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고조선조 > 전문역사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전문역사자료실

[원문자료] 삼국유사 고조선조

송화강 2019-05-28 (화) 18:02 6년전 6247  

삼국유사 고조선조 (국사편찬위원회)

 

고조선(古朝鮮왕검조선(王儉朝鮮)

 

古朝鮮 王倹朝鮮

魏書, “乃徃二千載有壇校勘 186王倹立都阿斯逹経云無葉山亦云白岳, 白州. 或云在開城, 白岳宮是.開國號朝鮮, 與髙校勘 187同時.”

 

위서(魏書) 244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 245에 도읍을 정하였다 ()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한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니 백주 246의 땅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의 동쪽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그것이다..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朝鮮)이라 했으니 고[-요임금-] 247와 같은 시대이다.”

 

244 위서(魏書)에는 다양한 이본(異本)이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서명(書名)만 전해지는 것도 여러 종류이지만(박대재, 삼국유사 고조선조 인용 위서론, 한국사연구112), 현재 전해지고 있는 위()와 관련된 사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245

이승휴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황해도 문화현에 구월산(九月山)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246

황해도 배천군의 옛 이름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43 白川郡).

247

고려(高麗) 정종(定宗)의 휘()인 요()를 피하기 위해 고()자를 쓴 것이다.

 

古記云, “昔有桓國校勘 188 帝釋.庻子桓校勘 189雄數意天下貪求人世. 父知子意下視三危太校勘 190伯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遣徃理之. 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 太伯妙香山.神壇校勘 191樹下謂之神市, 是謂桓雄校勘 192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糓·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 常祈, 于神雄願化爲人. 時神遺霊艾一炷蒜二十枚曰, ‘爾軰食之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熊女者無與爲婚故每於壇校勘 193樹下呪願有孕. 雄乃假化而㛰之. 孕生子號曰壇君王倹. 校勘 194即位五十年庚寅唐堯即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非庚寅也. 疑其未校勘 195. 平壤 西亰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阿斯逹, 又名弓 一作方忽山今旀逹. 御國一千五百年校勘 196王即位己卯封箕子朝鮮, 校勘 197君乃移於藏唐亰後還隠於阿斯逹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歳.”

 

고기(古記) 248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 249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250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 즉 태백(太伯)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 251이다. 신단수(神壇樹;神檀樹) 252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의 삼백육십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253 항상 신(환웅()에게 기도하되 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신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이 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서 먹어, ()한지 삼칠일(三七日)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하지 못해서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웅녀(熊女)는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壇樹;檀樹)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壇君王儉;檀君王儉)이라 하였다()의 고()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당의 요()임금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인 즉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이 아닐까 의심스럽다.으로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에 옮겼는데, (혹은 방()이라고 한다.홀산(忽山)이라고도 하며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의 호왕(虎王-武王-) 254이 즉위한 기묘(己卯) 기자(箕子)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 255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수()1,908세다.”라고 하였다.

 

248 삼국유사에는 '고기'가 여러 번 인용되는데, 이것이 책 이름인지, 아니면 단순히 옛날 기록이라는 보통명사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여기에서 인용한 단군 관련 '고기'에 대하여 안홍의 삼한고기(三韓古記)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김정배, 단군기사(檀君記事)와 관련된 고기(古記)”의 성격, 한국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166).

249

제왕운기(帝王韻紀)의 주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42 문화현 산천 구월산조에서는 구월산, 즉 아사달산의 다른 이름 중 하나로 삼위(三危)를 들고 있다. 태백(太白)은 뒤에 나오는 태백산을 가리킨 것이다. 이는 지금의 평안도(平安道) 영변부(寧邊府) 동쪽 130리에 위치한 묘향산(妙香山)을 가리킨다.

250

신의 위력과 영험한 힘의 표상으로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물건이나 실제 어떤 물건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251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54 寧邊都護府 고적조에는 묘향산이 부의 동쪽 130리에 있으며 태백산(太伯山)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252

신단수는 천··지하계의 접합점에 있는 성역이며 만물이 생성되며 태의(太儀)를 재현하는 성단(聖壇)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황패강, 단군신화의 연구, 단군신화론집, 새문사, 1988, 78).

253

곰과 호랑이를 토템 동물로 간주하고 북방민족에 있는 2개의 토템이 본래는 같은 근원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최남선, 단군고기잔석, 단군신화연구, 온누리, 1986, 24).

254

고려 제2대 혜종(惠宗)의 휘()가 무()임으로 주() 무왕(武王)을 호왕(虎王)으로 기록한 것이다.

255

고려사(高麗史)58 12 지리3 유주(儒州)조에서는 주 내에 아사달산으로 전하는 구월산(九月山)과 세간에서 당장경(唐藏京)이 와전된 장장평(莊莊坪)이 위치해 있다고 하였다.

 

 

唐裵矩傳云, “高麗孤竹國 海州校勘 198以封箕子朝鮮分置三郡謂玄莬·樂浪·帶方 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真···玄四郡, 今云三郡名又不同何耶.

 

배구전(裵矩傳)에 이르기를 고려(高麗)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지금의 해주(海州)이다.인데 () 기자(箕子)를 봉하고 조선이라 하였다()3()으로 나누었으니현토(玄菟낙랑(樂浪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라고 하였으며 256, 통전(通典) 257에도 역시 이 설명과 같다한서(漢書) 258에는 곧 진()(()(()(()()4(四郡)인데, 여기서는 3(三郡)이라 하며 또 이름도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259

 

256

구당서(舊唐書)63 열전13 배구(裴矩)조에는 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箕子 漢時分爲三郡 晉氏亦統遼東라고 기록되어 있다.

257

당의 두우(杜佑)가 지었다. 300권으로 중국 사고로부터 당대까지의 제도를 식화(食貨선거(選擧직관(職官) 9개 부분으로 나눠 기술하였다.

258

후한의 반고(班固)가 찬하고 반소(班昭)가 보충하였다. 12제기(帝紀), 8(), 10(), 70열전(열전) 등 총 120권으로 구성되었다.

259

사기(史記)한서(漢書)의 조선열전과 한서무제기(武帝記)에서는 모두 원봉 3년 즉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붕괴되고 한사군이 설정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서오행지(五行志)와 지리지(地理志) 낙랑군·현토군 관련 내용을 보면, 한군현은 동시에 개설된 것이 아니라 원봉 3년에 낙랑·임둔·진번의 3개 군이 먼저 설치되고, 원봉 4(기원전 107)에 현토군이 추가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기한서에 수록된 항한제후표(降漢諸侯表)의 내용 비교를 통해, 왕험성(王險城)의 붕괴 시점이 원봉 4(기원전 107)이며, 그 직후에 현토군이 개설되었으므로 왕험성은 낙랑군이 아닌 현토군에 속했을 가능성도 있다(조법종,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신서원, 2006, 246~258).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회원로그인

최신 댓글
  • 게시물이 없습니다.

접속자집계

오늘
282
어제
500
최대
4,666
전체
1,069,633


Copyright © 한퓨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