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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한국 무속의 영성 (치빌타 카톨리카)

송화강 2020-06-05 (금) 13:40 4년전 6009  

 

한국 무속의 영성

 

LO SCIAMANESIMO IN COREA

다니엘 키스터 S.J.

김민 요한 S.J. 옮김

조현범 도마 감수

  한국 영성의 원천은 다양하다. 그리스도교는 지금으로부터 2세기 전,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원들의 저술에 매료된 한국 지성인 모임의 한 회원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한반도에 천주교 신앙을 들여옴으로써 처음으로 표면화되었다. 중국에서 전파된 불교와 유교 영성의 사조(思潮)들의 경우에는 이보다 수 세기들 앞서 한국 문화를 풍요롭게 하였다. 하지만 태곳적부터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여온 영성의 깊은 곳에는 무속신앙의 토착적 원천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무속의 영성은 천주교의 영적인 전통과는 판이하지만, 무속의 영성은 한국과 동북아시아 사람들의 종교적 체험을 반추해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수단이 된다. 또한 다른 문화의 그리스도인들은 무속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 더욱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한국은 지리적 인종적 언어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며 어떤 점에서는 종교적으로도 그러하다. 무속 신령들의 세계는 보편적인 높은 신들뿐만 아니라 일부 중국의 신들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무당굿은 산의 산신(山神), 하천의 용신(龍神), 마을 신,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어느 장군의 혼령, 돌아가신 가족의 혼백들처럼 특정한 장소에서 한국인들을 돌보아주는 토착 신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행해진다. 굿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신들과 영혼, 정령, 귀신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왜냐하면 신들이 혼령들과 그리고 열등한 혼령들은 잡귀 잡신들과 중첩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 현상들은 그리스도교의 믿음과는 상충하지만, 한편으로 그 어떤 단일한 형태나 이름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를 소중히 간직해왔고 굿은 바로 이 자연과의 친밀함에 성스러움의 감각을 더 하여 관계를 한층 풍요롭게 만든다. 영신수련의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에서 이냐시오 성인은 “물질들에 존재를 부여하시는” 방식으로 세상 만물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사랑 활동에 대해서 관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면서 우리가 그 보답으로써 사랑으로 응답할 것을 요청하였다. 1)  무속을 믿는 이가 기도하기 위해 산에 갈 때 그녀(혹은 그)는 끊임없는 보호와 관심으로 자연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신과 소통하게 된다. 병풍처럼 솟아오른 산의 영속적인 힘, 거대한 고목(古木)의 항구한 현존, 맑은 물이 솟아나는 옹달샘의 생명을 주는 힘의 형태로 말이다. 툭 튀어나온 바위 앞에 차려진 흔들리는 촛불과 공양물 앞에서 그녀는 작은 징을 부드럽게 울리며 아이의 건강한 출산, 혹은 가족의 소원을 위해 산신이나 칠성님께 기도를 올린다. 하지만 그녀가 이를 행하는 것은 우주적인 창조의 힘, 완전한 사랑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사랑의 응답이 아니라 현세적인 복을 구하기 위함이다.

  비록 농촌과 자연의 주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긴 하지만 굿의 영성은 농촌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속 의례가 행해지는 대도시로 향하는 인구이동에도 어렵지 않게 적응해왔다. 왜냐하면, 무속의 근본적인 뿌리는 특정한 지역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생과 사, 그리고 희로애락이라는 인간 삶의 면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굿은 이승에서의 복에 초점을 맞출 뿐 내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굿은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는 영성의 형태를 띤다. 굿은 세계 평화나 보편적인 구원과 같은 범세계적 관심사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모든 인류에게 의미를 있다고 여겨지는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지도 않는다. 굿은 매일의 일상적인 사건들을 신들과의 만남이라는 성스러운 사건들로 변화시킨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서울 지역에서는 입문 과정을 거쳐서 무당이 된다. 대부분 여성인 무당들은 자신의 집이나 의뢰인의 집, 작은 굿당, 혹은 야외의 어떤 장소에서 굿을 행한다. 간단한 음식이 차려진 상 앞에서 무당 또는 법사가 혼자 제금(또는 바라)을 치면서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모습으로 굿을 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굿은 신들을 위한 공양물이 높다랗게 쌓인 제사상 앞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무당과 한 무리의 악사들이 수많은 굿거리들을 온종일 벌이는 축제와도 같은 것이다. 굿거리는 보통 “기도합시다(Preghiamo)”가 아니라 “놀아보세(Giochiamo)”라는 말로 시작되며, 고음의 창과 우스꽝스러운 농담, 장구 연주, 역동적인 춤사위가 동반되어 생기가 넘친다. 천주교 성사 예절과 유사하게 굿은 구체적인 표징 위에서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만남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굿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만남의 증표로서 거의 기적에 준하는 표징을 추구한다. 서울 지역에서 행하는 굿에서 무당은 술병 위에 거대한 떡시루를 올려 균형을 잡기도 하지만, 높은 대 위에 설치된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조심스레 춤을 추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압권이다. 무속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런 재주들이 별다른 신뢰를 주지 않지만, 믿는 이들은 이런 것들을 영험함의 표징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무당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실제로 저승에서 들려오는 말로 여긴다.

