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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 『축의 시대』1 (서문)

송화강 2019-05-12 (일) 21:57 6년전 4603  

축의 시대』1 (서문)

 

(Karen Armstrong 정영목 ,The Great Transformation : The World in the Time of Buddha, Socrates,

Confucius and Jeremiah.)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의시대 현자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었다모든 현자들이 공감과 자비의 영성을 설교했다.

자기중심주의탐욕폭력무례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

축의시대 현자들에게 종교란 정통적인 믿음이 아니라모든 존재의 신성한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타인들에게 친절관대하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축의시대 현자들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시대의 황금률(golden rule)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마라 을 정리해냈다.

(우리는 축의 시대의 이런 ethos를 다시 발견해야 한다.)

축의시대 철학자들은 마음에서 폭력의 원인을 찾았으며그 결과 내면의 세계로 뚫고 들어가 인간 경험에서 이제까지

발견치 못했던 영역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축의시대의 일치된 결론은 인류의 정신적 탐구의 결과가 똑같았음을 웅변적으로 증언한다.(자비의 윤리).

우리의 신앙이 다른 사람들의 신앙과 깊은 수준에서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나를 확인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이럴 때 우리는 우리의 전통을 떠나지 않고도 나름으로 추구해오던 공감의 삶을 향상시키는 방식을 다른 전통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축의시대 현자들은 사람들에게 자기 내면에서 이상적이고 원형적인 自我를 찾으라고 가르쳤다.

축의시대 이상은 만인에 대한 보편적인 관심이었다축의시대 영성은 우상파괴적인 것이 많았다.

 


인도인은 늘 축의 시대 진보의 선두에 서 있었다.

lsrael에서는 예언자사제역사가들이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이 간헐적으로 이상에 접근하다가 마침내 BC6세기에

바빌로니아로 추방을 당하면서 특별한 창조성이 피어나는 짧고 강렬한 시기를 경험했다.

중국에서는 BC6C 말에 공자에 의해 축의 시대 영성을 발전시켰다.

그리스인은 처음부터 타민족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나갔다.

Jaspers는 축의시대가 실제보다 더 짧은 기간이었으며 거의 동시대적이라고 보았다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흔히 믿음은 어떤 敎義에 속하는 명제들을 믿는 것이라고 여긴다.

실제로 종교적인 사람들을 흔히 신자(believer)라고 부른다마치 특정 종교의 어떤 조항에 동의하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보는 것 같다그러나 축의 시대 철학자들은 대부분 교리나 형이상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붓다는 개인의 신학적인 믿음에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어떤 현자들은 신학에 대한 논의조차 완강하게 거부했다그것이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해를 입힌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어떤 현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서 기대하는 절대적 확실성을 찾는 것이 미숙하고 비현실적이며 잘못된

태도라고 주장했다.

 

축의 시대에 발전한 전통들은 모두 인간 의식의 한계를 밀고 나아갔으며인간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초월적 차원을

발견했다그러나 그것을 반드시 초자연적이라고 여겼던 것은 아니며대부분 그것을 입에 올리기를 거부했다.

그 경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 점을 존중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현자들은 이런 궁극적 실재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고 하지 않았다오히려 그 반대였다.

종교적인 가르침을 의심 없이또는 간접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사실 어떤 예언자나 철학자가 강제적인 교리를 고집하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보통 축의 시대가 동력을 잃는다는 신호

였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어떻게 행동을 할 것인가 였다.

종교의 핵심은 깊은 수준에서 자신을 바꾸는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축의 시대 이전에는 제의(祭儀)와 동물 희생이 종교적 탐구의 중심이었다.

오늘날 훌륭한 연극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듯이존재의 또 다른 수준으로 우리를 안내해주는 신성한 드라마에서 신을

경험한 것이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것을 바꾸었다여전히 제의의 가치를 인정했지만거기에 새로운 윤리적 의미를 부여했으며,

정신적 상황의 중심에 도덕성을 갖다 놓았다.

이른바 하느님니르바냐브라만도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비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다.

사실 종교가 곧 자비(compassion)였다축의 시대 현자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모든 현자들이 공감과 자비심의 영성을 설교했다자기중심주의탐욕폭력무례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

Buddha(BC563-BC483?, 80?)

공자(BC551-BC479, 72)

Socrates(BC470-BC389, 61)

Jeremia(구약 예언자 )

...........................................

 

Karl Jaspers(1883-1969, 86)-()의 시대(Axial Age)주장.

BC900-BC200사이에 세계 4개 지역에서 인류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전통이 탄생했다고 주장하였다.

 

1.중국의 유교/도교

2.인도의 힌두교/불교

3.이스라엘 유일신교

4.그리스의 철학적 합리주의

 

축의 시대는 붓다공자소크라테스제레미아, upanishad의 신비주의자들맹자에우리피데스 시대였다.

 

우리는 매일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된 테러증오불관용의 사례를 목격하고 있다.

전통적인 종교 교리나 관례가 타당성이 없거나 신용할 수 없다고 여겨 미술음악문학약물운동 등에서 인간에

필요한 초월적 경험을 얻으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모두 환희와 황홀의 순간을 찾는다평상시보다 훨씬 더 충만하게 humanity(인간성속에 잠겨들어 내면 깊이 감동을

받고 순간적으로 우리 자신을 초월하여 高揚되고 싶어 한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존재)이다의미를 찾지 못하면 절망하고 어떤 사람들은 성스러워지는 길을 찾는다.

 

1970년대 말부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영적부흥운동-흔히 근본주의라 함(전통적인 신앙심)은 깨달음을 얻으려는

탈근대적인 시도의 한 표현이라고 본다.

이런 곤경에서 빠져나오려고 할 때 나(저자)는 Karl Jaspers가 명명한 축의 시대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축의 시대는 인류의 정신적 발전과정에서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대략 BC900-BC200 사이 세계 4개 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이후 계속해서 인류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전통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축의 시대는 기록된 역사 가운데 지적심리적철학적종교적 변화가 가장 생산적으로 이루어졌던 때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근대를 창조한 서구의 대전환 이전에는 이에 비길만한 시대가 없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세계의 현실을 반영하는 혁신적인 믿음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축의 시대의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다.

정신적사회적인 위기 때 사람들은 축의 시대를 돌아보며 길을 묻고 찾았다.

물론 이 시기의 발견들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한 번도 그것을 넘어서는데 성공한 적은 없다.

예컨대랍비 유대교기독교회교는 무릇 축의 시대에 발전한 전통이 나중에 개화한 것이다.

이들 전통은 모두 축의 시대의 전망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자기 시대의 환경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훌륭하게

번역해 냈다.

 

축의 시대의 예언자신비주의자철학자시인들은 워낙 앞선 선각자요 급진적이었기에 후세들은 그것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에서 축의 시대 개혁가들이 없애고 싶어 했던 바로 그런 종교성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저자)는 그런 일이 근대 세계에서 일어났다고 본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대부분 교리와 형이상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붓다는 개인의 신학적 믿음 때문에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어떤 현자들은 신학에 대한 논의조차 완강하게 거부했는데그 이유는 그것이 정신을 흩뜨리고 해를 입힌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어떤 현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서 기대하는 절대적 확실성을 찾는 것이 미숙하고 비현실적이며

잘못된 태도라고 주장했다.

축의 시대에 발전한 전통들은 모두 인간 의식의 한계를 밀고 나아갔으며인간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초월적인

차원을 발견했다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경험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기에그 점을 중히 여겨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고대 종교는 이른바 영속철학(perennial philosophy)에 의지했다.

이 철학에 따르면 지상의 모든 인간대상경험은 신성한 세계에 있는 실재의 복사물(창백한 그림자)이었다.

따라서 신성한 세계는 인간존재의 원형이며그것이 지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풍부하고더 강하고더 지속적이기 때문

에 사람들은 거기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믿음이었다.

(현대인들이 배우스포츠맨을 따르는 우상숭배주의와 그들을 모방하려는 의상몸짓성형 등은 결국 스스로가 생각하

는 원형과 모범에의 회귀욕망이라 할 수 있다.)




1축의 시대 문명벨트 (BC1600- BC900년경)

 


Zoroaster는 뜨겁게 윤리적인 전망으로 축의 시대를 고대했다.

