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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 축의 시대 (6) - 축의 시대의 귀환

송화강 2019-05-12 (일) 22:26 6년전 4299  

 

 

바가바드기타-축의 시대 마지막 위대한 노래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제국을 만들었듯이인도에서도 새로운 제국이 나타났다.

마가다 왕국은 BC4세기 이래로 간디스 강 유역을 지배해왔으며 강력한 난다왕조 때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다가 BC321년 부족공화국들 중 한 곳 출신인 듯 한 바이샤 출신(크샤트리아 출신이라는 설도 있음찬드라굽타

마우리아(BC349?-BC298?)가 왕좌를 차지했다.

그는 그리스인이 떠나 권력 공백상태가 된 펀자브에 이미 권력 기지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마우리아 제국은 벵골로부터 아프가니스탄으로 확장되었으며그 뒤로 찬드라굽타는 인도 중부와 남부로 뚫고 들어

갔다.

찬드라굽타가 자이나교를 좋아하자 자이나교도들은 그의 군대를 따라다니다 남부에 자리를 잡았다.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 마우리아는 아지비카교를 장려했으며, BC268년에 왕좌를 물려받은 3대 황제 아쇼카

불교의 후원자가 되었다그의 형제인 비타쇼카는 아예 불교 승려가 되었다.

아쇼카는 군사적인 힘을 아힘사(불살생)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BC260년경 수많은 사상자를 낸 칼랭가 전투를 치른 뒤 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에 바탕을 둔 정치를 결심,

다르마(dharma)는 합리적이고 올바른 윤리이자 붓다의 가르침이었다.

아쇼카는 다르마의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바위를 갈라 평평하게 만든 면이나 돌기둥에 칙령을 새겨 넣었다.

관용과 자비 실천이 기본정신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81개의 칙령 비문이 있었다고 하는데현재까지 약 60여 개가 발견되었다.

 

다르마의 선물.....다르마를 나누는 것에 비길만한 선물은 없다는 것이 아쇼카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BC231년 아쇼카가 죽고 나자 다르마는 소멸했다.

사회적 긴장과 종파 간 갈등이 시작되었다제국은 무너지기 시작했다인도는 암흑시대로 들어섰다.

정치적 불안정은 서기 320년 굽타왕조가 등장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인도는 암흑기에 중요한 영적 변화를 겪었다.

종교는 유신론적으로 변했으며 사람들은 인격신을 발견했다.

브라만즉 현대적 실재는 인격화된 신 루드라/시바와 동일시되었다.

요가 수행자들을 삼사라(samsara, 죽음과 재생의 순환윤회)의 고통스런 순환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이 신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요가 수행자가 moksha(또는 moksa.고통으로부터의 해방)를 성취하면 자기 내부에서 신을 보게 된다.

축의 시대가 끝날 무렵인더스 문명 시절부터 계속 존재해 왔을지도 모르는 이 대중적인 신앙은 현자들의 세련된

관행과 융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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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pe(하느님의 사랑)

bhakti(신을 향한 깊은 사랑헌신, sanskrit)

바크티의 중심적 행동은 자기 버리기(그리스인들의 Kenosis)였다신자들은 신에게 저항하는 것을 중단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의식하면서 신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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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암흑시대에 등장한 힌두 영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 핵심 텍스트는 바가바드기타(주님의 노래)였다.

바가바드기타는 축의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text였다.

이 책은 종교적 변화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새로운 종교적 통찰은 폭력에 대한 혐오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바가바드기타는 축의 시대 영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모든 사람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10축의 시대의 귀환 (BC2세기-)

 

천하통일과 사상의 통합

 


축의 시대의 영적인 혁명은 정복혼란이주 등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에서의 축의 시대는 周 왕조 붕괴와 더불어 시작나라의 전국통일로 끝을 맺었다.

인도의 축의 시대는 하라파문명(인더스 문명)이 해체된 후에 일어나 마우리아 제국과 더불어 끝을 맺었다.

그리스의 변화는 미케네 왕국과 마케도니아 제국 사이에 이루어졌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정박지에서 떨어져 나와 떠도는 사회에 살았다.

Jaspers에 의하면축의 시대는 큰 두 제국 사이의 공백기자유를 위한 휴식가장 명료한 의식을 가져다주는 깊은

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중동에서 제국의 모험 때문에 혹심한 고통을 겪었던 유대인마저 조국의 붕괴와 그에 이은 추방이라는 트라우마로 인해

과거와 단절새로 시작해야만 하는 무시무시한 자유를 얻게 되면서 축의 시대로 밀려들어갔으며 BC2세기 말에 이르러

세계는 안정되었다.

 

축의 시대 후에 확립된 제국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통일을 긍정하는 정신성을 찾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드디어 BC221년 진()이 중앙집권적인 제국을 수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안도했을 것이다.

진의 승리는 곧 법가의 승리였다진은 자신과 같은 선례가 없었기에 왕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했다.

 

시황제는 천명을 받았다고 주장치 않고 축의 시대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던 철학자들의 학파에 의지했다.

나중에 음양가(陰陽家)로 알려진 우주론은 BC3세기-BC1세기 사이에 중국의 상상력을 확고하게 사로잡았다.

음양가로의 몰입은 축의 시대 영성의 쇠퇴나 다름없었다.

음양가 이론은 전국시대 나라 추연(鄒衍)이 정리했다(木火土金水).

시황제는 음양의 논리가 자신의 통치를 승인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겨울 색깔인 검은 색 옷을 입었다.

영적인 수단보다는 물리적 수단으로 통제력을 얻고 미래를 예측하고 죽음을 막으려했다.

