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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 사학자의 재야 사학 이해

송화강 2019-05-27 (월) 21:10 6년전 2081  

[[새로운 신화 만들기:재야사학에 대한 또 다른 이해]] 


姜敦求(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Ⅰ 머리말 


"너희 나라의 역사가 반 만 년이 된다고 하는데 너는 그 말을 믿는가?" 

이 질문은 오래 전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있던 필자에게 일본에서 한국 종교를 전공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유학 온 일본인 대학원생이 묻던 말이다. 


일본인 학생의 그 질문에 당시 필자는 매우 당혹했던 기억이 난다. 

우선 소위 종교학을 전공한다는 학생이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의 진위성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나라는 개국 기원이 기원전 2333년인데 일본은 개국 기원이 비교적 오래지 않은 기원전 660년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 일본인 대학원생의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게 되었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역사가 자기 나라의 역사보다 오래 되었다는 우리의 주장에 그 친구는 일본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급기야는 우리나라의 개국 기원이 기원전 2333년이라는 주장이 사실이 아니어야만 일본인으로서의 긍지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이 예에서 신화와 역사의 관계, 그리고 신화의 역사화와 역사의 신화화라는 주제에 접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신화와 역사는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화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에 관한 이야기로, 그리고 역사는 실제 일어난 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과학적인 서술을 지향하는 역사학은 신화 자체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역사학은 신화의 사료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며, 단지 신화를 통해서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상황을 복원해 내려는 데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종교학은 일찍부터 신화와 역사를 이와 같이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학은 아무리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안목으로 서술된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서, 또는 역사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주장에 동조한다. 


종교학은 역사가들이 서술한 역사도 결국은 자체 내에 신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신화와 역사는 모두 과거 사실에 대한 의미 부여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신화와 역사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나면 우리는 신화와 역사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다. 

신화는 여러 학문 분야의 연구를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인식된다. 


역사를 사실로서의 역사와 의미로서의 역사로 구분해 볼 때, 

역사학은 신화를 통해 사실을 밝혀내는 동시에 신화에서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밝혀 내고자 한다. 


따라서 신화는 역사학에 의해 소위 역사화의 길을 걷는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건국신화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에서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볼 수 있다. 


한편, 우리는 그것이 반드시 역사가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역사가 신화화되는 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을지문덕이나 이순신과 같이 역사에서 소위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들의 전기에서 우리는 그 전형적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똑 같은 역사적 사실이 시대와 역사가에 따라 달리 이해되고 해석되는 예에서 우리는 역사의 신화화 현상을 볼 수 있다. 


본 논문은 신화와 역사의 관계를 위와 같이 설정하고 이어서 한국 고대사 관련 신화의 특징 몇 가지를 아래와 같이 지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시기적으로 고대와 관련이 있고, 오래된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 신화는 고대사의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 

문헌 사료는 고대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기 때문에 중세사나 근, 현대사에 비해 고대사의 서술은 상대적으로 공백이 많다. 


따라서 고대사의 서술은 문헌 사료 못지 않게 동시에 고고학적 자료를 중시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고학적 자료 또한 그다지 풍부하지 못한 상황에서 역사가에 의한 고대사 서술은 여전히 많은 공백을 지닌다. 


하지만 중세사나 근, 현대사에 비해 고대사는 바로 민족의 기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따라서 고대사에 대한 관심은 시대에 따라 강약의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이어 왔고, 

이때 신화는 고대사 서술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주요 자료로 주목받는다. 


둘째, 역사학계에서 말하는 소위 재야사학의 작업은 새로운 '신화 만들기(myth making)'라고 할 수 있다. 

재야사학자들은 누구보다도 민족의 기원과 고대사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단사학자들의 한정된 고대사 서술에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은 민족의 기원과 관련이 있는 고대사 서술을 체계화하기 위해 기존의 문헌 사료나 고고학적 자료를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해 내는 작업을 한다. 


비록 이들의 작업이 역사학계에 그대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고대사 서술은 이들로부터 일정 부분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이들의 작업을 새로운 신화 만들기라고 하였다고 해서 이들의 작업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신화는 누군가에 의해서 계속 만들어지며, 모든 신화는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재야사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우리나라의 고대사 서술이 부분적으로나마 바뀌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신화의 역사화 과정을 볼 수 있다. 


본 논문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재야사학자들의 작업을 또 다른 시각에서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재야사학자들의 고대사 서술은 고대사를 전공하는 역사가로부터 대부분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사 서술에 일생을 보내는 재야 사학자들의 열정 어린 몸짓이 결코 무의미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들의 작업을 적절히 자리매김해 줄 필요가 있다. 

아니 적어도 우리는 이들이 왜 이러한 작업을 해야만 하는지를 이해해 줄 의무가 있다. 