그는 새로운 전사의 에토스 속에 도덕성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진정한 영웅은 동포를 탄압하지 않고 폭력에 맞선다신성한 전사는 평화에 헌신한다.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고대 이란 종교특히 이란의 예언자 조로아스터(BC 7~6세기)의 종교에 나오는 최고

(). Ormizd, Ormazd라고도 씀)를 위해 싸우려는 전사는 끈기와 규율과 용기와 속도를 갖추고 악한 자들의 공격

앞에서 모든 선한 피조물을 방어한다.

 

Zoroaster-선과 악의 대결


축의 시대의 이상은 만인에 대한 보편적 관심이었다축의 시대는 완벽하지 않았다.

여자들에게 무관심했다는 것은 가장 큰 결함이었다이 같은 정신성은 거의 모두가 도시환경에서 성장했다.

도시는 군사적인 힘과 도전적인 상업활동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으며이곳에서 여자들은 시골 경제에서 누렸던

지위를 잃었다.

축의 시대 민족들은 균일한 방식으로 진화하지는 않았다각 민족은 나름의 속도로 발전했다.

인도인들은 늘 축의 시대 진보의 선두에 서 있었다이스라엘인들은 예언자사제역사가들이 마치 발작을 일으

키듯이간헐적으로 이상에 접근하다가 마침내 BC6세기에 바빌로니아로 추방당하면서 특별한 창조성이 피어나는

짧고 강렬한 시기를 경험했다.

중국에서는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진보가 이루어져 마침내 공자는 BC6세기 말에 처음으로 완전한 축의 시대 영성

을 발전시켰다그리스인은 처음부터 다른 민족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아리아인 고귀하다명예롭다마이뉴(마냐) = 신성한 영혼

 

축의 시대는 BC3세기 말에 쇠퇴기로 접어들었다그러나 선구자들은 후대인들이 건물을 지울 수 있게 토대를

닦아 놓았다.

축의 시대 영성(정신성, spirituality)을 처음 시도한 사람들은 러시아 남부의 초원지대에 산 목축인들 이었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아리아인이라고 불렀다.

아리아인이란 말은 인종적인 용어가 아니라 자부심의 표현으로서 고귀하다명예롭다는 뜻이었다.

아리아인은 공통의 문화를 지닌 부족들의 느슨한 network를 지녔었다.

이들은 아시아와 유럽의 몇 개 언어의 기초를 이루게 될 언어를 사용했기에 인도-유럽어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BC4,500년경부터 카프카스의 초원지대에 살았지만, BC3,000년대 중반에는 일부 부족들이 점차 멀리 떠돌기

시작마침내 현재의 그리스이태리스칸디나비아독일에 이르렀다.

초원지대에 그대로 남아있던 Arian들은 점차 흩어져 별개의 두 민족이 되면서 인도-유럽어에서 파생된 서로 다른

형태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1. Avestan Language(아베스타어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에 쓰인 언어고대 이란 언어 중 하나)

2. Sanskrit(고대 인도의 표준 문장어힌두불교자이나교의 경전이 이 언어로 쓰였다.)

 

이때만 해도 이들의 언어는 매우 비슷하여 서로 연락을 계속하며 살 수 있었다.

BC1,500년까지만 해도 문화적종교적 전통을 공유하며 평화롭게 살았다.

아리아인은 고대의 타민족처럼 자신의 내부와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경험

했다폭풍바람나무강은 비인격적인 정신이 결여된 현상이 아니었다.

아리아인은 그것들에게 마음이 끌렸으며그들을 신성한 대상으로 숭배했다.

인간동물식물자연의 힘이 모두 똑같은 신성한 영혼(spirit)의 표현이었으며 아베스타인들은 이를 마이뉴

(sansknit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마냐) 라고 불렀다.

이것이 그들에게 생기를 주고 그들을 한데 묶는 동아줄 역할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리아인들은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의 형식을 갖추어 나갔다.

Avestan계 아리아인들은 자신의 을 다에바(빛나는 존재)와 아메샤(불멸의 존재)라 불렀다.

Sanskrit에서는 데바와 암리타가 되었다그러나 이 신성한 존재들은 오늘날 우리가 보통 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아니었다다만 이들은 모든 것을 제자리에 유지해주고 진실하고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정해주었다.

인간 사회는 이런 신성한 질서에 의존했다.


우리가 아는 아리아인은 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다대신 그들은 듣는 행위를 통해 에 다가간다고 생각했다.

아리아인은 그들이 타인과 나누어 갖고 있다고 여겼던 이 영혼(동식물인간희생물에게 있다고 믿었던 것,

spirituality)을 깊이 존중하는 태도를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으며이것이 그들의 축의 시대의 핵심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영혼영성의 추구)


아리아인들은 들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느라 소비한 energy를 채워주려고 희생물을 바쳤다.

곡식우유가축물 등이 있었다.

아리아인들은 그들이 타인과 나누어 갖고 있다고 여기던 이 영혼(spirituality. 제의에 바치던 가축의 원형인 게우슈

우르반-황소의 영혼나아가서 모든 생물을 친족으로 여기는 마음과 희생정신)을 깊이 존중하는 태도를 완전히 잃

어버리지 않았으며이것이 그들의 축의 시대의 핵심원리로 자리 잡게 된다(모든 영혼의 존중)

아리아인은 우주 자체가 희생에서 나타났다고 믿었다그들은 희생을 늘 창조적으로 본다.

아리아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태초에 신성한 질서에 복종하여 일을 하던 신들은 세계를 7단계에 따라 만들어

냈다.

 

1단계에 신들은 하늘을 창조했다. (돌로 이루어진 아주 크고 둥근 껍질 같은 것이었다.)

2단계에 땅을 창조했다.

3단계에 껍질의 아래 부분에 고인 물

4,5,6 단계에 땅의 중심에 식물황소인간 등 살아있는 피조물을 갖다 놓았다.

7단계에 신들은 아그니즉 불을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생명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았다들이 식물을 으깨고황소와 인간을 죽여 3가지 희생제를

치른 뒤에야 세상은 생명을 얻었다해가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기 시작하고계절의 변화가 확립되고희생되

었던 피조물 셋이 자신과 같은 것들을 생산했다그래서 아리아인들은 희생을 늘 창조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아리아인들은 이 제의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삶이 타생물의 죽음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물의 3원형은 다른 생물이 살 수 있도록 자기 생명을 내놓았다자기희생 없이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어떤

진보도 있을 수가 없었다이것 또한 축의 시대의 원리 중 하나가 된다.(자기희생).

희생제는 소를 잡고소마(식물)를 찧고사제는 제물 가운데 가장 좋은 부분을 불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불의 神 아그니가 그것들을 신들의 땅에 전했다.


희생제가 끝나면 사제참가자들은 신들과 함께 제사상에 놓인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그들은 성화(聖化)된 고기를 먹고 사람을 취하게 하는 소마를 마셨다.

儀禮는 사람들을 존재의 다른 수준으로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호혜정신).

희생제는 늘 의뢰자가 있었고의뢰자는 잔치에 쓸 가축을 제공하고 제식을 주관하는 사제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주어 자신이 재력가임을 입증했다종교의 혜택은 순수하게 물질적이고 세속적이었다.

사람들은 신들이 자신에게 가축안전을 주기를 바랐다처음에 아리아인들은 내세에 희생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BC2,000년대 말부터 어떤 사람들은 희생제를 많이 의뢰한 부유한 사람들이 죽은 뒤 낙원에서 들과

만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상과 같은 무탈한 삶(자연적인 삶)은 아리아인들이 최신 기술을 발견하면서 끝이 났다.

BC1,500년경그들은 카프카스 산맥 남쪽의 Mesopotamia와 Armenia에 자리 잡은 발전한 사제들과 교역을

시작했다. Armenia인으로부터 청동무기와 새로운 운송방법을 배우게 되었다소가 끄는 나무 수레전차도 배웠다.

초원 야생마를 길들이는 법그 말들에 마구를 채워 전차를 끌게 하는 법 등도 배웠다.


결과적으로 이제의 삶은 이전과 달랐다아리아인들은 전사(戰士)가 되었다.

빠른 속도먼 여행우월한 무기는 이웃의 정착지를 습격하고 가축작물을 약탈했다.