 

순자(荀子)의 제자였던 이사(李斯)는 자식들에게 땅(영토대신 돈을 주고 제국에 대한 적대적 통제력을 유지하라고

시황제에게 조언했다이사는 또 진의 역사기록을 제외한 모든 역사기록백가(百家)의 글박사관에 보관한 것이나

농업의학약학점술농사에 관한 일부 서적을 제외한 다른 모든 문헌을 몰수불살라야 한다고 조언(焚書坑儒.

460명 학자 처단)했다.

중국의 축의 시대 철학자들은 만물의 통일에 대한 영적 이해에 이르렀으나이사에게 통일이란 반대자의 파괴를 뜻

했다세상엔 하나의 세계하나의 정부하나의 역사하나의 이데올로기 밖에 없었다.

다행히 황제는 체제 안의 공식 철학자 70명의 중국 고전 사본들을 보관하는 것은 허락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BC210년 시황제가 죽자 민란이 났다.

3년간 혼돈지역의 하급관리였던 유방(劉邦BC247?-BC195?)이 승리()나라를 세웠다.

그는 황로(黃老)라고 하는 철학(법가와 도가를 절충한 것)에서 통치 이데올로기를 찾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혼란을 느껴 다양한 학파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못했다.

한나라 초기의 <天下>라는 글의 저자는 중국의 정신세계가 해체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하가 큰 혼란에 빠져 훌륭한 사람과 현자들은 빛을 뿌리지 못하고도나 덕은 통일되지 못하며온 세상이 오직 한

측면만 보면서 전체를 파악했다고 생각하곤 한다.)

황로의 인기는 한의 문제(文帝, BC180-BC157재위때 절정그 뒤엔 변화의 조짐 보임.

BC136년 궁정의 학자 동중서(董仲舒, BC179?-BC104?)는 무제(武帝재위 BC140-BC87 )에게 너무 많은 학파가

경쟁을 하니까 유가에서 가르치는 6고전을 국가의 공식 가르침으로 채택할 것을 상소황제는 동의했다.

그러나 다른 학파도 계속 유지토록 했다.

역사가 유흠(劉歆. BC46-AD23)은 "제의 전문가들의 도가 모든 것 중 가장 높다.

유가는 6경의 우아함에서 기쁨을 느끼며자비와 정의의 테두리 안에 생각을 가두고요순의 전통을 전수하며문왕과

무왕을 전거로공자를 창시자로 삼는다그러나 유가가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

그 앎에는 빈 곳이 있으며 다른 학파들이 채울 수 있다각각의 철학에는 장단점이 있다."했다.

 

도가는 영적생활의 중심에 이르는 방법을 아나 제의의 역할이나 도덕의 통치를 과소평가한다.

음양가는 사람들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칠 수 있지만미신으로 전락할 수가 있다.

법가는 정부가 법이나 투지력에 의존해야 한다그들의 약점은 자비도덕을 버리는 것.

묵가가 사치숙명론을 비난하는 것이나만인에게 관심을 갖는 태도는 귀중하다.

결과적으로 중국인은 보통 각각의 믿음에 각각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한다.

이런 축의 시대의 태도는 지금 우리시대에 간절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불교영웅 보디사트바(보살菩薩)

 


인도에서는 BC231년 아쇼카 왕이 죽은 뒤 마우리아 제국이 급속히 해체되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박트리아에 있는 그리스-페르시아 식민지로부터 온 그리스 침략군이 인더스 강 유역을 점령했다.

BC1세기 중반이 되자 그리스인 자리에 이란과 중앙아시아 스키타이와 파르티아 부족으로 이루어진 침략군이 들어왔다.

 

BC200-AD200 사이에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는 불교와 자이나교였을 것바크티 신앙은 강렬했다.

마우리아 제국 붕괴 뒤 인도는 암흑기그러나 불교는 스리랑카일본동남아중국에 근착했다.

인도에서는 고전적인 힌두교가 두각을 나타냈지만이것은 축의 시대의 veda 종교와는 매우 달랐다.

엄격하게 우상을 반대하던 종교가 화려한 신신상신전을 눈부시게 배치하기 시작했다.

소리에서 신선한 경험을 했던 인도인은 이제 이미지에서 신성을 보고자 했으며이런 이미지에 신이 물리적으로 현존

한다고 믿었다신성한 것은 무한했기에 하나의 표현에 한정될 수 없었다.

가장 인기 있는 신은 시바비슈누바크티 신들어떤 면에서 보면엘리트 종교가 덜 발달된 대중 신앙에 밀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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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크티(bhakti). 사랑헌신신에 대한 감정적 굴복에 기초한 영혼의 수행.

바크티(bhakti). 예컨대 시바나 비슈누에서 헌신하는 사람임.

아바타라(avatara). 표현하강신이 지상에 나타난 모습을 가리킴예컨대 크리슈나는 veda 신 비슈누의 아바타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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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슈누 신앙의 핵심은 아바타라(化身)이다역사적 위기의 순간에 비슈누는 세상을 구하려고 하늘의 행복을 포기했다.

브라마나는 비슈누를 희생제의 치유의 힘과 동일시했다.

veda 전승에서 purusha, 즉 세상이 태어날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놓음으로써 자신을 비우는 사랑의

원리를 소중히 여긴 최초의 인간과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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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루샤(purusha)

인간처음에는 세상이 생겨나도록 신들 앞에서 스스로 희생한 태초의 인간을 가리키는 말.

이 원형적 희생은 리그베다의 푸루샤 찬가에서 기념하고 있다.

훗날 푸루샤는 창조신 프라자파티라는 존재와 합쳐져 인도 축의 시대를 여는 제의 개혁에서 핵심이 되었다.