이러한 문제 의식 아래 2장에서는 신화가 일반적으로 민족 정체성 확립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3장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경우를 각각 살펴볼 것이다. 


4장에서는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피고, 

5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최근 제기되고 있는 신화에 의한 고대사 인식이 중국과 일본의 고대사 인식과 어떤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살필 것이다. 


Ⅱ 신화와 민족 정체성 


베푸(H.Befu)는 민족주의를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separatist nationalism), 

통합을 위한 민족주의(pan-nationalist movement), 

그리고 문화 민족주의(cultural nationalism)라는 세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물론 민족주의의 이 세 유형은 서로 완전히 구분된다기보다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문화 민족주의는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와 통합을 위한 민족주의 모두의 선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민족주의의 세 유형 가운데 첫 번째 민족주의의 과제는 이미 해결되었으나 두 번째 민족주의와 세 번째 민족주의의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두 번째 민족주의의 과제도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이기는 하지만, 본 논문은 민족주의의 세 유형 가운데 특히 세 번째 유형인 문화 민족주의에 주목하고자 한다. 


베푸는 문화 민족주의를 다시 상징적으로(symbolic) 표현되는 경우와 언어적(verbal)으로 표현되는 경우로 구분하였다. 

우리는 이들을 각각 상징 민족주의와 담론 민족주의(discursive nationalism)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상징 민족주의는 國歌와 國旗, 그리고 국립묘지나 무명용사의 묘지 등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담론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言述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도모한다. 


따라서 민족의 주요 상징에 대한 해석도 담론 민족주의에 포함시킬 수 있다. 

담론 민족주의는 속성상 시대에 따라 많이 변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상충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담론 민족주의는 민족의 기원, 민족의 통합, 민족의 강역에 주된 관심을 지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민족의 문화가 타민족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본 논문은 문화 민족주의의 두 유형 가운데 주로 담론 민족주의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문화 민족주의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민족의 정체성 확립이라고 보고, 

담론 민족주의 가운데에서도 민족의 정체성 확립과 관련이 있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상징, 영웅, 순교자, 특별한 의미를 지닌 강역, 그리고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게 사실을 재조명하는 역사 서술이 필요하다. 


역사 서술에는 사실을 추구하고 정확성을 목표로 하는 것과, 

과거를 낭만적으로 서술하고 과거로부터 영웅을 만들고자 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전자는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경우에 따라서 오히려 민족의 자존심을 해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따라서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자와 그것의 확립을 원하는 자, 

다시 말해서 공급자와 수요자의 필요에 따라 사실로서의 역사를 영광된 역사로 만들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또한 민족의 정체성 확립은 공동체 의식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런데 공동체 의식은 그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를 구분해 주는 특징(mark)을 구성원들이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형성된다. 


본 논문은 우리 민족 공동체의 특징이 소위 재야사학자들에 의해 어떤 내용으로 부각되는지, 

또한 그것이 동아시아 삼국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종교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본 논문은 이 시대에 왜 재야사서들이 등장하고 일반 대중으로부터 주목받고 있는지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Ⅲ 동아시아의 신화와 역사 


1.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의 경우를 적절한 시각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신화가 민족 정체성 확립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일본의 구석기는 50만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석기문화 유적은 약 3만년 전부터 시작되는 후기 구석기 시대에 속하며, 그 수는 대략 3천여 개이다. 


약 1만 2천년 전부터 기원전 300년경까지를 조몬(繩文) 시대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고고학적 자료인 토기가 그 표면에 새끼줄처럼 생긴 문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초창기에 속하는 토기는 세계적으로 현재까지 발굴된 토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를 야요이(彌生) 시대라고 한다. 

일본 역사서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벼농사를 짓고 금속기를 사용하던 소수의 사람들이 한반도로부터 와서 토착 조몬인과 함께 살며 문화를 영위하던 시기이다. 


일본인의 원형은 아시아 남부의 고몽골로이드이다. 

그런데 현재의 일본인은 이들과 야요이 시대 이후 도래한 신몽골로이드가 혼혈을 거듭하면서 형성되었다. 


3세기 후반에서 4세기초에 최초의 통일 정권인 야마토(大和)가 성립하였으며, 3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를 고분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8세기초에 비로소 일본의 고대 국가 건설이 완성되었다. 


일본 고대사에서 우리의 주목을 가장 많이 끄는 시기는 4세기이다. 

이 시기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중국측 사료는 전혀 없으며, 또한 이 시기에 대한 일본측 사료도 신빙성이 없다. 