아리아인들의 살생과 약탈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전통적인 아리아인들은 당황공포삶의 방향감각 상실을 가져

왔다초원지대는 폭력지대로 변했다전통적인 부족들도 살기 위해 새로운 군사기술을 배워야 했다.

영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힘이 정의가 되었다(영웅시대)

족장들은 이익과 영광을 추구했다시인들은 침략무모한 배짱무용을 칭송했다.

이전의 아리안 종교는 호혜주의자기희생동물사랑(생명존중이었다그러나 이제 아리아인의 영웅은 역동적인

인드라(신성한 戰士)였다인드라는 브리트라고 부르는 머리가 셋인 용과 싸웠으며혼돈에 질서를 가져왔다.

용을 죽인 인드라는 전차를 타고 하늘의 구름 위를 내달렸다.

아리아인 cow boy들은 싸우고 죽이고 강탈하면서 자신들이 무력으로 세계질서를 확립한 인드라를 비롯한 호전적

인 데바(빛나는 존재)들과 하나라고 느꼈다.

그러나 아베스타어(Avestan language)를 쓰는 전통적인 아리아인들은 인드라의 노골적인 호전성에 경악다에바

들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아베스타계 아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신을 다에바(빛나는 존재), 아메샤(불멸의 존재)라고 불렀다. Sanskrit에서

   이 단어들은 데바와 암리타가 되었다.

 

다에바들은 모두 폭력적부도덕?


지상 사건들은 늘 하늘에서 일어나는 우주적 사건들의 반영이었다그렇다면 호전적 다에바들의 무시무시한 습격의

근거가 되는 신성한 원형이 존재한단 말인가?

이 같은 의문은 통찰력 있는 한 사제의 관점이었는데그는 BC1,200년경 아후라(하느님마즈다(정의와 지혜의

)가 자신에게 초원지대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을 위임했다고 주장했다.

사제 이름은 Zoroaster였다.(당시 약 30?) 마즈다는 Zoroaster에게 그의 백성을 모아 폭압에 대항하는 성전(聖戰)

을 펼치라고 말했다이 이야기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약속으로 밝게 빛난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신이나 인간 할 것 없이 모두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질서의 편에 설 것인가아니면 악의 편에 설 것인가?

Zoroaster는 이 환상을 통해 아후라 마즈다가 단순히 위대한 아후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최고의 신임을 확신했다.

조로아스터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마즈다는 이제 자연세계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초월적인 신 (다른 신과는 종류

가 다른 신)이 되었다그렇다고 딱히 일신교즉 유일무이한 하나의 신에 대한 믿음은 아니었다.

마즈다의 수행원인 빛나는 일곱(7)존재 - ‘신성한 불멸의 존재’(아메샤) - 또한 이었다.

이들 각각은 마즈다의 속성을 하나씩 표현했으며전통적인 방식으로 원래의 7가지 창조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조로아스터는 태초에 하나의 식물동물인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창조 이야기들을 명상하다가 신성한 불멸의

존재들 역시 아후라 마즈다가 창조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로아스터는 이론적으로 사유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초원지대의 폭력 근절에 몰입했다조로아스터가 썼다고 하는 17편의 찬가 가타에는 허약무능공포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습격자들은 자신들이 인드라(신성한 전사)와 함께 싸우는 영웅이라고 믿었지만 가타는 그들의 피해자가 이

영웅시대를 어떻게 여겼는지를 보여 준다.

 

가타는 소리 높여 정의를 요구한다아샤’(우주를 지탱하는 신성한 질서)의 수호자들인 신성한 불멸의 존재

’(아메샤)은 어디에 있는가?

언제 아후라 마즈다가 구원해 주실 것인가조로아스터는 (세계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진영으로 양극화 되었

다고 생각자비롭고 선한모든 것의 원천이 되는 하나뿐인 신적 존재가 있다면 습격자들의 잔혹행위를 부추기는

악한 신도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적대적인 영혼(앙그라 마이뉴)도 아후라 마즈다(지혜와 정의의 신)와 힘은 같았지만 정반대의 존재였다.

 

태초에 제1의 영혼이 둘 있었다이들은 서로 대립할 운명의 쌍둥이였다.

적대적인 영혼은 드루지즉 거짓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하여 악의 전형이 되었다.

그는 아샤의 적이요옳고 진실한 모든 것의 영원한 적이었다그러나 아후라 마즈다는 선을 택해 자신의 동맹자로

신성한 불멸의 존재들과 인간을 창조했다이제 모두 남녀가 아샤(우주를 지탱하는 신성한 질서)와 드루지(거짓과

운명을 같이 한 악의 전형사이에서 똑같은 선택을 해야 했다.

 

조로아스터는 초원지대의 전례 없는 폭력 때문에 고대 아리아인의 들을 서로 싸우는 두 진영으로 나누었다.

선한 사람들은 이제 인드라(신성한 전사)와 다에바(Sanskrit에서는 데바빛나는 존재)들에게 희생제를 올리지

말아야 했다.

그들을 성스런 구역으로 초대하지도 말아야 했다대신 아후라 마즈다(마즈다-지혜와 정의의 신), 그의 신성한

불멸의 존재다른 아후라들에게만 헌신해야 했다그들만이 평화정의안전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다에바와 가축 습격자그들의 악한 부하들은 모두 무찌르고 없애야 했다.

 

이젠 삶 전체가 전장이 되었으며 각자 순수한 것을 불순한 것과 구분하고선과 악을 구분함으로써 아후라 마즈다

를 위하여 세상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그들은 매일 5번 기도해야 했다.

 

Zoroaster와 그의 추종자들은 우주의 갈등이 폭발하는 경계의 시간에 살고 있지만그들은 곧 선의 최후의 승리와

어둠의 세력의 절멸을 목격하게 될 터였다악한 자들은 세상에서 쓸려 나가고 타오르는 강이 지옥으로 흘러들어

적대적인 영혼을 태워 재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우주는 원래의 완벽한 상태로 회복되고 산과 골짜기는 평평해져 큰 평원을 이루고 그곳에서 신과 인간들은

아후라 마즈다를 섬기며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보았다.

이제 죽음은 없다인간은 처럼 바뀌어 병노화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이런 묵시론적 전망은 자신의 민족이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본 Zoroaster에게는 더더욱 간절했다.

Zoroaster는 악인들이 선하고 무고한 자들에게 준 고통에 대해 벌을 받기를 바랐다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

이 살아서 마지막 날을 보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그는 선한 사람보다 나은 초인적 존재를 갈망했다.

 

Zoroaster가 쓴 17편의 찬가인 가타는 그를 사오샨트(유익을 가져올 자)라고 부르는데샤오샨트가 마지막

전투에서 아후라 마즈다의 군대를 이끌 것이라고 말한다.

 

수백 년 뒤 축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철학자예언자신비주의자들은 모두 비폭력에 기초한 영성을 장려자기

시대의 잔혹함과 공격성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Zoroaster의 전망은 복수심에 불타며 거기엔 방화폭압절멸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Zoroaster의 전망은 매우 경쟁적이었다우리는 곧 agon(경쟁)이 고대 종교의 공통된 특징이었음을 알게 될 것

이다. Zoroaster는 선과 악의 우주적 경쟁을 자신의 메시지의 핵심에 놓았다는 점에서 낡은 영적 세계에 속해

있었다그는 자기 시대의 폭력을 신들의 세계에 투사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Zoroaster는 오랫동안 자신의 부족에게 설교를 했지만 개종자를 단 한 사람 얻었을 뿐이다.

결국 그는 자기 마을을 떠나 다른 부족의 족장인 비슈타스파를 후원자로 얻었다.

비슈타스파는 자신의 영토에 Zoroaster교가 뿌리내리도록 도왔다.

Zoroaster는 비슈타스파의 궁궐에 오랫동안 살면서 악에 대항영웅적인 전투를 벌이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한 전승에 따르면 Zoroaster는 경쟁하는 사제들에 의해 죽었다고 함).

그의 사후 Zoroaster교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BC2,000년대 말 아베스타(Zoroaster교의 경전)계 아리아인은 남쪽으로 이주이란 동부에 자리를 잡았고,

이곳에서 Zoroaster교는 국교가 되었다묘한 일이지만 결국 아힘사(불살생)즉 비폭력의 원리에 기초, 축의 시대

의 첫 번째 지속적인 종교를 만든 사람들은 조로아스터가 비난했던 아리아인 가축 도둑들이었다.




