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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역사자료] 예(濊)와 이(夷)의 명칭에 관하여

송화강 2022-07-01 (금) 23:19 2년전 2715  

()와 이()의 명칭에 관하여

 

곽 창권

< 차 례 >

1. 韓人元祖設定 ; 濊族 , 夷族1

2. Kala, Koma, 는 역사의 근원1

3. 樂浪Kala이며 Nara 5

4. 濊族의 진화분화 ; 6

5. 敗退部族低地帶8

6. 고조선의 부족적 성분9

 

 

 

1. 韓人元祖設定 ; 濊族 , 夷族

 

이때 이들을 종족명으로 무어라고 하는가 할 때 여기서는 그것을 문헌상에 나타나는 <>가 합당하다고 할 수 있으며 秦夏人(中國人)들이 이름 붙인 <> 나아가 일본인을 일컫는 <>도 그 족속류로 범주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예족은 그들의 진화에 따라 청동기 단계에 먼저 들어선 부류를 (문헌에서는 , , 등도) 또는 濊貊이라고 개념화하여 본다.

 

() 漢書에 보면 안사고가 왈, 는 같다면서 張晏이라 하고 索隱에서 은 즉 라고 하였다. AD 2세기 사람 應劭은 국명으로서 東北方에 있는데 三韓之屬은 모두 貉類부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로 남아 있던 후진 부족도 진화하여 하나의 세력으로 굳혀 가면서 선진부족이었던 <>과 구분된 별도의 특화집단으로 본다. 가령 AD 10(한서, 왕망 始建國 2)<>將軍 양준과 <>將軍 엄우가 어양에서 출병하였다는 만큼 ==을 구분하고 있다. 당시 왕망은 예, 맥계에 대해 무척 악의를 지니고 있어 토예니, 주맥이니 하는 극단적인 반감을 보이고 있다.

 

또 이들은 통설로 된 바로는 넓은 의미로서 중국인들이 동이(東夷)라고 부르던 그들의 동방에 있던 여러민족 증의 한 종족임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들은 특수한 경우로 혼합된 호칭이 아니고서는 선비, 오환 등 동호(東胡)인과도 구분하였음이 명백히 나타나고 있었다. 가령 호()라고만 나올 때 이것이 그들의 이방인으로서 옛시대 사람(古人, , , 의 뜻이 있다)들이란 뜻으로 보아질 때도 있었고 예족을 칭할 때 또는 동호족을 지칭할 때도 있어 문맥과 당시의 정황으로 판단하게 한다. 또 북적(北狄)인 흉노나 거란 등과도 구분된다고 본다.

, 夷人들은 또 BC 2천년을 경계로 문화적 통일체로서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그들보다 먼저 와 있던 선예계(先濊系) 즉 문헌상의 읍루, 숙신, 말갈, (), 발해-대조영의 발해가 아니라 산동반도 동북 방면에서 발해연안에 있던 숙신계(?)- 및 여진족의 선조 등과도 구별된다고 보고 있다.

 

() 읍루는 숙신, 말갈의 선인이고 그 사람의 형상은 부여와 비슷한데 그 언어가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동이열전)

 

 

2. Kala, Koma, 는 역사의 근원

 

그런데 여기서 이, , 맥 등은 어떤 뜻이며 왜 그런 글자로서 한인의 조상을 나타내는 부족명으로 쓰이게 됐는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병도는 예와 맥을 二重示함은 잘못이고 이는 중국말로 Houei-mai의 고대음 Khouei-mai를 따서 곰 토템, 신성을 의미하는 <고마>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와 맥은 한데 붙여쓰기도 하지만 따로 떼어나오기도 한다. 가령 부여나 동예는 예로만 나올 때가 있고, 고구려나 옥저는 맥으로만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여, 동예를 맥으로만 쓰거나 고구려, 옥저를 예족으로 쓰는 경우는 예외 이외에는 안 쓴다.

, 등 글자로도 보이고 , 등으로 나올 때가 있는데 이병도는 보다 가 먼저 나왔고 보다는 이 타당하다고 하였으나, 본고에서는 가 먼저 나왔고 맥도 이 먼저 나온 후 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字典에서의 음가구성 추정만으로서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소리는 음운의 변동이 심하더라도 음가적 요소는 좀체로 없어지지 않고 뒷날까지 유지한다고 보고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자() 중에서 예()만은 , 등에서는 없는 g(k, x)l(r)의 음가 요소를 지니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민족의 시원 단계에서는 본래 만을 차용할 수 있었고 그 뜻은 우리말의 같은 무리(동류), 동일 종족의 읍락(邑落)을 의미하는 kala, 또는 kulu였었다.