  무속을 믿는 가정은 가족의 병이나 재정적인 문제, 혹은 가정의 파탄 등으로 곤란을 겪을 때에 무당을 초대하여 굿판을 벌인다. 이때 굿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을 영적인 세계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굿거리가 바뀌면 이에 따라 무당은 신령의 옷이나 조상신의 옷으로 갈아입고 춤을 추면서 탈혼 상태를 유도한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신령이나 혼령이 무당 속으로 들어온다고 믿어진다. 굿을 드리는 가족은 다 함께 두 손을 비비며, 도움을 청하는 의미로 가볍게 머리를 조아린다. 굿의 효과를 믿는 이들은 신령들과 혼령들이 선한지 악한지를 따지지 않으며, 다만 그들이 만족했는지 아니면 불만족스러워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한, 무덤에 물이 스민다든가 조상 제사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아서 사랑하는 망자의 혼이 소위 한(恨)이라는 원망의 감정을 품고 있는지 여부 또한 중요하다. 망자가 살아있는 이들과 지속해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는 한국인들의 생각은 유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수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무당은 망자의 혼을 불러내어 즐겁게 해주고 달랜 다음에 무당 자신을 매개로 하여 망자의 혼이 가족과의 관계에서 품고 있던 나쁜 감정을 털어내고는 가족들에게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말해줄 기회를 마련해준다. 일단 감정이 누그러지면 망자는 대개 “걱정 마라(Non vi preoccupate)” 혹은 “내가 함께하마(Io sarò con voi)” 등과 같은 위로의 말을 남긴다. 신령이나 조상신을 물리적으로 불러내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앙과는 상충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망자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무속신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시성된 성인들의 도움을 구하면서 왜 사랑하는 망자로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는지 의아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통해 오히려 망자의 영혼을 도우려 할 뿐이다. 어찌 되었건 한국의 무당은 혼령들의 대변자가 되어서 혼령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려주는 데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심리적인 차원에서 볼 때, 무당은 가족 문제의 원인을 가족 자체 내에서 드러내기 위해 무당 자신이 가진 개인적인 감수성, 유쾌하면서도 극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무당이 대담하면서도 웃음을 유발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신령들과 혼령들을 연극적인 방식으로 불러내 옴으로써 가족 문제를 공공연히 드러내어 가족 구성원이 그 문제를 직시하도록 해준다. 이리하여 종교적 믿음, 심리치료, 심리극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샤머니즘에 관한 국제적인 학술회의에는 많은 정신분석학자들과 심리치료사들이 참석한다. 이들은 다양한 원주민 부족 사람들이 슬픔과 아픔, 금이 간 인간관계 등의 문제를 잘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샤먼들의 전문적인 기술에서 배움을 얻고자 한다.

  동해안 어촌마을에서 별신굿은 연극적 요소를 지니는 유쾌한 한마당이다. 절기에 맞추어 행하는 마을 의례인 이 축제에서 기구 하는 일과 즐기는 일이 하나가 된다. 마을을 지키는 신과 다른 신령들, 그리고 조상신들에게 기원하고 그들을 즐겁게 하려고 마을 주민들은 남녀로 구성된 무당 가족을 고용한다. 이들 무당들은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 무속인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당이 된 이들이다. 그들은 신령들과 단순히 대화를 나누는 자들이지 영매(靈媒)는 아니다. 게다가 일종의 엔터테이너로서 역할을 한다. 마을주민들은 고기를 잡는 물가에 천막을 치고 신령들에게 바치는 공양물로 제사상을 차린다. 천막에는 형형색색의 종이로 만든 등을 매달고, 제사상은 종이꽃들로 화려하게 장식된다. 마을 주민들은 무당을 통하여 자신들의 삶과 노동이 신령들의 가호 아래에 있기를 빌고, 신령들이 질병이나 불행에서 자신들을 보호해주기를 청하며 아이를 낳는 일이나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는 일에 도움을 줄 것을 부탁한다.

