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의 수수께끼] <9> 누정과 모정
산으로 바다로 피서 대탈출이 한창이다. 산과 바다로 떠나는 것도 괜찮은 피서법이겠지만 바람 솔솔 불어오는 원두막에 누워 한여름 더위를 씻는 것만큼 은근한 멋을 즐길 수 있는 피서도 드물다.
원두막에서 더위를 식히려면 그 유래를 정확히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언제 보아도 정겨운 원두막은 근대에 생긴 것이고, 원두막의 시조는오랜 옛날부터 한여름 `피난처'로 이름이 높던 `모정(모정)'과 `누정(누정)'이다.
모정은 한여름 더위를 피하고 휴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이 딸리지 않고 마루뿐인 마을의 공용건물을 뜻한다. 글자 그대로 초가를 얹은 소박한정자로 농민들의 집회소다. 반면에 누정은 누각(누각)과 정자의 앞머리글자를 따온 것으로 선비문화의 대표격이다.
이 두가지 병렬적인 문화현상에서 당시대 문화구조를 총체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둘을 대비하면, 당시 신분구조는 물론이고 삶의 태도, 일상적관습, 신분에 걸맞는 예우 같은 중세사회풍속사의조망이 가능하다.
역사적으로는 누정이 모정보다 먼저 등장했다. 일찍이 중국에서 발달한누정문화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이미 국가 차원의 호화로운 누정이 세워졌을 정도로 보편화됐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만 꼽아도 무려 8백85개소에 이른다.
두만강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퍼져 나간 것으로 알려진 누정은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주로 세워 경영하였고, 지방관들은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누정을 세웠다. 심지어 고산 윤선도가 귀양지 보길도에서 이룩했던 대 역사(역사)도 바로 누정이 중심이었다.
누정엔 향촌사회의 사대부와 관리들이 모여 친교를 도모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소수의 특권층만이 음주농월로 세월을 보냈다는비판도 따른다. 가문이나 문벌의 위세를 내세우며 거들먹거리는 부정적요소도 없지 않았고, 민중들의 원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누정은 조선시대 선비정신이 구현되던 향촌사의 생생한 무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정전문가 박준규 교수(전남대.국문학)는 누정의 기능을 유흥과 경관구경, 시단(시단), 학문수련장, 종회나 마을회의장소, 활쏘기 수련장, 고을의 치적을 상징하는 명소 따위로 설명한다.
진주 촉석루, 울진 망양정, 안주 백상루, 담양 소쇄원의 대봉대 등에서볼 수 있듯이 누정은 어김없이 강가나 바닷가 산록의 풍광 좋은 곳에 위치했다. 시 한수 읊조리기엔 제격이기 때문이다. 백광홍의 <관서별곡>, 정철의 <관동별곡>, 송순의 <면앙정가> 따위도 바로 누정에서 만들어진시들이다. 듣기만 해도 쟁쟁한 이들이 들먹여질 정도로 누정은 선비문화그 자체였다.
반면에 모정은 무지랭이 농민문화다. 모정 말고도 시정(시정).유산각.농청(농청).농정(농정).동각(동각).량청(양청) 같은 명칭이 두루 쓰이나 역시 대종은 모정이다. 시정 같은 표현들은 후대에 모정과 누정문화가 일부 섞이면서 등장한 신식 이름이지 순수 `모정 혈통'은 아니다.
선비들이 술 마시며 노닐던 누정과는 달리 모정은 단순하게 쉬는 장소가 아니다. 한여름철엔 김매던 농군들이 점심을 먹은 뒤 잠시 불볕 더위를 피해 눈을 붙이는 요긴한 장소요, 구비치는 들녘을 바라보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랑방이요, 모깃불이 사위어가도록 밤더위를 피했던 곳이다.
그런가 하면 마을회의를 열어 품앗이, 다리보수, 공동혼상구 준비 따위의일년 대소사를 결정하는 곳이기도 하다.
모정문화는 지역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호남을 제외한 지역에서는모정을 찾아보기가 극히 힘들다. 전북 익산지방에서 모정문화를 조사하다가 금강을 건너 충청도 부여로 접어들면 이내 모정이 사라지고 만다. 섬진강을 끼고 도는 전라도 곡성에서 경상도 하동으로 접어 들어도 마찬가지다. 독특하게 호남 중심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다른 지역에 모정에 준하는 공동체적 결집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정의 다른 이름인 동청, 농청, 농정 따위가 바로 공동체적 결집소 명칭이었다. 함경도 북청 같은 지방에는 도가라 불리는 공공건물이 있어 마을의제의.노동.놀이 따위를 관장하였다. 북청사자놀이도 도가를 중심으로벌어졌다.
일제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결집소들은 호남을 제외하곤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호남의 모정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호남이 전형적인 농업지역인 탓도 크지만 호남 특유의 끈끈한 공동체의식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물론 호남의 모정문화는 나무그늘에서 쉬는 영남의 평상문화와 같이 자연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야산은 물론 햇볕 가릴 곳조차 없이일망무제로 퍼진 들녘에서 살아가려면, 모정이라도 있어야 견딜 만하지않았을까.
이렇듯 옛 선조들의 피서문화의 중심을 이룬 모정과 누정은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에 세워졌던 누정은 거의 대부분 관광명소가 되었거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모정은 시대가 변한 지금도 여전히 생활 속에살아숨쉬는 공간이 되고 있다. 지금의 모정은 근대화 물결에 휩쓸려 예전의 초가 대신 기와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지만, 역사 속의 민중과 더불어그때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파수꾼'이다. 땅에 뿌리박은 농민의 문화가 가장 생명력이 강하다는 귀중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 아닌가.
주강현 민속학자.경희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