상키아 철학에서 푸루샤는 본성에서 해방되어야 하는 모든 개인의 영원하고 신성한 자아를 가리킨다.

 

상키아(samkya)

분별요가와 비슷한 철학으로 우주를 24개 범주로 분석모크샤(Moksha, 해방)를 유도키 위한 명상의 대상을 제공할

목적으로 우주론을 고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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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神像)은 명상의 대상이 되면서 이타주의의 icon이 되었다.

불교도와 자이나교도 또한 힌두의 이런 새로운 헌신(바크티)에서 영향을 받았다붓다 상은 AD1세기에 만들었다.

깨달은 인간의 이미지였다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니르바냐가 충만했기에 니르바냐와 동일시되었다.

인간의 형상으로 초월적 실재를 표현했다.

 

이 무렵 불교는 두 학파로 분리소승불교는 더 엄격하고 은둔적 경향세상에서 물러나 고독 속에서 깨달음을 구함

(달팽이). 대승불교는 더 민주적자비심이라는 덕 강조그들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뒤 장터로 가서 40년 동안 삶의

어디에나 존재하는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쳤음을 지적했다(고래와 바다).

AD1세기 여기에서 새로운 불교 영웅 보디사트바(보살)가 탄생했다그는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개인화된 니르바냐를 얻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자신의 행복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방을 발견하라는

가르침을 주려고 samsara(죽음과 재생의 순환)의 세계로 돌아왔다.

보디사트바는 자비의 새로운 model이었으며축의 시대의 오래된 이상을 새로운 형식으로 번역한 존재였다.

 




토라의 원리-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유대인의 축의 시대는 이상과 재정착이라는 어려운 상황 때문에 갑자기 중단되고 막혀버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2, 3차 개화가 이루어지면서 완성에 이르게 된다.

BC1세기에 로마제국이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이 나라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로마의 강압에 반항, 66년에 반역을 했는데 놀랍게도 4년간이나 로마 군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서기 70년 훗날 로마 황제가 되는 Titus Vespasianus(재위 79-81 )장군은 예루살렘을 정복성전을 불태워버렸다.

두 번째 성전파과는 큰 충격이었지만지금 보면 흩어진 유대인보다 더 보수적인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이미 이

재난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세네파와 쿰란파는 예루살렘 성전이 부패했다고 생각이미 주류사회에서 물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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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네파와 쿰란파


에세네파는 BC2세기경부터 AD1세기 말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활동한 유대교 교파를 말함.

수도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으며재산을 공유하고 금욕적경건한 삶을 추구.

바리사이파와 마찬가지로 모세율법안식일정결의식을 엄수했고불멸과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믿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와 달리육체의 부활을 부정했고 두루 섞여 살기를 거부에세네파에 여러 분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쿰란파(쿰란공동체)도 그 중 하나다.

쿰란파는 사해문서 중 쿰란사본을 만들어 낸 사람들 일파를 지칭자신들을 언약의 백성선택된 자참 된 이스라엘

등으로 부름이들은 철저하게 율법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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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정화된 공동체가 영혼의 새로운 성전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축의 시대 이후 발전한 묵시록적 경건함에 물들어 있었으며조로아스터 교도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끝날 때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사이에 벌어질 큰 전투를 고대했다.

자기 시대의 폭력을 내면화하여 그것을 신성한 방식으로 승인한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진보적인 유대인은 바리사이파로서그들은 유대교의 축의 시대에서 가장 포용력 있고 진보적인

영성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사제들의 신성한 나라로 불러야 하며신은 성전만이 아니라 가장 초라한 집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유대인은 정교한 제의 없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동물희생보다는 자비의 행동으로 죄를 씻을 수 있었다자선은 율법 중 가장 중요한 계명이었다.

 

아마도 바리사이파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바빌로니아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랍비 힐렐(BC1세기- AD1세기)

일 것그의 관점은 토라의 본질이 율법의 글자가 아니라 그 정신이었다힐렐은 그것을 황금률로 요약했다.

당신 자신에게 가증스러운 일을 타인에게 하지 마시오그게 토라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그 주석일 뿐이오.

가서 그것을 공부하시오.” (공자의 己所不欲 勿施於人과 같다.)

 

바리사이파는 그들 주위에서 파괴적으로 분출하는 폭력에 관여하기를 원치 않았다.

로마에 저항 봉기했을 때(68- 70그들의 지도자는 힐렐의 제자 중 가장 훌륭한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그는 유대인이 로마제국을 이길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전쟁에 반대했다종교의 보존이 민족독립보다 더 중요했다.

사람들이 그의 조언을 무시하자 그는 관에 숨어 예루살렘을 빠져나왔다유대인 열심당원들이 도시 성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는 그길로 로마진영으로 가 Vespasianus 장군에게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남부

해안의 야브네에서 살게 해달라고 요청성전 파괴된 뒤 야브네는 유대 종교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유대의 축의 시대는 랍비 유대교에서 성년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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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당


젤로트당유대분파 중 공격적인 당파로마와 로마가 신봉하는 다신교 철저 배척유대인 중 로마와 평화화해 바라는

자 경멸서기 68년 로마와의 전쟁 때 선봉. AD 73년 로마제국에게 마사다 요새를 넘겨주게 되자 집단 자살을 택함.

 

랍비 유대교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된 뒤 바이사이파 랍비들이 발전시킨 율법적 형태의 유대교.

이 유대교는 탈무드』 안에 있는 법률문서와 주석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지금까지 전 세계에 퍼져있는 모든

유대인이 지켜야 할 예배양식과 생활원칙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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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동정심사랑환대는 새로운 유대교의 중심을 이루었다.