따라서 이 시기의 일본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학계는 이 시기에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 출병하여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소위 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 역사학계 내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의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여러 수정된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이 과거에 일본이 한반도의 일부를 지배하였기 때문에 한반도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故土라는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 고대사에서 우리는 712년에 발간된 {古事記}와 720년에 발간된 {日本書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사기}는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권은 神統譜와 신화, 중권은 영웅과 역사적 인물, 그리고 하권은 천황의 계보를 싣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고사기}는 神代로부터 스이코(推古, 554-628) 천황에 이르는 황실의 연대기와 계보, 그리고 설화를 담고 있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초대 천황인 진무(神武)로부터 지토(持統, 645-702) 천황까지를 편년체로 기술한 30권 짜리 역사서이다. 


이 밖에도 일본의 신화를 담고 있는 책으로 713년에 일본 정부가 전국의 지방 관청에 그 지방의 특산물과 지명의 유래 등을 조사하여 보고토록 하여 만든 일종의 지리서인 {風土記}가 있다. 


{고사기} 상권, 그리고 {일본서기} 1권과 2권에 실려 있는 신화를 記紀神話라고 한다. 

記紀神話가 神道的인 세계관을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하여 전체 일본을 신의 나라로 만들고 있다면, {풍토기}에 실려 있는 신화와 설화는 특정 지역을 신성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일본인들의 상당수는 이들 신화를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the plausible history)로 생각하고, 

이들 신화에 근거하여 자기 민족은 하나의 기원을 가진 특별하고 깨끗한 민족으로 믿고 있고, 또한 그 점을 강조한다.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한 17세기 이후 18세기에 걸쳐서 '日本的 中華主義'가 생겨나고,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일본주의가 팽배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근래에 다시 日本人論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와 같이 일본의 신화가 일본민족이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의식을 심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일본의 경우 새로운 신화 만들기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미 완료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경우에 따라서는 역사학자들의 역사 기술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경우에는 신화를 통해서 자신들의 과거를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신화에 의한 과거 이해와 역사에 의한 과거 이해를 동시에 시도하고 있으며, 

양자간의 상호 괴리에 대해서는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중국의 경우 


중국은 일본에 비해 신화의 중요성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대체로 신화가 사료가 없는 기간을 메우는 역할이나 또는 시인이나 문학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어떤 학자는 중국에서도 옛날에는 신화가 매우 풍부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는 하나, 

역사가 흐름에 따라 신화는 대부분 소실되고 극히 일부분만 남아 있다. 


게다가 중국의 신화는 수 천 개의 문헌에 분산되어 남아 있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신화들을 재구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처럼 중국에서 신화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이유는 유교와 도교의 영향 때문이다. 

유교는 黃帝에 대한 공자의 언급에서 볼 수 있듯이 신화를 역사화, 도덕화하였으며, 

도교는 混沌에 대한 장자의 해석에서 볼 수 있듯이 신화를 철학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중국의 신화를 수록하고 있는 책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신화를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보조 자료로 이용하여 신화를 역사화시키고 있는 책들로 {書經}과 {史記}가 대표적이다. 


둘째, 신화를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로 변형시켜 신화의 내용을 축약시키고 있는 책들로, {老子}, {莊子}, {筍子}, {韓非子}, {淮南子}가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그나마 중국 신화를 원형에 가깝게 수록하고 있는 책으로는 [周頌], {山海經}, {三五曆記}, {風俗通義}를 들 수 있다. 


중국의 역사는 구석기에서 시작하여 신석기(仰韶文化 : BCE 5000년 - BCE 2500년, 龍山文化 : BCE 2300년-BCE 1800년)를 거쳐 夏(BCE 2050년-BCE 1550년), 殷(BCE 약 1800년-BCE 1100년), 周(춘추, 전국시대), 秦, 漢으로 이어진다. 


夏에 관한 기록은 모두 후대에 편찬되어 신빙성이 없고, 또한 夏의 고고학적 유물도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夏의 실재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殷도 청동기와 토기, 그리고 갑골문이 발견되고 있기는 하지만 殷의 역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국의 고대사는 周, 그것도 춘추 전국시대부터 비교적 정확히 서술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사는 역사가에 의한 역사 서술보다 오히려 신화에 의해 재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소위 三皇五帝에 관한 중국인의 인식이다. 


삼황오제의 시대는 바로 夏의 이전 시기이다. 

삼황오제에 관한 기록은 중국 고전에 따라 그 내용이 상이하다. 


그러나 대체로 三皇은 伏犧, 女 , 神農을 지칭한다. 

복희는 팔괘와 문자를 발명하고, 결혼제도를 만들었는데 人頭蛇身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여와는 기울어진 천지를 바로 잡았으며, 신농은 농업과 상업을 시작하고, 의약을 만들었는데 牛頭人身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五帝는 <<黃帝, 전頊, 高陽, 堯, 舜>>을 지칭한다. 