  모든 참가자들은 바닷가 작은 언덕에 있는 마을 신당까지 행렬을 지으며 나아간다. 흰옷을 입은 마을 어른이 대나무로 만든 신장대를 들고 가는데, 신장대에 달린 흰 깃발이 청명한 하늘에 나부낀다. 신당에서 모든 참석자들은 북과 태평소, 꽹과리, 그리고 큰 징의 소리에 맞춰 신명 나는 춤을 추며 마을 신을 영접한다. 무당은 자신이 연주하는 제금(또는 바라)의 빠른 가락에 장단을 맞추며 신령에게 다가오는 새해에 마을의 안녕을 청한다. 마을 주민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신령의 신탁(神託)을 기다리는데, 이는 무당이 잡고 있는 신대가 신비로운 방식으로 흔들리고 무당이 이를 그 증표로 해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신탁을 받은 주민들은 다시금 행렬을 지어 신령이 깃든 신대를 호위하여 바닷가의 본래 굿판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틀, 혹은 좀 더 오랫동안 복을 빌기도 하고 즐기면서 보낸다. 주민들은 집안의 복을 기원하고 신령이 내린 자리에서 먹고 마시고 춤을 춘다. 이 의례를 통해 신령들과 조화를 이루고, 또 마을 주민들끼리도 화목을 도모한다. 별신굿의 마지막은 신령들과 혼령들이 사람들 곁에 남아 해를 끼치지 않도록 그들을 잘 떠나보내는 것이다. 중국 속담에 “혼령들을 불러내기는 쉽지만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은 어렵다(È facile evocare gli spiriti, ma è difficile mandarli via)”라는 말이 있다. 별신굿은 참여자들과의 인격적인 합일을 바라시는 하느님과의 지속적인 일치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현대의 대도시에서는 종교적 기원 행위, 노동, 유희가 다양한 집단들 속에서 다양한 활동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마을 의례에서 주민들은 기원, 노동, 유희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활기찬 영성 속에서 일체가 된다. 구약은 다윗 왕이 언약의 궤 앞에서 아이처럼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고(2사무엘 6,14-15), 그리스도교 전례는 예배드리는 이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환호(acclamare Dio)” (시편 66,1) 하도록 일깨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전례는 전통적으로 장엄한 찬송과 전례 행위와 성스러운 공간에 대한 감각을 환기해왔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투과된 빛은 이러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마치 한국의 불교 의례처럼 그리스도교의 전례는 엄숙함과 침묵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와 달리 잘 치러진 굿에서는 북과 태평소, 징의 약동하는 리듬, 형형색색의 종이 장식, 생동하는 춤사위, 유쾌한 희극이 한데 어우러져 전형적인 한국적 삶의 기쁨을 표현해낸다. 떠들썩한 웃음소리, 흥청거리는 술자리의 소란이 굿 마당에 울려 퍼지면서 신성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리스도교 전례에는 웃음을 위한 자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데, 마을 축제와도 같은 경신행위가 주는 신앙의 기쁨을 맛본 이들은 어쩌면 ‘왜 굳이 전례에서 웃음을 위한 자리가 없어야만 하는가?’의 질문을 던질 법하다.

  한국의 무속 의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2세기경 북부여 왕국(오늘날의 만주)에서 행해졌다는 것이고,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에 적혀 있다. 영고(迎鼓)라고 불리는 의례가 그것인데, 이는 오늘날의 마을 굿에 해당한다. 음주가무와 점(占), 참가자들이 하늘에 공양물을 바친다는 점에서 굿의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무당’이라는 말 자체는 12세기의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에 무당이 있었다는 것인데, 이때의 무당은 의례의 시행자가 아니라 국왕에게 조언하는 예언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내림굿을 받거나 가족의 혈통에 따라 무당이 된 사람들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단지 신령들의 대변인인지 스스로 예언을 하는 존재였는지 불분명하다. 한편 예언자로서 그들의 역할은 위험한 일이었는데, 이를 148년 7월에 있었던 고구려의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사냥을 하는 동안 임금이 활로 여우를 쏘았지만 빗나갔다. 임금이 이에 관해 묻자 무당은 여우는 변덕스러운 짐승인지라 상서로운 표징은 아니라고 답했다. 무당이 계속해서 임금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덕의 길을 따르면 악운이 상서롭게 될 것이라고 했다. 왕이 답하길 불운은 불행한 것으로 드러나고 행운은 상서로운 것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고로 불운함이 축복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러고 나서 임금은 그 자리에서 무당을 죽였다.

