의 여신 아테나의 나무(올리브)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누구인가.

‘일찍이 하늘 신선들을 부려 비단을 짜게 하고 붉은 물감을 들여 관복을 만들어 지아비에게 준(삼국유사)’ 중국

황실의 따님이었다는 사소(娑蘇), 뒷날 신라의 시조 혁거세를 낳았다는 선도 성모(仙桃聖母)의 자손일 가능성이

있는 자다.

중국에서 본 올리브와 그리스에서 본 뽕나무 앞에서 내가 어떻게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주몽의 아들 유리 이야기와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 이야기를 견주면서 문화 교섭이 있었을 법하지 않은 두 나라

영웅의‘아비 찾기’ 신화가 얼마나 서로 비슷할 수 있는지 보여 주고자 했다.

주몽과 유리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만 테세우스 이야기는 유리의 손자 호동 이야기에서 ‘사랑과 배신’의

모티브로 모양을 바꾸면서 놀라울 정도로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테세우스 이야기는 아버지를 찾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강력한 적국 미노스 왕국으로 떠나야 한다.

거기에는 인육을 먹는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미궁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미궁으로 들어가 괴물을 죽이고, 죽음의 미로로 짜여진 그 미궁을 무사히 탈출한다.

적국 공주 아리아드네가 괴물 죽이는 법과 미궁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일러줌으로써 조국과 부왕을 배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경우, ‘미궁 탈출’ 모티브는 유리의 손자 호동 이야기에서 ‘자명고 찢기’로 되풀이된다.

고구려의 적국 낙랑에는, 적군이 침범하면 스스로 울리는 북, 즉 자명고(自鳴鼓)가 있다.

낙랑에 자명고가 있는 한 고구려는 결코 낙랑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호동은 낙랑으로 잠입, 오늘날의 조기경보

체제에 해당하는 자명고를 부숨으로써 고구려군에게 승리를 안긴다.

적국 낙랑의 공주가 손수 자명고를 찢음으로써 조국과 아버지 최리를 배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승승장구한다. 아들 히폴뤼토스 또한 승승장구한다. 이들에게 외부의 적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적이 있다. 아버지의 후처 파이드라가 히폴뤼토스를 짝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강직한 청년이라 계모의 추파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계모는 여러 차례 매파를 보내어 불륜의 사랑을

하소연하지만 히폴뤼토스의 반응은 완강하다.

파이드라는 히폴뤼토스의 야멸찬 말을 전해 들은 날 밤, 제 잠옷을 갈가리 찢어 알몸을 드러나게 한 뒤 테세우스

앞으로 한장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다. 히폴뤼토스가 선택하는 최후는 비참하다.

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 낙랑을 가무린 호동을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히폴뤼토스가 맞은 것과 같은

운명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 3대 대무신왕’ 편을 읽어 본다.

“…호동은 왕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 손녀의 소생이었다.

호동은 용모가 준수하여 왕이 매우 귀여워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름도 ‘호동(好童)’이라고 했다.

첫째 왕비는 호동이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호동은 나를 무례하게 대하며 간통하려 하였습니다”하고 참소했다.

왕은 “그대는, 호동이 다른 여자의 소생이라 하여 미워하는가”하고 나무랐다.

왕비는 왕이 자기를 믿지 못하는 것을 알고 울면서 “바라건대 대왕께서 가만히 엿보소서, 만약 그런 일이 없으면,

제가 죄를 받겠습니다”하고 호소했다.

왕비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대왕도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죄를 주려 하였다.

누군가가 호동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하고 물었다.

호동은, “스스로 해명한다면 이는 어머니의 죄를 드러내는 동시에 왕께 근심을 더해 드리는 셈인데,

이것을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하고는 칼을 품고 엎드려 자결하였다.”

1. 중국의 극서부인 신강성 우루무치의 올리브 나무에 열린 올리브 열매. ‘기름’을 뜻하는 영어 ‘오일’은 ‘올리브’

에서 유래한다.

2. 라신의 희곡을 기둥줄거리로 하는 영화 ‘페드라’의 한 장면. 의붓어머니 파이드라(페드라) 역을 맡은 멜리나

메르쿠리가 히폴뤼토스 역을 맡은 안소니 퍼킨스에게 사랑을 호소하고 있다.

‘페드라’는 가까이는 히폴뤼토스 신화의 패러디, 멀리는 호동 신화의 패러디이기도 하다.

3. 의붓 어머니 파이드라와의 불륜의 사랑에 연루되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는 ‘히폴뤼토스의 죽음’

(17세기 화가 루벤스) 

 

 

 

 

25. 도끼자루 깎는 법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기.

외국을 여행할 때면, 외국의 어떤 도시를 여행할 때면 나는 그 나라, 그 도시의 상징이 될만한 것을 열심히 찾고는

한다. 파르테논 신전,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에펠 탑, 자유의 여신상은 각각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의

상징일 수 있는 동시에 그 나라들의 거대 도시인 아테네, 로마, 파리, 뉴욕의 상징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구조물 상징이다.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는 이런 상징보다는 나 홀로 은밀히 음미할 수

있는 상징을 더 좋아한다.

먹거리, 마실거리 상징이다. 술이다. ‘우조’라고 불리는 그리스의 독한 포도 증류주, ‘니혼슈(日本酒)’라고 불리는

일본의 청주, ‘뻬주’라고 불리는 중국의 화주는 각기 그 나라를 상징하는 술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외국을 여행할 때면, 거리의 술가게 진열대 앞에, 공항 면세점 주류 진열대 앞에 오래 서 있고는 한다.

동행 여럿과 함께 중국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 술 좋아하는 내가 주류 진열대 앞에 붙어 오래 떠나지 못하는 것을

본 한 동행이 다른 동행들을 돌아보면서, 이 아무개의 저 모습을 보니 속담이 생각나는군요, 하고 중얼거렸다.