성전이 파괴될 무렵 바리사이파 일부는 이미 신을 섬길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바리사이파는 환대가 미래의 핵심이라고 생각전쟁시절의 폭력분열에서 고개를 돌려 하나의 몸과 하나의 영혼으로

통일된 공동체를 창조해야 했다.

그들은 유대인 두세 명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공덕을 이루면신성한 존재가 그 가운데 자리한다고 믿었다.

랍비 유대교에서 공부(공덕을 쌓음)는 다른 종교 전통의 명상만큼 중요했다그것은 영적인 탐구였다.

공부를 뜻하는 단어 다라슈는 탐색한다추구한다는 뜻이다.

이는 타인의 생각을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새로운 통찰로 이끄는 것이다.

이렇게 랍비의 미드라슈(주석)은 원래의 text보다 더 나아가그 text가 말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완전히 새로운

해석을 찾아낼 수 있었다공부는 또 행동과 떨어질 수 없었다.

랍비 힐렐이 회의적인 이교도에게 황금률을 설명했을 때 그는 가서 그것을 공부하라고 말했다.

황금률의 진실성은 그것을 일상생활에서 실행에 옮길 때만 드러날 터였다.

공부는 신과의 역동적인 만남이었다성경은 닫힌 책이 아니었다계시는 먼 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다.

성경은 유대인이 text와 대면거기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상황을 거기에 적용하려 할 때마다 새로워졌다.

이 역동적인 비전은 세상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랍비들은 궁극적 실재가 초월적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축의 시대의 원리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지상에서 신의 현존 이야기를 할 때 신이 우리에게 보도록 허용해주는 특질과 우리에게는 늘 접근 불가인 신의

신비를 세심하게 구분했다.

그들은 간단하게 신이라는 말 대신 신의 영광(카보드), 신의 현존을 뜻하는 셰키나성령 등의 표현을 하는 것을 좋아

했다이것은 그들이 경험하는 실재가 신의 본질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일깨워주었다.

어떤 신학도 결정적일 수 없었다랍비들은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사람 각자가 서로 다르게 신을 경험했다고 주장

하는 일이 많았다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지 않았다.

예언자들은 각기 서로 다른 신을 경험했다각자의 인격이 각자의 신이라는 개념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심오함과 과묵함은 그 뒤로도 유대교 신학과 신비주의의 특징으로 남게 된다.

 

기독교는 유대인이 되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했던 서기 1세기 운동 중 하나로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서기 30년경 로마인에게 십자가형을 당한 갈릴리의 한 신앙 요법사의 삶과 죽음이 중심이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나사렛 예수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유대인 메시아이며그가 곧 영광 속에 다시 돌아와 지상에 신의 왕국을

열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신의 아들이었다고대 왕실 신학에서는 이스라엘 왕은 야훼의 아들이자 종이라고 보았다이사야의 고통

받는 종이 예수와 연결되었는데그 종 또한 인간들 때문에 수모를 겪고 신에 의해 특별히 높은 지위로 들어 올려졌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의도가 없었으며 뿌리 깊은 유대교였다.

복음에 기록된 그의 많은 말은 바리사이파의 가르침과 비슷했다.

예수도 힐렐처럼황금률의 한 형태를 가르쳤다예수는 랍비들처럼 온 마음과 영혼으로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토라의 가장 훌륭한 계율이라고 믿었다.

기독교를 이방인 종교로 만든 사람은 최초의 기독교 저술가 바울로였다.

그는 예수가 메시아’ ‘기름 부음을 받은 자’(그리스어로 christos 크리스토스)이기도 했다고 믿었다.

바울로는 실리시아 타르수스(Tarsus. 터키 이첼 주 실리시아 충적평야의 타르수스 이르마이(지드누스 강강변에

있는 고대 도시출신의 유대인.

바리사이파인 그는 코이네 그리스어(BC5세기-BC3세기의 표준 그리스어신약성서가 이 언어로 기록되었다.)

글을 썼다.

 

바울로는 축의 시대의 보편적인 전망을 가졌다하느님은 만인에게 관심이 있었다.

바울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인류 전체에 열려 있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한다고 확신했다.

바울로는 예수의 죽음 이후 약 25년 뒤인 50년대 중반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 있는 개종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기독교도가 처음부터 예수의 사명을 kenosis(자기 버리기)로 경험했음을 보여주는 초기 기독교의 찬송가를 인용했다.

이 찬송가는 예수가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며그럼에도 이런 높은 지위에 매달리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이 같은 전망은 인류의 고난(고통때문에 스스로 니르바냐의 행복을 젖혀 놓은 보디사트바의 이상과 다르지 않다.

 

기독교도는 예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인류 구원을 위해 고통스런 낮춤을 시도한 하느님의 Avatar로 보게 되었다.

이런 이타적인 방식으로 타인을 존중하면 그들도 예수가 행한 kenosis의 mythos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바울로에게 종교의 핵심은 kenosis와 사랑이었다사랑은 자기중심주의를 계속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사랑은 친절합니다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고린도 서)

 

서기 70-100년경에 기록된 복음은 바울로의 노선을 따른다복음서들은 나중에 유행하는 삼위일체나 원죄와 같은

교리를 (예수가가르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에 예수는 묵자의 兼愛(모든 사람에 대한 관심)라고 불렀을만한 것을 실행에 옮긴다.

현대 사람들이 보면 놀랄지 모르지만예수는 매춘부문둥병자간질병자로마의 세금을 걷는다고 해서 따돌림

당한 세리 등 죄인들과도 사귀었다그의 행동은 종종 붓다의 가없는 마음’(無量心)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는 자신의 관심 범위에서 아무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예수는 또 ahimsa(불살생)의 인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은 눈으로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앙갚음하지 마라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마태복음).