 

() 여기서 kala는 음운관계상 kalag, kulu, kol, kul, kohl, kohli 등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k,l 등 음가도 g, x, hr 등으로 구성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가라>또는 <가락>을 구성하는 것으로만 한다.

 

그러다가 그 kala 족속 중 지배적인 위치에 선 대부족 kala, 선진 kala가 청동기 단계에 들어 天孫地祉 사상 등을 곁들여 통치체제 등에서 한발 앞서게 되었는 바 이에 kala國邑, 또는 국토(國土)의 개념으로 되면서 큰가라, 마가라, 검가라 계통의 표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이를 , 자를 동원하였을 것이며 이라든가 東夷人單綴기피 경향대로 濊貉이라고도 하였을 것으로 구성한다.

따라서 이들이 예에서 맥으로 되는 동기 자체가 그들을 神聖族 또 그들이 사는 곳을 <>王土, 天市를 의미하는 고마, 개마라 한데 있었으므로 힘이 센 종족을 표시하는 (=)를 써서 濊貊, 또는 穢貉(卑稱)이라고 하는 것도 추정된다.

 

() ; 北方의 곰 비슷한 동물로 힘이 세고 을 먹는다 ; 즉 곰==사상을 가진 강력한 부족이 , 을 사용한다. 이들은 北方種族이다. 이렇게 보면 , , 穢貉kala(曷慮, 加羅, ) 濊貊, 穢貊koma(蓋馬, 馬韓, 高麗)로 발음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本體字 歲東方을 의미하는 <>로 발음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太歲星, 즉 동방지숙인 목성으로서 만물의 근기라는 배경도 있다. 이점에서 , , 와 통한다. 가 물()가에 있으면() () 또는 호()로 발음되어 고어의 Xwát Xwâla kala 또는 중고음의 hou ko가 된다(Karlgren). 그러나 , 등은 이 kala 음가(k, kh, h, l, r)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 을 글 뜻과 소리에 따라 추적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이는 일차적으로 각 단어에 있는 모든 음가적 요소를 동원해 보는 방법이다.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애당초 예는 Kala에서 출발하였고 그 동기는 동방을 의미하는 만물의 근원을 의미하는 를 동반하여 , 滿지방에서 특화된 것이다. 그러나 세()자를 동반한 다른 자(, )k, l 음가가 없다. 다만 물가(水邊)에 사는 족속이 그들의 집단을 kala라고 하기 때문에 로 자음화한 것이다.

따라서 kala는 어떤 특정 부족의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예족의 집단세력(集落, 邑落)을 나타내는 일반통칭으로서 고구려의 구려 또는 고려나 가라(加羅), 가야(伽倻), (;일본인의 훈음ガラ) 그리고 열하, 요령성 일대에 널려 있는 喀喇, 喀佐(가라, 가사)등 지명도 모두 이 kala=가 변형정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 예는 kala, ko, 東方人夷

 

해 세

年星名(木星;東方) 相說切 太歲左行於地

물많을 회

물소리 활

平會切 ; Hou <- Koe <-Ko 또는 Kae

平活切 ; Hwal <- Kwal <- Kul(u) 또는 Kal(a)

물깊을 예

물이름 예

烏外切, 於廢切 ; 水深廣, 饒多也

烏胃切, 音穢, 濊水, 濊邑 地名

더러울 예

거칠 예

악할 예

於廢切, 干列切 ; 穢與薉同(師古)

蕪穢不治, 惡也 汗也(暴君)

 

더러울 예

於廢切, 穢薉同, 說文에서 蕪也

薉則塞, 行之惡也(筍子王廟篇)

????

종족이름예

동방종족예

於廢切 音穢, 本作濊(본래는 )

音穢同

 

<-2> 에서 본 kala(國邑)koma(王土)로 된 변화과정

 

원 음 가

 

짐승이름

 

짐승이름

 

북방종족

 

고요함

 

曷各切 本作貈(;北方人) 亦作貉

 

 

曷各切 ???????????????????????????????????????????????? ․음가추정

下各切() ???? Klmak ; Klma Kolma(koma)

???? ???? ???? (大邑;지배적선택집단)

莫白切 ???? ???? ????

末各切() ???? Kala(,) Mal()

????