  660년에 백제의 어느 무당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는데, 그는 왕에게 왕국의 운이 정점에 달하여 이제는 기울어질 때인 반면, 백제의 경쟁국인 신라의 운은 커지기 시작하여 결국 백제를 넘어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달이 둥글다는 것은 가득 찼다는 것이니, 이제 곧 기울 때가 되었다는 뜻이고, 초승달은 아직 차지 않았으니 머지않아 보름달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화가 난 왕은 무당을 죽여 버렸다. 신라의 왕들은 그들 스스로가 일종의 무당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왜냐하면 5~7세기 신라의 왕관들의 형태가 샤머니즘의 우주목과 사슴 형태의 모티브가 합쳐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라의 왕들이 실제로 무당이었는지를 확증해주는 역사자료는 찾기가 힘들다. 전 세계 각지의 샤먼들에 관한 학문적인 연구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모습은 샤먼들이 탈혼 상태에서 신령이나 혼령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또 그 증거로서 거의 기적과 유사한 표징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기록에서 무당은 탈혼 상태에서 말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에서도 무당들이 반드시 탈혼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당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와 유사한 묘사 혹은 풍자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유학자 이규보(1168~1241)의 시에서 드러난다. 유학자들은 세상이 합리적 이치를 통해서 돌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당의 활동을 매우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이규보는 신령들이 무당과 접신한다는 주장을 비웃는다. 그는 주름이 가득한 백발의 노파 무당이 새소리 같은 가느다란 소리로 주변의 군중들을 현혹하고 있는 모습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늙은 무당은 칠성신의 초상 앞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신령이 자신에게 내려왔다고 주장하고 이런저런 신탁(神託)을 이야기하는데 만일 그녀의 입에서 쏟아진 수만 가지의 말들 가운데 한 가지만이라도 맞으면 추종자들은 그녀를 칭송하며 어리석게도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이 절대적인 진리인 양 받아들인다.

  이규보는 무당들이 북을 치며 야단법석을 떠는 식으로 평화를 해치기에 이들을 모두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규보가 묘사하는 무당은 오늘날의 굿처럼 수많은 신령들과 혼령들을 모시는 무당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을 모시는 무당이지만, 무당에 대한 이규보의 회의적이고 조소적인 모습은 굿에 대한 오늘날의 이미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가 굿을 비난하는 데는 보다 근원적인 이유가 있다. 굿하는 모습들이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기 6,4)라는 유대-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명백하게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점복과 접신, 망자의 혼령들에게 뜻을 묻는 관습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금하고 있다(신명기 18,10-12). 굿은 하느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과는 반대로 사람들의 원의(願意)에 부응하도록 신령들을 조종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무속에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16)라거나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와 같은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굿에서 등장하는 초자연적 접신의 징표는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하여금 이적(異蹟)에 대한 미신적인 매혹을 조장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또한, 사람들의 원의가 이루어지도록 신령들에게 청하는 굿의 기복적 특성은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하여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7,7)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지나치게 경도되는 경향을 남겼다. 로마의 어느 기관에서 온 외국인 교수 신부는 잠시 동안 무당을 만난 후에 무당이 악령과의 소통함으로써 악마 숭배에 사로잡혀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굿의 세계에서 혼령은 완전하게 선하지도 또 완전하게 악하지도 않은 존재이다. 마치 인간 존재처럼 굿의 신령과 혼령들은 변덕스럽고 해를 끼치는 존재임과 동시에 평화롭고 도움이 되는 존재이다.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치유하는 장면으로 묘사한 마르코 복음서(1:23-27)의 이해와는 달리 굿의 세계는 선한 힘과 악한 힘 사이의 전쟁터가 아니다.

  과거 한국 정부는 한국교회와 마찬가지로 굿의 풍습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었고 근대국가의 모습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보았다. 1974년 서강대에서 영미문학을 가르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나는 어느 서울 무당에게 서강대 학생들을 위해 굿을 해 주라고 부탁하였다. 그녀는 부탁을 받아들였지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외국인들을 위해 굿을 녹화하는 일은 삼가 달라는 것이었는데 굿을 하는 행위가 자칫하면 한국이 후진국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녀가 제시한 이유였다.