舜은 禹에게 제위를 선양하였는데 바로 禹가 夏를 건국하였다. 

이와 같이 일반적으로 중국인의 고대사 인식에 의하면 중국의 고대사는 삼황오제, 하, 은, 주, 진, 한으로 이어진다. 


黃帝는 神農과 싸워 이기고, 또한 탁鹿에서 蚩尤의 난을 평정함으로써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이 무력으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문자, 역법, 궁궐, 의상, 화폐, 수레 등의 문물제도를 창안한 최초의 군주이다. 


따라서 현재 黃帝는 중국 문명의 창시자인 동시에 중국 민족의 공동 조상으로 숭배받고 있다. 

{史記}에 의하면 黃帝의 뒤를 이은 四帝(전욱, 제곡, 요, 순) 뿐만 아니라 夏의 시조인 禹, 殷의 시조 契, 周의 시조 稷, 그리고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를 낳은 秦의 시조 費는 모두 黃帝의 후손이다. 


중국에서 주나라 때 天, 天命, 天子, 天下로 형성된 帝王思想과 중국 위주의 세계관 수립이 가능할 수 있었고, 

또한 宋나라 때 中華思想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중국인들의 이러한 고대사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거에는 중국의 신화가 漢族 중심의 민족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중국에서는 漢族 중심의 민족주의 형성보다는 중국 내에 있는 여러 민족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신화 연구도 이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중국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漢族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문제보다는 중국 내의 여러 민족을 어떻게 통합시킬 것인가가 보다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다. 


현대에 들어 와서 중국은 영토 내에 있는 여러 민족들을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통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일정 부분 약화됨에 따라 중국은 영토 내에 있는 여러 민족들을 통합시킬 수 있는 또 다른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과거에는 漢族을 중심에 놓고 다른 민족을 四夷라고 부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漢族 중심의 중화사상을 부각시켰으나, 

이제는 급기야 여러 민족이 혈연관계에 있으며, 혈연을 중심으로 중화민족이 다시 형성되고 있다는 새로운 신화를 제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孫進己는 중국 동북지방 민족의 源流를 연구하면서, 결국 이 지역의 민족들은 서로 同源과 同流로 얽혀 있으며, ' 中有我, 我中有 '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孫進己의 이러한 주장은 중국 내에 있는 모든 민족들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우리 한민족을 중국 민족의 한 갈래, 또는 중국 문화의 큰 영향을 받아 漢族化한 準漢族으로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Ⅳ 한국의 신화와 역사 


1. 강단사학 


우리나라는 현재 초등학교에서는 인물사와 생활사 중심으로, 중학교에서는 주제 중심으로, 그리고 고등학교에서는 정치·사회·경제·문화 등의 측면에서 국사를 교육시키고 있다. 


이처럼 초·중·고에 따라 교육의 목표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교육과정별 교과서는 주안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기본 골격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들 교과서가 비교적 간략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기는 하나 현재 역사학계의 성과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이 글에서는 이들을 주요 자료로 삼아 현재 역사학계의 고대사 서술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는 약 70만 년 전부터이며, 기원전 6천 년경에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기원전 1천 년 경에는 청동기 문화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생산이 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각 지역에서 군장 사회가 성립하였고, 이들이 연맹체를 구성하여 고조선을 이루었는데, 고조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로서,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세력을 떨쳤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철기 문화가 보급되어 생산력이 더욱 늘어남에 따라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에서 새로운 나라들이 일어났는데 

북쪽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가 일어나고, 남쪽에서는 진국, 그리고 이어서 삼한이 형성되었다. 


고조선은 기원전 3세기경 요하를 경계로 중국의 燕과 대립할 만큼 강성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에 燕으로부터 입국한 衛滿이 왕검성에 쳐들어가 準王을 몰아 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 위만 왕조를 성립시켰다. 


위만 왕조는 漢에 의해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漢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였으나 이들 군현은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소멸되었다. 

그리고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은 나중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이어졌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지금까지의 고대사 서술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것이 연표에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의 설명에서는 고조선이 청동기 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단군의 고조선 건국 내용이 {三國遺事}에 실려 있으며, 이 내용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말해 주면서 동시에 홍익인간의 건국 이념과 고조선의 건국 사실은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자긍심을 심어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화로서의 역사'와 '사실로서의 역사'가 서로 상이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교과서에 함께 실려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연표에는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고 실려있고(신화로서의 역사), 본문에서는 기원전 1000년 이후인 청동기 시대에 고조선이 성립되었다고 하고 있다(사실로서의 역사). 