莫駕切() ???? <發音>

???? ① Klak(m탈락, Kala족 뜻)

???? ② Kmak(l탈락, Kala大族)

盧各切, 盧谷切 ???? ③ mak(Kl탈락, 大族의 뜻)

古文밑에 ???? ④ Kma Koma Kama(王土의 뜻)

????

洛作雒 ???????????????????????????????????????????????????? ①→ Kla la na

(天上, 國土의 뜻)

물이름

 

(漢郡名)

 

 

짐승이름 맥

짐승이름 맥

 

북방종족 맥

고요한 맥

莫白切, 音陌

莫白切, ; ???? 곰 비슷한데 Maek ma

???? 多力, 食銅鐵

本作貉, 莫白切 (蓋馬) (馬韓)

本各切()

 

반면 kala(邑落)에서 발전하여 koma()으로 될 때는 같은 kala의 음가(音價)로 구성된 을 거쳐 주도적(), 주권적(蓋馬)이라는 뜻이 부각되어 이는 klma - ma(변화 과정표 참조)로 진행된다. 고조선 세력뒤에 이를 이어받은 마한이나 고구려를 고마 예맥의 나라라고 구성하는 것도 그런 배경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한편 (kala)또는 예맥(koma)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갈래는 으로 변하여 樂浪 = kala = Nara로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다음항 참조)

다만 이상과 같은 자전의 반절음(反切音)이 고대의 음가를 제대로 반영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이미 고대 음운을 연구한 학문적 성과가 나타나고 있는바 이에서도 이글의 가정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B. Karlgren (1889-1978)이 제시한 고대 중국음의 변천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글 자

<>

<>

<>

<>

상고시대

(西周)

Xwât

ģlâk

măk

diər

중고시대

()

Xuât

γâk

mɒk

i

현대

중국음

huo

no

mo

Yi

 

그런데 왜 진하인들은 kala의 본체자(本體字)로 썼는가 가 궁금하게 된다. 다른 글자도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재언하지만 歲字가 동방의 뜻, 만물의 근기(根基)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즉 중국지방에서는 진하계인들이 오기 전에 동방의 선주민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역사의 근원()이며 종족적으로 진하인과 다르다는 것을 그들은 라고 쓴것이라고 구성해 본다. 는 지()라고 하였으며(後漢書) ()의 발음도 본래는 di였다고 한다(Karlgren). 그런데 라고 하다보니 발음상 로도 바뀐다. 더구나 卑稱으로서는 보다 심지어 ????, 로도 쓰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을 本稿에서는 의 범주 속에 넣는데 지장이 없다고 본다.

<3> 자 계통의 音價와 뜻

의 돌림글자

犭夷

 

짐승 이

풀이름 이,

콧물 이()

 

延知切 音彛

莁荑(草名)

以脂切, 延知切, 音夷

地計切 音替, 洟同, 他禮切, 土禮切

밑에

 

 

 

동방오랑캐 이

,어질,

근본다를,大道,,地神

 

東方之人

以脂切, 延知切, 羊吏切, 音異,

古文 尸밑에(진하계와 다른 종족)

東方曰夷, , 萬物柢地에서 , 상고음은 diər

 

<-4> 에 대한 해석, 용도(康熙字典)

오랑캐

땅이름

큰 활

쉬울

나빠질

물귀신

 

물이름

東方之人

東表嵎夷, ()이름

大弓

, (어질)

, 平易;大道 甚夷(老子道德經)

穨替;帝王之道日以陵夷, 陵夷始盛 終衰

水神, 馮夷河伯(壯子), 古之能御陰陽者馮夷, 泰西之御也

(淮南子 原道訓)

夷水

(기타)

기블(), 상할(), 베풀(), 무리(, ), 멸할()

 

그런데 는 중국인이 볼 때 변화무쌍하다. 즉 그 뜻이 거의 모든 사상(事象)에 미치고 있다. 東方之人을 비롯해서 大人, , , , , , , , , 등 온갖 뜻을 지니며 심지어 水神인 하백(河伯)으로도 나타난다. 어떻든 그들의 역사와 인식의 근원과 관계된다.(=) 그것이 라는 것이며 그 기원은 를 동반한 =kala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3. 樂浪Kala이며 Nara

 

한걸음 더 나아가 낙랑에 대해서도 미리 설명해 두는 것이 앞으로의 이해를 위하여 필요할 것 같아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이 낙랑에 대하여 신채호는 浿水, 平壤과 관련하여 <펴라>로 풀이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펴라가 무엇인지 또 설명이 난잡해진다. 여기서는 이를 앞서의 에서와 같이 음가(音價)에서 찾고자 한다.