  한국의 무당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고 학력이 낮은 이들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많은 무당들은 현명하고 예술적인 재능을 지녔으며 심리적으로도 영민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매우 헌신적이다. 내 친구이면서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한 무당은 자기 자식들이 의사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어쨌건 무속을 믿는 사람들은 무당이 신령에 의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혼령이 내려준 특별한 힘을 발휘한다고 보았다. 무당이 이러한 힘을 얻게 되는 과정인 신내림의 체험은 바란다고 언제나 되는 것이 아니며, “신병(malattia dello spirito)”이라는 것을 통해서 느닷없이 생기는 것인데, 이 신병은 때에 따라서 몇 년씩이나 계속되기도 하지만 그 원인을 진단할 수 없다. 신병에 걸리면 정상적으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또한, 그들은 혼령들과 만나는 꿈을 꾸기도 하는데 이때 실제와 꿈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산속을 배회하다가 이따금 죽은 무당의 무구(巫具)나 옷가지가 땅속에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신병을 앓는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무당이 되라는 것인지 의심도 해보지만, 이를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한 나쁜 운명으로 여겨 거부한다. 그러나 결국 이미 무당이 된 이가 그녀에게 치유를 위해서는 몸주신과 특별한 유대를 갖는 내림굿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해시켜준다.

  나는 언젠가 한 번 질병과 심리적인 문제, 결혼생활에서의 문제로 수년간 시달린 30대 초반의 여성을 위한 내림굿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믿던 개신교의 여러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내림굿을 하는 동안 산신(山神)은 의식을 주관하는 무당을 영매로 삼아 장차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고된 인생을 살아야 할 그녀를 위해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의식을 주관했던 무당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삶이 후회스럽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본인이 직접 내림굿을 해준 신딸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애기무당이 되어 도제교육을 받고 있었다. 신참 무당은 신령들과 혼령들을 상대하는 방법, 그들이 내려왔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방법, 정해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해학과 유머를 사용하여 의뢰인들을 시험하고 그들의 문제를 객관화하는 기술들을 배운다.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 한국인 교수는, 만약 내가 한국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들의 종교적인 뿌리인 무속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조언해주었다. 오랜 시간 후에 나는 같은 이유로 천주교 신학교에서 무속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신학생들도 자신들의 종교적 뿌리를 명료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굿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나는 무당들의 종교적 경험과 삶을 반추해봄으로써 나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신학생들 또한 비슷한 경험을 했기를 바란다. 나는 연구에 있어서 더 큰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당시 그리스도교와 정부가 무속을 비난하는 편이었지만 무속은 수 세기 동안 한반도에서 융성하였다. 나로서는 일찍이 무속이 긍정적인 종교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를 밝혀내고 싶었다.