인도에 정착한 정복자 아리아인


산스크리트를 사용하는 아리아인 중 일부가 초원지대에서 대대적인 파괴를 자행했지만다른 아리아인은 남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한 뒤 마침내 펀자브의 비옥한 땅에 정착했다.

인더스 강의 지류 사이에 펼쳐진 땅이었다그들은 새로운 터전을 삽타-신두즉 일곱 강의 땅이라고 불렀다.

아리아인들의 인도 정착에 대해서는 그동안 논란이 많았다아리아인은 이른 시기의 인도와 관련고고학적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우리에게 남는 유일한 정보출처는 Sanskrit로 작성된 祭儀用 문서인데전체적으로 Veda(지식)

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Veda의 언어는 아베스타어(Avestan language :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에 쓰인 언어.

고대 이란의 언어 중 하나)와 아주 비슷하고문화적인 전제들은 가타(찬가)와 아주 밀접하기 때문에 Veda

거의 틀림없는 아리아인의 경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 역사가들이 BC2,000년대에 초원지대 아리아 부족들이 인더스 강 유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그러나 이것은 집단적 이동도 아니고 군사적 침략도 아니었다.

싸움저항광범위한 파괴의 증거는 없다아주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아리아인들이 이 지역에 끊임없이 침투했을

것이다처음 도착한 아리아인은 인더스 강 유역에서 이전 문명(인더스 문명)의 잔해를 보았을 것이다.

이 고대 제국은 힘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BC2,300~ BC2,000년 경)에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보다 컸다.

고대인도 제국은 두 곳에 수도를 두었는데 하나는 모헨조다로이고 다른 하나는 하라파였다.

아리아인이 인더스 강 유역에 도착했을 때 하라파 제국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나 폐허가 된 도시들에 사람들이 조금 남아 있었을지는 모른다따라서 사람이 섞이고 교류를 했을 수도 있

으며 아리아인 일부가 현지 종교에서 몇 가지 요소를 채택자신들의 종교와 합쳤을 수도 있다.

아리아인이 인더스 강 유역에 정착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토착민의 공동체 지상에 존재하는 아수라(고대

이란 언어 중 하나인 아베스타어의 아후라-는 Sanskrit에서 아수라가 되었다.)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 기르는 가축을 약탈하는 것뿐이었다.

Punjab에 도착한 확신 있는 elite들은 Veda경전 중 가장 유명한 Rigveda(운문으로 이루어진 지식)의 가장

초기에 속하는 찬가들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완성된 Rigveda는 모두 1,028편의 찬가로 이루어졌고, 10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Rigveda는 다양한 노래만트라(제의에서 사용하는 짧은 산문 양식)암송을 위한 지침 등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문헌 가운데 일부일 뿐이었다.

이 문헌과 시들은 모두 영감을 받아 쓴 것이었다슈루티(Sanskrit. 들은 것이란 뜻인도 전통에 따르면 슈루티는

신들이 직접 들려준 계시힌두교에서는 종교 문헌을 슈루티와 스므르티로 구분.

소므르티는 기억한 것이라는 뜻이며인간이 저술한 것을 의미한다.), 즉 들은 것이었다고대의 위대한 예언자

(리시)에게 계시로 드러난 이 글은 절대적 권위가 있었고인간이 손댄 것이 아니었으며신성하고 영원한 것이

었다.

Rigveda가 문서로 기록된 것은 BC1,000년대의 일이었다글을 쓰고 읽는 능력을 가지면서 인간의 기억력

은 감퇴했다.(그래서 그렇게 긴 문장을 사람이 외울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들다.)

그러나 베다 경전은 심지어 고대 Sanskrit를 거의 이해할 수 없게 된 뒤에도 흠 하나 없이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여전히 사라진 원래의 언어에 관한 정확한 강세억양과 함께 제의 때의 손가락팔 움직임까지 전해진다.

 

아리아인에게 소리는 늘 신성한 것이었다그들은 이 신성한 text에 귀를 기울일 때면 신()이 들어온다고 느꼈다.

찬가를 암기할 때면 그들의 마음에는 신성한 존재가 그득히 들어찼다.

Veda의 지식은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성스런 홀림으로 경험되었다.

Rigveda의 시는 모호한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이미 공동체에 익숙한 신화나 전설을 암시한다.

그 시들이 표현코자 하는 진실은 깔끔하고 논리적인 말로 전달될 수 없었다시인은 리시즉 예언자였다.

그러나 시인이 찬가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찬가들은 다른 세계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는 환상 속에서 스스로 드러났다.

리시는 진실을 볼 수 있었고보통 사람들에게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찬가를 들은 사람은 이 영감을 받은 시의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아 경외감경이감공포기쁨의 상태에 빠져들었

으며 신성한 힘과 직접 접촉한다고 느꼈다.

Veda의 신성한 지식은 단지 말의 의미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소리에서도 왔는데이 소리 자체가 데바(아베스

타계 아리아인-조로아스터 경전에 쓰인 언어를 쓰는 아리아 부족-은 자신의 신을 다에바(빛나는 존재)와 아메샤

(불멸의 존재)라고 불렀다Sanskrit에서 이 단어들은 데바 암리타가 되었다)였다.

리시(예언자)들은 찬란한 말의 발명자이자 세상의 빛인 아그니의 도움을 받아 신처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리시는 인도 축의시대의 기반을 닦았다.

이 같이 이른 시기부터 그들은 경험적인 지식을 넘어서 더 깊고 더 근본적인 진리를 직관으로 파악하려는 목적을

위해 노력했다그러나 리시는 아리아 공동체의 극소수를 대변할 뿐이었다.

 

전사와 습격자들은 완전히 다른 영적 세계에서 살았다그들의 생활은 마을(그라마)과 밀림(아라냐)을 오갔다.

우기가 되면 임시 야영지에서 아수라(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동기나 지나면 말과 소를 묶어 두고 광야로 뛰어들어 공동체의 를 다시 보충했다.

마을과 숲의 대립은 인도의 사회적이고 영적인 paradigm이 되었다이 둘은 상호보완적이었다정착 공동체의

거주자들은 전사자들이 요구하는 농작물을 제공하고 가축을 길렀다.

그러나 늘 사회의 외곽을 배회하는 가축 도둑 무리의 공격이 두려웠고열대 숲은 전사자가 용기를 입증하고 미지

의 영역을 탐험하는 장소였다.

나중에 축의시대에 들어온 자들은 숲으로 들어가 영적인 영역을 개척한다이렇게 아리아인은 아라냐()에서

종교적 깨달음만이 아니라폭력을 경험했다아주 이른 시기부터 둘은 서로 뗄 수 없이 얽혀져 있었다.

 

전사는 리시처럼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정신과 마을을 비우는 대신 전망과 통찰을 향해 싸우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리아 전사들은 습격과 전투에서 데바(질서 유지의 신)와 아수라(아투라주여 할 때의 )가 벌이는 천상의 전투

를 재연했다그들은 싸움을 할 때 자신을 넘어서 인드라와 하나가 된 것처럼 느꼈다.

이런 제의들은 그들의 전투에 영혼을 부여했으며 지상의 전투와 신성한 원형을 결합하여 전투를 성스런 활동으로

만들었다.

 

희생제는 인도 아리아 사회의 영적 핵심이었다희생제는 또 경제의 중심이기도 했다.

아리아인의 희생제는 미국 북서부 원주민 부족들이 행하는 포틀래치(potlach: 부나 권력의 과시로 벌이는 겨울

축제의 선물 배분 방식의식과 비슷해졌다.

포틀래치 의식에서 부족신은 자신의 노획물을 과시하며 많은 짐승을 도살호사스런 희생 잔치를 벌였다.

공동체가 필요 이상의 동물이나 작물을 축적하면 이런 잉여는 태워야만 했다.

늘 이동하는 유목집단이 잉여생산물을 보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포틀래치는 사회의 부를 재분배하는 임시변통

의 방법이었다이 의식은 족장이 성공적으로 일을 수행해왔음을 과시하고 위엄을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인도에서 라자(족장)도 비슷한 생각으로 희생제를 의뢰했다인드라(신성한 전사)와 자신을 동일시했으며동시에

찬사와 존경도 얻고 싶어 했다현세의 자아를 남겨두고 천상의 대응물과 하나가 되어야 할 때에도 적극적인 자기

주장에 몰두한 것.(신과 속인의 자기 동일시)

고대 祭儀에서 발생하는 이런 역설은 축의시대에 많은 개혁가들의 관심가가 된다.