樂浪字典에서 풀이하면 다음표와 같다. 즉 낙랑의 <>은 그 자체의 음가요소(nglag)에 역시 포함되고 있는 Gl이 분리되거나 n으로 전환되어 고대 예맥사화에서 부족 중심지를 나타내는 kala(khala)를 거쳐 국() 또는 국토를 이미하는 <나라>가 되면서 滄海지방의 나라(()라는 뜻에서 한자의 쌍철음인 樂浪을 빌어쓴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창해(즉 발해, 요동만)의 동쪽에 있다고 알고 있던 위만조선이 해체되고 난 뒤에 이 지방사람들이 그들의 나라를 Kala, nara, 또는 Nkla라고 하므로 이에 대응하는 의 관명(官名)樂浪()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낙랑은 어떤 특정국가라기 보다는 Kala와 같이 나라를 나타내는 보통명사로 추정할 수 있다.

이점에서 , 등도 낙과 같은 발음이었을 것임을 앞에서도 추적한 바 있다. 그런데 더욱이 한어(韓語)에서는 두음에 l이나 r을 쓰지 않는다고 보면 <>을 읽는 낙랑은 고조선 지역의 토착인이 동원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낙랑은 그냥 <가라()>, <나라>라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한반도 以南지역에 오면 시대도 훨씬 下代가 되어 문자도입이 보편화된 시기에 Kala를 구태여 을 써서 나타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加洛, 加羅, 伽倻로 정착되었다고 본다.(만주, 열하, 요령지방에서는 喀喇, 喀佐)

 

<-5> 樂浪字音

 

表音

原音價

差用變化

五角切(丘音) ngag

魚敎切(樂音) ngyo

glag, ngla 또는 glyǒ

 

(音樂의 소리결을 나타내는 우리말 가락에서도, 音價gl요소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 glag galag gala kala(國邑)

<gl의 분리>

 

(2) nglag ĺag ĺa na()

<g가 탈락하여 l이 강음이 되어 n>

nala nara(國土)

<과 합쳐서; =, , ->

 

(3) glyǒ gulyǒ kulyǒ(구려)

또는 kôryǒ(고려)

 

盧各切(洛音) lag

 

 

盧谷切(祿音) log

力召切(療音) lyo

洛鄭音 lyô

魚刀切(勞音) lo

 

盧唐切(郞音) lang, lo

郞宕切(閬音) lang, lo

lo, la

<滄浪水音;滄海= >

; , , , , 등 표시

 

Karlgren<>의 중국어 발음에 대하여 상고음, 중고음, 현대음을 다음과 같이 구성하고 있다.

上古音(西周代)

glak or nglǒk

中古音(唐 代)

lâk or nglak

現代音

lo or yüe

 

4. 濊族의 진화분화 ;

 

(kala)족은 그들의 부족 특성 역사성에 따라 진화되고 분화되어왔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 고전적 본류인 古濊(협의의 예, 부여, 동예 등)

()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예족은 고대의 국가적 체제도 못 갖춘 채 부족 생활단계에 머물러 있던 후진 사회를 (> <>라고 하였다(이병도). 옛사람(古人)이라거나 누추한()부족이라는 뜻도 있을 것이다.

 

) 선진부족인 맥(예맥 즉 고마; 고조선, 고구려 등)

() 이때부터 예족의 통칭이 예(가라)나 맥(, , 고마) 등을 진하계와 같은 단철음이 아니라 쌍철음인 예맥, 개마, 구려 등으로 부르게 된다.

 

) 맥에서 분화된 한(마한, 진번 및 변진, 임둔부족?)

() 도 고대인은 , , , 의 뜻을 가지지만 kala라고 일컬었었다.

 

) ()한계통의 맥인 옥저

 

) 일본으로 유출되어 그곳에서 특화된 왜(야말 예매)

 

) 중국지역에서는 이를 (고예의 하나?)라고 불렀던 것이다.