  굿의 세계에 대해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합리화된 종교적 세계관이 과연 영적 힘들로 가득 찬 성경적 세계의 실재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동시에 나는 굿이 불러일으키는 실존적인 놀라움의 감각과 산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물에 기도를 드리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또한, 종이꽃이나 떡, 과일과 같이 신들께 바치는 공양물과 같은 일상적인 수단을 통해 성스러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굿의 놀라운 능력에도 매력을 느꼈다. 더욱 매력적이었던 것은 기도에 관한 굿의 관념이었는데 이는 “주님의 현존 앞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Communio 21, 1994:113-114)과 비슷하며, 전례 학자 로마노 과르디니는 그리스도교 경배를 특징짓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2)  또한, 나는 보통의 한국인들처럼 굿의 효과를 믿는 이들이 망자들과 갖는 친밀한 관계에 대해서 존경심까지 갖게 되었다. 비록 굿에서 이런 친밀함은 구체적인 물질적 형태를 띠기 때문에 이는 나에게 너무나도 낯선 것이지만 말이다. 오늘날에는 다행히도 굿 전통에 대해 교회와 한국 정부의 반감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는 편이다. 일부 교회에서는 굿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정부에서는 특정한 굿을 행하는 기술을 지닌 무당에게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신학생들에게 한국 무속을 가르치면서 나는 무당의 신내림 과정에 비추어 자신들의 사제직으로의 소명을 성찰해볼 것을 초대하였다. 신학생들은 꿈, 환시 경험, 그리고 신병이 주는 사회적 소외감 등을 자신들의 성소 경험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바라보았다. 이어서 곧바로 자신들의 부르심의 체험은 어떤 운명적인 속박보다는 자유의지로 받아들인 은총이라고 덧붙였다. 더 나아가 일부 신학생들은 굿이 건강과 부귀영화, 다산(多産)과 장수(長壽)와 같은 현세적인 행복을 목표로 한다고는 점, 또한 무당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혹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불만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학생들은 무당의 고통스러운 신내림의 경험이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에 매우 공감하였으며 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신들이 응당 가져야 할 바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일부는 무당의 삶이 사제들의 예표보다 봉사하는 사람으로서의 사제상에 더 잘 부합한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신학생들은 사제들이 주로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명예로운 지위를 누리며 많은 것이 잘 갖추어진 사제관의 안락함에 고립되어 살고 있는 반면 무당은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의 일상생활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고 보았다. 나는 가끔 만신을 수업에 초대해서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지만, 신학생들이 그녀의 사유방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신학생들은 자신들의 종교경험을 지적으로 조직화한 절대적 세계관의 측면에서 이해했다. 하지만 만신은 자신의 경험을 상상력의 논리에 의해 파악된 유동적이고 직관적인 세계의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그녀는 추론된 신학적 개념들이 자신의 영적 경험의 세계와는 매우 이질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는 합리적 사유의 한계에 갇혀 있는 사람보다는 징표와 경이로 가득 찬 성경적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무당이 사람들을 돌보는 데 가장 의미심장한 방법의 하나는 가족들 가운데 돌아가신 분을 위해 굿을 행하는 것이다. 장례식 직후에 종종 벌어지는 이 굿은 장례미사처럼 망자를 평화로 인도하고 또 유가족들에게 평화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장례미사와 굿이 가장 다른 점은 바로 굿은 망자와 그 가족의 사정에 맞춰진 의례로 밤낮으로 행해지면서 애도 중에 가족, 심지어 망자 본인의 능동적인 참여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예컨대 동해(東海)에서 익사한 망자를 위한 오구(오귀)굿은 해변에서 시작된다. 어느 청명한 겨울 아침 나는 어부로서 처음 바다에 나갔다가 숨진 장남을 기리는 과부를 위한 오구굿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꽹과리의 박자와 가락에 맞춰 무당은 마을 신과 부처, 바다의 용신께 아들의 영혼을 해변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하였다. 죽은 아들의 어머니는 거센 겨울바람에 나부끼는 흰 깃발이 달린 큰 대나무 장대를 들고 있는 동안 무당의 남성 보조자는 살아있는 닭과 쌀이 들어 있는 밀봉된 상자를 바다에 던졌다가 다시 줄로 그것들을 잡아끄는 식으로 영혼을 해변으로 꾀었다. 그동안 무당은 사람들의 흐느낌 속에서 파도 소리와 어우러지는 느리고 구슬픈 노래를 읊조렸다. “육지로 오려무나! 육지로 오려무나!(Vieni alla riva! Vieni alla riva!)”

  천주교의 전통적인 믿음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무속 안에서도 사람들은 죽음 이후 망자의 영혼은 최후의 안식처로 곧바로 가기보다 중간적인 상태에 잠시 머물게 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망자의 영혼에 대한 정화(淨化)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정화가 아니라, 흔히 한(恨)이라고 불리는, 깊은 원한이나 회한, 즉 슬픔과 고통, 분노와 오해의 삶이 영혼 안에서 맺힌 것에 대한 정화(淨化)를 위해 그 중간적 상태가 필요한 것이다. 그 과부의 아들처럼 혼인도 치르지 못한 채 삶의 정점에서 느닷없는 사고사를 당한 이의 영혼은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혼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방황한다고 여겨지고 한(恨)으로 똘똘 뭉쳐있기 때문에 굿으로 이를 풀어주기 전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여겨진다.

  오구굿의 앞부분에서 총각의 영혼은 마찬가지로 망자가 된 처녀와 결혼을 올리게 되는데, 이때 의례의 중심은 한 쌍의 인형이 된다. 이러한 영적 결혼의 목적은 피안(彼岸)인 저승에서의 동반자 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혼자만이 제대로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족보에 망자가 자신의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하는 목적이 있다. 굿의 초반에 무당은 망자가 개인적으로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녀를 영매로 삼아 망자는 한으로 뭉쳐진 감정의 타래를 풀어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감추었던 오해나 악감정을 토해내게 된다.

