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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8) 부여의 변한 정복과 가라 건국

송화강 2026-06-07 (일) 22:56 1개월전 195  

쇠처럼 단단한 ‘가라 土器’… 부여 기마군단이 전수한 철기문화 덕분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18) 부여의 변한 정복과 가라 건국

고조선 해체 뒤 민족 대이동 … 기병대장 출신 수로, 김해에 도착 뒤 이진아시왕에 복속 않고 금관가라 건립

백제·신라엔 없는 철장검, 6가라 全지역 출토… 기마부대 야영용 구리솥도 부여족이 세운 국가임을 증명

고조선 연방제국이 해체되고 뒤이어 위만조선이 BC 108년 멸망하는 대폭발적 거대충격이 가해지자, 고조선 지배층 유민들은 이웃 후국들로 피란하거나 새 국가를 세우고자 해 민족대이동의 제1차 파동이 일어났고, 우선 한국 역사에도 ‘다국시대’가 시작됐다.

고조선 유민의 일단은 남하해 멀리 진한, 지금의 경주 지역에 6개 마을을 형성해서 정착했다가 고조선 왕족 청년이 말을 타고 찾아오자 그를 박혁거세 왕으로 추대해 고조선을 계승해서 BC 57년 신라(사로국)를 건국했다. 고조선 왕족의 한 가문은 북부여에 피란했다가 환영받지 못하자 주몽 집단이 말을 타고 압록강 중류 구려에 내려와서 BC 37년(일설 BC 277년) 고구려를 건국했다. 고구려의 왕위 계승에서 밀린 온조 세력은 한강 부근으로 남하해 BC 1세기 중엽 백제를 건국했다. AD 1세기에는 제주도에도 부여·고구려·양맥족 일부가 남하해 선주민 촌장들과 결합해서 탐라국을 건국했다.

변한 지역의 6가라는 어떻게 건국됐는가? 가라 출토유물들에는 이웃 신라와 백제에 없는 북방 ‘부여(扶餘)’의 선진 철기문화, 기마문화 유물과 동일한 것이 한반도 낙동강·섬진강 사이에서 많이 출토돼 있다. 변한 지역에서 이 정도 선진적 철기문화와 기마문화 유물들이 자생적으로 성장해 나오려면 성장 과정의 미숙한 초기 철기들과 초기 기마문화 출토유물이 반드시 이 지역에서 꾸준히 나와야 한다. 그러한 과정 없이 갑자기 부여의 최선진 철기문화와 기마문화가 변한지역에 쏟아져 나온 경우에 우리는 부여기마민족의 변한 정복에 의한 6가라 건국설을 일단 정립할 수 있다. 필자는 1995년 사회사연구회에서 단군 실재 발표 때 이 해석을 구두로 발표했으나(‘단군설화의 사회학적 해석’, 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 제47집, 1995), 단군 실재 논쟁에 묻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에 이를 글로 정리해 독자들의 새 패러다임 전환에 참고자료를 제공하려고 한다.

고문헌에는 2가지 설화가 남아 있다.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이 승려 이정(李貞)으로부터 채록한 건국 설화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政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 왕 ‘뇌질주일(惱窒朱日)’, 금관국(金官國)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伊珍阿시王)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이다”라고 수록돼 있다.

가라 기병을 조각한 기마인물형 각배 가라토기(김해 고분 출토, 국보 275호, 경주 박물관 소장, 자료: 대가야의 유적과 유물, 2004)

고령군은 변한 시대에 ‘미오야마나(국)(彌烏邪馬國)’이었다. 가야산 산신으로 표현된 미오야마국(고령) 모주(母主) 여성 족장이 천신(天神, 고조선·부여 왕족 상징)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라국 시조 ‘이진아시’왕(별칭 ‘붉은 해(朱日)’)과 금관국의 ‘수로’왕(별칭 푸른 후예(靑裔))을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붉은 해’의 ‘해’(의역 朱日, 음역 解)는 부여 왕족의 성씨라는 사실이다. 부여 왕족 ‘해’ 씨 ‘이진아시’왕이 ‘대가라’(고령가라·임나)를 건국한 것이다. 한편 금관국은 ‘수로’왕이 건국했는데 모두 천신의 아들이지만 ‘푸름의 후예(靑裔)’라 했다. 부여 왕실 ‘해’ 씨는 ‘태양’과 ‘새’ ‘사슴’을 토템으로 했다. 한편 고조선연방의 유목민들, 산융·실위·정령… 등은 ‘태양’과 함께 ‘푸른 이리’를 토템으로 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고조선·부여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대가라의 이진아시왕이 부여왕족이고, 금관가라의 수로왕은 유목민의 자손 기마부대장이었음을 대학자 최치원이 시사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건국설화는 후에 ‘삼국유사’에 수록돼 있는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라는 관직자가 고려 문종(1075∼1084) 때 기록했다는 ‘가락국기(駕洛國記)’다. 이것은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설화다. 이에 의하면 서기 42년(후한 광무제 18년) 3월에 구지봉에 함성이 들려 9간(9개 마을 촌장)이 모여 가 봤더니,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사내아이로 변했는데, 맨 처음 나온 아이의 이름을 수로(首露·처음 나타났다는 뜻)로 해 대가락(大駕洛)의 왕으로 삼았으며, 나머지도 각기 돌아가서 5가라의 왕이 됐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구지봉 봉우리’의 ‘함성’을 통해 수로 등이 ‘육로’로 집단 이동해 왔으며, ‘붉은 줄’ ‘붉은 보자기’ ‘황금알’로 동일한 고조선·부여족을 상징하고, ‘가라’의 한자를 ‘駕洛’으로 써서, ‘말’(馬)위에 ‘가’(加)를 얹은 글자를 택해 부여의 ‘가’(장군, 대장)들이 말을 타고 내려왔으며, 6개 편대의 기마부대에 선봉대장은 ‘수로’였고, ‘대가라’를 건국했으며, 나머지 5개 기마부대장도 각각 주둔지에 돌아가서 각각의 가라를 건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은 기마부대의 정복이었지만 전투 없이 지방 촌장들이 합의해 수용·봉대한 무혈 정복 융합이었음이 잘 시사돼 있다.