() 중국지역의 이()는 일부가 한만지역으로 동래하였지만 상당부분은 그곳에서 동화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고대국가의 구성은 이들 각 부족간의 주변 역학관계 규명으로 도식화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굴 한인 조상을 추적하는 데는 예(kala) (예맥;koma) (남예맥;kan, kala)이라는 진화분화과정을 설정하고 좀더 체계화하는 연구가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 실상 그 체계화의 골격은 이미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북삼한, 남삼한설 등)

이상의 가설은 예족의 지역별 명칭표에서 보다시피 이 무렵에 관한 문헌적 자료가 그런대로 뒷받침하고 있다. 이 표만으로도 예족 분포의 특성은 밝힌 셈이 되지만 몇가지 부연한다.

 

먼저 맥을 예의 선진이라 한 것은 예족 중에서도 고고학상 청동기시대에 먼저 진입한 부족이라고 보면 무난하고 단국조선은 말하자면 그 초기에 해당하는 <原貊>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다음 단계인 철기시대도 이들이 선두주자로 되어 나중에 <>의 시발이 되는 예맥조선, 진번조선 즉 마한과 진변한 등 미분화 상태인 초기 <원한족> 出自의 본류가 되는 것이다.

 

예맥의 활동무대인 요하권역-개마고원 일대를 <중앙>으로 잡은 것은 여기서 ()조선이 나오고 <마한> <진번>이 나오고 또 고구려, 백제, 심지어 신라(삼국사기)까지 포함한 한국사 정통론의 배경이 되는 고대세력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原史시대를 Trans Baikal 고지대 내지 Onon-Argun강 유역에서 보낸 예의 조상은 역사시대가 되면서 개마고지대 내지 요하-대동강 유역으로 그 중심세력을 이동한 셈이다.

요하(遼河)의 물줄기가 포괄하는 범위는 서쪽으로는 흥안령 동남 기슭을 따라 북중국 음산산맥의 동녘에 이르는 열하 광령지역에 백하, 란하, 대능하, 신개하와 그 서북방으로는 노합강, 시라므렌강 등 서요하 상류 지류가 있다.

동남으로는 합달령, 천산산맥, 장백산맥에서 함경, 묘향산맥에 이르는 개마고원에 太子河, 渾河(小遼河 그 상류가 蘇子河), 通河 등 동요하지류(東遼河支流)와 압록강 靉河, 동가강과 청천, 대동강과 두만강 등이 있고, 또 합달령을 분수령으로 해서 송화강의 상류인 柳河, 輝發河 등이 북류(그 상류가 속말하임)하고 있다. 우리는 고조선이라고 할 때 그 중 동쪽의 백두산 일대와 그 이남의 대동강까지의 유역에 대하여서만 역사의식을 한정시켜 온 상태라고 하겠다.

 

<-6> ()족의 지역별 명칭

부족명

지역범위 및 부족특성

비 고

(중앙)

<선진예족>

요하권역에 분포(북경-평양일대), 요하, 압록, 대동강 유역

고조선(원맥)예맥진번조선(원한맥)마한고구려(예맥의 주류),

고구려는 부여별종, 언어제반사가 많이 부여와 같다.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음

부여(동북방)

<고예족>

요하권역북방, 송화강남부, 만주대평원 ; 지방이천리, 본래 예의 땅

남에 고구려, 동에 읍루, 서에 선비 ; 濊城은 본래 예()의땅

동북방에 읍루, 말갈, 숙신 등

옥저(동남,서남방)

<맥중 비한계>

동옥저 ; 개마대산의 동쪽 함경도설(통설)

옥저 ; 요동반도 개평, 해성 서개마(명사) 언어는 고구려와 大同

말갈, 읍루와 어울려 있음

(동남방)

<고예족 남방>

동예 ; 강원북부설(통설)

+ 原韓系 남진 ; 原三韓進化

; 요동반도 남방 및 개마고원 남방, 辰國(스스로 고구려와 동쪽, , 옥저, 고구려는 본래 조선의 땅)

반도북부의 동서양해안에는 말갈족

 

남으로 바다건너 倭人

(서방)

고예족의 漢稱>

四夷, 六夷, 九夷(, , , , , , , , ) 郁夷, 嵎夷, 萊夷, 淮夷, 島夷; 秦夏系, 東胡系와 어울림,

그 북방에 맥인

중국인은 예, , 말갈 등을 모두 라고 함

, ,

읍루(해변지역)

<先濊系?)

말갈, , 발해, 숙신, , , 등 표현 ; 사람모양은 부여인 같으나 언어가 부여, 고구려와 같지 않다고, 함북, 연해주 지방(통설)

말갈은 서쪽의 산동반도북안, 발해연안, 요동만, 광령소택지, 평북서해안과 동쪽의 송화강 저지대 흑룡강변, 연해주 및 함경동해안 등지에서 산재.