둘째, 東夷가 황하 하류와 淮河 河口, 그리고 산동반도를 포함하는 발해만 일대와 북으로는 송화강 유역까지, 그리고 남으로는 한반도 전체에 분포하고 있으며, 

고조선의 세력은 서쪽으로 山海關과 大凌河를 포함하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에 걸쳐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는 점이다. 


고조선의 영토가 1989년 이전의 교과서에서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오늘날 이와 같이 東夷의 분포와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상정한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선 東夷와 고조선의 범위를 이처럼 상정한 것은 재야사학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본 논문은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재야사학의 대부분의 주장을 '새로운 신화 만들기'라고 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새로운 신화의 또 다른 역사화의 예를 볼 수 있다. 


셋째,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중국과 일본에 비교해 볼 때 체계적인 서술을 하기가 비교적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경우에는 삼황오제, 하, 은, 주, 진, 한으로 이어지면서 漢族 중심의 고대사 서술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일본에 비해 史料나 고고학적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여 큰 무리 없이 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 

다만 중국의 경우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중국이라는 나라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시점에서 漢族 중심으로만 고대사를 서술할 때 생기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또 다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지금의 중국 영토 내에 있는 모든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되 각 민족의 개별 역사를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중국은 영토는 비교적 변함이 없으나 민족이 다양하다는 데에서 고대사 서술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영토의 변동이 비교적 없었으며, 또한 민족도 중국과 같이 그다지 다양한 편이 아니다. 

게다가 일본은 조몬 시대 사람들은 물론이고, 야요이 시대 이후 도래한 사람들까지를 포함해서 민족의 기원을 하나로 설명하는 신화가 현재까지 그대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비해 8세기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편찬된 史書들이 현재까지 존속해 오고 있는 것도 일본 고대사 서술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비록 단일 민족이라는 신화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고대로 갈수록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가 다양하게 등장하여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히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중국과의 국경이 수시로 바뀌어 영토의 변동이 많았기 때문에 특히 고대사를 서술할 때 민족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영토를 중심으로 할 것인가에 따라 그 내용이 상이하다. 


이와 같이 민족을 중심으로 하든, 영토를 중심으로 하든 우리나라의 체계적인 고대사 서술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어려움이 따른다. 

나아가 우리나라는 고대사와 관련된 사료의 절대 부족, 그리고 최근까지 북한 지역과 만주 일대의 고고학적 자료에 접근할 수 없었던 점 등으로 인해 고대사는 그야말로 비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왔다. 


한편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등 몇몇 국가와 관련된 건국신화만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고대사의 공백 부분을 메울 신화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래 고대사의 체계적인 서술을 도모하는 재야사학의 노력은 확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재야사학의 고대사 관련 주장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호응을 얻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의 각축장이다. 

실증사학을 표방하는 강단사학은 철저히 고증된 문헌과 확실한 고고학적 자료만을 토대로 고대사를 서술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서 강단사학은 그래도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삼국사기}에 단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이유로 단군의 실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근 북한에서 발굴된 단군릉도 고고학적 자료로 인정하기에는 불충분하다는 점을 이유로 북한학계의 주장을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것으로 단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강단사학의 고대사 서술만을 가지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들에 의한 고대사 서술은 시기적으로 공백이 많을 뿐만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의미 부여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민족의 기원이나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재야사학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고 하겠다. 


2. 재야사학 


재야사학자들은 예를 들어서 환인, 환웅, 단군 가운데 단군만 사실로 받아들이고, 환인, 환웅은 신화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단군은 물론이고 환인, 환웅까지도 사실로 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고대사를 서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대체로 이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등 소위 재야사서들을 중심으로 우리의 고대사를 정리하는 사람들이다. 

조선 초기와 일제하에서 우리는 고대사와 관련된 많은 사료들을 분실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중화주의라는 중국적 보편주의 속에 우리나라를 위치시키려는 의도 아래 우리의 주체의식을 강조하는 史書들을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없애버렸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사편수회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리한다는 명분아래 각 지방에 보관되어 있는 사서들을 대대적으로 수거하였는데 이 가운데 역시 우리의 주체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사서들은 모두 없애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의 고대 사서들이 대대적으로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몇몇 사서들은 끈질기게 보존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실증사학자들은 대체로 이들 재야사서들이 僞作이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야사학자들은 비록 이들 재야사서들의 내용이 나중에 부분적으로 첨삭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사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특정 종교의 사관을 중심으로 고대사를 정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도 대체적으로는 재야사서들을 많이 참조하기는 하지만 이들 재야사서들의 내용을 특정 종교의 교리에 부합시키면서 좀더 체계화시키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 이들은 인류의 기원과 우리 민족의 기원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우리 민족이 전체 인류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을 강조하기도 한다. 


셋째, {삼국사기}와 같이 강단사학에서 기본적인 사료로 인정받고 있는 책들을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고대사를 정리하는 사람들이다. 