고문헌에서 ‘가라’ 관련 지명을 찾아 연결해 보면, 백두대간(태백산맥)의 서쪽 육로의 산등성이와 계곡을 따라 남해안 김해 지역까지 ‘가라’ 지명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서기 42년 부여 기마족의 한 갈래가 기병부대를 나눠 황해도 수안 부근 멸악산맥 등성이를 거쳐서 충청도 죽령과 조령을 넘어 낙동강 상류에 도착했다고 본다. 왕족은 낙동강 상류에서 가장 농경과 기마 활동에 적합한 지금의 가야산 밑 고령(高靈)에 자리를 잡았다. 가장 용감하게 앞길을 개척한 막강한 선봉 기병부대는 남해안 끝 김해(金海)까지 도착했다고 본다.

이 두 개 건국설화를 종합해 보면, 처음 6개 기병부대가 하나의 통일 ‘가라국’을 건국하지 못하고, ‘6가라’를 각각 건국하게 된 요인을 알 수 있다. 고령 ‘대가라’ 이진아시왕은 부여 왕족이므로 신분상 전체 6개 부대 정복지의 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족일 뿐 전투 실력은 부족했다. 반면 ‘수로’는 신분은 ‘가’이지만 가장 막강한 선봉 기병부대 대장이고 최강의 실력자였다. 그는 ‘해’ 씨가 아니라 청예(靑裔·유목민의 후예)였으므로 최강의 무력에 기초해서 독립 금관국을 건국했다.

광개토대왕비는 당시 ‘6가라’를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기록했다. ‘임나’와 ‘가라’를 분절시키면, 그 뜻은 ‘임나’는 ‘임금의 나라’이고, ‘가라’는 ‘가(장군·대장)의 나라’의 뜻이 된다.

대가야의 금동관(3C) (자료:대가야의 유적과 유물, 2004)

금관국을 세운 수로왕의 신분은 부여 유목민 후예 ‘가’였으나 그의 역량은 가장 탁월했다. 그는 선봉부대로 서기 42년 김해 지방에 도착하자 고령의 이진아시왕에게 복속하지 않고 금관국을 건국했다. 부여족 기마군단이 남하해 6가라를 건국한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 고고유물로는 특히 다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6가라 전 지역에서 출토된 철장검들은 부여 유적인 만주 요령성 서차구 유적과 길림성 유수노하심 유적(BC 1세기∼AD 1세기)에서 다수 출토된 철장검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유형이다. 이 유형의 철장검은 황해도 이남 한반도(백제·신라 지역)에서는 출토된 일이 없고, 탐라국(제주도) 용담동 유적(AD 1세기)에서만 2자루 출토돼 있다.

(2)고령 지산동 44호 및 45호 무덤을 비롯해 6가라 전 지역에서 출토되는 철제 말 자갈, 말 멈추개 등 철제 마구류는 길림성 유수노하심 출토의 것과 완전히 동일한 유형이다.

(3)고령 지산동 32호 무덤의 철제 투구와 갑옷, 합천 옥전 M3호 무덤의 금동장식 투구, 부산 복천동 10호 무덤의 철제 단갑 등 가야 철제 갑옷과 투구는 부여 유적인 유수노하심 2기(中기)층 56호, 67호, 97호 무덤 출토의 각종 갑옷과 투구, 길림성 대안현 어장토광묘 207호 출토 갑옷(편)과 동일한 유형으로 계승·발전한 것이다.

(4)가라 유적 김해 대성동 29호 무덤 출토 동복(銅·구리솥)은 부여 유적인 길림성 동단산 유적과 요령성 서차구 유적 및 길림성 유수노하심 2기층 출토 동복 2점 가운데 제2형 동복과 완전히 동일하다. 부여 기마부대에서는 동복을 야영용 필수장비로 사용했다. 대성동 출토 가라 동복은 흉노의 동복이 아니라 부여 기병부대의 동복이라고 본다.

