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제
단군문화의 핵심은 천신제(天神祭)에 있다.
단군문화기행을 쓴 박성수 교수에 의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의식으로 가장 오래된 우리문화의 원형
이라 한다.
후일 천신제가 지방에 따라 산신제, 동제 등으로 이름이 변모되었지만 원형은 천신제이다.
천신제는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삼한에도 천군이란 제천의식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특히 고구려의 동맹과 백제의 교천(郊天)을 거쳐 고려의 팔관회로 이어지면서 불교와 융합되기도 했다.
천신제의 기본원리는 삼신신앙이다.
환인이 환웅을 지상으로 내려 보내어 웅녀와 결합하게 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삼국유사의 기술은 삼신
신앙의 원형을 간결하게 서사화한 것이다.
이런 경우 환웅이 강신한 곳이 삼위태백이요, 봉우리가 셋이 있는 산이 곧 삼신산이다.
제천의식은 본래 산에서 거행되는 것이 원칙이다.
제소로 선정되는 산은 반드시 성산, 신산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마을이 형성되면 곧 성산이 지정되었고 이런 성산을 당산, 진산, 신산, 단산 등으로 불렸다.
그 중 당산이란 호칭은 가장 나중에 형성된 명칭으로 본다.
대마도에서는 아직도 단산(壇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만큼 원래의 제천의식에 훨씬 가까운 원형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천제는 늘 산 정상에서 지냈기 때문에 천제를 산제로 오인하게 되었으며 천신과 산신을 혼동하게 된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제단의 위치가 항상 산 정상에 자리하였다는 사실을 보면 산제는 본래 천제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천신제를 거행하는 장소는 제소(祭所)라 한다.
제소로 선택된 산 정상에는 제단이 설치되었지만 특별한 시설은 없었다.
단지 나무를 베어 공지를 만든 경우가 많았으며 이를 제정(祭庭)이라 했다.
또 천연의 암석에서 제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적석단, 탑 등은 후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제의가 거행되는 자리는 반드시 금줄로 표시되었으며 평소에는 방치되었다가도 제삿날이 되면
말끔히 단장되었다.
이런 원시적 제단은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산중턱 또는 산 아래에 있는 당집이 건축된 것은 후대의 일이라 한다.
당집이 건축되어도 원래의 제단은 신성시되었으며 당집에서 제사지내기에 앞서 산 정상에서 먼저
강신제 즉, 신내림을 올려야 한다.
또한 제단에는 반드시 신목(神木)이 지정되는데 이 신목은 삼국유사에서는 신단수라 했다.
신단수의 원래 위치는 산 정상이었으나 후일 산중턱, 산기슭으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산에서 제단과 신목이 존재하면 산 전체가 신성시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소도와 같은 개념이다.
현재, 우리나라 각지의 마을에는 단군문화의 유적인 당목과 선왕당(先王堂) 또는 당집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있다.
당목은 당집에 있는 나무란 뜻으로 수종은 느티나무가 가장 많고 다음이 소나무다.
서낭당이 성황당(城隍堂)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중국의 성황당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성황은
잘못된 표현으로 보고 있으며 우리나라 고유의 서낭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서낭은 원래 선왕에서 유래된 어원으로 선왕은 환인, 환웅, 단군 등 삼신을 말하던 것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여러 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서낭제는 때에 따라 나라에서 대제(大祭)로 행해지기도 했다,
가물어서 흉년행사로 기우제를 지낼 때나, 역질(疫疾)이 돌아 사람이 죽어갈 때 흔히 거국적인 행사로
이어진다.
서낭신은 바람, 구름, 우레, 비의 신을 오른 쪽에 모셨고 남향으로 정좌시켰다.
천신제의 본질은 하늘의 신을 지상으로 불러 내리는 강신제이므로 천신인 환웅의 강림을 축원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제물은 백주, 백병, 백반, 백미, 백체 등 모두 백색으로 통일하는 것이 원칙이다.
거기에다 천신제는 반드시 소머리를 바쳐야 하는데 소머리도 흰 소의 머리를 올려야만 한다.
제관 또한 백의를 입어야 했다.
신위를 적는 종이나 헝겊을 신폐라 하는데 이 또한 백면포, 백마포, 백지 등을 사용했다.
백지는 제사가 끝난 뒤에는 꼭 태워 하늘에 날려 보냈다.
중국 당나라 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 고구려에는 음사가 많고 신라는 즐겨 산신제를 지냈다고 기록
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천신제는 서서히 산신제로 이름을 바꾸어 갔던 것 같다.
신라가 당의 도움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당에 대해 사대외교를 시작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천신제
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산신제로 부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신제의 유속이 아직까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제주도이다.
육지에서 1920년 일본의 침탈 이후 서서히 소멸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마을이 파괴
되면서 전통문화까지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천신제에 대한 믿음은 우리들의 DNA에 남아 있다.