예맥족 주변 도처의 저지대에 雜居(예족에게 쫒겨 退居?)

 

옥저, 임둔 등도 맥족이지만 주류가 못되는 부족으로 <>으로의 진화과정에서 제외되어 일부는 개마대산 동남으로 밀려나고 나중에 같은 맥의 중심세력인 고구려에 흡수, 소멸된 세력인 것 같다.

() 임둔은 은 되었지만 마한 진번 등에서 보면 소외당하는 비주류였다고 볼 소지도 있으며 또 진작 진번계 위만조선에게 흡수, 소멸된(사기 조선열전) 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맥이 아닌 대부분의 예, 즉 고예는 위의 중앙 예맥으로 인하여 동남방(또는 동의 )과 동북방(부여, 북국) 그리고 서방(북중국, 九夷, 六夷 東夷)에서 각기 그 다음 시기의 역사시대로 진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김철준은 동남방에 있던 토착 부족은 신석기 시대부터의 전통적 생활 방식의 연장인 후진성이 한동안 지속되어 통일신라 이후의 한국사도 자연히 남방적 후진성을 띠고 있다고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시간적 상대성을 전제로 한 것임은 물론이다. 다만 전통적 보수성이라든가 문화적 독자성 내지 지역적 특화에 의한 고립성을 문명사적 보편성에서 보자면 후진성, 정체성같은 왜곡된 표현을 받을 소지는 있다.

근세 이전에 우리가 이런 시각으로 일본을 보아온 데 대하여 현대사에 들어오면서 역으로 일본이 우리를 그렇게 평가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시대별로 두 나라 사이에 세계사적 보편성에의 근접도가 달랐던데 있었던 것이다. 이 경우 북방적 후진성 운운은 쓰지 않을 것이다. 남방적 후진성이라는 표현도 시간적 여장선상에서 보면 합당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는 시간 개념과 함께 주인공의 속성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先濊系로 다룬 읍루, 말갈, 숙신족은 통념상 퉁구스족(여진, 만주)의 조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으나 숙신을 ()조선의 異稱이라거나 말갈을 신석기시대 선주인이라거니 또 읍루는 고아시아계니 하는 설도 있다.

() 그런데 이들과 한족과는 언어학에서 말하는 알타이어계라는 전제하에서 <선예계>라 한 것이고 이들을 퉁구스가 아닌 고아시아계(김방한, 김정배 등), 그것도 한인의 조상과 무관할 때는 <非濊系>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종족 성분을 떠나서라도 시기적으로 현재까지 규정하는 바로는 이들이 예맥보다는 선주인이었다고 하느데서 선예계라고 해둔다. <> 또는 <>의 선택은 後考로 미룬다.

 

이들은 진작부터 중국사의 동북방면에서 발, 식신등으로 나타나는 바 신석기시대가 시작될 무렵 벌써 북중국과 한-만 연해주 지역에서 상당수준의 문명생활을 영위한 것 같지만 목축, 농업고 같은 정착기반을 못 가진 어로, 수집단계의 수준으로 장구한 세월을 보내며 나중에 고구려, 발해(), (거란) 등의 지배하에서 문화적 소양을 쌓아 역사의식을 갖추게 된 민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조만간 예족의 사회에서 그들의 생활 본거지는 해안과 소택지, 하천 저지대 등지로 밀려난 것 같다.

 

 

5. 敗退部族低地帶

 

여기서 부족세력의 부침과 지역적 배경과의 관계에 대하여 중요한 양상을 짚고 넘어간다. , , 사회에서는 하천 줄기가 부족생활에 절대적인 본거지가 되고 그 물줄기를 찾아 이동하거나 투쟁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 패퇴세력이 되면 대개는 말갈처럼 늪지나 바닷가로 밀렸던 것 같다. 그것은 예맥의 생활기반이 목축적이었기 때문에 지배세력은 하천의 중, 상류 고지대를 점거하고 그 세력에 밀린 집단을 낮은 지대에 살 수밖에 없었다고 보이기도 한다. 가령,

 

1) 단군말기에 관한 기사중 밀려난 곳인 장당경이 황해도 서북, 대동강 하구남(河口南;재령강구, 구월산 등)이나 강화도와 관계되는 기사

2) 準王이 남으로 入海한 것

3) 동옥저나 동예가 개마고원의 동남방 동해안으로 된 것(옥저는 요동반도 해성이라고도)