(5)가라 토기는 ‘경질’ 토기의 굳기와 높은 그릇받침대의 구멍(물, 바람구멍)과 다양한 도안으로 큰 특징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토기는 섭씨 800도 이하로 구운 농경사회의 토기다. 필자는 가야에서 1200도 이상 고열로 ‘경질토기’를 구워낼 수 있게 된 것은 부여에서 말을 타고 내려온 철기문화가 철 생산 고열기술을 토기에 적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유수노하심 부여 동복(제1형)

부여 유적인 유수노하심 97호 무덤 출토 제1형 동복(銅)을 다시 한 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 동복은 본 동복(높이 25㎝, 구경 14㎝)에, 높이 4.2㎝의 받침대(器臺)가 붙어 있고, 받침대에는 가라 경질토기처럼 전후좌우에 구멍 4개가 뚫려 있다. 토기를 얇게 만들어 1200도의 고온으로 매우 단단하게 소성할 때 불길이 고르게 들어가 구워내도록 새 기술이 도입된 것이고, 그 기원이 부여의 동복 제조 기술과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만 봐도 6가라는 북방에서 AD 42년에 부여족의 기마군단이 새 정착지를 찾아서 육로로 남하해 변한 12국을 평화적으로 정복해 세운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이 부여 기마족의 정치적 지휘자인 부여 왕족은, 막강한 선봉 기마부대(김수로)가 앞길을 남해안 김해까지 안전하게 개척하자, ‘고령’에 도착해 여기에 정착했다. 고령에 부여 왕족은 ‘임나(任那)’를 건국했지만 실력 부족으로 5개 기병부대장을 다 통솔하지 못했다. 선봉부대장 ‘수로’는 신분은 부여왕족이 아니라 가(加·아마 狗加인 듯)였지만, 능력은 가장 탁월했으므로, 역시 AD 42년에 정착지 김해에 ‘금관국(金官國)’을 세웠다. 나머지 4개 기병부대장도 각기 군립했다. 그 결과 1개 임나(任那·임금 신분의 나라)와 5개 가라(加羅·가 신분의 나라)가 수립됐다. 부여의 선진 철기 문화·기마 문화와 변한의 선진 농경 문화의 융합에 기초한 6가라 연맹국가가 수립된 것이었다. AD 4세기 말까지에는 가장 강성한 금관가라가 6가라 연맹을 주도했다.

그러나 백제 아신왕이 399년 신라를 정복·병합하려고 백제·금관가라·왜의 3개국 동맹 연합군을 편성할 때 이에 참가한 것이 금관가라 실패의 변곡점이 됐다. 백제·금관가라·왜군이 연합해 신라의 수도 경주를 점령한 즈음에, 위기의 신라 내물왕은 고구려로의 신속(臣屬)을 결정하고 구원을 청했다. 이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5만 명 동아시아 최강의 기병부대 대군이 AD 400년 경주로 직행 남하해 백제·왜 연합군을 참패시키고 김해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때 백제군 4만 명 가운데 전사자는 셀 수도 없고, 포로가 된 백제군만도 8000명이었다니 얼마나 큰 참패였는가를 알 수 있다. 금관가라군과 바다를 건너온 왜군도 대패했다. 이에 1세기 이후 300여 년간 크게 번영했던 금관가라의 시대는 사실상 끝나고, 신라 연합공격에 불참했던 대가라(임나)가 5세기 초부터 6가라의 맹주가 된 후기 시대가 열린 것이다. 종래의 가라 건국사에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 용어설명

수로왕의 금관국 건국 과정

금관국 건국은 6년간의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었다. 그는 ①건국(서기 42년) 이듬해 ‘수도’를 김해에 정하고 나성(羅城)을 쌓았으며, ‘궁궐’을 44년 2월에 완공했다. ②이해(44년) 탈해(脫解)가 지휘하는 군사들이 바닷길로 쳐들어오자 막강한 기병과 500척을 이끈 수군으로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해 그들을 쫓아 보냈다. ③수로왕은 서기 48년 중국 상선 편으로 회계(會稽)에 망명한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16세) 허황옥(許黃玉)을 맞아 정식 왕비로 삼고 왕족 신분을 갖췄다. 수로의 부여 신분은 왕족이 아니라 그 아래의 ‘가(加)’였다. 이제는 아유타국왕의 공주와 결혼했으니, 부여의 제도로도 ‘고추가’가 되고, ‘왕족’이 된 것이다. ④수로왕은 대대적 관제개혁을 단행하고, 농경과 제철수공업, 국제무역을 크게 발전시켰다. 김수로왕의 금관국은 AD 1세기 중엽 고대국가 구성요를 다 갖춘 부강한 고대왕국을 건국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2435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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