 

예수는 체포될 때 제자들이 그를 위해 싸우지 못하게 했다. “칼을 쓰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그는 자신을 처형한

자들을 용서하며 죽었다.

그의 놀라운 가르침은 모든 증오를 금지한 것이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

이다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복음 5:3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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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hallel lujah)


정확한 발음은 알렐루야에 가깝다히브리인들은 발음 안함할렐루야는 히브리어 힐렐에서 유래찬양하다는 뜻.

할렐루는 힐렐의 명령형너희는 찬양하라는 의미야는 야훼야웨야베즉 주인이라는 의미.

합치면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는 말.

 

미드라쉬(Midrash)


탈무드(Talmud)는 할라카(Halakha.성경에서의 법적인 규율)와 아가다(성경에서의 교훈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이 양자를 만들어 낸 자료들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이 미드라쉬이다미드라쉬란 찾다연구하다 라는 뜻의 동사.

다라쉬에서 나온 명사형으로 해석 혹은 설명을 의미이를 히브리어로 미드라쉬라 부른다.

 

미슈냐(Mishna.또는 Mishnah라고도 씀복수형은 Mishnayot)


유대 전승의 모음집유대인의 구전 토라를 기록한 것으로 최초의 것이다.

바리새파에 의해 주도되었으며서기 70에서 200년 사이로 추정되는 랍비 현자들의 모임인 탄나임의 토론을 담고 있다.

랍비 문학의 중요한 책으로 가장 최초의 것.

 

히브리어


히브리어는 고대 이스라엘의 언어다오늘날 대부분의 문자와는 달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구약성서는 거의 대부분 히브리어로 쓰였고 후대에 작성된 일부만 아람어로 쓰였다.

히브리어는 22개의 자음이 있고 모음은 없다.

그러나 수백 년 전 마소라 학자들은 구약성서의 내용에 '모음 요소들'을 추가해 독자들에게 히브리어 단어들을 발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신약성서의 시대에는 대다수 유대인들(예수와 사도들을 포함한다)이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나 그리스어를 썼다.

구약성서는 히브리어에서 아람어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유대 학자들은 여전히 히브리어를 배웠으나 135년 무렵 히브리어는 거의 死語가 되어 생활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20세기에 이스라엘이 국가로 재탄생되자 히브리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인들은 대부분 히브리어 이외에 다른 언어도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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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그리스도교도들은 굳이 히브리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교회에서는 400년경에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

성서만 사용했다(불가타 성서, Vulgate. 성 히에로니무스(제롬)가 번역한 것으로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용하는

라틴어 성서. '공동번역'이라는 뜻의 라틴어 editio vulgata에서 유래불가타 성서의 번역자인 히에로니무스는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 학자들을 불러 모아 도움을 받았다.)

 

1500년대에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성서 원본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들이 그 두 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히브리어는 현재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계열의 신학대학에서 가르친다.

머지않아 구약성서를 정확히 번역하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다.

고대에 유대인과 그리스도교도들은 히브리어가 인류 언어의 기원이라고 믿었다.

천지창조를 기록한 창세기가 히브리어로 쓰였으므로 일리 있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아담과 이브도 히브리어를 썼고 신도 인간에게 말할 때는 히브리어를 쓴다고 여겼다.

히브리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중세에도 히브리어는 '신성한 언어'로 간주되었다.

독일과 동유럽의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이디시어(Yiddish)는 히브리 문자로 표기된다.

기본적으로 이디시어는 옛 독일 방언에 히브리어로부터 차용한 단어들을 합친 언어다.

이디시라는 명칭도 '유대어'라는 뜻의 옛 독일어에서 나왔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주로 이디시어를 썼다.

 



토라의 원리-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메카 사람들은 부유해졌지만 공동체가 씨족의 약한 구성원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던 오랜 부족전통은 잊어버렸다.

610년경 무함마드가 첫 계시를 받았을 때 많은 아라비아인들은 그들의 만신전 최고신 알라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하느님과 똑같다고 확신했다.

실제로 아라비아 기독교도는 이교도와 함께 보통 메카의 알라 성전으로 간주되는 카바로 하지 순례를 갔다.

무함마드의 첫 가르침 중 하나가 자신의 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도시였으며이제 그들의 하느님을 아라비아인도 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쿠란에서 하느님은 이슬람교도에게 아흘 알키타브’ 이전 계시의 사람들을 예의 바르게 대접하고 존경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친절한 방식이 아니라면 이전 계시를 따르는 자들과 논쟁하지 마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이 아니라면 이렇게 말하라우리는 높은 곳으로부터 우리에게 계시된 것만이 아니라 당신들에게

계시된 것도 믿노라우리의 하느님과 당신들의 하느님은 한분이시며 우리 모두 하느님께 복종하노라.”

 

8세기 중반까지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권장되지 않았다.

유대교가 이삭과 야곱의 자녀들의 종교이고기독교가 부름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종교이듯이, Islam은 아라비아인

의 종교라고 생각했다오늘날 어떤 이슬람교도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모독하고어떤 극단주의자들은 이슬람을 위해

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이슬람의 의무라고 말하지만이는 수백 년의 신성한 전통과 결별하는 것이다.

 

Al-lah(알라)는 아랍어로 단순히 하느님이라는 뜻.