다나카의 만행
경천사 십층석탑은 1348년 개성근교 부소산자락에 세워졌다.
고려사에는 예종이 이곳에서 숙종의 추모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일반인에게도 이 석탑은 ‘병을 치유해 주는 약황탑’으로서의 명성이 자자했던 영물이었다.
고려인들이 사랑했던 석탑이었다.
우선 이 탑은 날렵하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준다.
마치 팔작지붕의 기와집들이 빼곡히 늘어선 마을을 보는듯한 풍요로운 인상이다.
우리나라 석탑들이 대부분 홀수인 점과 달리 층수가 짝수인 것도 흥미를 끈다.
또한 이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로 나뉜다.
기단부에는 부처, 용, 보살, 화초, 천부상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높이가 10층으로 보기도 웅장하지만 생김새도 독특하며 재료도 섬세하다.
석탑의 나라로 불리는 우리나라에서도 탑의 재질은 대체로 단단한 화강암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이 석탑은 재질이 화강암이 아니라 회색 대리석을 사용하고 있다.
대리석은 화강암보다 재질이 훨씬 무른 재료이기에 더 정교한 조각이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체적으로 균형과 안정미를 갖추었고 세부적인 조각들도 나무랄 곳이 없는 희귀한 명품으로 평가된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석탑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 석탑이 있다.
이것은 경천사 십층석탑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바로 경천사 십층석탑이 한 일본인의 사욕에 의해 온갖 수난을 당하며 현해탄을 오르내리는 비극을 맞게
된다.
문화재청이 발간한 ‘수난의 문화재’에 그간의 경위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어쩌면 영원히 우리나라에서 사라질 뻔했던 위기를 당하였다.
일제는 우리역사를 왜곡하고 수많은 우리유적과 문화재를 약탈하기 위해 왕릉을 도굴하고 파괴하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불법반출을 일삼았다.
얼마나 많은 우리문화재들이 유린되었는지도 모르고 있다.
특히 시기적으로 통감부가 설치되는 1910년을 좌우해 문화재 약탈은 극에 달했다고 기록에 전하고 있다.
그림과 고려자기, 불상과 종, 기타 석탑과 불교미술품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훔쳐갔다.
경천사 십층석탑도 그 와중에 있었다.
다나카 미스아키(田中光顯)는 일본의 궁전대신으로 문화재약탈자 가운데 가장 악랄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1907년 황태자 축하사절단의 일원으로 조선을 찾는다.
그러나 그는 줄곧 경천사 십층석탑에 대한 야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 석탑은 높이 13,5 미터나 되는 장신에다 탑에서 풍기는 상승과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균형감이
일품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석탑을 자기 집 정원에 옮기겠다는 터무니없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누리던 다나카는 마침내 일을 저지르고 만다.
1907년 3월에 다시 조선에 온 그는 “고종황제가 기념으로 나에게 하사했다.
개성근처 절터에 있는 대리석탑을 도쿄의 우리집 정원으로 운반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경천사로 들이닥쳤다.
인근주민들이 저항하고 관할군수까지 직접 나와 항거하였으나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석탑을 마구 해체
하기에 이른다.
날이 어두워지자 수십 대의 달구지에 옮겨 실은 석탑은 개성역으로 빼돌린 뒤 일본으로 실어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문화재 약탈이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백주의 강도행위였다.
다나카는 옛것을 좋아하고 고미술품에 대한 전문지식자로 백주에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강탈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어처구니없고 대담한 일본고위관리의 전대미문의 사기행각은 외국인 기자들의 고발에 의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된다.
영국의 조선특파원인 어네스트 베셀에 의해 처음 이 사실이 서방세계에 공개되자, 총독부는 거짓이라며
사실을 부정했다.
결국 연일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선교사 호머 헐버트씨가 가세하여 힘을 실어주면서 국제적인 문제
로 비화하며 일본을 압박하게 되었다.
국내외 여론이 불리하게 되자 일본은 더 이상 약탈 반출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범행을 저지른 범인인 다나카는 그래도 버티고 있었다.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2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1918년 전임자가 해결하지 못한 경천사 십층석탑의
반환문제를 풀었다.
대한해협을 다시 건너온 경천사 십층석탑은 이미 심하게 훼손된 뒤였다.
애써 찾아오긴 했지만 돌아온 석탑은 광복 때까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
1959년 경복궁 전통공예관 앞에 세워졌다가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5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다시 해체하여 복원작업을 했다. 무려 10년에 걸쳐 완벽하게 새것으로 복원되었다.
멋진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복도에 앉아 있다.
고귀한 자태로 가혹한 운명을 견디고 꿋꿋이 서있다.
(제갈태일)
경천사 십층석탑
https://www.youtube.com/watch?v=M2QbVEfke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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