 

이미(인도에서만연해 있던 폭력이 희생제 때문에 더 증가했다희생제가 끝나면 인도에서의 라자(족장)는 재산

(가축)을 채우려고 다시 습격을 했다.

희생제는 엄숙한 행사였지만 동시에 크고 떠들썩한 카니발이기도 했다여기에서는 가무음주전차경주활쏘기,

줄다리기도박여자 노예들과의 성행위 등 갖가지 일들이 벌어졌다.

초대 받지 못한 라자는 복수의 칼을 갈았고 나중엔 싸움(전투)으로 번지기까지 희생제는 제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아리아의 영웅 코드에 내재한 영광과 공포를 재연했다.

 

전사의 삶은 식량부를 싸고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경쟁아곤이었으며 경쟁의 끝은 죽음이었다.

아리아인들은 초원지대에 산 이래 자신들 중 가장 훌륭하고 부유한 자들이 하늘의 신들과 결합할 것이라고 믿어

왔다.

 

리그베다』 시를 보면 사회변천()을 읽을 수 있다.

BC10세기에 이전의 부족 내의 평등한 구조가 무너지고 크샤트리아(힘 있는 자)로 알려진 전사가문(귀족계급)

지배계급이 되었다그보다 신분이 낮은 씨족 사람들인 바이샤는 습격을 그만두고 농부가 되었다.

비아리안계 주민인 수드라와 마찬가지로 바이샤도 이제 자신의 전당에 그대로 머무르는 아수라()를 닮아갔으며

약탈자들의 사냥감이 되었다.

 

※ veda시대 : 대략 BC2,000년경부터 BC600년경까지 베다시대는 다시 아리아인이 인도에 이주하기 시작한

전기 베다시대(BC2,000-BC600)와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하면서 선주민의 문화와 융화되는 후기 베다시대

(BC1,000-BC600)로 나뉜다아리아인의 이주로 인도 주민들이 세운 인더스문명은 막을 내렸다.

 

인도에서 몇몇 족장은 초기 형태의 왕국을 만들기 시작했다왕은 종신직이 아니었으며 매년 경쟁자와 경쟁을

해야 했다. 라자수야라고 하는 성화의식을 거쳐야 했다경쟁에서 패하면 숲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지만 힘을 길러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그래서 왕의 적은 국가의 한 구성요소로 인정되었다.

 

베다시대 후기에 새로 이주의 물결이 일어났다. BC10세기에 아리아인 중 일부가 꾸준히 동진야무나 강과 갠지스

강 사이의 도아브(힌디어로 두 개의 하천을 의미)에 정착했다이 지역은 아리아 바르타즉 아리아의 땅이 되었다.

 

식민 단계에서는 불의 신 아그니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숲을 태워 터를 닦았는데 숲을 태울 때는 불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불을 신처럼 모시고 살아야 했다.

불은 환경을 장악하는 전사들의 능력을 상징했다그들은 불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했으며 불은 전사의 가장 훌륭

하고 깊은 자아(아트만)를 대표하며 불은 아그니()이기에 성스럽고 신성했다.

 

왕이 전리품을 들고 습격에서 안전하게 돌아오면 그는 브라만과 하나가 되었다.

브라만은 만물이 강해지고 확장될 수 있게 해주는 근본원리요 생명자체였으며 신들보다 더 높고 더 깊은 최상의

힘이었다.

브라만은 또 침묵 속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祭儀는 브라만의 신비를 표현하는 언어적 형식을 찾아내는 브라모디아

(신적 존재의 철학적 인식시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한 사람이 어렵고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내면 상대도 똑같이 모호한 방식으로 대답을 했다.

시합은 한쪽이 응답을 못할 때까지 계속되었다침묵을 하게 되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브라만의 초월성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의 신비로운 충돌 속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충돌 속에서 말의 무력함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BC10세기가 되자 몇몇 리시(족장)들이 새로운 신학적 담론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데바()들은 악하고 불만족스러워 보인다데바들은 자신들 너머의 뭔가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Rigveda의 후기 찬가 중 몇 노래는 그들보다 더 섬길 가치가 있는 다른 신을 찾는다(“우리의 제물로 어떤

신을 섬겨야 할까?Rigveda』 10권의 121찬가에서 한 리시가 묻는다. “인간과 가축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눈 덮인 산과 거센 바다는 누구의 소유인가신들 가운데 누가 하늘을 지탱할 수 있는가?”

이 찬가에서 시인은 인도 축의 시대를 여는 초기 신화의 하나가 될 답을 찾는다그는 창조적인 신이 원시의 혼돈

으로부터 떠오르는 모습을 본다브라만이 인격화된 존재다.

그의 이름은 프라자파티즉 만유(萬有)라는 뜻이다프라자파티는 우주와 동일하다. (※ 프라자파티=창조신)

 

프라자파티는 생명력이며의식의 씨앗이며무의식적 물질로 이루어진 물에서 떠오르는 빛이다.

프라자파티는 또 우주 바깥의 영혼으로서 자연의 법칙을 주관할 수 있다.

내재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프라자파티만이 신들 가운데 신이며 그에 비길 신은 아직도 없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리시에게는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다그는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존재도 비존재도 없고죽음도 불멸도 없고오직 무차별적인 혼돈만 있었다.

이런 논란에 어떻게 질서가 잡히고 생명력이 생겼을까시인은 이 질문에는 답이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창조물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오는지 누가 진정으로 알며 누가 선언할 수 있을까?

신들은 이 세상의 창조보다 늦었다따라서 이 세상이 언제 처음으로 생겨났는지 누가 알까?

이 창조물의 첫 번째 기원인 그그가 이 모든 것을 이루었는지 이루지 않았는지 가장 높은 하늘에서 눈으로 이

세상을 관장하는 그는 진정 그 답을 안다아니 어쩌면 모를 수도 있다.

이 시는 브라모디아(제의적 시합).

이 시는 리시 자신이나 청중 모두가 답을 알지 못해 말을 못하는 침묵에 빠져들 때까지 깊이를 알 수 없는 질문을

연거푸 던진다마침내 유명한 푸르샤(신들 앞에서 스스로 희생한 태초의 인간찬가에서 한 리시는 아리아인의

오래된 창조 이야기를 명상하며 인도 축의 시대의 기초를 닦는다.)

 

그는 첫 인간이 희생물이 되어 인류가 태어났음을 떠올린다시인은 이 최초의 인간(푸르샤)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희생제 터로 걸어가 새로 자란 풀밭에 누워 신들이 자신을 죽이는 것을 허용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렇게 자신을 내주는 행동 때문에 우주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르샤 자신이 우주였다모든 것이 그의 주검에서 나왔다푸르샤는 갈등 없이 자신을 내주었다. (예수는)

푸루샤와 프라자파티는 그늘에 가려진 고독한 보물들이며 이들의 신화는 발전하지 않았다.

그들에 관해서는 할 말이 거의 없다사실 프라자파티의 본명도 질문 대상이다. “누구?”(ka)

 

축의 시대를 눈앞에 둔 인도의 선각자들은 개념과 말을 넘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경우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을

존중하기 시작했다그러나 푸르샤 찬가가 보여주듯이 그들은 여전히 고대의 제의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제의들은 위험하고도 폭력적이었지만 계속해서 인도의 위대한 변화에 영감을 준다.

BC 10세기 말에 이르면 리시들은 첫 번째 위대한 축의 시대 영성을 창조할 상징들의 복합체를 확립하게 된다.




외로운 통치자의 시대


BC16세기 이후 황하유역을 다스려 온 중국의 商 왕조(殷 나라)의 왕들은 자신들이 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신 제()는 중국의 넓은 평원에 검은 새 1마리를 내려 보냈다고 믿었다새가 알을 낳았고 그 알을 한

귀부인이 먹었다시간이 흘러 부인은 상 왕조의 시조를 낳았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자는 왕뿐이었다.

왕은 점치는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 군사 원정신 정착지 건설 들을 제와 상의했다.