 


결국 무함마드의 종교는 ‘Islam’(내어놓다)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슬람교도(muslim)는 하느님에게 자신의 삶을 존재론적으로 내어놓은 사람들이다이것은 바로 축의 시대의 핵심과

이어진다무함마드가 그의 개종자들에게 하루에 몇 번씩 기도(살라트)를 하며 엎드리라고 했을 때아라비아인들에게

이는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군주제를 인정치 않았으며노예처럼 땅에 엎드리는 것은 불명예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을 구부려 엎드리는 것은 그들에게 이슬람이 요구하는 것을 이성적인 수준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가르치려고

고안된 것이었다즉 날뛰고 우쭐대고 젠 체 하고 언제나 자신에게 관심을 끌려고 하는 ego를 넘어서라는 것이었다.

 

이슬람교도는 또 수입의 일정 비율을 빈자에게 주어야 한다.

이 자카트(淨化)는 그들의 마음에 뿌리박은 이기심을 씻어낸다처음에는 무함마드 종교를 타자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자카트와 관련이 있는 이 모호한 말은 번역이 까다롭다순화관용기사도 등의 후보들이 나왔지만 모두 딱 들어맞지는

않다이슬람교도는 타자카에 의해 자비와 관용의 미덕으로 몸을 감싸게 되었다.

그들은 자연의 징조’(아야트)를 관찰알라가 인간에게 보여준 관대한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해야 했다.

 

이슬람교도는 창조의 신비를 명상하여 그와 비슷한 관대한 자세로 행동해야 한다.

알라의 친절 덕분에 혼돈과 볼모대신 질서와 다산이 나타났다.

이슬람교도가 알라의 모범을 따르면그들 자신의 삶이 신성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이기적인 야만 대신 영적 순화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종교는 그 평등주의적 정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메카 주류의 분노를 샀다.

가장 잘 나가던 가문들은 이슬람교도를 박해했고 예언자를 암살하려했다.

결국 무함마드와 이슬람 70가족은 북쪽으로 400km 떨어진 메디나로 달아나야 했다.

혈연이 가장 신성한 가치였던 아라비아 환경에서 이 일은 신성모독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가족을 떠나 관계도 없는 부족과 영원히 함께 산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移住(히즈라)뒤에 이슬람교도는 아라비아에서 가장 강한 도시 메카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5년 동안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전사들은 무자비했다.

메카 사람들이 이슬람 공동체를 정복했다면 틀림없이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아이는 노예로 삼았을 것이다.

이 어두운 시기에 쿠란의 계시 가운데 일부는 전장에서의 행동을 가르쳤다.

이슬람은 아힘사의 종교가 아니었지만 쿠란은 방어전쟁만 허락했다.

쿠란은 전쟁을 무서운 악이라고 비난하며 이슬람교도가 먼저 적대행위를 시작하는 하는 것을 금했다.

침략은 엄금하고 선제공격은 불가였다그러나 공격을 당하면 방어는 허용했다.

적이 평화를 간청하는 순간 적대행위는 중단하고 이슬람교도는 적이 제시하는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여야 했다.

 

전쟁은 갈등을 처리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었다아주 친절한 방식으로 토론을 할 수만 있으면 앉아서 설득을 하는

것이 더 나았다용서하고 참는 것이 더 나았다하느님께서는 역경에서 인내하는 자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지하드라는 말은 聖戰’(성전)이라는 뜻이 아니다그 1차적 의미는 투쟁이다.

잔인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슬람교도는 사회경제지성영혼 등 모든 전선에서 노력을 기울이라는 명령을 받았다때로는 싸우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었지만전쟁을 종속적 지위에 놓는 것은 중요하고 매우 영향력이 큰 전통이었다.

전투에서 돌아오면서 무함마드는 우리는 지금 작은 지하드’(전쟁)을 떠나 더 큰 지하드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

했다우리 사회와 우리의 마음을 개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다급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슬람교도는 자기 방어에만 전념(싸웠다)했다.(송양지인?)

복수는 엄격하게 균형이 맞아야 했다민간인을 죽이는 것은 피해야 했다나무는 벨 수 없었다건물은 태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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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襄之仁


송 양공은 覇者가 되고자 노력했으나 초나라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두 나라는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홍수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가 대치할 무렵이었습니다.

송나라가 먼저 진을 치고 기다릴 무렵 초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기 시작하자 공자 목이가 즉시 공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양공은 상대가 미처 준비하기 전에 기습하는 것은 인()의 군대가 할일이 아니다.”며 공격을 반대했습니다.

이어 초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 진을 치기 시작하자 다시 공자 목이가 공격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양공은 같은 이유로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초나라 군대가 전열을 갖추자 그때서야 공격 명령을 하달했고병력이 약한 송나라는 대패하고 말았으며 양공

또한 부상을 입은 후 병세가 악화되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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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년 무함마드는 하지 순례를 하고 싶다고 발표하고 자신과 동행할 이슬람교도 지원자를 모았다.

이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하지 동안 아랍 순례자는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다.

메카의 성소에는 모든 폭력이 금지되어 있었다벌레를 죽이거나 심한 말도 못했다.

따라서 비무장으로 메카에 간다는 것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슬람교도 1,000명이 동행자로 나섰다메카는 순례자를 죽이려고 기병대를 보냈지만 현지 베두인족이 다른 길을

이용해 그들을 성지로 안내했다.

무함마드는 성지에 들어서자 평화의 자세를 보여주었다그렇게 하면 메카인이 곤경에 처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메카 사람들은 협상사절단을 보냈다그때 그곳에 있던 이슬람교도가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무함마드가 쿠란의 가르침에 순종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이슬람이 어제까지 목숨을 바쳐 싸워 얻었던 모든 유리한

위치를 내던져야 하는 조건을 받아들인 것.

이슬람교도 순례자들은 격분했다내란은 가까스로 피했지만 이슬람교도들은 화가 나 입을 다물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함마드는 집으로 가는 길에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데하느님은 패배로 보이는 이 사건을 분명한 승리라고 불렀다.