4) 부여나 발해의 후기, 말기가 갈사수(송화강, 또는 두만강 하류)라든가 怱汗海(목단강, 경박호 부근)

5) 백제 초기 비류가 미추홀(한강 하구), 백제 말기의 도성이 금강하류(부여)로 된 것

6) 마한시대 말기가 금강하구의 남쪽인 익산설

7) 가야세력이 낙동강 하류(김해등지)로 밀려 있었던 것

8) 바다 건너서 유출된 왜가 상당기간 한반도 남부해안(낙동강 하류나 섬진, 영산강 하류 등) 일대를 그들의 출자로 삼고 임나라고 동경하던 것

9) 한군현의 마지막 단계에서 <대방>이 해안에 주로 위치했던 것(속현들의 명칭에서 추정)

 

등이 참고가 될 것이다. 한족의 세력이 반도 남쪽으로 이동하는 모멘트도 이 세력간의 부침과 새로운 고지대를 찾아 이동하는 습성과 무관하지 않다.

어떻든 , 족의 사회와 하천과는 밀접한 관계였음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그들은 그 물과 관계되는 지역의 명칭과 세력 명칭을 즐겨 썼던 것이다.

 

() , 족 지역내의 하천과 관계되는 명칭

°물가에서는 無慮, 牟盧, 末盧, 室僞() ; 무로, 모로, 무리, , () ; 그것이 집단을 위미하는 무리()으로도 남는다.

°큰물의 나라였던 곳에서는 加羅, 加洛, 喀喇(kala), 伽倻, 加那, 喀佐(kasa), 高麗.

°골짜기, 협곡에서는 , , 溝婁, 句麗, 古離(이란 뜻도)

°들에서는 두루, 두레, 凟盧, (高地帶, )

°벌에서는 , , 徐伐, 夫餘, 卑難.

°세력중심지(王居地, 上國)에 해당하는 곳은 , , 奈羅, 奈良, 樂浪, <>는 땅의 뜻이 있음)

 

 

6. 고조선의 부족적 성분

 

이상은 대체로 지금부터 2500년 전을 전후로 한 무렵의 예족 부포를 상정하여 본 것인데 사실은 이 무렵이 고고학적으로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 경제적으로는 지역적으로 농업경제 생활이 분포되고 있어 조만간 농, 목적 경제체제가 정립될 무렵인 것이다. 한국인의 조상은 청동기 시대부터라는 선입견이 이런 상황에 먼저 압도부터 당한 영향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때 역사상에 나타나는 국가적인 존재가 문헌상의 고조선이다. 즉 단군, 기자, 위만으로 대표되는 시대이다. 이들 고대국가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상술하기로 하고 다만 여기서는 그 종족 - 부족적 성분을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그것은 예맥족 진화, 분화단계에 대한 부연이기도 하다.

 

<단군조선>

 

예족사회에서 선진부족인 원맥이 아사달(조선, 평양, 패수 등)이라는 구심점을 지니고 지배력 내지 동화력 확산함(삼한 未發生)

아사달 체제는 좀더 사실적 고증을 거친 다음에 논할 것이지만 지금까지는 청동기 시대의 산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초기 농업적 요소도 있다. 그러고 보니 한국상고사는 송화강과 요하유역에서의 생활경험을 지닌 이후라야 한다는 배경이 나온다. 즉 개마고원이 초기 배경이다. 그러나 그 주인공들의근원의식은 신석기시대부터 발원했다고 자부한 것 같으며, 목축적 묘소를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 근원의식에 포괄되던 시대는 반드시 개마고원에 도달한 이후의 시기에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동몽고 흥안령 산간 일대에서 개마고원에 이르는 동안에 간직하게 된 고사가 전승되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 가령 중국인들의 근원은 서쪽으로 티베트 고원과 곤륜산까지 미치고 있고 유태인들의 역사는 가나안 지방에서 정립되었지만 그들의 창조신화의 근원의식은 동쪽으로 코카서스 남쪽 아라랏트 산에서 메소포타미아 지방까지는 미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그 후대에 가면 새로 유입된 세계관 지배질서에 의해 재정립과정이 불가피해 진 것 같다. 그 패퇴세력이 개마고원에 일부 잔류하고 나머지는 남쪽 대동강 유역으로 밀린 것 같다.