상 왕조의 첫 도시들은 청동병기전차나 제사에 사용하는 반짝거리는 제기를 제조하는 일에 앞장서던 제조업

집단의 장인들이 건설했는지도 모른다신기술을 장악한 왕은 강제 노동이나 전쟁에 농민 수 천 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상 왕조는 자신들이 중국의 첫 왕조가 아님을 알았다그들은 하(왕조(BC2,070-BC1,600, 470)의 마지막

왕에게서 권력을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하 나라의 존재를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나 문서는 없다그러나 BC2,000년경 대평원에는 어떤 왕국이 있었을

것이다.

대평원은 높은 산과 사람이 살 수 없는 늪지대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었고 기후도 가혹했다.

초기 정착자들은 운하를 파 습지의 물을 빼고 농작물이 홍수로 침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아야 했다.

중국에는 이런 일을 했던 고대인에 관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남아 있다.


황제(黃帝)는 괴물과 싸워 해별의 길을 바로 잡았다.

神農은 농업을 발명했으며, BC23세기에 지혜로운 두 임금 (), ()은 평화와 번영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순의 시대에 큰 홍수가 나자 순은 토목을 책임졌던 우()에게 이 문제의 해결을 맡겼다.

우는 13년간 운하를 건설하고 습지를 정돈하는 등 여러 강이 바다로 흐르도록 했다.

우의 노력으로 백성은 벼기장을 재배할 수가 있었다.

순은 이 같은 우의 치적에 감명을 받아 우에게 자신의 왕좌를 물려 줬다.

이렇게 해서 우는 하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이 모든 전설적인 지혜로운 왕들은 중국 축의 시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상 왕조 귀족들은 그들의 문명이 힘겹게 얻어낸 위태로운 성취라는 것을 알았으며살아 있는 자들의 운명이 그들

앞에 살았던 자들의 영혼과 뗄 수 없이 묶여 있다고 믿었다.

(나라)은 중앙집권국가가 아니라작은 읍성들의 연맹체였으며 각 읍성은 왕가의 대리인이 통치했다.

읍성은 아주 작아서 왕과 봉신들의 주거단지로만 이루어졌다.

읍성은 홍수외침 방지를 위해 흙으로 된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상 왕조의 마지막 수도인 은(현재의 하남성 안양시)의 경우성벽 길이가 800m나 되었다.

상 나라의 읍성들은 유형이 같았다.(벌써부터 도시 계획적?) 동서남북 구역별로 직업계층별 주거지 지정.

상은 평등사회가 아니었다위계서열을 몹시 따졌고 이는 이후 중국 문명의 특징이 되었다.

 

왕은 제()의 아들로서 봉건적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었고다음 서열은 왕가의 제후들즉 여러 읍성의 통치자

들과 그 밑에 조정에서 직책을 맡은 큰 집안의 우두머리나 성벽 바깥의 농토에서 들어오는 세입으로 살아가는

귀족이 있었다제일 밑은 사()라 불리는 전사계급이었다. (-제후-귀족-)

 

도시는 귀족이 따로 모여 사는 장소였다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다.

상나라 귀족은 종교전쟁사냥에만 몰두했고 그들은 군사적 보호 대가로 지역 농민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을 받았다.

사냥은 오락이요 의무이기도 했다이 때 도처에 맹수 등이 많아 골칫거리였다.

왕은 큰 사냥을 다녀오면 제사를 드린 뒤 성대하고 시끌벅적한 잔치를 열고 술과 그 고기를 먹었다

 전쟁과 사냥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전투는 귀족만이 했다걸어서 따라가는 농민은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고 시종하인짐꾼 노릇을 하거나 말을 돌보

았다귀족의 도시 생활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 공동체의 생활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귀족은 농민을 인간으로 여기지도 않았지만 야만인과 마찬가지로 농민도 중국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농민은 자신과 땅을 동일시했으며그들 사회는 자연의 반복되는 박자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여름에는 일하고 겨울에는 쉬었다반대로 여자들은 겨울에는 옷감 짜고 술을 빚었으며 여름에는 놀았다.

이런 교대(交代)는 중국의 음양 개념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상나라 귀족들은 농업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농촌 풍경으로부터는 풍부한 영적 의미를 찾아냈다.

바람은 모두 중요한 신이었으며 네 방위(4)의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연 신들은 땅에 속했으며천신(天神)인 제()에 대응하는 신적 존재였다.

이 신들은 秋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에 제사를 올려 달래고 구슬려야만 했다.

그러나 이 신들보다는 황가의 조상이 훨씬 더 중요했으며그들에게 드리는 제사가 상나라 종교의 핵심이었다.

 

수도인 은의 유적지에서는 왕의 무덤이 9개나 발굴되었다순장된 병사들의 유해도 나왔다.

왕은 죽으면 신의 지위에 올랐다그는 제와 함께 하늘에서 살았으며제에게 땅에 사는 친척들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상나라 사람들은 왕조의 운명이 죽은 왕들의 호의에 따라 좌우된다고 확신했다()를 섬기는 특별한 제사는

없었다자연신도 어떤 의식을 정해놓고 섬기지는 않았다그러나 조상들은 호화로운 의식을 거행하여 섬겼다.

이 같은 제의 뒤에는 깊은 불안감이 감추어져 있었다.

제는 비바람을 다스리고 왕관리병사에게 명령을 내리며 자연신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제는 예측 불가능적인 존재였다가뭄홍수 등 재앙을 내리는 일도 많았다.

심지어는 조상도 믿을 수가 없었다死者의 혼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고 亡者를 두꺼운 관에 넣어 묻었다.

혼이 빠져나와 산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몸의 구멍을 막았다.

골치 아픈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혼을 자비로운 존재로 바꿀 수 있는 祭儀도 고안했다.

사자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특별히 섬기는 날을 정해주었다.

조상은 제와 인간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상나라에 관한 정보는 대부분 왕의 점술가들이 제자연신조상에게 한 질문을 새긴 동물 뼈나 거북 등껍질에서

나온다고고학자들은 이런 신탁용 뼈들을 15만개나 발굴했다.

왕은 사냥추수 심지어 치통까지 점술인들의 조언을 구했다주술처럼 외치고 부지깽이를 동물 등의 껍질에 댔다.

반응을 점쟁이들이 해석했다. (맞을 리가 있었을까결국은 self-fulfilling prophecy를 통해 자기최면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중엔 왕이 할 말을 글을 새기는 일을 전담하는 사람이 새기기도 했다.

 

영적인 세계를 통제하려는 상나라 왕들의 시도는 자주 실패로 돌아갔다.

조상들은 흉년이나 불운을 보내주는 경우가 많았다상나라 사람들은 에게 도움을 청하는 정형화된 전례를 만들

지 않았으며, BC12세기가 되자 제를 직접 부르는 것조차 중단하고 조상과 자연의 영들에게만 호소하게 되었다.

 

상나라 사회는 우아세련야만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했으며그들의 예술은 세련되고 창의적이었다.

청동제기는 그들이 야생동물이나 가축으로 기르던 소나 말을 꼼꼼하게 관찰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양코뿔소올빼미를 닮은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인 항아리를 만들었다.

왕은 사냥에서 야생동물을 무지막지하게 죽였으며 賓禮장례 때는 가축을 많이 잡았다.

왕과 귀족은 큰 부를 쌓았는데 가축금속농작물사냥감을 기준으로 부를 측정했다주변에는 야생 동식물이

많았고농민들은 농작물을 끊임없이 제공했다내일을 위해 저축을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훗날 축의 시대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묵자(墨子)는 천자(天子)인 상나라 왕들의 호사스런 장례식을 엄청나고

천박한 방종과 가엾은 하인이나 가신을 죽이는 제의에 역겨움을 느꼈다.

상나라 종교에는 잔혹과 폭력이 있었던 것이다. (도덕()의 결여)

 

BC1,045년 渭河(웨이허유역의 제후국인 나라 文王이 상나라에 왕이 없는 동안 상을 공격했다.

그러나 문왕은 전사하였고그의 아들 武王이 계속 商 영토를 공격하여 황허 북쪽 무예(牧野)에서 商 군대를 제압

했다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을 참수하고 나라는 은()을 점령했다.

