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노래의 의미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소모의 공포'속에서 살아간다.
한국의 할머니들이 어린 아이를 재울 때에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들려주는 자장가에서부터
그 한의 가락은 시작된다.
"...아버지가 장에 가서 밤 한말을 사다가 선반 위에 두었더니 머리 감은 새앙쥐가
들락달락 다 까먹고 알밤 한톨 남은 것..."
우리의 할머니들이 넋두리처럼 들려주었던 그 자장가는 바로 한국의 운명을 그대로
노래한 것이었다.
저 우랄 산맥과 중앙 아시아와 시베리아를 지나서 동방으로 이동해 온 우리의 조상들은
하얼빈을 중심으로한 만주 대륙의 대평원에 정착의 터를 잡았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 넓은 땅이 이리저리 다 찢겨나가더니 밤새 들락거린
새앙쥐가 밤 한말을 다 까먹듯 줄어들다가 겨우 한반도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겨우 남은 한반도마저 두 동강이 나서 민족 상잔의 전쟁을 겪고 잿더미로 변하게
되었다. 우리 할머니들의 자장가도 바로 그런 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알밤 한 톨 남은 것 밑빠진 솥에다 삶아서 밑빠진 조리로 건져서 껍데기는
언니주고 버미는 누나 주고 알맹이는 너랑 나랑 둘이서만 나눠먹자..."
이런 끝없는 소모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라난 아이들이 자라나서 부르는 애국가도 역시
소모적인 노래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것은 바로 언제인가부터 우리 민족의 정서가 현실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흘러왔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선반 위의 밤 한말처럼 다 사라져가는 것이므로 그저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네 삶의 저변에 깔리고 있던 정서였고
바탕이었다.
이러한 현실 부정의 앙금들이 세월과 함께 가라앉으면서 그것은 소위 '한(恨)'이라는 응어리로
남게 되었다. 우리의 삶 속에는 목으로 내는 소리이든 숨결로 불어내는 대풍류나
손으로 뜯어대는 줄풍류에도 '시나위'라는 이름의 가락이 전해져 내려왔다.
그것은 사람의 살갗에 소름이 돋게 할 정도로 처절한 한을 뿜어대는 가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서운 한은 드디어 '작별'이라는 개념으로 승화한다.
우리가 잠시 얹혀 사는 이 땅은 우리의 땅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대개 한국의 이야기들은 주인공들이
홍길동이나 허생원처럼 바람같이 떠나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김동리의 아름다운 단편소설 '역마(驛馬)'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겨 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어,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서 있을 어머니의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갈 무렵
하여서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었다..."
갈아입은 옷양목 고의 적삼에 명주 수건까지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새로 맞춘
하얀 엿목판을 짊어진 채로 화개장터를 떠나는 주인공 성기의 그 모습은 바로
모든 한을 가슴깊이 삭여 내리며 미련없이 삶의 터를 떠나왔던 우리네 조상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러한 작별의 미학이 고여 있는 노래가 바로 '아리랑'이었던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비한 가락의 근원을 캐기 위하여 광막한 시간의 골짜기를 헤매어 왔다.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전설과 민요들을 찾아다니면서 '아리랑'의 어원을 찾아다닌
사람들도 있었다.
경상남도 밀양의 아랑각(阿랑閣) 전설에 나오는 '아랑'의 이름에서 그 어원을 추측하는
이도 있고 영웅의 탄생을 상징하는 '알'에서 건국 신화를 생각하는 이도 있다.
또 강을 의미하는 '아리라'나 농가에서 나오는 '아농언(我農焉)'을 연결시켜 아리랑을
농민의 노래로 규정하기도 하고 가슴이 '아리다'라는 말에서 한의 개념을 유추해내기도 한다.
'아리랑'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전국을 찾아다니며 연구했던 김열규(金烈圭) 교수는 그의 저서
'아리랑... 역사여 겨레여 소리여'의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아리랑은 결국 우리들 삶의 혈맥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들 몸 구석구석 핏줄이 뻗치고
또 스며 있듯이 우리들 삶 구석구석에 아리랑은 뻗어 있고 또 스며서 울리고 있었다.
아니면 그것은 우리들 생활과 문화의 지각(地殼) 밑에 고루 번져간 수맥(水脈)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세로로나 가로로나 아리랑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노래한 소리였다."
그렇다. 아리랑은 바로 우리들의 '모든 것'이었다.
아리랑의 근원을 찾으려면 우리는 역사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무엇인가 두고 왔다. 우리가 있는 곳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이 땅에 오기 전에 무엇인가 커다란 '작별'의 슬픔을 겪었던 것이다.
인류의 대분단(大分斷)... 우리는 그것을 거론할 때 아라랏 산을 빼놓을 수 없게 된다.