全源燮, 李重宰, 吳在成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 가운데에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을 집중적으로 고찰하여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그리고 왜의 활동 무대가 모두 중국 대륙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넷째,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의 중간쯤에 서 있는 사람들로 이들은 특히 중국 측의 문헌 사료들을 중점적으로 검토하면서 동시에 다른 부류의 학자들보다 고고학적 자료를 비교적 많이 참조하는 사람들이다. 


尹乃鉉은 자신의 주장이 북한측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지만, 한국측 자료 못지 않게 중국측의 방대한 자료를 참조하는 동시에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고대사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다만 윤내현은 강단사학 측으로부터는 재야사학에 기운 사람으로, 그리고 재야사학 측으로부터는 강단사학에 기운 사람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李相時는 고고학적 자료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고대사 연구에 의혹을 제기하고는 있지만, 재야사서를 비롯한 고대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나아가서 인접학문의 연구 결과를 참조하자는 그의 제안을 고려할 때 이 부류에 속하는 학자로 분류할 수 있다.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은 주로 단군과 고조선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 주장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영토와 관련된 내용이다. 

부여는 만주 일대 전체를 그 활동 무대로 삼았다.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활동 무대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측 사료를 참고로 하여 부여에 대해 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을 뿐이고, 

발해사가 우리 민족사에 포함된 것도 얼마 전의 일이다. 


대체로 지금까지 우리는 민족사를 한반도 중심으로 서술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강역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민족사의 내용은 많이 달라진다. 


오늘날에도 남한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견해는 수도를 평양 부근으로 보는 견해, 

고조선 전기의 중심은 요녕지방이었으나 후기는 대동강 하류로 이동하였다는 견해, 

그리고 발해만 북안에서 서북안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견해 등이 혼재해 왔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볼 수 있듯이 근래에 들어서 강단사학도 고조선의 강역을 서쪽으로 山海關과 大凌河를 포함하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강단사학에서 위만조선의 위치는 평양 부근으로 설정한다. 

교과서에서도 위만이 처음에는 중국측으로부터 들어 와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가 얼마후에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가 準王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재야사학에서는 위만조선이 고조선의 서쪽 변경 지역에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漢四郡도 강단사학에서는 평양과 그 주위에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재야사학에서는 한사군 역시 고조선의 서쪽 변경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吳在成은 {삼국사기}와 중국측 사료를 비교 분석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활동무대는 지금의 북경과 황하, 양자강 유역, 즉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동부 지역 전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과거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물론이고 현재 중국 영토의 대부분이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 


이와 같이 강단사학에서는 비록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만주 일대를 비롯한 지금의 중국 땅의 일부에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민족사를 한반도 중심으로만 서술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반면, 


재야사학에서는 우리 민족이 만주 일대를 비롯한 중국 땅의 일부, 또는 꽤 넓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그 지역의 역사를 민족사에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 


둘째, 민족 구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포함하여 중국 동쪽에 사는 종족을 총칭하여 東夷라 불렀다. 


따라서 중국인들에 의하면 東夷는 우리 민족을 포함하여 인접하는 여러 민족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東夷 가운데 예족, 맥족, 부여족, 韓族 등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언어나 풍속에서 공통적인 요소가 많으며 문헌상으로도 이들 사이에 구체적인 차이를 발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교과서에는 東夷가 산동반도를 포함하는 발해만 일대, 그리고 북으로는 송화강 유역에서 남으로는 한반도 전체에까지 분포하였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교과서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서술은 우리 민족의 선조가 東夷와 직결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모두 항복하여 올 것이고, 九韓이 朝貢도 할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九韓으로 日本, 中華, 吳越, 托羅, 鷹遊, 靺鞨, 丹國, 女狄, 濊貊 등을 열거하고 있다. 이들 九韓이 각각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을 지칭하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신라인들이 이들 九韓과 자신들을 구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체로 재야사학에서는 요즈음 東夷와 九夷를 모두 넓게 우리 민족의 조상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중국 동북 지역의 東夷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산동 지역의 東夷를 우리 민족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한다. 


대체로 강단사학과 중국학계에서는 이들 지역의 東夷는 중국 민족의 조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에 반해, 

재야사학에서는 중국 동북 지역의 東夷는 물론이고 산동 지역의 東夷도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재야사학의 주장에 의하면 부여, 고구려, 옥저, 예, 맥, 말갈, 여진까지 우리 민족에 포괄되며, 결국 중국 고대사에서 우리 민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의외로 커지게 된다. 