무왕은 주나라 수도에 남았고 죽은 주왕의 아들 녹보에게는 나라 도읍이었던 은을 맡겼다.

 

무왕은 위하로 돌아와 얼마 후 죽었다무왕 사후 상 제후들은 주나라 통치에 대항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周公이라고 알려진 무왕의 동생 단()이 반란진압을 하였고상나라는 결국 중원의 통제력을 상실했다.

나라는 태자 송이 새 왕이 되었지만 어려서 주공이 섭정하며 봉건제나 비슷한 체제를 고안했다.

 

제후와 동맹자들에게 봉토로 도시를 하나씩 나눠줬다동쪽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새 수도를 건설해서 그곳은 새

왕인 성왕(成王)을 기념成周라 불렀다주나라는 상의 모든 제도를 따랐다.

그러나 제()를 천()이라 부르고 자신들의 천신과 합쳤다여기서 그들은 모순을 느꼈다.

상은 제()의 승인 하에 수백 년간 통치되었다주나라가 대평원을 지배하려면 여전히 그곳(대평원)에 살고 있는

상나라 귀족의 마음을 얻어야만 했다주나라는 자신의 조상과 더불어 상의 죽은 왕들도 섬기고 싶었다.

그러나 상의 왕조를 파괴해놓고 어떻게 상의 영혼을 섬긴단 말인가?

 

주공이 해결책을 찾아냈다상나라 때 제()는 가끔 적의 부족을 이용상나라에 벌을 내린 적이 있었다.

같은 논리로 상나라 왕들은 부패하여 압제를 일삼았다하늘은 고통을 가엾게 여겨 상에게 위임했던 천명을 도로

거둔 뒤 새로운 통치자를 찾았다마침내 하늘은 주나라의 왕들을 보게 되었고이들이 천상제(天上帝)의 새로운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중국 6대 고전 중 하나인 書經에 기록된 말)

 

주나라는 그때까지 도덕성에 관심이 없던 종교에 윤리적 이상을 도입했다.

그래서 천명(天命)은 중국의 축의 시대에 중요한 이상이 된다(天命의 理想化). 천명에 대한 해석을 싸고 주공과

그의 동생 소공(召公이름은 석.간에 이견이 있었다.

주공은 하늘이 모든 백성들에게 천명을 주었다고 보았으나소공은 왕 혼자만 천명을 받았다고 보았다.

成王은 소공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성왕과 소공은 주공에게 퇴진 압력을 가했다.

주공은 자신의 봉토인 중원 동쪽의 읍성 에 거처를 잡았다노 사람들은 주공의 덕에 매료되어 주공은 영웅이

되었다덕이 마법적인 카리스마보다 중요하다는 주공의 신념은 축의 시대에 걸 맞는 통찰이었다.(덕의 중요성)

 

주나라는 이후 서도()에서 다스렸기에 BC10세기에 이르러 동쪽 도시들은 점점 반항적으로 바뀌었다(전제 봉건

제에 반기). 주 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주 왕조는 왕들이 정치적 중요성을 잃은 뒤에도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권위는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중국인들은 주 왕조 초기 시절을 결코 잊지 못했다그래서 축의 시대에도 천명을 받을 자격이 있는 외로운 통치자

를 찾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전쟁하는 신성한 신 야훼


BC 12세기에 지중해 동부는 위기에 처해 그리스히타이트(터키), 이집트는 암흑시대로 빠져들었다.

학자들은 (Egypt 기록에서 언급되는해양민족들에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크레타와 아나톨리아 출신의 어부 농민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무리가 레반트를 휩쓸고 다니며 도시와 마을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해양민족들은 격변의 원인이었다기보다는 증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후환경 변화로 광범위한 가뭄기아가 지역경제를 파괴하면서 분열에 창조적으로 대체할 유연성을 상실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히타이트와 이집트는 수백 년 동안 근동을 나누어 가졌다. Egypt는 시리아 남부페니키아가나안을 장악했고히타

이트는 소아시아아나톨리아(지중의 터키)를 통치했다.

그러나 BC 1,130년이 되면서 이집트는 국외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히타이트 수도는 폐허가 되었고 그리스에서는 미케네왕국이 해체되었다.

모든 것을 잃고 자포자기에 빠진 민족들은 일자리와 안정을 찾아 유랑을 했다유랑에 이은 암흑시대에는 축의 시대

민족 중 둘이 나타났다.

미케네 폐허에서는 새로운 그리스 문명이 탄생했고가나안 고지대에서는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부족동맹체가

출현했다. (이 때는 진짜로 암흑시대라서 역사적 기록은 全無그리스에 관해서는 BC 9세기까지 믿을만한 정보가

거의 없고초기 이스라엘 정보도 단편적대략적 정보만 소수 있다.)

 

가나안의 붕괴는 매우 점진적이었다. BC 15세기 이후 이집트 제국의 일부였던 해안지대 평원의 넓은 도시국가들은

이집트가 물러나면서 하나씩 붕괴했다.

이 과정 전체가 100년은 걸렸을 것이다붕괴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도시 몰락은 한 가지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BC 1,200년 직전 고지대에 새로운 정착지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이 네트워크는 북쪽으로 갈릴리 남부남쪽으로는 베르셰바(브엘세바)까지 뻗어 있었다.

마을들은 성벽도 요새화도 되어있지 않았다수수하고 균일한 주택들은 이곳이 평등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거주자들은 경작하기 힘든 자갈밭과 씨름했다경제는 곡물가축에 의존해야 했다.

BC 11세기에는 이 고지대에서 인구폭발이 일어나(고고학적 기록에 의하면절정기에는 약 8만에 이르렀다.

학자들은 이 마을들에 거주한 사람들이 파라오 메르넵타(pharaoh Mernepta,?-1204)의 승전 기념판에 언급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데 동의한다성경 이외에 이스라엘이 언급되는 것은 이 기념판이 최초다.

(파라오 메르넵타는 BC 1,209 봄 리비아인들과의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했고 승리기념을 위해 거대한 기념판 4개를

새겼다이 중 유명한 이스라엘 스텔라는 palestina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사실을 기록했다상형문자 가운데

이스라엘은 황폐해졌고 그 씨가 말랐다.”라는 표현이 나왔다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이스라엘 종족의 실체를 인정했다.)

 

초기 이스라엘의 발전에 관한 그 시대의 기록은 없다성경은 아주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원래 구전되던 이야기

가 문자로 기록된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축의 시대의 산물인 성경의 창조는 수백 년이 걸린 긴 영적과정이었다.

최초의 성경 text들은 BC 8세기에 기록되었으며성경 경전은 BC 5세기 또는 4세기에 결정되었다.

 

축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역사가시인연대기 기록자예언자사제법률가들은 자신의 역사를 깊이 명상했다.

중국인들에게 요주공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에서도 나라의 창건자들인 아브라함모세여호수아다윗은 영적

으로 중요했다이스라엘인들은 인도의 현자들이 희생제의 의미를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집요하게 그들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사유했다.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조직화를 위한 상징이 되며축의 시대의 발전은 이 상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설을 발전시키고 바꾸고 꾸미고 보태고 재해석하고 시대의 특정 상황과 연결시켰다.

모든 시인예언자선각자가 이 진화하는 이야기에 새로운 층을 더하며 의미가 확대 심화 되었다.

 

이야기의 결정판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원주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조상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출신

이며 BC 1,750년경 신의 명령으로 가나안에 정착했다족장들은 이 고지대 여러 지역에 살았다.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살았다그의 자(이삭은 베르셰바(브엘세바)에 살았다.

손자 야곱(이스라엘이라고도 부른다.)은 세겜에 살았다<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스라엘)>

 

야훼()는 족장들에게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주고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기근이 들어 야곱(이스라엘)과 그의 열두 아들(이스라엘 12지파의 창립자)은 이집트로 이주한다.

처음에 그들은 그곳에서 번창했으나 결국 이집트인의 노예가 되었고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곳에서 400년간 고달픈

포로생활을 한다.

마침내 BC 1,250년 경 그들의 신 야훼는 그들을 동정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모세에게 영토를 맡겨 그들을 해방한다.

(홍해가 갈라지고 파라오와 이집트 군대는 수몰되었다.)