아라랏.... 터키의 동북방 아르메니아 지방에 솟아 있는 해발 5,165 미터의 이 산은 바로
'대홍수'가 끝난 후 바로 노아의 방주가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이라고 성경 창세기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라랏 산은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와 그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그리고
그들의 아내들이 방주에서 나와 새로운 세계사를 시작했던 장소이다.
즉 아라랏 산은 바로 홍수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산 위에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던 셈의 장자들에게 있어서 아라랏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셈의 장자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에는 늘 산 위에서 드렸기 때문에 홍수 이후의 시대에는
아라랏이 바로 그들의 성산(聖山)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셈족의 언어에는 아라랏과 유사한 발음의 어휘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아라' '아리' '아르' 등의 어간이 들어간 말들이 셈 족속의 어느 언어에나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도 히브리어의 '아라'가 '나그네'를 의미한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아라랏 산', 그것은 바로 모든 인류의 고향이었고 인류 최대의 작별 즉 '대분단'이
있었던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형제들이 서로 헤어질 때 누구보다도 가장 가슴 아파야했던 것은 바로 '장자'들이었다.
셈의 장자들은 바로 그들이 장자의 책임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대분단의 책임자로서
깊은 한을 되새기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아라랏 산에서 작별해야 했던 모든 족속의 슬픔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한 개인들마다
또 얼마나 큰 슬픔이 있었을 것인가.
결국 아라랏 산의 계곡은 서로 헤어져야 하는 부부와 자식 그리고 형과 아우들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을 것이며 집안이 달랐기 때문에 헤어져야 하는
셈과 야벳의 연인 함과 야벳의 연인 셈과 함의 연인들의 흐느낌이 고개 마루를
뒤덮었을 것이다.
어쩌자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에게 이토록 가슴 아픈 작별을 겪도록 슬픔의 드라마를
계획하셨던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 애착을 갖지 못하도록 만드셨다.
(성경 약 4: 4)"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히 4:3)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는데.(요 3:16)
세상과 벗이 되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사탄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엡 6: 12)"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은 바로 사람의 영안을 멀게 하고 정욕의 눈을 밝게 하여(창 3:7)
사람의 누능로 하여금 세상을 보게함으로써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사람들은 '보이는 세상'을 따라 나섬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엡 2: 2)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를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요 15: 19) "만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라.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내가 너희를 세상으로부터 선택하였느니라.
이로 인하여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렇게 해서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다가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안목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위하여
작별의 드라마를 연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을 갖지않도록 유도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미련을 갖지 않은 나그네처럼
살았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장차 유업으로 받을 땅으로 떠나가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떠났으며
믿음으로 그는 타국 땅에 있는 것같이 약속의 땅에 기거하여 그와 함께 그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들인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느니라.
이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성을 기다렸음이니 그것을 세우시고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히 11:8~10)
이러한 나그네의 정신이 가장 많이 계승되어 온 민족이 바로 한국 민족이었다.
같은 셈의 후예이고 우랄 알타이 어족이지만 바로 옆의 나라인 일본 사람들은
'떠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민족이다.
그들은 바로 섬의 끝까지 옮겨간 사람들이어서 '떠남'의 미학을 모른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라하찌부(村八分)'로 몰리는 것이다.
즉 마을의 관습을 어겨서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받는 사람을 '무라하찌부'라고 하는데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을을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신문을 보면 하루가 멀다고 단신부임(單身赴任) 때문에 자살했다는 사람들의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대기업의 사원으로 지방근무 발령을 받았으나 집안 사정때문에
혼자서 부임해야 하는 사람들이 집을 떠나게 된 충격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마을'이라는 이름의 '세상'에 매여서 죽음을 택하는 셈이다.
한국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 충격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된 셈인지
한국 사람들은 일찌감치 그런 일에 익숙해 있다.
오랫동안 지방이나 외지에 혼자 나가 있는 사람들이 허다하고 이미 수십년 전에 고향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예 해외로 이민을 가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아리랑의 노래로
한국 사람들에게 작별의 훈련을 시켜서 그들을 전세계로 보내 놓으셨던 것이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의 큰 사업을 계획하고 계신다.
이 세상이 최종적인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한국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셨던 수많은 작별의 체험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에덴에서 우리를 내보내셨던 하나님의 그 아리고 쓰라린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밀양아리랑에 나오는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이
'아리고 쓰린'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언젠가 우리는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그 아프셨던 마음을
이제 우리가 모두 알았으니 그분의 아픔을 위로해드리기 위하여 우리가 이 세사에서 해야 할
일들을 다 마친 다음에 우리는 모두 그분의 나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순례자 이 세상에서 언젠가 집에 돌아가리
어두운 세상 방황치 않고 예수와 함께 돌아가리...,
출처:김성일 장로의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 2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