  때때로 이런 만남은 화해의 의례가 되기도 하는데, 이때 화해의 의례란 하느님과의 화해가 아닌 가족과의 화해, 고해소의 비밀스러운 장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화해가 아니라 모두가 증인이 되는 열린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화해이다. 슬픔 속에 있는 유가족들은 이 만남을 통해 망자와의 극적인 상호작용 안에서 자신의 슬픔과 비통함, 후회, 서운한 감정들을 해소하게 된다. 익사한 아들을 위한 오구굿에서 젊은 망자는 무당의 말을 통해 어머니를 위로한다. 무당은 아들을 대신하여 아들이 파도 속에 가라앉을 때 “엄마!(Madre)”를 목청껏 부르짖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무당을 통해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돈이 원수예요. 우리가 돈이 있었다면 제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을 터이고 좋은 직장을 잡았겠죠. 그렇다면 지금 제가 물고기 밥이 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는 자신이 바다로 나가던 순간 “안 가면 좋겠는데” 하고 말했던 순간을 가슴이 사무치는 마음으로 떠올린다. 만약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바다에 나가라고 강요했더라면 지금 어머니의 마음은 상실의 슬픔뿐만 아니라 더 깊은 회한에 빠졌을 것이다. 망자의 영혼과의 만남에 대해서 무당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미신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아들이 해주는 말을 들어야 위로가 돼요.”

  망자를 위한 굿에서조차 유머는 한몫을 한다. 서울지역의 지노귀굿에서는 불교의 명계(冥界)의 염라대왕이 보낸 저승사자가 등장한다. 그는 무덤에 누운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곳, 곧 죄의 심판과 처벌을 위한 장소로 혼을 붙잡아가는 역할을 한다. 고딕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괴수 상처럼 저승사자 역시 공포와 웃음을 자아내는 역할을 하는데, 저승사자는 굿에서 권능을 발휘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어릿광대의 역할을 한다. 입에는 떡을 물고 팔에는 길고 흰 천을 휘두르는 저승사자는 망자의 혼을 붙잡으려 하는데, 망자의 혼은 공양물이 놓인 제사상 위의 밝은 색 종이꽃에 붙어있는 하얀 종이로 표현된다. 이때 망자의 가족은 저승사자를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데 이들 사이의 난투장면은 유가족의 슬픔을 어릿광대짓으로 일시적으로나마 흩어주며 치유하는 기능을 한다.

  천주교에서 신학적 결의론의 담론 방식으로 갈고 닦은 죄의식의 분위기에서 자란 이들이나, 옛 장례미사곡 ‘분노의 날’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의 위협적인 이미지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저승사자의 어릿광대 같은 희화화는 매우 낯선 것이리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굿의 영성은 개인의 죄가 아니라 한(恨)이라는 우리의 죄 많은 상태에 예민하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전라도 씻김굿은 한(恨)을 풀어주는 의례인 ‘고 풀이’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는 흰 옷을 입은 무당이 흡사 우아한 독무(獨舞)와 같은 몸짓으로 기다란 흰 천의 큰 매듭들을 풀어가는 것이다. 고(매듭)라는 단어는 고통을 의미하는 고(苦)의 일종의 말장난이다. 그리고 매듭은 인생살이에서 마주하는 고통과 화가 사람의 마음에 응어리진 한(恨)을 상징한다. 굿의 정신세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살아가며 죄를 짓게 되면 개인의 죄의식의 여부와 무관하게 그 사람은 죄에 속박된다고 믿는다. 고 풀이는 뉘우침 여부와 무관하게 주술적으로 그 죄를 풀어주는 것이다. 어떤 신심 깊은 할머니가 고해소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냐는 조심스러운 질문을 받았을 때 할머니의 대답은 “삶이 곧 죄지요(La vita è peccato)”라는 것이었다. 혹자는 그 할머니가 죄에 대해서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해를 하고 있으며, 어떤 신학적인 담론에도 부지(不知)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할머니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악에 대한 그 자신의 충분한 이해에서 그렇게 말을 한 것이다. 할머니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의 움직임이 얼마나 모호한지에 대해서 한국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를 대변해주었다.