야훼는 가나안 남쪽 사막지역 시나이(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계약을 하고 그들을 신성한 사람으로 만들 율법을 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가 그들을 가나안 국경지대로 이끌 때까지 광야에서 40년간을 떠돈다.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죽지만 BC 1,200년 경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승리한다.

여호수아의 지도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모든 도시를 파괴하고 거주자들을 죽인 뒤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967년 이후 이루어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의 발굴은 이런 이야기(전설)를 확인해주지 않는다.

인도 veda문명의 기원을 둘러싼 토론에서처럼학자들의 논쟁은 격렬했고 종종 적대적으로 치달았다.

결국 학자들은 이집트 대탈출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대체적으로합의를 보았다.

성경의 이야기는 BC 13세기가 아니라이 text들 대부분이 기록된 BC 7세기나 6세기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고지대에 새로운 정착지를 만든 정착민 다수가 해안의 쇠퇴하는 도시국가들에서 이주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따라서 최초의 이스라엘인 다수는 외지인이 아니라 가나안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경의 가장 오래된 부분들은 야훼가 원래 남쪽 신들의 신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다른 부족들이 남쪽에서 고지대로 이주하면서 야훼를 데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성경의 저자들은 현대 역사가들을 만족시킬 만큼 과학적으로 정확한 이야기를 쓰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존재의 의미를 탐색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만의 정체성을 창조하도록 돕는 시사적 이야기이자 민족의 전설이었다.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가족사회의 신참자였으며, trauma와 격변의 산물이었고늘 주변으로 밀려날

위협에 시달렸다.

이스라엘인은 이에 반발하는 정체성과 서사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 야훼와 독특한 관계를 누리기 때문에 그 지역의 타 민족들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부족의 ethos는 구성원들에게 친족의 죽음에 복수할 것을 요구했다친족은 하나의 몸이었다.

부족만은 단일한 삶을 공유했다구성원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했다종종 사랑이라고 번역되는 헤세트라는 말은 원래

부족의 용어로서 자신의 가족집단에 대한 관대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친족관계를 의미했다.

이 같은 친족 정서(혈연의 아니더라도 혼인이나 계약으로 부족에 통합될 수 있었다)가 새로운 이스라엘의 다양한 종족

집단을 함께 묶는 계약의 특징이었을 것이다이렇게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만이 신과 이어져 있다고 느꼈으며자신

들을 암야훼즉 야훼의 혈족 또는 민족이라고 불렀.

이스라엘 민족은 스스로 이웃과 매우 다르다고 느꼈지만 성경기록을 보면 BC 6세기까지 이스라엘의 종교가 사실상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종교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은 즉 가나안의 최고신을 섬겼으며 뒤 세대들은 엘 신앙을 야훼 신앙과 합쳤다.

야훼 자신도 모세에게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는 족장들이 늘 자신을 엘이라고 불렀지만 이제 자신의 진짜 이름이 야훼

임을 밝힌다면서 이 과정을 언급한다.

가나안에서 엘은 결국 최고신 대부분과 같은 운명을 맞아 BC 14세기에 엘 숭배는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대신 사람들은 역동적인 폭풍의 신이자 신성한 전사인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다초기의 야훼 숭배는 바알 숭배와 아주

흡사했다심지어 바알 찬가 중 일부가 예루살렘의 야훼 성전에서 개작되어 쓰이기도 했다.

 

중동의 종교는 경쟁적인 면이 아주 강해 신들 사이의 전쟁육박전전투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전쟁의 신 마르두크는 태초의 바다의 화신 티아마트를 죽여 그 주검을 거대한 조개처럼 둘로 갈라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 (매년 에사길라 신전의 새해를 맞는 행사에서는 이 전투를 재연했다.)

시리아에서는 바알이 머리가 7개 달린 바다의 용 로탄과 싸웠다로탄은 성경에서는 레비아단(리워야단)이라고 부른다.

바알은 또 혼돈의 상징인 태초의 바다 과도 싸웠고가뭄죽음불임의 신인 모트와도 싸웠다.

바알은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려고 자신의 신성한 산인 사판 산에 궁을 지었고, BC 6세기까지 이스라엘인들은 야훼가

세상을 창조하고 자신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레비아단 같은 바다의 용들과 싸웠다고 주장했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을 감계로 삼아 민족의 영적 통합의 동력으로행동의 등대불로 자리 잡았다.

이스라엘인들의 상무정신(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전쟁은 신성시된(성화된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야훼는 전쟁의 신이었고이스라엘의 신은 야훼 사바오트즉 군대의 신이라고 불리었다.)

 

야훼는 특별한 신이었지만 이스라엘인들은 다른 신들의 존재도 인정하고 섬겼다.

야훼가 유일신이 되는 것은 BC 6세기 말이다. 초기에 야훼는 신들의 모임에 속한 신성한 자들 또는 엘의 아들 중 하나

일 뿐이었다태초에 엘은 신성한 자에게 각 민족의 수호신 일을 맡겼고야훼는 이스라엘의 신성한 자로 임명되었다고

한다.(신명기)

신성함을 가리키는 아카드는 엘루인데 이것은 청결잘남광채라는 뜻이다.

이 말은 헤브라이의 엘로힘과 연결되는데종종 간단하게 신으로 번역되지만 원래는 신이 인간에게 의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약한 말이다.

 

중동의 신성한 자들은 인도의 빛나는 자들인 데바들과 같았다중동에서 신성함은 브라만과 마찬가지로 신들을 넘어

선 곳에 놓여 있는 힘이었다.

Mesopotamia에서 일람(성스러움)이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신을 초월하는 빛나는 힘을 가리킨다.

이는 근원적 실재로서 어떤 단일하거나 독특한 구체적 형태와 연결될 수 없었다.

신들은 일람의 근원이 아니라인간··나무·별과 마찬가지로 신성함에 참여하는 존재들이었다.

이 신앙에서는 일람과 접촉하는 모든 것들이 신성해졌다.

사제신전 심지어 제기까지 일람과 연결되어 신성해졌다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신성함을 하나의 신적인

존재에만 한정짓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다.

 

BC 10세기경 이스라엘 부족들은 군주제를 도입했다성경에 따르면이스라엘 왕족 2대왕 다윗(BC1000-BC970)

과 3대 Solomon왕 (BC970- BC930)은 예루살렘에서 통일 왕국을 다스렸다그러나 Solomon이 죽고 나자 왕국은

둘로 나뉘었다. 12부족 중 10부족이 예루살렘에 반기들고 세운 북부 이스라엘 왕국이 더 크고 부유했으며 인구도

90%를 차지했으며 땅도 비옥했다.

다윗 왕의 자손들은 남쪽에 작은 왕국(유다)을 만들었는데이곳은 거친 땅에 외부와도 고립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유다의 종교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성경 저자들이 남쪽 왕국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전형적인 가나안의 군주제였으며이곳 종교의 중심에는 다윗 왕 개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윗왕은 이곳 종교에서 야훼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신성한 전사가 되었다.

다윗은 대관식에서 신성한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신의 아들이 되었다.

 

유다 왕국에서는 야훼와 부족들이 맺은 동맹의 언약이 다윗 왕과 맺은 언약즉 그의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에 가려

졌다과거의 언약 축제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왕 숭배는 고대의 신화로 돌아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성한 전사의 지원이 필요했고 야훼를 자랑스러워했지만 다수는 다른 형태의 신성함도 원했다.

이는 결국 야훼만을 섬기고 싶어 하는 소수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BC 10세기의 모습)

 

축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이 모든 전통의 특징은 높은 수준의 불안이었다.

가축 약탈자들의 폭력으로 초원지대의 삶이 변하기 전 아리아인의 종교는 평화롭고 너그러웠다.

그러나 유례없는 호전성이 던진 충격 때문에 조로아스터는 양극화된 경쟁적 전망을 키워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과 인도에서도 새로운 적대적 땅에서 하나의 사회를 유지해 나가는 일의 불안정성과 어려움 때문에 믿음에

폭력과 호전적 이미지가 들어왔다그러나 사람들은 고수준의 긴장을 무관하게 유지하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제의는 그들에게 심연을 보라고불가능한 것과 맞서도 살아남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BC 9세기에 축의 시대 민족 중 4번째인 Greece인들은 암흑시대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경험은 제의의 드라마가 고대 세계 사람들에게 역사적 파국과 절망에 창의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

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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