 

<기자시대>

 

구태여 <기자>라는 명칭에 신경 쓸 것은 없다고 하겠다. 기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기자적 세계관과 통치질서(홍범구도, 팔조지교 등)가 지배한 시대라고 보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입 외래사상의 시대적 표현의 예 ; 기자, 유교 내지 공자시대, 미륵보살 내지 선교, 신성로마제국시대 등

 

(예맥)족이 한 걸음 더 진화, 분화되던 시기로서 <原韓系>의 주류인 마한(말한, 물한, 買韓; 신채호)의 출현, 기자적 세계관의 형태화 시기이다. 여기서 기자는 <기자류으 부족(천관우)>이라기 보다는 맥족 내부의 유신세력이 주도적으로(이병도) 선진문물제도를 정립하여 그것의 이념화로서 전통사회 재편으로 (仁人이 나타나 군신관계를 바로잡다;제왕운기), 마치 보살, 미륵, 제석신, 그리스도의 내림, 도래사상과 비슷한 기자 동래신앙이 팽배하던 시대라고 할 것이다. 이런 새 사상이 들어오면 전통사회가 붕괴되고 기존질서, 즉 구세력의 통치권력이 붕괴되던 것을 유의한다.

 

() 중국의 불교 유입시기에 한 제국 붕괴와, 516국의 남북조 시대의 도교신앙으로 불교적 세계관의 붕괴, 기독교사상에 의한 로마제국의 붕괴, 조선말 서구적(기독교적) 사상의 유입으로 유교적 가치체제, 왕조체제 붕괴 등

 

이무렵 조선은 동호와도 어울려 지내고 (, , , 등 용어의 출현) 그러다가 서방에서 밀려오는 韓系중 그때까지 비주류였던 진번계 등에게 패권을 탈취당하고 밀려서 그 주세력이 이동한다. ,

) 東進一部 : 백두산 방향(고구려 세력화)

) 南進一部 : 대동강 방향(마한 주도세력화로 그곳에서 토착 또는 선착세력(단군 후대?)을 축출한다. 뒷날 남진을 계속한다.

이 두 코스는 전대인 단군말기 주세력의 퇴로이기도 하였고 반대로 후대에 와서 백두산이나 대동강 유역의 새력이 대륙으로 진출할 때 밟던 역코스이기도 하였다.

특히 남진 세력은 나중에 삼한이 분리될 시기에 한강 및 그 이남으로 2차로 남진한다.(後述)

 

<위만시대>

 

진번조선(김정배 등) 즉 삼한분리 초기의 原弁辰系가 조선 서방에서 아사달 - 왕검성으로 진출, 이 시대는 고대국가 체제 개혁 (중앙과 지방에서), 부의 축적, 정복활동의 왕성, 주변 제부족에의 충격, 특히 중요한 것은 농업경제 기반으로의 전환촉진과 상업경제의 발아 등으로 특징지워지고 있다. 어쩌면 기자적 세계관 시대에 대한 반동도 작용했지 않았을까 한다.

이들 세력도 재편 이동을 하게 되는데, 그 코스는 전대의 기자조선 말기의 퇴로와 비슷하다.

) 일차 남진 : 대동강 유역으로 - 이 무렵 개마고원 일대를 석권한 고구려 세력의 신장과 한, 흉노 등 異邦세계의 발호, 부여 패퇴세력의 진로도 미치게 된다.

) 황해도와 한강을 거쳐 동남방 낙동강 유역으로 - 이때는 삼한이 분리 정착한다. 변한의 일부는 남해안으로 밀린다.

 

() 신라 출자 조선유민설(삼국사기) 진한재북설(이병도 한강유역) 및 신라가 한강유역에서 출발했다는 설(김성호) 등 참고

 

다시 말하면 이들예, , 왜 각 부족은 단군시대 하대부터 세력재편 이동이 시작되어 서기후 3세기가 되면 대부분의 새력이 정착되고 부족성분의 진화단계도 일단 종결된다. 이점은 중국지방 특히 황하유역 이북지역(AD 6세기)이나 왜(AD 7세기)보다 3-4세기 가량 먼저 특화가 정착된 것이며 그 뒤 예컨대 고구려, 발해의 소멸시는 재편 이동이 아니라 반도 역사로의 흡수 또는 수축, 포용작용만이 있었던데 불과하다고 하겠다.

 

 

 

{곽창권 , 韓國古代史 探索(pp.85-101), 일선출판사, (1987)에서 옯겨온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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