  망자들을 위한 굿은 인간의 경험 영역들을 분명하게 구분 짓지 않음으로써 그것들의 모호함을 오히려 더 존중하는 한국인의 일반적인 경향을 반영한다. 망자들을 위한 굿에서는 저승에서 영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으며 분명한 희망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영혼이 최종적인 평화, 빛, 자유, 그리고 어떤 성취를 달성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표현되는 상징들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품 안에서 평화를 찾는다는 식의 암시를 주는 것과는 다르다. 동해안 오구굿에서 무당은 망자에게 “이제 배를 띄울 터인즉 너는 그 배를 타고 가거라(Ora dobbiamo caricare la barca e tu devi andare)”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알록달록한 종이배와 종이로 만든 연등을 길고 하얀 천위에 천천히 놓는다. 마지막 위로의 단계에서 무당은 망자가 깃들였다고 믿는 밝은 종이꽃이 달린 작은 막대기로 흐느끼는 유가족들을 건드린다. 무당은 꽃으로 장식된 막대기를 가지고 우아하면서도 단호한 몸짓으로 천을 길게 찢으며 최종적으로 영혼을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분리하여 안식처로 보낸다.

  이런 소박한 의례적 수단들,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차분함,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품위 있는 모습은 사람들은 더욱 애도에 잠기게 된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행위가 절정에 달하면서 가족들은 죽음의 신비 앞에서 깊은 놀라움을 경험하며 상실과 그리움이라는 애끓는 마음을 토해낸다. 천을 찢고 꽃을 장식하는 행위는 각각 음과 양의 역설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며 죽음에 의한 분리를 꽃장식이라는 위로의 이미지로 승화시킨다. 동시에 생명을 상징하는 꽃장식 역시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의한 분리일 뿐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아무튼, 이 주술적이며 성사와도 같은 의례 속에서 죽음에 대한 통과의례가 행해지며 이를 통해 아무쪼록 망자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안식 속에 놓이기를, 그리고 유가족에게는 망자의 죽음을 수용하고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라게 되는 것이다. 망자를 위한 굿은 장례미사에서의 성찬례에 상징되는 믿음, 즉 삶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일치라는 그리스도교적 믿음과는 무관하다. 망자 굿은 상당한 정도의 시간과 돈을 들여야 하고 망자의 삶의 신비를 의례적으로 드러내는 무당의 전문성이 요청된다. 그러므로 작두날 위에서 춤을 추는 서울의 무당의 경우에서처럼 때때로 굿은 기이한 힘 앞에서 마음을 홀리는 정도의 놀라움만을 자아낸다. 이와 달리 동해안에서 행해진 망자를 위한 오구굿은 굉장히 풍요로우면서도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경이를 선사한다. 여기에서 경이는 어떤 깊은 영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 무당의 삶과 굿이라는 의례로 표상되는 고대의 종교전통은 이른바 “고등종교(grandi religioni)”의 특징인 보편적 세계관과 윤리적 지평과 영성적 지평의 통합이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동전을 봉헌하는 과부에 관한 예수님의 우화(루카 21:1-4)처럼 무당은 굉장히 많은 것을 봉헌하는 존재이다. 겸손하게 자신을 희생하는 삶, 그리고 몸주신으로 모시는 신령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 신령의 활동에 관한 역동적인 영성, 삶의 문제에 시달리는 이들에 대한 통찰과 연민, 신령들의 현존 앞에서 사람을 웃기고 놀게 만드는 능력, 그리고 소박한 의례적인 수단을 통해 의례를 경이로움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재주 등이 그것이다. 진짜배기 무당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접신을 하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그 어떤 의심을 하지 않는다. 무당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의미와 자신과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신령들과 혼령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식별하는 데 전 생애를 투신할 뿐이다. 무당의 삶에 대해서 보다 긍정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그리스도교인은 1986년 아시시에서 있었던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 직후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성령의 움직임에 대해 열린 태도를 지녀야 한다. “모든 진정한 기도는 각 사람의 마음 안에 신비로이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입니다.” 3)


1)  편집자 주.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수련』, 정제천 옮김, (서울: 이냐시오 영성연구소, 2016), 235번.
2)  R. Guardini, “La liturgia come gioco”, in Lo spirito della liturgia, (Brescia: Morcelliana, 1980), 74-89.
3)  Giovanni Paolo II, s., Discorso alla Curia romana per gli auguri di Natale, Lunedì, 22 dicembre 1986.http://w2.vatican.va/content/john-paul-ii/it/speeches/1986/december/documents/hf_jp-ii_spe_19861222_curia-romana.html (접속일: 2018.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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