예를 들어서 兪昌均은 중국 상고시대의 왕들과 관련된 신화에 나오는 이름들을 언어학적으로 분석하여 이들이 모두 東夷와 관련이 있고, 결과적으로 중국의 상고사는 우리 민족의 고대사라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말갈과 여진 등이 우리 민족에 포괄됨으로써 中原을 지배했던 殷, 遼, 金, 元, 그리고 淸도 우리 민족과 조상을 같이 하는 민족이 세운 국가라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셋째, 민족의 정통성, 즉 민족사의 주류를 어떻게 보는지와 관련된 부분이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는 여럿이 있다. 


물론 우리 민족의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하느냐에 따라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도 그 범위가 다르다. 

조선 초기와 중기에는 민족사의 흐름을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 - 삼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민족사의 흐름을 단군조선 - 부여 - 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계통과 기자조선 - 마한 - 삼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계통이 동시에 있었다. 

그러다가 한말 일제하에서는 단군 - 기자 - 마한 - 삼국으로 이어지는 소위 마한정통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적어도 교과서를 참조해 볼 때 근래에 강단사학에서는 대체로 고조선을 반쯤만 인정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에 대해 언급을 하더라도 그러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온다는 것을 구태여 밝히고 있는 것에서 이러한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강단사학에서는 근래 민족사의 흐름을 (고조선) - 위만조선 - 열국시대(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마한, 진한, 변한) -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근래 재야사학에서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이 모두 고조선의 서쪽 변경, 다시 말해서 만주의 서쪽 지역에 있었으며, 고조선(단군조선)은 곧 바로 열국시대로, 그리고 열국시대는 다시 삼국시대(또는 가야를 포함해서 사국시대)로 이어진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우리 민족사의 흐름은 결코 단절된 적이 없으며, 또한 우리 영토가 중국의 영토가 된 적이 없다. 

그리고 고대사 관련 문헌에는 체계적으로 언급이 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재야사학에서는 부여, 옥저, 동예, 마한, 진한, 변한,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이 모두 단군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재야사학에서는 우리 민족이 모두 단군의 후손으로 하나의 혈연공동체를 구성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Ⅴ 동아시아 신화의 상호 갈등 


앞장에서는 강단사학과 대비하여 고대사 관련 재야사학의 주요 내용을 몇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의 고대사 서술은 자국의 정체성 확립과 서로 맞물려 있다. 


따라서 각국의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은 고대사 관련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들을 자국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적절히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체로 실증과 고증을 강조하는 강단사학은 각국의 고대사 서술이 상충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래도 상호 조정을 위해 공동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재야사학은 자국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기 때문에 서로의 주장이 평행선을 유지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재야사학은 기본적으로 "과거 조선 고대 민족은 중국 고대문화의 건설자이며, 일본 문화의 선구자였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측의 자국 고대사 인식과 상충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일본의 고대사 관련 서술 가운데 서로 상충되는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각국의 신화가 각기 민족 정체성 확립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조명해 보도록 하겠다. 


중국은 역사를 민족 단위가 아니라 영역 중심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오늘날 소위 中原은 물론이고 만주도 중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그곳에 대한 고대로부터의 연고권을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재야사학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중국의 고대사 인식에 도전한다. 


첫째, 재야사학은 중국의 신화시대는 물론이고 역사시대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가운데 상당수가 우리 민족의 선조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복희는 환웅시대 5대째 임금의 아들이며, 신농은 환웅시대 8대째 임금의 신하이고, 黃帝를 탁록에서 격파한 치우는 바로 환웅시대 14대째 임금이라고 재야사학자들은 말한다. 


또한 이들은 舜, 강태공, 공자도 모두 東夷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 우리 민족이 중국 고대문화를 건설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둘째, 재야사학은 우리 민족이 中原을 지배하였거나, 적어도 中原까지 진출하였던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에 의하면 고구려와 백제는 한때 북경과 상해까지 진출하였으며, 통일신라는 한때 길림에서 북경까지 진출하였다. 

또한 혹자는 아예 백제, 고구려, 신라, 그리고 고려의 주 활동 무대가 중국이었다고까지 주장한다. 


한편, 일본은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광개토대왕 비문의 구절을 근거로 하여 소위 任那日本府說을 중심으로 일본이 과거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주장을 해오고 있다. 


근래에는 일본 학계에서도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나 일본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재야사학은 역시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일본의 고대사 인식에 도전하고 있다. 


첫째, 재야사학은 일본 황족의 조상이 우리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신화는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는 내용이 많고, 또한 우리나라의 신화와 유사한 것도 많이 있다. 


따라서 한일 양국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서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신화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고, 그러한 이유로 해서 신화를 해석하는 데 양국 학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많이 있다. 


일본 황족의 조상이 우리 민족이라는 설은 사실 일본인 학자들이 먼저 제기하였다. 