누군가가, 어떤 속담이 생각나는데요, 하고 물었지만 이 말을 한 당사자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속담이 생각나느냐고 물어 보았다.

한 사람이 대답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까, 이 속담 아닌가요?”

다른 사람은 다른 말을 했다.

“비둘기가 콩밭을 그냥 지나칠까, 이 속담 아닌가?”

또 한 사람은 듣기 민망한 말을 했다.

“개가 똥밭을 그냥 지나칠까….”

나를 보고 ‘저 모습을 보니 속담이 생각나는군요’라고 비아냥거린 사람은 ‘속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환기시켰을

뿐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실제로는 세 가지 속담을 말한 것이나 다름 없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실제로는 ‘많은 말을 하기’… 어쩌면 신화 및 상징과 이렇게 비슷한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실제로는 많은 말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상징이다. 신화는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호는 상징이 아니다.

특정한 사물을 표상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리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것에 기호와 상징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카를 융의 명저 ‘인간과 상징’은 기호와 상징을 구분하는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인간은 자기가 전달하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말과 글을 사용한다. 이 언어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인간은… 기호나 이미지도 사용한다… 이런 것들은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안된

의도에 따라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상징이 아니다. 우리가 상징이라고 부르는 것은… 특정 함축성을 지니고 있으며 관습적이면서도

명백한 의미를 지닌다. 상징은 모호하고,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우리들에게는 감추어진 무엇인가를 내포

하고 있다…

말이나 형상이 명백하고 직접적인 의미 이상의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상징’이라고 부른다.’

서툰 화가가 어떤 사람의 얼굴을 그려놓고 그 위에다 ‘DJ’라고 써놓았을 경우, 이 ‘DJ’는 기호일 뿐 상징이 아니다.

‘DJ’에는 ‘직접적인 의미 이상의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굴 옆에 지팡이가 하나 그려져 있다면 이것은

상징적이다.

우리는 이 지팡이를 통해 얼굴을 그린 사람의 직접적인 의도 이상의 어떤 의미(권위 혹은 수난)를 읽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화가가 한 얼굴을 그려놓고 그 위에다 ‘JP’라고 써놓았을 경우 ‘JP’는 기호일 뿐 상징이 아니다. 

하지만 얼굴 옆에 골프 채가 하나 그려져 있다면 이것은 상징적이다.

우리가 이 골프 채를 통해, 이 얼굴을 그린 사람의 직접적인 의도 이상의 어떤 의미(야유)를 읽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자는 기호적이고 그림은 상징적이다. 그렇다면 문자로 쓰여진 신화는 기호적인가, 상징적인가?

신화는 문자로 쓰여졌으면서도 그 뜻은 문자 너머에 있다. 신화의 요체는 문자가 아니라 그 문자가 구성하는 언어다.

신화는 상징적인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상징의 묘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기에 있다. 무엇인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감추는데 있다.

전에도 쓴 적이 있다. ‘상징’을 뜻하는 영어 ‘심벌(symbol)’은 고대 그리스어 ‘쉼볼레인(symbollein)’에서 온 말이다.

‘맞추어 본다’는 뜻이다. 국가에 변란이 생기고 가족이나 친지가 이별할 경우 거울이나 도기(陶器) 같은 것을

깨트려 신표(信標)로 나누어 가지고 있다가 뒷날 서로 ‘맞추어 보기’가 바로 ‘쉼볼레인’, 곧 ‘심벌’의 본뜻이다.

우리에게도 뒷날 서로 ‘맞추어 보기’ 위한 이 신표와 아주 똑 같은 말이 있다. 부절(符節)이다.

옛 사신이 가지고 다니던, 돌이나 대나무로 만든, 반쪽으로 된 부신(符信)이 바로 부절이다.

반쪽은 사신이 가지고 다니지만 반쪽은 조정(朝廷)에 있다. 이 두쪽의 부절을 서로 맞추어 보고 딱 들어맞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 바로 ‘동부(同符)’다. ‘부절이 딱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조선조를 창업한 조상 여섯 분, 즉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증조부인 익조(翼祖), 조

부인 도조(度祖), 아버지인 환조(桓祖) 및 태조와 그 아들 태종(太宗)의 업적을 중국 고사에 견주어 찬양한 노래를

짓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용비어천가’다.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나리사 일마다 천복(天福) 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

우리나라에 여섯 마리의 용이 하강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그분들이 하신 일이 중국의 옛 성인들이 하신 일과,

부절을 맞춘듯이 ‘아주 딱 들어맞더라’… 이런 뜻이다.

도끼 자루를 깎아라, 도끼 자루를 깎아라.

우리에게, 인간의 전모를 세계의 전모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일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

우리에게 우리가 속한 민족의 꿈과 진실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일은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신화는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부절 비슷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갖지 못한 나머지 반쪽 부절의 모양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만일에 신화가 부절 비슷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신화’라는 이름의 부절이 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가진 부절의 모양을 통하여 우리가 갖지 못한 부절의 모양을 헤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신화 읽기의 목적으로 삼는다.

‘시경(詩經)’은 노래한다.

‘도끼 자루를 깎아라, 도끼 자루를 깎아라.
그 깎는 법이 멀리 있지 않다

(벌가벌가 기측불원 伐柯伐柯 其則不遠)’

도끼 자루를 깎으려면 오른 손 안에 도끼가 있어야 한다. 도끼 자루 깎는 법은, 오른 손 안에 있지 멀리 있지 않다.

나에게 신화는 나의 오른 속에 들려 있는 도끼의 자루이기도 하다.

나는 이 도끼의 자루를 보면서 새 도끼 자루를 깎으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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