옛 종교의 폭력에 고무된 메카인은 마음속에 고집스러운 경멸감을 품었지만하느님이 이슬람교도에게 내적인 평화

(사키나)라는 선물을 내려준 덕분에 그들은 차분하고 고요한 태도로 적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완전히 내어주는 행동으로 이교도 메카인과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며우리가

축의 시대의 종교라고 부르게 되는 것과 연결되었다.


쿠란에 따르면평화의 정신은 그들을 토라나 복음과 연결해주는 것이었다.

전망이 어두워 보이던 조약은 결국 긍정적인 평화를 낳았다. 2년 뒤 메카인은 자발적으로 무함마드에게 성문을 열었고,

무함마드는 피를 흘리지 않고 메카를 차지했다.

 




이 위험한 시대에 우리에겐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축의 시대 종교들은 그 핵심에서 자비존중보편적 관심이라는 이상을 공유한다이 시대 현자들은 우리 시대와 다를

바 없는 폭력적 사회에 살았다그러나 타고난 인간적 에너지를 활용폭력적 공격에 맞서는 영적 기술을 창조했다.

 

축의 시대 종교 분포(현재)


종교

신도 수()

종교

신도 수()

기독교

1,965,993,000

도교

22,050,000

이슬람교

1,179,326,000

유대교

15,050,000

힌두교

767,424,000

유교

5,067,000

불교

356,875,800

자이나교

4,152,000

시크교

22,874,000

조로아스터교

479,000

 

어떤 사회에 전쟁과 테러가 발생하면 이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친다.

증오와 공포는 그들의 꿈관계욕망야망 등에 스며든다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런 일이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일어

나는 것을 보고 이를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자아의 더 깊고 덜 의식적인 수준에 뿌리를 둔 교육을 창조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쳤는데도 깊은 수준에서는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했음은 그들이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에서

어떤 중요한 것을 실제로 발견했음을 말해준다그들은 각각의 신학적 믿음(이는 현자들과는 별 관계가 없다)과 관계

없이사람들이 자신을 재교육하려고 훈련을 받고 노력을 하면 인간성의 고양을 경험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program은 폭력의 주된 원인인 자기중심주의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으며황금률의 感情移入的 靈性

장려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엑스타시스(Ekstasis, 그리스어무아경말 그대로는 밖으로 나아감정상적 경험을 초월하는 경험), 즉 습관적이고 지기에게 얽매인 의식으로부터 바깥으로 나가기를 경험했으며이때 흔히 하느님니르바냐브라만,

아트만도라고 부르는 실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먼저 발견한 다음자비로운 삶은 사는 것이

아니었다훈련된 자비의 실천 자비의 실천 자체만으로 초월을 맛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동료형제나 자매적국에 관해 뭔가 적대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유혹을 느낄 때마다 만일 남이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나의 기분이 어떨지를 생각하여 참는다면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넘어서게(초월되는 것이다.

바로 초월의 순간이다.

그런 태도가 습관화되면 사람들은 늘 엑스타시스의 상태에서 살 수 있다.

오묘한 황홀경에 빠지기 때문이 아니라자기중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살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program은 모두 이런 태도를 장려했다랍비 힐렐이 지적했듯이그것이 종교의 핵심이었다.

 

儒家의 양보’ 제의는 타인을 존중하는 습관을 기르려고 고안된 것불교 수행자는 요가 훈련에 앞서 아힘사즉 비폭력

에 숙달되어야 했으며단 하나의 말행동으로도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이런 수행과정에서 수행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했다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기심을 버리고 자비의 영성을 계발

했다그들에게 종교란 황금률이었다.

그들은 사람이 초월해야 할 대상(탐욕자기중심주의증오폭력)에 집중했다.

에고원리(아항카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초월적 가치는 그 본성상 정의(define, 원래의 의미가 제한을 둔다는 것)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 교리를 버리는 대신그 영적 핵심을 찾아보아야 한다.

종교적 가르침은 결코 단순한 객관적 사실의 진술이 아니다그것은 행동장려이다.

바울로가 필리피인들에게 초기 기독교 찬송가를 인용한 것은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에 관한 율법을 정하려는

것이 아니라스스로 kenosis(자기 희생자기 버리기)를 실천하라고 촉구하려는 것이었다.

 

14세기 그리스 정교 신학자들은 축의 시대의 핵심과 바로 이어지는 신학원리를 계발했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한 모든 진술에는 두 가지 특질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선 역설적이어야 했다신과 관련된 것은 우리의 제한된 인간적 범주에 들어맞을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부정적이어야 했다우리가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학적 논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에 관한 우리의 모든 의문에 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시합에 나선

사람들을 말 없는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브라모디아(brahmodya산스크리트제의적 시합시합 참가자들은

각각 신비하고 형언할 수 없는 브라만의 실재를 표현하는 언어적 공식을 찾으려 노력결국은 경외심에 빠져 침묵.

침묵 속에서 브라만의 임재를 느꼈다.)와 같아야 한다.

 

근본주의적인 종교는 우리 시대의 폭력을 흡수극단화된 전망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근본주의자들은 초기 조로아스터 교도처럼인류를 두 적대진영으로 나누고 신자들의 진영이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항목숨을 건 싸움을 벌었다고 본다이런 행위는 역효과를 낳는다.

폭력은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해도 휘두른 자에게 되돌아간다.’