江上波夫는 4세기말 대륙에서 침공해 온 기마민족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야마토(大和)를 건설했다는 '기마민족국가설'을 제시하였다. 


당시 江上波夫는 기마민족이 구체적으로 우리 민족이라고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레드야드(G. Ledyard)는 기마민족이 부여족이라고 주장하였고, 나아가 洪元卓은 기마민족이 바로 백제인이라고 주장하였다. 


鹿島昇은 일본의 皇統譜가 백제와 가야의 두 왕통을 합하여 이룬 것이고, 제38대 天智天皇은 백제의 夫餘 豊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佐佐克明은 신라의 金多遂가 제40대 天武天皇이라고 주장했고, 谷川建一은 제1대 神武로부터 제14대 仲哀까지는 모두 가공의 인물이고, 제15대 應神이 최초의 실존 인물인데 應神은 한반도 태생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 재야사학은 삼국시대에 일정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이 일본의 일부를 직접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우선 任那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일본측의 주장에 대해서 재야사학은 임나가 대마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任那는 본래 백제가 가야를 경영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가야를 경영하던 백제인의 후손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자신들의 선조가 한 일을 야마토 정권이 한 일로 바꾼 데서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 남부경영론이 제기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일본 내에서 자국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소위 '三韓三國의 日本列島內 分國論'을 주장하는가 하면, 아예 백제가 4세기말에서 7세기 후반까지 3백년 동안 일본을 통치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재야사학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고대사를 우리 민족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Ⅵ 맺음말 


본 논문은 각 민족의 신화가 해당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 신화는 여러 각도에서 정의내릴 수 있지만 본 논문에서 말하는 신화는 소위 실증사학이 해명해 주지 못하는 부분을 해명해 주는 '이야기'로 정의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말하는 신화는 과거로부터 전해 오는 성스러운 이야기 뿐만 아니라 새롭게 생겨나는 이야기도 포괄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오히려 새롭게 생겨나는 이야기에 보다 주목하였다. 


실증사학이 해명해 주지 못하는 부분을 해명해 주는 이야기를 신화라고 했을 때, 본 논문에서 말하는 신화는 주로 당연히 고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史料는 현대로 올수록 풍부하지만 고대로 갈수록 빈약하기 때문이다. 

사료가 빈약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실증주의를 강조하는 역사학은 할 말이 적을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 틈새를 이용하여 새로운 이야기, 다시 말해서 신화적 서술은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상황 아래에서 역사를 실증적으로 다루는 강단사학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재야사학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표출된다. 


본 논문은 재야사학의 의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중국과 일본에서 신화가 각각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중심으로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의 핵심적인 주장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재야사학이 한국과 중국,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 관련 쟁점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민족의 정체성은 확립, 수정, 재확립의 과정을 끊임없이 겪는다. 

이 과정에서 민족의 역사는 민족의 비전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된다. 


그런데 이런 맥락에서 과거는 경험적으로 있었던 사실로서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있어야 할 사실로서의 의미가 보다 중요할 수 있다. 

있어야 할 사실로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일반 대중을 오도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있어야 할 사실로서의 의미 부여는 세계와 민족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확립시켜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신화는 있는 사실보다는 있어야 할 사실과, 있어야 할 사실의 의미를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 

본 논문에서는 재야사학의 업적을 신화의 범주에 넣고 논지를 이끌어 왔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재야사학은 있어야 할 사실을 찾는 일과 그렇게 찾아 낸 사실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재야사학 관련 서적들이 왜 일반인들에게 그렇게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강단사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민족사, 특히 고대사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그다지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민족의 정체성 확립은 타민족과 구별되는 특징을 부각시키고, 또한 그러한 특징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또는 타민족보다 우리 민족이 무언가 우월한 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렇게 볼 때 재야사학은 강단사학이 하지 못하는 역할을 나름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닌다. 


또한 중국과 일본에 비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비교적 덜 확립되어 있다는 점에서 재야사학의 등장 이유를 지적해 볼 수 있다. 

민족의 정체성은 여러 가지 측면과 수단에 의해 확립될 수 있지만,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나가는 재야사학은 민족의 정체성 확립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또 다른 수단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중국은 신화와 역사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황오제, 하, 은, 주로 이어지는 고대사 서술에서 신화는 적어도 삼황오제 시대의 역사적 공백을 메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신화와 역사가 각기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서 일본인은 역사적으로 任那가 한반도에 있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있어야 할' 사실의 개연성을 믿고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신화와 역사가 각기 역할 분담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고대사와 관련된 새로운 신화 만들기의 작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과정에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새로운 신화 만들기의 의의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또 다른 안목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지닐 때 

비로소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보다 생산적으로 확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http://cafe.daum.net/urychungchoon/VHf/7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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