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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문고: '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송화강 2019-05-28 (화) 14:45 6년전 1546  

삼성문고: '우리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자들은 어디서 온 작자들인가? 진정 한국 역사학계를 대표할 만한 자들인가? 또 한사람 김원용씨가 있다. 이 자는 일본이 날조해 낸 황국 사관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다까마쓰 고분 발굴 장소에 가서 일본, 북한,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인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마당에 당나라 화풍이 보인다느니, 고분의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이라느니 하고 우겼던 자이다. 또 이 자는 을지문덕이 중국 사람이라고 우겼던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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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혜성의 사나이 이기동씨가 있다. 87년 5월 29일, 30일에 있었던 역사학 대회에서 고대사 되찾기 운동을 "민족주의가 팽배했던 70 년대와 유신 체제의 분위기의 연장" 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그는 또 "실증 사학이 마치 식민 사관의 장본인 인양 단정되고 일부 민족 민중 사관이 고조되는 분위기에선 고대사 연구는 존립 기반이 질식되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고 한탄해 마지않았다. 


이상 여러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성향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자들이 주름잡고 있는 사학계의 현실 속에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례로 비록 식민 사학자들에게서 배웠지만 일부 뼈대있는 소장 학자들이 그 천편일률적인 식민 사학에 싫증을 느끼고 이에 반기를 들려고 하면 그들은 대스승인 이병도 박사가 그런 짓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밥줄이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식민 사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서 기골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독특한 민족 사관을 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식민 사학자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화살을 퍼붓는 통에 한국 땅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실례도 있었다고 한다. <국사통론>을 쓴 건국대학교의 박형표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기독교까지 이런 작업에 끼여들었다. 이들은 단군 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국사 교과서에서 아예 빼 버리자는 위원회를 조직하여 맹렬히 활동하고 있고 한국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의 한 갈래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또 이것이 안되니까 한국의 국조를 단군으로 인정하고 이 단군 국조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파생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 연세대 교수 김동길씨 (지금은 사퇴하고 정치일에 뛰어들었음) 의 단군성조에 관한 견해를 보자. 


"곰과 인간의 염색체수가 다른데 어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또 불확실한 신화시대를 우리의 정사에 집어넣고자 힘쓰는 사람들의 의도는 흡사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아시아 대륙과 미국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그 옛날의 일을 미국사에 정식으로 포함시키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그런 얼빠진 미국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우리들에게는 확실한 역사의 시작이다. 이 나라들이 출발이 대개 기원전 60년에서 20년 사이라는 말은 이 나라의 역사가 한 2천년쯤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고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 사람은 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소리들을 할까? 이 사람의 머리에는 일제가 그렇게 바라던 식민 사관으로 꽉꽉 들어차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상으로 일제가 저질러 온 민족문화와 민족 역사의 말살을 살펴보았고 민족 역사인 경우 해방후 우리 사학계의 실태까지 살펴보았다. 글의 초두에서 밝혔듯이 당시 일본은 조선인의 반일본화 시책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것은 민족 역사의 철저한 왜곡이라고 보고 교과서적인 조선사 편찬을 위해 (다른 어떤 교재보다 교과서가 가장 권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류의 우리 민족 사서를 소각 내지 압수할 필요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들의 수십 년에 걸친 압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압수를 위한 발악이라 표현하고 싶다) 민족의 몇몇 선각자에 의해 민족사서가 오늘날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위 글중 식민 사학자들의 대화에서 비쳤던 규원사화, 단군세기 외에 환단고기가 오늘날에 출토된 민족사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전화나 환란속에서 사라져 간 민족사서의 고갈 속에서 그나마 이것들의 가치는 국보 급이라 아니할 수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사학계에서는 이 사서들이 '신빙성이 없다', '황당하다' 는 이유로 천시되고 따돌림받는 이유는 어인 일인가?


최근에 들어 고고학의 발달과 고적의 출토 등으로 이들 사서들의 가치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러한 경향은 점점 뚜렷해질 것이라 믿고 환단고기를 처음 본 일본 사람들이 '아시아의 지보' 라 하였고 중국 사람은 '서역까지 밝혀 주는 주옥의 지보' 라 예찬했던 점을 상기시켜 본다. 


글: 김완섭(piz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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