 

축의 시대의 종교적 탐구는 모두 자기 시대의 전례 없는 폭력으로부터 원칙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물러나는 데서 출발

했다인도에서 축의 시대는 제의 개혁가들이 희생 결정에서 갈등과 공격성을 빼내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축의시대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대인이 바빌로니아로 강제추방을 당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

었다바빌로니아에서 사제들이 화해의 아힘사라는 이상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중국의 축의 시대는 戰國時代에 시작되었다이 시기에 유가묵가도가는 모두 널리 퍼진 무법적이고 치명적인 공격

성을 제어하는 방법을 찾았다폴리스가 폭력을 제도화했던 그리스에서는 축의 시대의 이상에 주목할 만한 기여를

했지만 (특히 비극영역에서),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변화는 없었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조언을 했다.


① 자기비판 있어야 한다. (이 점은 유대 예언자들이 강력한 모범을 보였다.)

② 우리는 축의 시대 현자들의 본을 따라 실천적효과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인도의 제의 개혁가들은 희생제에서 agon(경쟁)을 제거했다.

孔子는 예를 왜곡시킨 전투적인 자기중심주의를 빼내려 했다.

사제 저자 P 고대 창조 이야기들에서 공격성을 제거하고 야훼가 모든 피조물을 축복하는 우주 창조론을 만들어 냈다.

 

축의 시대 현자들이 지칠 줄 모르고 설명했듯이종교적인 이해는 단순히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많은 현자들이 기록된 경전이라는 관념에 반대한다그것이 통속적이고 피상적인 앎을 낳을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진정한 앎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꾸준히 설명했다. Socrates는 아무리 엄격하게 논리적이라

해도 진실의 어떤 측면은 늘 우리를 빠져 나간다는 사실을 합리적인 그리스인들에게 일깨우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이해는 지적인 kenosis 뒤에즉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우리의 마음에서 이미 받아들였던 관념들이 비어졌을

에만 찾아온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과감하게 근본적인 가정들에 의문을 제기했다우리도 우리 시대 문제들에 대해 늘 새로운 생각에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한다복수는 답이 아니다과거의 고통의 기억을 바탕으로 황금률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인은 인간의 비참한 상황을 무대에 올려 아테네 관객이 불과 몇 년 전에 그들의 도시를 유린했던 Persian들에게

공감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축의 시대 현자들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상황에서 자비의 윤리를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늘

일깨워야 한다.

현자들은 utopia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현자들은 우리보다 먼저 공감이 우리 자신의 집단

에만 한정될 수 없음을 인식했다우리는 불교에서의 가없는’(無量전망을 계발해야 한다.

황금률은 나처럼 타인을 귀하게 여길 것을 강조한다내가 만일 나의 개별적 자아를 절대적 가치로 만들어 버리면 인간

사회는 유지가 불가능하다따라서 모두가 전 지구적으로 서로 양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비극이라는 장르는 우리가 타인의 관점에서 사물을 볼 것을 요구한다종교가 세계에 빛을 던지려면 맹자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사라진 마음즉 우리의 모든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자비의 정신을 찾으러 나서야 한다.

 

結論


축의 시대 종교들은 그 핵심에서 자비존중보편적 관심이라는 이상을 共有한다.

이 시대 현자들은 모두 우리 시대와 다를 바 없는 폭력적 사회에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타고난 인간적 에너지를 활용하여 이 공격에 맞서는 영적기술을 창조했다.

 

어떤 사회에 전쟁과 테러가 발생하면이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친다.

증오와 공포는 그들의 꿈관계욕망야망 등에 스며든다.

축의시대 현자들은 이런 일이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이를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자아의 더 깊고,

덜 의식적인 수준에 뿌리를 둔 교육을 창조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쳤는데도 깊은 수준에서는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했음은 그들이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에서

어떤 중요한 것을 실제로 발견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각각의 신학적 믿음 (이는 현자들과는 별 관계가 없다)과 관계없이사람들이 자신을 재교육하려고 훈련을 받고

노력을 하면 인간성의 고양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program은 폭력의 주된 원인인 자기중심주의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으며황금률의 감정이입적 영성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엑스타시스(Ekstasis, 그리스어무아경말 그대로는 밖으로 나아감’, 정상적 경험을 초월하는 경험), 즉 습관적이고 지기에게 얽매인 의식으로부터 바깥으로 나가기를 경험했으며이때 흔히하느님니르바냐브라만,

아트만도라고 부르는 실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축의시대 현자들은 이기심을 버리고 자비의 영성을 계발하는 것을 그들 의제의 맨 위에 두었다.

그들에게 종교란 황금률이었다.(한 중 일에 있어서의 유교의 의미)

 

근본주의적인 종교는 우리 시대의 폭력을 흡수극단화된 전망을 발전시켰다.

 

축의시대의 종교적 탐구는 모두 자기 시대의 전례 없는 폭력으로부터 원칙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물러나는 데서 출발

했다.

 

인도에서 축의 시대는 제의 개혁가들이 희생 결정에서 갈등과 공격성을 빼내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의 축의 시대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대인이 바빌로니아로 강제추방을 당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사제들이 화해의 아힘사라는 이상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중국의 축의 시대는 전국시대에 시작이시기에 유가묵가도가는 모두 널리 퍼진 무법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성을 제어

하는 방법을 찾았다.

폴리스가 폭력을 제도화했던 그리스에서는 축의시대의 이상에 주목할 만한 기여를 했지만(특히 비극영역에서),궁극적

으로 종교적인 변화는 없었다.

 

축의시대 현자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조언을 했다.

1. 자기비판 있어야 한다.(이 점은 유대 예언자들이 강력한 모범을 보였다.)

2. 우리는 축의시대 현자들의 본을 따라 실천적효과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Karen Armstrong 정영목 ,The Great Transformation : The World in the Time of Buddha,

Socrates, Confucius and Jerem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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